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29화
48장 도박장을 다 털어버리다(1)
“이런 취미도 있었나?”
진백천의 물음에 언해원이 부채를 펼치며 얼굴을 가렸다.
“제 취미가 제법 유별나긴 하죠?”
진백천이 도홍경과 언해원을 번갈아 봤다.
옷도 그렇고 워낙 대비되는 둘이라 절로 시선이 갔다.
“여긴 왜 온 거야?”
“저도 들었어요. 저희 세가에 빚이 넘쳐난다면서요. 회주님이 여기까지 온걸 보면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방법? 빚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지?”
거기까지는 듣지 못한 듯 언해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백천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2천 냥이요?”
“그 정도에 세가가 넘어갈 것 같아?”
“그러면 2만 냥이요? 많긴 해도 주변에 자금을 융통하면…….”
“은자 말고 금자로.”
당연히 은자라고 생각했는지 언해원의 눈동자가 휘둥그래 해졌다.
자신이 일주일에 용돈으로 쓰는 돈이 은자 10냥이었다.
그것도 적지 않다 생각했는데 금자로 2만 냥이면 은자로는 40만 냥이었다.
잠시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언해원의 첫마디는 곱상한 얼굴과 다르게 진한 욕설이었다.
“미친! 그 버러지 같은 언호충 새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허허. 공자님이 입이 걸걸하십니다.”
“조용히 해. 입 걸걸하게 생긴 걸로 따지면 너를 따라올 자가 없거든?”
“저는 이래 봬도 도사입니다!”
“도사면 도사답게 입 다물고 있어. 이 도사 새끼야!”
도홍경은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물러났다.
진백천은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쯧쯧. 둘 다 그만해. 단순히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니까 괜히 시선 끌지 말고 흩어져.”
“회주님은 어떻게 하시게요?”
“우선 이곳 대가리가 누군지 뭐 하는 곳인지부터 알아봐야지. 그리고 그 후에는…….”
“후에는?”
진백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여튼 정확히 1시진 후에 여기서 다시 보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형님! 흐흐.”
도홍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박장 안쪽으로 달려갔다.
품속에서 절그럭거리는 은자 소리가 무척이나 세속적으로 들렸다.
‘저놈. 왜 이렇게 익숙하게 보이지?’
“저는 회주님하고 같이 다닐래요.”
“귀찮아. 너는 너무 시선을 끌어.”
“회주님은 안 끌고요?”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는 오히려 언해원보다 진백천이 더 했다.
진백천은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나는 걱정 말고 도박이나 즐기든 뭐하든, 여기 있어.”
언해원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곧 날아오는 주머니를 얼떨결에 받았다.
절그럭-
두 손으로 받기에도 묵직한 돈주머니였다.
그것도 무려 철전이 아닌 은전.
난생처음 받아보는 금액에 언해원이 꿀 먹은 곰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면 아무리 잃기만 해도 1시진을 즐기기에는 무리가 없을 거야.”
“……다 써도 돼요?”
“물론.”
앞으로 걸어가던 진백천은 문득 멈춰 서며 말했다.
“아. 첫째처럼 빚은 지지 말고.”
“절대요. 그런 멍청이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언해원은 탁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 진백천으로써는 하지 않는 게 가장 돈을 버는 거라 생각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 진백천의 신형이 순간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그를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면 헛것을 본 게 아닐까 할 정도의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 * *
도박장은 큰 원의 형태였다.
4층까지 이어진 건물은 중앙이 뻥 뚫려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도박장을 지키는 무인들은 각 층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각 층에 있는 도박의 종류는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층을 나누는 것은 판돈이었다.
‘1층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정도이고 2층은 은자, 3층은 금자로만 인가?’
금자만 걸고 받는 3층은 창살로 가려져서 들어가고 나가는 것조차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백천이 찾는 것은 판돈 높은 도박장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 금전출납이나 구린 것들을 기록해두는 장부가 있을 거야.’
이런 규모의 도박장이 흑도방파 하나에서 운영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진백천의 기억에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구린 건 가장 안쪽에 있는 법이지.’
