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57화
56장 도광귀와 십이용천공(十二龍天功)(4)
‘이제 마지막 하나 남았군.’
진백천이 남은 주정을 흩어내며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단지 몇 번의 내기를 할 뿐이었지만 생각보다 얻는 것이 많은 날이었다.
환력신공(煥力神功)의 비급은 물론이고 보물보다 더 값진 50년 산 모타주도 얻었다.
진백천은 만족한 얼굴로 도광귀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배의 난간을 붙잡고 술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 너머로 붉은빛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벌써 해가 뜨는 건가?’
진백천은 몰랐지만 그들이 술을 나눠마신 시간이 제법 되었다.
강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서서히 녹아들며 황톳빛 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서진 파편과 수적들의 사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회주님. 속은 괜찮으세요? 이거라도 드세요.”
“고마워.”
조심스레 건너온 당소예가 따뜻한 국물을 내밀었다.
마침 갈증을 느꼈던 터라 조금씩 들이켰다.
밤새 추위로 굳었던 몸과 속이 절로 풀리는 느낌이었다.
“끄윽.”
“괜찮으세요? 이거라도 드시겠습니까?”
“……됐다!”
도광귀는 연달아 진 내기로 인해 기분이 퍽 상했다.
50년 내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진 것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마지막은 이기고 말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다음 내기는 뭡니까? 마지막인 거 알고 계시죠?”
“잘 아니까 걱정 마라.”
이대로 한 번만 더 지면 자신의 무공을 정말로 넘겨줘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됐다.
“……그렇게 되면 분명 다른 놈들이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겠지.”
“네? 다른 놈들이라뇨?”
“크흠! 혼잣말이니까 신경 꺼라.”
도광귀는 진백천에게서 몸을 돌려 앉더니 강가를 쳐다봤다.
뒤통수에서부터 복잡한 속내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그의 예리한 기감에 멀리서 다가오는 인물들이 느껴졌다.
겉에서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정파의 인물이 아님이 확연히 전해졌다.
‘마교의 인물이구나! 요즘 들어 강호를 자주 돌아다닌다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어!’
도광귀와 내기를 했던 자 중에는 마교의 인물도 많았다.
그들이 정파의 인물들과 사이가 좋지 않음을 잘 아는 도광귀는 곧 무언가를 떠올리곤 입술을 말아 올렸다.
“정했다!”
“뭡니까?”
“네놈의 무공실력도 보았고 술 실력도 봤으니 이제 남은 인성을 살펴봐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까지 본 걸로는 무척이나 싸가지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요?”
도광귀는 진백천이 별 반응이 없자 헛기침을 하며 멀리서 다가오는 배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움직인 진백천의 눈동자가 곧 휘둥그레졌다.
“마교!”
“다들 전투 준비!”
장강수로채 무인들 중 누군가가 다급하게 경호성을 내뱉었다.
장강수로채와 마교는 현재 보기만 해도 무기를 휘두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둘러 무기를 뽑아 들고 경계하는 그들의 눈에 긴장감이 흘렀다.
도광귀는 그 모습을 무척이나 만족스럽게 살폈다.
“저 배에 올라탄 마교의 무인과 호형호제를 한다면 내가 졌다고 인정하마!”
“……호형호제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회주님 절대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진백천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오묘해졌다.
장강의 무인들은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지만 정작 진백천과 그 일행은 입을 다문 채였다.
진백천은 마교의 배를 일견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나겠는데?’
“흐음. 뭐 어려울 것도 없죠.”
진백천은 곧바로 배의 선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형님!”
그러자 누군가 마교의 배에서 박차고 뛰어올랐다.
단 한 번에 배와 배 사이를 뛰어넘을 정도 엄청난 경공이었다.
장강의 무인들이 당황했지만 무인은 어느새 진백천 앞에 내려섰다.
“아우! 여기서 다 보게 되다니! 반갑군! 하하하!”
