무림회귀백서 163화
57장 속가제자 방덕(5)
“13호! 건방지게 굴지 말고 가만있어라!”
가장 나서서 진백천을 질타한 것은 자신을 끌고 온 자였다.
하지만 조장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13호가 나한전이라.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 오래 속가제자 생활을 했고 인망도 좋으니. 다만 문제는 실력이겠지.”
조장의 눈이 번뜩이더니 빠르게 비수를 던졌다.
검게 칠한 비수는 어둠을 틈타 눈 깜짝할 사이에 목 바로 아래까지 뻗어왔다.
‘이건 시험하려는 거다.’
진백천은 일부로 느리게 비수를 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목덜미는 비수에 베어 핏물이 흘러내렸다.
‘딱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려서 지나치게 여유로운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장은 진백천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그렇지 않아도 오늘 원진이 108 목인항을 통과하는 자가 있으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했다. 그런 자리를 13호가 차지한다면 놈의 얼굴도 꽤나 보기 좋게 일그러지겠지.”
그것이 허락의 표현임을 알고 진백천이 고개를 숙였다.
“3호. 나한전에는 반대가 없게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3호는 방덕을 지금까지도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그자였다.
조장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진백천에게 던졌다.
“13호. 마기단이다. 절대 부족함이 없이 준비해라.”
진백천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일그러져 있었다.
놈의 겉으로 보이는 자애로운 모습과 달리 들리는 속마음은 시궁창처럼 지저분했다.
-마기단이라고 역천단(逆天丹)을 줬으니 이주야 동안은 급격히 내력이 향상되겠지. 어차피 버리는 패이니 뜨겁게 불타다 죽거라!
이러한 속마음은 조장이라는 놈뿐만 아니라 다른 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어딘가 뒤틀리고 편협한 놈들뿐이었다.
-나를 두고 13호에게 마기단을 줘? 저놈의 피를 갈아 마셔서라도 빼앗겠다!
-허접한 비영대 주제에 감히 어디라고 나서려고 해? 기회를 봐서 손이라도 하나 잘라내야겠어.
마교라고 소속과 실력에 대한 시샘과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쓸모 있음’을 기준으로 더더욱 상대를 평가했다.
현재 방덕은 진백천에게 궤멸당하다 싶은 비영대였기에 이곳에서는 하인이나 다름없었다.
계율원에 드러나는 간자로 뽑힌 것도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후. 마음 같아선 죄다 다 패버리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한 내 덕인 줄 알아라. 새끼들아.’
그 말을 끝으로 마인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진백천도 곧바로 속가제자들의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건물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에게 이를 갈던 3호였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지? 지금 나한테 반말한 거냐? 쓸모없는 비영대 소속을 함께 활동할 수 있게 해줬더니 이제 기어오르려고 해?”
3호는 거칠게 얼굴을 가린 천을 뜯어냈다.
서늘한 눈빛 위로 이마에는 6개의 붉은 점이 박혀 있었다.
소림사의 나한이라는 표식이었다.
“네놈이 회주에게 처맞더니 정신줄을 놓았군!”
3호는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곧바로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목이라도 비틀 기세였다.
진백천은 주변에 또 다른 자가 있는지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 놈은 혼자였다.
‘그 말은 즉…….’
두들겨 패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진백천은 막혔던 속이 뻥 뚫리기라도 한 듯 숨을 내뱉었다.
그 덕분에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손이 덜컥하고 멈췄다.
“뭐지? 왜 한숨을 쉬는 거냐?”
평소와 다른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얍삽한 새끼.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네.”
“뭐?”
3호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진백천을 죽이고 싶은 마음과 뭔가 이상하다는 경각심이 양립했다.
하지만 곧 진백천의 이죽이는 표정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다.
“조장에게 단약을 받았다고 내가 못 건드리라 생각한 거면 큰 오산이다!”
“건드릴 수 있으면 건드려봐. 새끼야. 나는 충분히 건드릴 생각이니까!”
