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43화
51장 관제묘(關帝廟) 안에서의 진실대담(2)
“그러면 한 사람씩 돌아가며 질문을 받기로 하죠.”
진실대담의 방식은 간단했다.
질문은 받는 차례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한가지씩 질문을 받고 대답하면 되었다.
첫 순서는 풍류공자 교영이었다.
“무엇이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시죠. 어떤 것이든 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막상 질문하라고 해도 그에게 궁금한 게 있을 리 없었다.
유소어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 은근슬쩍 손을 들었다.
“그럼 규칙이니 염치불구하고 묻겠소. 여기는 어떻게 찾았오? 내가 보기에 공자는 세 가지 단어를 해독할 능력이 되어 보이지는 않소만.”
자칫 무시하는 듯한 질문이긴 하지만 진심이었다.
교영은 머리가 좋은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허영심이나 복잡하게 생각하는 자도 아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납득하며 대답했다.
“하하. 그거야 당연히 두 분을 따라왔죠. 3차 경연 문제가 나오자마자 저는 다른 참가자들 얼굴만 살폈습니다. 회주님과 성주님은 워낙 빨리 가버려서 따라잡지 못했고, 다행히 두 분은 따라올 수 있었습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호오.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빠르게 다른 방법으로 간극을 채운 거구려.”
교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분들은 질문 없으십니까?”
다른 이들이 조용하자 진백천이 손을 들었다.
“이 경연에 참가한 이유는? 단순히 언 소저를 차지하고 싶어서 그런가?”
“하아. 굉장히 무거운 질문입니다.”
딱히 그럴 것도 없지만 교영에게는 심각한 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탁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고뇌하는 얼굴로 장작불을 내려다봤다.
“모두 제 생활이 어떠셨는지 아실 겁니다. 풍류공자(風流公子)로써 하북의 기생이란 기생은 다 만나봤고 호방하게 세상을 즐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지 아련한 눈으로 변했다.
“아무리 언해원 소저가 아름답다고 하나 저만을 바라보는 수많은 여인에 비할 바가 못 되죠. 그런 제가 경연에 참여한 것은 바로 가문 때문입니다.”
그가 속한 장노방은 만년 3등이었다.
그마저 수재였던 그의 아버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술 마시고 웃음을 지을 줄은 알아도 세가를 다스릴 줄은 몰랐다.
더구나 자신은 외동이니 아버지가 늙어갈수록 고민 또한 깊어졌다.
“제가 물려받으면 장노방도 그것으로 끝이겠죠. 그나마 이름을 유지하며 장노방을 남기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경연에 참가했습니다. 진주언가라면 사위 가문쯤 챙겨주지 않겠습니까?”
“의외로군.”
먹고 즐길 줄이나 아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생각이라는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이외의 질문은 없었다.
다음 차례는 유소어였다.
첫 질문은 마뇌부터였다.
“사패천의 10신위로 알고 있는데 의도가 있어서 참가하신 건가요?”
웃는 얼굴치곤 날카로운 질문에 유소어가 손을 저었다.
“저어언혀 아닙니다. 저야 당연히 사 소저가 시켜서 남아 있을 뿐이고 전혀……!”
그는 그 말을 내뱉다 말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지막까지 가면 이것을 구실로 진백천에게 뭔가를 요구해 볼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진백천도 이미 예상했다.
그는 그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궁금했다.
‘구중천(九重天)에 대한 것을 물어봐도 지금 같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진백천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소어의 어리숙한 서생 이미지는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자꾸 자신의 옆에 붙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내가 질문하지. 내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뭐지? 혹시 구중천이 시켜서 그런 건가?”
구중천이란 단어가 나오자 두 명의 고개가 홱하고 돌아갔다.
한 명은 역시나 유소어였고, 두 번째는 마뇌였다.
둘 다 놀란 표정이었지만 유소어는 경악이었다면 마뇌는 호기심이었다.
-……회주가 어떻게 구중천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진백천은 유소어의 속마음을 엿들으며 정보를 파악하려 했다.
놀란 유소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당연하죠. 이거 완전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가 나타나서 내가 네 아빠다 하는 격인데요?”
그는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딱히 말해도 상관없겠지. 이미 알고 있는 자라면…….
“제가 구중천과 관련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한때 그곳을 담당하던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쫓겨나고 연락조차 되지 않습니다. 회주님의 주변을 맴도는 건 저보다 사령령 소저의 의지라…… 하하.”
“그 가문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나?”
“한 번의 질문은 이미 끝났습니다. 회주님.”
아직 질문을 하지 않은 마뇌가 그것을 물으려 했지만 유소어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관우가 튀어나와 청룡언월도를 휘둘러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름 세상의 숨겨진 비밀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교영과 유석경은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저 어딘가 있을 무림방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 생각했다.
“흐음. 자네 강릉 유씨라고 하지 않았나? 본관이 같아서 기억이 남는군.”
“맞습니다. 저를 기억 못 하실 줄 알았는데 알아보셨군요.”
둘은 때아닌 구면임을 자랑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덕분에 유소어의 차례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다음은 제 차례군요. 아무거나 물어보시죠.”
마뇌의 차례가 되자 의외로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교영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경연에 대체 왜 참가를 한 거요? 내 눈이 이상한 건지…… 아무리 봐도 남자로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오.”
“여자라고 하는 것이오? 장모사 형제가 여려 보이긴 해도 그렇게 말하는 건 모욕이오!”
유석경이 그를 대신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내 씨익 웃는 마뇌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역시. 풍류공자라더니 그런 쪽에 재능이 있는가 보군?”
