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30화
48장 도박장을 다 털어버리다(2)
모욕적인 언사에도 독객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박장의 태반이 전부 하북팽가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도박장을 세운 돈부터 암암리에 운영하는 기루까지 전부였다.
하북팽가는 철저히 양지에 머물렀고 음지에서는 이들이 수족이 되어 움직였다.
이번 진주언가를 치는 일 또한 팽가의 계획이었다.
‘진주언가의 알맹이를 모두 빼가면 껍데기를 이들이 가져갈 셈이었군.’
아무리 망가진 껍데기라고 해도 그 전통이 어디 가지 않는 법이었다.
흑도방파는 그 이름값을 탐냈다.
“길거리를 개새끼처럼 떠돌아다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겠지?”
“……물, 물론입니다.”
팽가의 무인은 손에 힘을 풀며 독객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통보하듯 자신의 요구사항을 다시 한번 말했다.
“진주언가에게 빚의 변제를 요구해. 갚지 않으면 언호충을 노역장에라도 보내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라고. 그렇게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고 나면 그들을 따르던 남은 이들도 떨어져 나가겠지. 그러면 언시경도 더는 버티기 힘들 거다.”
진주언가에서 언호충을 과감히 쳐내면 끝날 문제겠지만, 자식을 끔찍이 생각하는 언시경이라면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다.
그 과정에서 과한 빚과 고리대금이 문제 되겠지만 흑도방파의 팔다리를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진주언가가 무너지고 난 후에는 뜯어먹는 자들의 축제였다.
-그것으로 하북팽가는 더더욱 커지겠지! 그때쯤이면 이따위 흑도방파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하북은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팽가의 무인은 그러한 속마음을 철저히 감추었다.
아직까지는 그들이 오물을 받아줄 이들이 필요했으니까.
‘뒷구석이 더럽다 못해 썩어가는 놈들이네. 쯧.’
진백천은 혀를 차다 문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열쇠에 향했다.
방금 팽가의 무인이 중년 남자를 집어던지며 떨어진 것이었다.
‘분명 어딘가의 금고 열쇠 같은데?’
진백천은 그림자처럼 움직여서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방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이곳저곳을 살폈다.
‘여기다!’
진백천의 예상대로 통로 안쪽에는 또 다른 방이 하나 더 있었다.
두꺼운 철창으로 감춰진 곳 안쪽으로 금고가 보였다.
‘흐음. 돈 냄새가 나는군.’
금자나 은자를 모아놓기에는 작아 보였고 단순히 책자나 쌓아놓기에는 커 보였다.
아마도 도박장이나 기루에서 번 돈은 믿을 만한 전표로 바꿔놓을 게 분명했다.
그 부피도 그렇고 옮기기에 힘들 테니까 말이다.
진백천은 독고구검을 들어 철창의 한쪽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후. 그럼 뭐가 있는지 한번 털어볼까?’
금고로 다가간 진백천이 손을 비비며 금고 열쇠를 밀어 넣었다.
철컥-
열쇠를 돌리자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금고문이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그의 예상대로 수북히 쌓인 전표와 장부들이었다.
전표는 전부 3대 상단에서 나온 것들이었고, 장부는 그동안 하북팽가나 다른 곳과 거래한 내역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는 뇌물을 건넨 내역도 전부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제대로 물 먹일 수 있겠는데?’
진백천은 장부를 전부 챙기고 전표 또한 싸그리 긁어모았다.
하나같이 천 냥 단위의 전표라 부피도 얼마 되지도 않았다.
‘후후. 이렇게 바꿔놓은 걸 후회할 거다.’
그렇게 진백천이 챙긴 금액은 웃기게도 정확히 은자 40만 냥이었다.
진주언가가, 아니, 언호충이 정확히 그들에게 빚진 금액이었다.
‘주는 대로 받는 법이지.’
진백천은 다시 금고의 문을 닫고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도 팽가의 무인과 흑도방파의 주인은 대화중이었다.
진백천은 열쇠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떨어뜨리고 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혈에 짚인 이들은 여전히 그 자세로 눈알만 굴리고 서 있었다.
“많이 기다렸지?”
진백천은 그들은 친히 끌고 구석에 숨겨놨다.
전부 눈알을 굴리며 반항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놈들의 복장을 차려입고 보초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대할 무인들이 다가왔다.
“뭐야? 안쪽에는 왜 아무도 없어?”
“아아.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 보내줬지.”
“쯧. 다음부터는 조심해. 독객 형님이 알면 난리 난다고.”
“그러지.”
진백천은 능글맞게 그들과 교대를 했다.