진백천은 놈의 손이 뻗어오기 전에 이미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웅!
순간 묵직한 충격음이 울려 퍼져서 아차 싶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바닥 대신 주먹으로 얼굴을 힘차게 두들겨 주었다.
입술이 터지며 피와 함께 건치 몇 개가 빠져나왔다.
‘걸개구타권으로 흠씬 못 패는 게 아쉬울 뿐이다.’
혹시라도 진백천의 정체를 알아채면 모든 작전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최대한의 아쉬움을 주먹에 담아 힘껏 휘둘렀다.
“커헉!”
“시끄러워. 다른 이들 불러와서 일 키우고 싶어?”
놈은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아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크윽!”
몇 차례 놈이 반항하려 했지만 도리어 명치에 주먹이 꽂히며 주저앉았다.
놈이 마침내 전의를 잃고 숨을 씩씩거리자 그제야 손을 털었다.
“후우. 이제 조금 속이 풀리네.”
“……13호. 실력을 숨긴 거냐?”
진백천을 올려다보는 3호의 눈에 깃든 감정은 시기심과 불신이었다.
이런 눈빛을 가진 자들의 습성은 뻔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밑에 있는 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 나중에 사달이 나겠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어떻게든……!
진백천은 괜히 놈의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다.
바짝 민 머리가 타격감이 좋았다.
“네놈은 아직도 내가 13호로 보이냐?”
“……그게 무슨?”
“13호가 나처럼 무공실력이 좋았으면 네놈 따위의 말을 듣고 있었겠냐?”
의문에 찬 3호의 얼굴을 보며 진백천은 품속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바로 지살대의 무인 중 하나였던 일금영(一禽影)을 죽이고 얻은 패였다.
놈은 그 패를 보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은, 은형대 이추산이 지살대의 검을 뵙습니다!”
패의 효과는 대단했다.
‘다행히 패를 알아봤군.’
은형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은형살수와 관련이 있는 무력대였다.
특잠과 은신을 주력으로 하는 이들 중 특별히 뛰어난 이들을 뽑아 은형살수(隱形殺手)로 훈련을 시켰다.
3호라는 이놈의 무공실력을 보아하니 은형살수는 못되고 임무를 받아 강호로 나온 듯했다.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뛰어나지도 않은 이들이지.’
진백천은 다시 품속에 패를 집어넣자 이추산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금영께서는 언제부터 방덕의 모습으로 계신 건지……?”
“이번 방문객들 사이에 섞여서 왔다. 네놈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니까 괜히 가볍게 입을 놀려서 일을 망칠 생각하지 마라.”
“…….”
이추산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수룩한 놈이 아닌 이상 겨우 패 하나를 봤다고 진백천을 따를 리 없었다.
분명 이 자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참회동의 조장이라는 자를 찾아가 주절주절 떠들어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만들 순 없지.’
“잘 봐라.”
진백천은 손을 들어서 천마신공의 마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마치 성화처럼 검은색의 마기가 세차게 타오르듯 일렁였다.
화아아아아-
천마신공의 마기는 이추산이 지닌 마기에 반응해서 금방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듯 뻗어왔다.
“허억!”
이추산은 그것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마기에 매료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엄, 엄청나다.”
그리고 위험한 줄도 모르고 손을 뻗어 마기를 쓰다듬으려 했다.
진백천은 재빨리 놈을 발로 쳐내며 마기를 흡수했다.
“이놈들은 죄다 마기만 보면 미쳐 가지고. 쯧.”
-본, 본교의 인물이 맞다. 그것도 조장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실력이야. 말로만 들었지만 이렇게 순수한 마기라니……!
이추산은 서서히 정신이 들면서 머릿속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오직 교주의 명령만 듣는 직속 그가 직접 이곳에 온 것이면 소림사의 일을 얼마나 중요시 여겨지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기회였다.
-이분의 마음에 들면 나도 본교로 복귀할 수도 있다!
이추산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전과 달리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살대의 검을 따르겠습니다.”
