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38화
50장 언해원의 정혼자(2)
도왕 팽도천은 진주언가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감옥으로 향했다.
아직 팽가의 패배 소식을 모르는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팽 어르신 오셨습니까.”
“지금 당장 첫째 손자놈을 봐야겠다.”
“그, 그게…….”
관리는 도왕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기세에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감옥에 있는 팽중군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았다.
그저 몸 여러 군데가 상하고 부기가 올라온 것뿐이었다.
“사지가 잘리지는 않았구나.”
만약 도왕 본인이었다면 팔뚝 하나는 잘라냈을 터였다.
“가주님!”
팽중군은 비틀거리며 감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푸라기조차 제대로 깔리지 않은 바닥의 더러운 잔해에 몸이 더러워졌다.
도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진주언가와 본격적인 싸움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팽중군을 보고 얼마가 되었든 그곳에서 버티라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망가진 그의 꼴을 보니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쯧. 나도 늙은 것인가.”
“저는 괜찮습니다!”
“팽가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괜찮아야지. 나올 준비를 하거라.”
도왕은 그 말을 남긴 채 바로 관리를 찾아갔다.
“회주가 요구한 게 금자 18만 냥이더냐?”
“……맞습니다.”
확실히 그런 요구가 있었다.
관리에게는 정도회의 회주 이전에 표기장군이었기에 그 말을 거역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팽가라 해도 그렇게 큰돈을 바로 준비하지 못한다. 딱 절반인 금자 9만 냥을 주마. 내 손자놈과 팽가에 걸린 혐의를 벗겨라.”
“……바로 표기장군께 보고하겠습니다.”
예전이라면 자신의 말 한마디에 개처럼 달려들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눈 밖의 존재일 뿐이었다.
당장에라도 패 죽이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사태는 되돌릴 수 없다.
관리는 잠시 후 은은한 미소와 함께 돌아왔다.
“표기장군께서 허가하셨습니다.”
“돈은 진주언가로 보내도록 하지.”
도왕은 그 말을 끝으로 팽중군을 빼내고 팽가로 향했다.
“가주님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보고 있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팽가의 떨어진 명예를 되찾아야 합니다.”
몇 장로의 말대로 도왕이 작정하고 나서면 그들을 베는 것을 막을 자들은 없었다.
“자네들은 내가 언제까지 살 거라 생각하는가?”
“…….”
도왕은 늙었다.
어쩌면 오늘이 그의 절정일지도 모른다.
혹은 어제가.
그만큼 그는 저무는 해였다.
이제 멀어진 명예는 다른 이가 이끌어야 하는 법이었다.
‘자식 복이 없었지.’
팽가칠도도 전부 도왕의 사형제들뿐이다.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팽가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진주언가를 집어삼키려 했다.
‘오늘 싸웠던 진백천 회주는 점점 더 강해질 거다. 앞길이 나와 달리 구만길이니까.’
도왕은 문득 둘째 손자가 떠올랐다.
자신을 닮아 오만한 첫째와 셋째와 달리 특이한 녀석이었다.
도왕이 이룩한 팽가가 싫다며 어릴 때 진즉에 떠나 버렸다.
뛰어난 근골과 두뇌만큼은 팽가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도왕의 무공도 단번에 거절할 만큼 대가 센 놈이었다.
“중호는 잘 지내고 있느냐?”
갑작스러운 도왕의 질문에 뒤따르던 팽중군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낭인처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낭인이라. 꼭 그놈답구나. 팽가로 불러들이거라.”
“……네. 알겠습니다.”
‘단 한 놈만 제대로 된 녀석이 나오면 된다. 단 한 놈만.’
도왕은 그길로 팽가에 돌아가 정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하북팽가는 한 달간의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봉문을 선언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도왕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팽가칠도(彭家七刀).
도왕 못지않은 고집의 장로들은 도저히 이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가주께서 물러섰지만 우리까지 그럴 순 없지.”