그리고 여유롭게 걸어서 지하를 빠져나왔다.
그의 품속에는 장부와 돈이 한가득이었다.
‘이걸 알면 배 아파서 못 참을 거다.’
방을 빠져나온 진백천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도박장으로 들어섰다.
이제 언해원과 도홍경만 찾아서 돌아가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2층으로 올라간 진백천은 그곳에서 둘을 발견했다.
둘은 사람들 사이에 휩싸여서 게임을 진행 중이었다.
‘제법 땄나 보네.’
도박에 자신 있어 하는 도홍경은 그렇다 쳐도 언해원은 의외였다.
둘의 옆에는 딴 것으로 보이는 은자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그가 주지 않은 금자도 몇 보였다.
둘을 상대하는 도박사는 얼굴이 반쯤 죽어 있었다.
‘얼마나 잘하길래 이래.’
진백천은 둘의 실력에 호기심을 느끼고 옆에 섰다.
그들이 앉은 탁자의 도박 종목은 주사위를 던져 높고 낮음을 맞추는 것이었다.
진백천이 당가의 형제들과 했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도박사가 자신의 것과 참여자의 주사위를 던지고 그것을 놓고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도박사와 짜고 치지 않는 이상 사기나 편법을 막을 수 있었다.
딸그락-
도박사는 굳은 얼굴로 주사위가 담긴 컵을 흔들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도홍경과 언해원, 도박사의 바로 앞에 3개의 컵이 놓였다.
그리고 가볍게 한숨은 내쉬며 말했다.
“공자님들. 이제 정하시면 됩니다.”
돈을 거는 입장에서는 숫자의 높고 낮음을 선택하던지, 아니면 도박사의 숫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숫자의 높낮이를 맞추면 2배, 숫자를 맞추게 되면 무려 5배의 배당이었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따기보다 잃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쓰으읍. 어떻게 해야 이번에도 신령님이 내게 답을 내려주실까나.”
도홍경은 잔망스럽게 말하며 도박사의 컵을 살폈다.
이미 주변에서 혹시나 사기를 치지 않을까 도박장의 무인들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상단전을 열어놓은 진백천은 도홍경의 속마음을 들려왔다.
-흐흐. 네놈들이 아무리 그렇게 두 눈 뽑아져라 쳐다봐도 어떻게 맞추는지 모를 거다.
도홍경은 사기 따위는 치지 않았다.
다만 술법의 도움을 살짝 받을 뿐이었다.
그의 눈이 아주 잠시 동안 녹색으로 번뜩였다.
-도박사는 4, 나는 3이로구나! 후후
“이번에는 왠지 신령님이 몸을 낮추라고 하니. 아래를 선택하겠습니다!”
“도박판에 신령은 무슨! 그러다 다 잃으면 조상 탓을 하려고? 하하하”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 신령인지 뭔지가 다 맞춰줬잖아?”
사람들은 도홍경의 말에 왁자지껄 웃었다.
“어허. 다들 내가 잃었으면 하는구만! 같은 편이 되지는 못할망정 그래서 되겠어?! 그런 의미로 이번에도 따면 거하게 개평을 뿌리지!”
도홍경은 익숙하게 사람들의 환호를 이끌어 냈다.
자연스레 그의 주변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럴수록 도박장의 무인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더더욱 커졌다.
이것 또한 그의 수임이 분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언해원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처음 진백천이 돈을 줄 때만 해도 재미로 몇 번 참여했을 뿐이었다.
규칙도 잘 모르고 참여했지만 이상하게도 도박사가 계속해서 돈을 더해줬다.
사람들의 환호가 더더욱 커지고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와버렸다.
-이쯤에서 그만둘까? 어쩌지? 하아. 지금 딴것만으로도 많은데…….
그녀가 고민 중인 이유는 바로 세가의 빚 때문이었다.
이대로 몇 번 더 따면 혹시나 빚을 갚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이었다.
-……열두 번만 더 맞추면 갚을 수 있는데.
확률적으로는 당연히 말도 안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얼추 비슷하게 그 정도로 맞춰왔다.
만약 정말 신령이 존재한다면 그녀를 따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할 정도였다.
-잃는다 해도 어차피 회주님이 주신 돈이잖아?
“공자님. 서두르시죠.”
도박사가 공손히 말하지만 목소리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그 또한 도박장의 무인들에게서 압박을 받는 중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5를 선택하자.
그녀가 5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생일이 5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선택은 전부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는 전부 잃겠네.’
하지만 던진 돈주머니는 어중간한 위치에 놓였다.