붉은 머릿결의 멧돼지 같은 인상의 남자는 다름 아닌 염라혈소(閻羅血笑) 철용이었다.
* * *
도광귀는 눈을 꿈뻑거리며 진백천과 철용을 번갈아 봤다.
다른 이들도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도광귀만큼은 아니었다.
서로를 부르는 형님과 아우는 그야말로 자신이 제시한 ‘호형호제’ 그대로였다. 잘못된 것은 없었다.
“그때 이후로 바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고향에 들렀다 가야지.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뭐하는 중이냐?”
“뭐. 간단한 내기 중이었습니다.”
철용은 뒤편에 서 있는 도광귀를 유심히 쳐다봤다.
어딘지 자신과 비슷한 느낌의 노인이었다.
“흐음. 저자가 그 유명한 도광귀인가 뭔가 하는 자인가 보구나.”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마교의 인물들 중에서도 꽤나 유명한 자니까. 제법 무공을 많이 안다던데?”
진백천은 철용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도광귀에게 돌아갔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무척이나 늙어 보였다.
“……그래. 네놈이 이겼다, 아니, 네놈들이 전부 이겼지.”
“네. 대가는 바로 주실 겁니까?”
“십이용천공(十二龍天功)은 내 머릿속에만 있다. 잠깐 쉬면서 책자에 적어주지.”
도광귀는 위향아에게 잠시 배 안에서 쉬겠다는 통보 아닌 통보를 내뱉으며 들어갔다.
한숨이라도 자고 책자를 써주려는 모양이었다.
‘천하의 도광귀가 도망갈 리는 없겠지.’
진백천은 짧은 인사를 끝으로 철용과 헤어졌다.
그 둘의 사이는 보기 좋아 보여도 다른 무인들은 아니었다.
날 선 신경전이 계속되다가는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기회가 되면 또 보도록 하지!”
“형님도 건강하세요.”
진백천은 또 보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마교의 무인인 그와 또 보게 될 상황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터였다.
철용이 떠나고 장강의 배는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굳이 박살 난 황강수로채의 배 옆에서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회주님도 어서 쉬세요.”
선내로 들어간 도광귀는 배가 떠나갈 듯이 코를 골며 잠들었다.
안일한 건지 자신을 감히 건드릴 거란 생각을 안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진백천도 마련된 침상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아직 점심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
‘조금 더 잘까?’
진백천은 다시 눈을 감으려다 고개를 젓고 일어섰다.
그리고 품속에 넣어놨던 환력신공(煥力神功)을 꺼내 읽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전신 세맥에 흩뜨려놨던 내공을 터뜨려 일시적으로 강한 힘을 얻는 무공이었다.
‘평소 외공 훈련을 많이 한 자만이 쓸 수 있겠어.’
단전에 모은 내력을 인위적으로 전신에 흩뜨려 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거칠게 몸을 단련했던 자만이 세맥에 천천히 내력이 깃들었다.
그런 자들을 위한 무공이었다.
그 밖에 사특하거나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조 무공의 느낌이니까.’
비급을 다 읽어본 진백천은 문득 자신이 환력신공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다.
세맥에 퍼져 있는 것은 천마신공의 마기였다.
남들과 비교하면 수십, 수백 배로 많은 내력이었다.
그것들이 전부 터진다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터져 죽을지도 모르지.’
진백천은 피식 웃으며 비급을 덮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도광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어났나 보군.’
배의 갑판으로 나가자 역시나 정신을 차리고 식사 중인 도광귀의 모습이 보였다.
한숨 푹 자고 나서인지 제법 상태가 좋아 보였다.
양손에 각각 큼지막한 오리 다리를 움켜쥐고 뜯어먹는 중이었다.
“기생오라비! 너도 와서 먹어라!”
그는 마치 자신의 음식처럼 진백천에게 권유했다.
진백천은 마주 앉아서 배를 채웠다.
그들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전부 둘의 눈치를 살폈다.