진백천은 만족한 웃음을 감추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좋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잘 알 테고.”
물론 이추산은 몰랐지만 괜히 끼어들어서 자신의 멍청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당장 소림에 있는 간자의 목록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진행도가 어떤지 일목요연하게 적어와라.”
그는 순간 진백천을 올려다볼 만큼 깜짝 놀랐다.
관련 자료는 극비였기에 서로의 정체도 숨기며 극도로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이런 것을 모두 써서 보고하라는 말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본교에서 나온 분이 소림사의 일에 대해 모를 리 없다. 아마도 조장과 따로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지.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참회동에서 있었던 일도 왠지 짜고 친 것처럼 느껴졌다.
힐끔하고 진백천을 올려다보자 역시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래! 이건 분명 나에 대한 평가임이 틀림없다! 내가 얼마나 다른 이들과 소림에 파악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야!
혹시라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가서 똑같이 평가할 거란 생각이 들자 그는 조바심이 들었다.
-내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 본교로 갈 기회를 빼앗길 수 없다!
진백천은 그의 속마음을 들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알아서 착각에 빠져들어 가는 꼴이 퍽이나 우스웠다.
‘여기에 살짝 당근 하나만 던져줘 볼까?’
진백천은 품속에서 조장에게 받았던 역천단을 꺼내 이초량에게 던져주었다.
“방금 받은 마기단이다. 네놈이 제법 똘똘해 보이니까 미리 주는 상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감, 감사합니다! 일금영님!”
진백천은 맨들맨들한 뒤통수를 쓰다듬고는 숙소로 들어갔다.
이초량은 자신이 받은 것이 독약인지도 모르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밤새 없는 머리를 뜯어내며 보고서를 작성했다.
다음 날 아침 진백천은 그것을 훑어보고 곧바로 원진 장로에게 전달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덤이었다.
“……13명? 그렇게나 많다고?”
“네. 전부다 소림에 스며든 지는 오래된 모양이에요. 특히나 참회동의 조장이라는 자는 얼굴을 가렸지만 제법 공력이 대단했거든요.”
원진은 참회동의 이야기를 하자 앓는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끄으윽. 참회동의 죄인들까지 포섭할 정도면 분명 낮은 위치는 아닐 것이다. 내가 36방의 통과자를 제자로 들이겠다고 말한 것도 장로들과 원로들에게뿐이니.”
“대충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요?”
“있지. 있긴 한데 그자라면 너무 상황이 복잡해진다.”
사실 진백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자신이 계율원을 맡기 전 원장이었으면서 지금은 참회동을 관리하는 원로.
“운조 대사.”
무려 원진보다 한세대 위였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만약 장문인이 사라진다면 다음 대 장문인으로도 거론되는 인물이었기에 원진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의 힘만으로는 쳐 낼 수 없는 자였기에 더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아마 정확할 거예요. 이초량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맞다. 이 보고서는 정확해. 계율원이 알아낸 것보다 훨씬 더.”
이 보고서대로라면 계율원에도 이미 마교의 간자가 중간 다리에 앉아서 정보를 조작 중이었다.
그동안 원진이 알아냈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전부 마교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본 것이다.
“황궁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지독한 패배감이군.”
보고서를 쥔 그의 손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말하진 않았지만 계율원에 있다는 마교의 간자도 원진이 믿던 자 중 하나였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죠. 상대의 머릿속을 들여다봤으니 반격할 차례에요.”
“그렇지. 회주의 말이 맞다.”
가장 우선은 역시나 36방의 통과였다.
그가 원진의 제자가 되고 나한이 되어 나한전에 들어가는 것.
마교측에서는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다며 좋아하겠지만 나중에 그것이 전부 그들의 작전이었다는 것을 알면 꽤나 보기 좋은 꼴이 나올 터였다.
“그때까지 참으세요.”
“회주만 믿고 기다리지!”
진백천은 은밀한 만남을 뒤로하고 36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올라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