“적어도 회주 그자에게는 팽가의 도 맛을 보여줘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를 날카롭게 갈며 때를 기다렸다.
진백천이 진주언가에서 벗어나 혼자가 되는 그때를 말이다.
* * *
팽가칠도 늙은이들의 얼굴이 죽상일 때 진백천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팽가에서 보내온 합의금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금자 8만 냥!”
“어마어마합니다.”
바로 옆에 있던 당소예와 황대원마저 눈을 동그랗게 쳐다봤다.
하나같이 전표였지만 원체 금액이 많다 보니 상자에 담겨 왔다.
진백천은 상자를 받자마자 전표를 전부 쏟아냈다.
“전부 달라붙어서 잘못된 거 없나 확인해 봐. 위조전표를 끼워 넣었을지도 몰라.”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철두철미함에 모두가 놀랐다.
전표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진짜였다.
“총 금자 7만 8,920냥입니다.”
“조금 비는데 그 정도는 내가 양보해야지. 안 그래?”
“역시 회주님은 아량이 넓으십니다.”
진백천은 묵직한 상자를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도박장에서 챙겨온 금자 2만 냥을 포함하면 10만 냥에 가까운 돈이었다.
웬만한 성 크기의 장원을 사서 놀고먹어도 3대가 떵떵거릴 만했다.
기뻐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주언가에서도 도박 장부가 공개되며 자연스레 빚이 삭제되었다.
갚지 못할 빚이 사라지자 언 가주는 진백천을 찾아와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전했다.
“회주님.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하북팽가?”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까 걱정입니다.”
황대원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봉문이라고 해도 그중에는 분명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진백천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하북팽가의 근처는 하오문의 사람들로 한가득이었다.
쥐새끼 한 마리라도 빠져나간다면 바로 진백천에게 알리도록 조치해놨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놨으니까 너무 걱정 마.”
“네. 회주님.”
다행히 며칠간 하북팽가는 조용했다.
그리고 진백천의 예상대로 슬슬 소문이 퍼지며 떠났던 이들이 돌아왔다.
진주언가는 조금씩 북적이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던 세가에 사람들이 다시 몰리는 것은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진주언가의 풍경이었다.
아무래도 이목이 집중되면서 겉으로 보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담벼락이 보수가 안 되어 있다니. 후우. 아무래 사정이 아직까지는 힘든 거겠지.’
이러한 진백천의 예상은 정확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돈은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전부 지출했다.
그렇다고 언 가주나 언해원이 진백천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한동안 이 상태가 유지될 것이란 것쯤은 잘 알았다.
진백천은 이왕 진주언가를 돕는 김에 한 번 더 선심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나중에 더 크게 돌려받을 날이 있을 테니까.’
“언 가주 좀 보러 갈까?”
“아버지를요?”
“응. 할 말도 있고.”
진백천은 곧바로 언해원과 함께 가주전으로 향했다.
언시경은 다시 찾는 사람들 때문에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런데도 진백천이 오자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바쁘실 텐데 본건만 말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진백천은 미리 준비한 봉투를 꺼내 건넸다.
봉투 안에는 금자 2만 냥에 해당하는 전표가 들어 있었다.
“……이건?”
“돈 들어갈 곳이 많을 것 같아서요. 편하게 쓰시고 나중에 천천히 갚으세요.”
곧 죽어도 공짜로 주기는 아까웠다.
‘진주언가라면 어차피 금방 회복할 테니까.’
언시경은 그것만으로도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돈 들어갈 곳이 수두룩했다.
금자 2만 냥이면 그것들을 처리하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의외인 것은 언 가주가 언해원의 정혼자 찾는 것을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았다.
‘하북팽가가 떨어져 나가서 그런가?’
언해원의 성격상 정혼자를 아무나 고를 리 없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더구나 현재 진주언가에는 그녀의 정혼자로 부족하지 않은 이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크게 언해원의 정혼자가 되기 위해 온 이들과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별의별 것들이 다 몰려드네.’