진백천의 신형이 4층으로 향했다.
그림자 하나 없이 불이 밝혀진 도박장이라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신중했다.
4층의 유일한 입구 앞에는 두 명의 무인이 보초를 선 상태였다.
“하아암. 피곤하다.”
“어제 또 이화루에 찾아간 거냐?”
“흐흐. 어제는 초연이 보러 갔지.”
중요한 곳을 지키는 보초치고는 무척이나 건들거렸다.
그때 안쪽의 문이 열리며 안의 풍경이 살짝 드러났다.
진백천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로 가득했다.
‘더럽게 노는 곳이군.’
도박장에 술과 여자가 빠질 리 없었다.
4층은 그걸 원하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진백천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도박장을 살폈다.
4층이라 그런지 아래의 풍경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제일 위층이 아니면 대체 어디에 숨겨둔 거지?’
그의 시선이 빠르게 문이란 문은 전부 살폈다.
밖으로 통하는 곳은 전부 막혀 있고 따로 통로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진백천의 시선에 특이한 장면이 들어왔다.
도박사가 딴 판돈을 탁자 아래에 놓자 바닥이 열리며 빈 통으로 바꿔 간 것이다.
‘지하였나?’
그러고 보니 1층에는 특이한 구조의 방이 존재했다.
도박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문이 하나 달린 공간이었다.
단순히 보초들이 쉬는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겠지.’
진백천은 다시 1층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도박장 안은 사람들의 환호 소리와 탄식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점차 환호가 커지는 자리가 존재했다.
“와아! 봤어? 저 사람 또 맞췄어! 이게 말이 돼?”
“앉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벌써 3배라고!”
“도박의 신이야!”
단순한 주사위 놀이였음에도 연전연승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틈으로 험악한 인상이 보였다.
다름 아닌 도홍경이었다.
‘도사가 도박의 신이라니.’
이래서 도박장에 가자고 했을 때부터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시선도 끌어주고 진백천은 별 어려움 없이 방에 들어섰다.
철컥-
진백천은 문을 닫고 안을 둘러봤다.
겨우 방 한 칸 정도 되는 공간에는 작은 탁자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누가 잘못 들어와도 단순히 쉬는 공간이라 생각할 만했다.
진백천은 탁자 위의 촛불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의자 밑쪽에 가져다 대자 촛불이 강하게 흔들렸다.
‘아래쪽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어. 분명 여는 방법이 있을 텐데.’
방안에는 딱히 조작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일일이 벽을 짚어가며 눌리는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진백천의 짐작은 정확했다.
철컥-
문가 바로 옆의 벽이 쑤욱 눌리며 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자 밑의 공간이 열리며 통로가 드러났다.
진백천이 그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흐음. 생각보다 넓은데?’
지하 공간은 일정 간격마다 횃불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혹시 모를 침입자를 대비한 것이기도 했고, 지하 특유의 습기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지하는 여러 갈래 길로 미로처럼 꼬여 있었다.
딱히 이정표도 없기에 나아갈 방향으로 잡을 것은 소리뿐이었다.
‘이쪽인가?’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향하자 크게 뚫린 공간에 간이 침상이 여러 개 있고 무인들이 휴식 중이었다.
이곳에 상주하며 지키는 자들로 보였다.
그 수가 수십 명에 이를 만큼 제법 많았다.
“이번에 기대되지 않아?”
“뭐가?”
“진주언가 말이야. 그 멍청한 첫째가 도박으로 다 날려줘서 집어삼키게 생겼잖아.”
진백천은 자신이 아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였다.
“그래 봤자 자금으로 들어오는 건 없잖아? 팽가에서 다 집어삼키기로 했으니까.”
갑자기 나오는 하북팽가에 진백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들의 말투는 마치 지금의 상황을 전부 하북팽가가 만들어낸 것처럼 들렸다.
“멍청한 팽가 놈들이 어떻게 그렇게 머리를 굴렸을까. 크큭.”
“그놈들보다 진주언가가 더 멍청하니까 당한 거지.”
“그사이에 나오는 콩고물은 우리가 다 먹고 말이지.”