유석경과 유소어는 화들짝 놀라며 마뇌를 쳐다봤다.
진백천은 그런 둘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지금까지 못 알아본 게 더 용하다. 강릉 유씨가 원래 눈치가 없냐?”
“…….”
단순히 내뱉은 말이었는데 사실인지 유석경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제가 여자라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참가제한 자격에 여성은 없었으니.”
“흐음. 그렇다면 진심으로 언소저와 혼약을 위해서 왔다라?”
마뇌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것 따위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진백천을 도발하듯 쳐다봤다.
“나한테 질문하고 싶은 게 있을 텐데?”
“호오. 이제 반말인가?”
“피차 비슷한 위치에서 나만 존댓말 하니까 억울하잖아.”
진백천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 준비한 질문을 꺼냈다.
주변의 사람들을 죽일 수 없으니 물론 전음으로였다.
-천마는 어디 있지?
* * *
마뇌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 환하게 웃었다.
역시나 호적수라 인정한 자답게 진백천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천마라. 벌써 그 단계까지 이르렀는가.’
혹여 주변에 마교에 관련된 자가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할 수준이었다.
마뇌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진백천이 뛰어난 모습을 보일수록 그것의 과정을 밝혀내는 과정이 재미있을 테고, 그 마지막의 열매도 달 테니까.
-갑자기 천마가 왜 나왔을까?
-나올 만하니까 나오지. 대답을 못 하는 거 보니까 내가 제대로 짚은 게 맞나 보군.
이미 사라졌다고 믿는 천마.
그것은 십만대산 천마신교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 전설 같은 신화를 끌고 내려오기에는 마교의 세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마뇌는 자신이 책략을 맡기 시작한 오래전부터 마천영을 통해 마교 내에 남아 있는 천마의 흔적을 지워왔다.
-그것은 단지 전설일 뿐이다. 마교의 교주를 뜻하는 것이다.
-천마는 마교의 가장 강한 교주를 뜻하는 말이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마교도들은 그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마뇌가 그렇게까지 했던 것은 다만 천마라는 이름이 조금은 희석되길 바라서였다.
-대답해. 나한테 뭐라도 물어보고 싶다면.
‘적절히 회유할 줄도 아는구나. 좋구나. 좋아.’
마뇌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만약 진백천 같은 자가 한 명이라도 더 마교에 있었다면 중원은 물론, 세외 무림까지 진즉에 마교의 차지였을 터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쉽고 기쁘구나.’
-천마는 여러 곳에 존재하지.
-우리들 마음속이니 개 같은 말을 할 거면 확 뒤 안 보고 두들겨 패버린다?
마뇌는 진백천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정도회 회주답지 않은 싼 말투에도 실소를 터뜨렸다.
-걱정 마. 그 말은 비유법이 아니니. 말 그대로 천마는 여러 곳에 존재한다. 때를 기다리며.
진백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커다란 열쇠 조각을 주었으니 그것을 제대로 맞춰서 비밀을 푸는 것은 그의 몫이다.
‘어차피 알아봤자 바뀌는 것은 없을 테지만.’
복잡한 둘과 달리 다른 이들은 조용한 둘을 번갈아 봤다.
그중에 교영이 뭔가를 눈치챘는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크흠. 안 봐도 무슨 질문인지 알겠군. 역시나 소저는 진백천 회주님을 쫓아 경연에 참가했겠지. 남장까지 불사하는 그 열렬한 애정이라니.”
갑자기 쌩뚱 맞은 소리에 진백천이 그를 노려봤다.
마뇌 따위의 애정이라니.
줘도 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마뇌는 그저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슬슬 다음 차례로 넘어갈까?”
마뇌는 진백천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선 것은 유석경이었다.
“재밌는 시간이군. 어떤 것이라도 성실히 답하지.”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교영이었다.
“성주님은 왜 참여하신 겁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여자든 혼사를 거부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언해원 소저가 아름답다고 하나 무림에서나 그렇고 훨씬 이름난 미녀들이 많은데 말입니다.”
유석경이 언해원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녀의 정혼자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강호를 돌아다니면서도 많은 금의위들이 말했었다.
그저 명령을 하라고.
그렇다면 진주언가는 함부로 거절하지 못하고 그와의 만남을 유지해야 할 터였다.
왕족이자 성주가 가지는 말 한마디의 힘은 그만큼 강했으니까.
“흐음. 거기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군. 첫째로 나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언해원 소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본적이 없어. 이건 진심이야.”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유석경의 얼굴에는 실웃음이 맺혔다.
“그렇다면 두 번째 대답도 자연스레 이해되겠지.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네. 그 무엇보다도 더. 가문이나 다른 배경 없이 온전히 그녀에게 빠져들었지.”
“왕족이 하는 신분을 뛰어넘는 불같은 사랑, 그런 겁니까?”
자연스레 유소어가 이어서 질문했다.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말이 단지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불같은 사랑이라면 글쎄. 적어도 일 년 가까이를 혼자 이렇게 애정할 수 있는 사랑이니 평생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
“그녀가 만약 거절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성주님도 아시다시피 철중화는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이는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싫다면 존중할 걸세. 그리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며 사랑하겠지. 단지 그뿐이야.”
그의 대답이 끝나고 모두의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그것은 단순히 모닥불의 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유석경의 마음에서 우러러난 애정이 간접적으로 전해져서일지도 몰랐다.
“크흠. 잘 들었어. 도저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말이야.”
진백천이 유석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마지막 차례인 그만 남았다.
빗줄기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거칠게 쏟아져 내렸다.
“나한테 궁금한 게 있는 사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