흔히 말해 듣보잡들이었다.
그들은 정사파를 가리지 않았다.
어떻게 언해원을 붙잡아 팔자를 고쳐보려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진주언가에서도 저런 것들을 걸러내려면 꽤나 피곤하겠어.’
물론 언해원이 준비한 세 가지 시험을 통과 자체도 못 할 테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동안 진백천은 진주언가에서 마련해 준 별당에서 머물렀다.
하루 중 대부분은 유석경의 수련을 봐주거나 태상장로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유석경은 이제 제법 맷집이 좋아져서 웬만큼 맞아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강해진 건 맷집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격체전력(隔體傳力)으로 진백천의 내력도 상당히 쌓였으니 가진 한방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슬슬 휴식하면서 몸을 만들어.”
“백천.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거야.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겸허히 받아들이지.”
“걱정 마. 내가 옆에서 도와줄 거니까.”
진백천은 유석경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태상장로에게 향했다.
태상장로를 비롯해 개방의 무인들은 이곳을 찾는 무인들의 뒷조사를 완벽하게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될 만한 놈이 있으면 바로 진백천에게 알렸다.
“아직까지는 별놈들 없다. 대부분 구경이나 온 자들이지.’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너는 그 성주라는 자를 이어주려는 거지?”
“맞습니다.”
태상장로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백천은 그가 왜 그런지 잘 알았다.
‘언해원이 낼 세 번의 자격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진주언가는 특별히 태상장로에게 심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재밌는 구경을 놓칠 리 없는 그는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언해원이 할 자격 검증이 어떤 것이지 알고 있었다.
태상장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회주. 네가 원한다면 알려줄 수도 있다. 우리는 생사를 함께했던 맹우(盟友)이니까 말이다.”
“괜찮습니다. 그 맹우라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이것만 알려주지. 절대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겠죠. 하지만 그런 만큼 지켜보는 재미도 있으실 겁니다.”
진백천의 말에 태상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진백천이 관심을 가질 만한 자들이 나타났다.
“사령령과 유소어.”
“아는 자들이냐?”
“네. 저번에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회주에게는 별의별 것들이 다 꼬이나 보군. 자네도 이미 알아봤겠지만 사령령은 사패천주의 친동생이야. 성질을 감추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니 그녀에게 죽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백천이 더 걱정스러운 것은 바로 유소어였다.
개방에서도 그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단순한 낙방 서생처럼 보이지만 그 출신이 가볍지 않아.’
은거기인들로 이뤄진 구중천(九重天) 중 하나에 속한 가문의 사생아.
구중천은 진백천이 있는 평범한 무림이나 황실과는 궤가 다른 곳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세외 무림? 아니면 그들만의 세상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확실한 것은 은거기인인 그들은 하나같이 초절정 이상의 실력은 가진 이들이었다.
괜히 가까이해서 좋을 리 없었다.
진백천이 전에 사령령을 과하게 혼내고 쫓아낸 것도 전부 옆에 붙어 있는 유소어 때문이었다.
‘쯧. 아무래도 다시 한번 만나봐야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진백천은 곧바로 그들이 묵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때마침 사령령과 유소어는 밖에 나와 있는 중이었다.
“회주! 그간 건양하셨습니까!”
유소어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웃는 얼굴에 차마 침 뱉으랴- 하는 생각이었지만 진백천이라면 침도 뱉고 뺨도 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백천의 시선이 그들을 지나 누군가에 꽂혔다.
‘……저자가 왜 여기에?’
치렁치렁한 검은 장포에 부채.
흑단 같은 머릿결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남자 같은 옷차림에도 외모를 감추지 못했다.
촤아악-
부채를 소리 나게 핀 그, 아니 그녀가 진백천을 쳐다봤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웃었다.
“진백천 회주?”
뇌리에 분명히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마뇌(魔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