4와 5 사이의 반쯤 걸친 곳이었다.
도박사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공자님. 4입니까 5입니까?”
도박사는 빠른 눈치로 그녀가 5에 올려놓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5로 옮기려던 그는 문득 지금까지의 운을 떠올리며 손을 반대로 움직였다.
4로 밀어 넣은 것이다.
“잠시만. 나는 5로 올려놓은 건데?”
“주머니가 더 4쪽에 있었습니다. 낙장불입(落張不入)입니다.”
도박사의 어이없는 행동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전부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도박사는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 무표정으로 야유를 무시했다.
도박장 무인들이 나서고 나서야 야유가 가라앉았다.
유일하게 도홍경과 진백천만이 혀를 차며 언해원을 쳐다봤다.
‘운 한번 더럽게 좋네.’
“크흠. 그러면 결과를 공개하겠습니다.”
우선 도홍경의 주사위를 담은 컵부터 뒤집었다.
“숫자는 3입니다.”
비교적 낮은 숫자였기에 도박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도박사의 컵을 뒤집었다.
빨간 4개의 점이 주사위에 박혀 있었다.
“4다! 이번에도 맞췄어!”
“어떻게 이렇게 맞출 수 있지? 짜고 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도박사의 표정이 검게 물들었다.
도홍경이 딴것은 그렇다 쳐도 언해원의 것은 명백하게 자신의 실수였다.
자신이 그대로 5에 두었으면 전액을 땄을 터였다.
그의 절망스러운 심정과 다르게 주변에서는 환호 소리로 귀가 먹먹해졌다.
“으하하하하! 신령님께서 기뻐하신다! 다들 개평 받으시오!”
도홍경은 받은 은자를 한 움큼 집어 공중으로 뿌렸다.
사람들이 떨어진 은자를 집기 위해 난장판이 되었다.
그 사이 도박사는 도박장의 무인들에 의해 끌려갔다.
누가 봐도 그가 언해원을 도왔다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 저는 정말…….”
“입 닥치고 따라와.”
도박사가 사라지고 도박장의 관리자로 보이는 이가 직접 다가왔다.
“공자님들 가게에 은자와 금자가 많지 않아 3대 상단의 전표로 대신해도 괜찮겠습니까?”
“가져갈 때도 그편이 더 가벼우니 상관없지.”
도홍경은 전표를 직접 꼼꼼히 살폈다.
“절강상방(浙江商幫)의 것이라면 신원은 확실하지. 공자도 받으셔도 됩니다.”
언해원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전표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어쩐지 가슴이 불룩하자 여자처럼 보였다.
“크흠. 공자님들 2층에서만 하시기에는 아쉽지 않으십니까? 3층에는 더 큰 판돈으로 특별하게 즐길 수 있으신데 어떠십니까?”
“3층? 그곳은 입장 조건이 어떻지?”
도홍경은 뒤편에 서 있는 진백천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왠지 철창으로 가려진 곳에 혼자 들어가기에는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관리자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돈입니다. 돈만 있으시면 거지든 아이든 상관없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하북 최고의 부자가 되실 수도 있으니 운이 좋으신 공자님들이라면 꼭 들어가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그 돈의 기준이 얼마인데?”
“원래는 금자로 20냥이지만 공자님들은 특별히 출입 가능하십니다.”
금자로 20냥이면 은자로 400냥이었다.
‘중요한 건 판돈이겠지.’
도홍경은 진백천의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판돈에 대해서도 물었다.
2층까지는 최소한의 금액이 정해져 있지 않았었다.
“3층에서는 재미를 위해서 최소 금자 1냥씩 받고 있습니다.”
제법 큰 금액에 도홍경과 언해원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자를 따라나섰다.
3층 입구로 들어선 그들을 보며 진백천은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금자 1냥씩이라. 장부를 내놓을 것도 없이 확 도박장을 털어버려?’
도박으로 흥한 놈들이니 도박으로 망하는 모습도 왠지 재밌을 것 같았다.
진백천은 거침없이 3층으로 향했다.
도중에 도박장 무인들이 길을 막아섰지만 품속에서 꺼낸 전표 다발을 보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이곳에서는 돈이 황제고, 권력이며, 신이었다.
“재밌는 놀이 되시길 바랍니다.”
3층 문이 열리며 새로운 풍경이 드러났다.
탁자마다 수북히 쌓인 금자.
그리고 은은히 풍겨오는 피 냄새.
탁자에 앉아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유난히 두꺼운 도를 등 뒤로 멘 자와 신경질적인 눈초리의 남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지하에서 봤던 팽가의 무인과 독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