탁자의 음식을 전부 먹어치우고 나서야 도광귀는 배를 두드리며 만족해했다.
“하아. 오랜만에 잘 먹었군! 좋다 좋아!”
“그럼 이제 대가를 주셔야죠?”
“물론이다. 내 평생의 규칙이었으니 주지 말라 해도 줄 거니 걱정 말아라. 하지만 그전에…….”
도광귀는 위향아와 황대원을 쳐다봤다.
아직 그들에게 소원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너희부터 원하는 것을 말해라.”
“꼭 지금 말해야 돼요?”
“나중에 날 찾아오면 상관없지만 찾을 수는 있겠느냐?”
바람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도광귀였다.
“그리고 이제 나도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흐음.”
위향아는 딱히 소원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듯 고민하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괜찮은 남자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저랑 잘 어울리는 남자로요.”
“남자?”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냐는 말을 내뱉으려던 도광귀는 그녀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겨우 자신을 이기고 바라는 소원을 이딴 식으로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은 들어주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도광귀가 호랑이 같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진백천이었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돌렸다.
“둘은 절대 어울리지 않지.”
시선은 황대원에게서 잠시 머물렀지만 오래 있지 않았다.
대쪽같은 성미의 남자는 여장부와 상극이었다.
그때 도광귀의 눈에 적절한 인물이 들어왔다.
자신의 황금을 대가로 받은 이소한이었다.
“저놈이다. 저놈이랑 함께하면 잘 살겠구나.”
지목당한 이소한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위향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소한을 살폈다.
“가느다란 것이 여장부 옆에서 보조도 잘하겠고 잘 맞추겠어. 너. 고집도 없고 그런 거 잘 맞추지?”
“……물론입니다.”
이소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딘가 기대 섞인 눈동자는 위향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위향아도 잠시 생각하더니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소한이라면 괜찮지.”
그동안 이소한을 봐온 팽지약도 딱히 반대는 없었다.
“잘됐군! 둘이 결혼해라! 다음!”
도광귀는 환하게 웃으며 황대원을 쳐다봤다.
소원 하나를 단 말 몇 마디로 날려 버렸다.
황대원은 위향아와 다르게 미리 생각해 둔 게 있는지 당당하게 말했다.
“혹시 내력을 증진시켜 줄 영약이 있으면 그것을 받고 싶습니다.”
“영약이라. 물론 있지. 하지만 그중에 골라가는 것은 너의 안목이다.”
도광귀는 품속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끄집어냈다.
작은 자기병부터 한지에 쌓인 오래된 단약까지 별의별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관리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오래되어서 부패하기 일보 직전의 물건들이었다.
‘이런 것들을 잘못 먹었다간, 괜히 몸만 더 상하겠는데?’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된 건 없어요?”
“이것들뿐이다. 전부 내기에서 진 이들의 물건이지.”
그나마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은 작은 도자기 병에 담긴 물건이었다.
곱게 밀봉되어 열어본 흔적도 없었다.
“이건 뭡니까?”
“집성의가(輯成醫家)의 가주가 내기에서 패배하고 내놓고 간 요상단이다. 한 20년쯤 되었으니 제법 숙성이 되어서 맛이 괜찮을 거다! 크하하하!”
도광귀는 실망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며 무척이나 통쾌해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진백천만이 집성의가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의술 쪽으로는 제법 유명했던 곳이었다.
본인들 것만 고집하는 이들과 달리 지식의 교류를 꺼리지 않았고 제법 쓸 만한 약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나마 이게 괜찮겠는데?”
진백천의 말에 황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요상단을 골랐다.
“후회 안 하겠느냐? 그 효능은 나도 모른다.”
“상관없습니다.”
황대원은 요상단을 진백천에게 건넸다.
진백천은 조심스럽게 그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우윳빛의 끈적한 액체였다.
“……공청석유(空淸石乳)?”
“뭐라?”
진백천의 중얼거림에 도광귀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