놈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끄럽게 웃어댔다.
그때 안쪽에서 누워 있던 자가 일어나며 못마땅한 듯이 소리쳤다.
“시끄럽다. 일이 모두 마무리될 때까지는 얌전히 지키고 있어. 이번 일이 형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지?”
“네. 물론입니다. 형님!”
“잘못 틀어지기라도 했다가는 우리도 모두 목줄이 날아가. 정신 차려.”
형님이라 불린 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인원만 보면 역시나 평범한 흑도방파가 아니야.’
진백천은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의 옷을 집어서 대충 겉에 걸쳤다.
그리고 남자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이들은 겨우 2류를 넘어서는 실력이라 진백천의 움직임을 감히 간파하지 못했다.
남자가 향하는 곳은 지하의 가장 안쪽이었다.
문하나 없이 다 뚫려 있던 공간에 철제문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그 앞으로 가로막고 서 있던 보초가 남자가 보고 고개를 숙였다.
“방주님은 아직도 대화 중이냐?”
“네. 그렇습니다.”
“흐음. 일단 문 열어. 오늘 보고는 드려야 하니까.”
보초가 여러 겹으로 쳐져 있던 자물쇠를 풀었다.
1특이한 것은 바깥쪽뿐만 아니라 안쪽에도 자물쇠가 쳐 있었다.
만약 안쪽과 바깥쪽 한쪽에서라도 열지 않는다면 드나들 수 없는 구조였다.
끼이이익-
“자물쇠 잠가.”
문이 열리자 남자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백천을 그를 따라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저 안에 갇히면 빠져나오기 곤란했다.
‘탈출구는 미리 확보해야지.’
진백천은 자물쇠를 닫는 보초 뒤편에 나타났다.
그리고 빠르게 마혈(痲穴)을 짚어 그를 기절시켰다.
안쪽에 있는 보초는 갑자기 동작을 멈춘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야. 뭐하냐?”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보초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눈동자는 바로 보초의 뒤편이었다.
그 시선에 다급하게 뒤돌아섰지만 똑같이 마혈을 짚이며 몸이 굳어버렸다.
진백천은 얼굴을 가린 채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죽이진 않겠다. 자신 있으면 소리라도 질러봐. 바로 목울대를 뜯어줄 테니.”
진백천은 목가에 손을 올리고 입을 움직일 수 있게 풀어주었다.
“교대 시간이 언제지?”
“……1시진 후입니다.”
-……일다경(一茶頃, 15분)이면 다음 보초가 올 테니…….
더 들어볼 것도 없이 다시 마혈을 짚었다.
‘15분이면 안을 둘러보고도 남을 시간이지.’
그리고 대충 문이 잠긴 것처럼 만들어 놓고 독객이 향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독객은 안쪽의 공간에서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다.
얼굴을 가린 거구의 사내와 중년의 남자였다.
그런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법 컸다.
“팽 대협! 약속을 어기려는 것입니까!”
“약속은 무슨! 독객. 네놈은 그저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충분히 그렇게 했습니다! 언호충에게 미약을 먹여서 도박 빚을 늘렸고, 그 담보로 세가를 내놓으라고 협박까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하라는 거 아니야!”
이야기를 들어보니 도박장을 운영하는 흑도방파는 하북팽가의 말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진주언가에 올가미를 씌운 것도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팽 대협. 우리 같은 도박장 놈들이 감히 진주언가를 건드렸습니다. 이 일이 조금만 더 커지면 사방에서 개처럼 우리를 물어뜯으려 할 겁니다. 서둘러 얻을 것만 얻어내고…….”
팽가의 무인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탁상을 세게 내리쳤다.
쩌저저적-
단숨에 탁자가 반쪽으로 부러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팽가의 무인은 억센 손으로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뒤편에 서 있던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지만 감히 나서지 못했다.
“커, 커헉!”
“네놈들이 하는 일에 우리 팽가가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해주는지 알고 있겠지? 하북에서, 아니, 강호에서 자네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우리의 말을 개처럼 따르는 것뿐이야.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