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26화
47장 철중화의 정혼자(2)
언해원은 아침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마침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때가 되었는데 벌레 한 마리가 끈덕지게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벌레는 하북팽가의 팽중혁이었다.
“나와 이야기 좀 하지?”
“내가 왜요?”
“당신은 내거니까.”
이미 언해원이 자신의 것처럼 반말하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그놈의 하북팽가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주둥이를 후려쳤다.
“소름 돋으니까 단정 짓지 말죠? 제 낭군은 따로 있으니까.”
“낭군은 무슨! 나 팽중혁의 눈에 든 이상 너는 다른 이의 것이 될 수 없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납득하고 있을 텐데?”
언해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문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준비한 벽보가 붙었을 테고 사람들이 열심히 소문을 퍼뜨리는 중 일터였다.
그러기 위해서 이름 꽤나 날리는 문장가에게서 시까지 받아냈다.
그런 것에 담담한 자신이 봤을 때 눈물이 찔끔 났을 정도니 다른 이들은 더할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망아지처럼 구는지 모르겠군.”
“망아지?”
언해원은 애써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참으며 그를 노려봤다.
“왜? 그렇게 불리니 기분이 나쁜가? 하지만 사실이지. 강한 남자, 강한 남자 그렇게 원한대서 왔더니 결국 이러고 있으니!”
“내가 말하는 강한 남자는 단순히 무력만 강한 게 아니라 이 머리도 있어야 하거든?”
언해원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가리키자 팽중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대로 무력은 강해도 멍청하다는 선입관은 하북팽가 전부의 약점이었다.
그런 점을 대놓고 쑤셔대니 얼굴이 푸르락누르락 변했다.
“아무래도 기를 한번 죽여줘야겠군!”
팽중혁은 이곳에 진주언가임에도 손을 쓰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대신 도를 꺼내는 대신 언해원이 자신 있는 권각을 뻗었다.
언해원은 그가 손을 뻗을 것이란 것을 미리 예측했다.
자연스레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몸을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역시 무작정 주먹을 뻗는 것을 보니 팽중혁 당신은 내 상대가 아니야!”
언해원은 그를 비웃으며 단숨에 정문을 열었다.
하지만 곧 마주친 이들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자들은 또 뭐야?’
언해원은 단숨에 밀쳐낼까 고민했지만 멈춰섰다.
바로 앞에 있는 남자의 기백이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또한 뒤편에 있는 자들 또한 고수들이었다.
“누구지?”
언해원의 시선이 진백천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오만해 보이지만 당당해 보이는 눈동자는 평범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뒤편에 도끼를 든 자는 분명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당금 강호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정도회주 진백천?”
그녀가 진백천을 잘 아는 것은 자신이 당천아과 친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무림오봉인 둘은 제법 성미가 잘 어울렸다.
당천아는 정도회에 들어가서도 언해원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서신의 내용 대부분은 진백천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가였고, 그녀 역시 강호의 소문을 들어왔기에 특징 정도는 기억했다.
‘회주가 진주언가에 들릴 수도 있다고 말할 때는 설마 했는데 진짜로 오다니.’
팽중혁은 진백천에 대해 모르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언해원은 순간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잘하면 거머리 같은 팽중혁 따위 깔끔히 떼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무척이나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진백천에게 인사했다.
“기다렸습니다.”
“내가 누군지 아나?”
“물론입니다.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그녀의 친절한 태도에 일그러지는 팽중혁의 얼굴은 꽤나 고까웠다.
* * *
‘나를 기다렸다고?’
진백천은 당장 상단전을 열고 그녀의 속마음을 엿들었다.
당천아와의 서신 이야기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납득이 갔다.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나는…….”
“네놈은 누구냐!”
진백천의 말을 끊고 앞으로 나서는 것은 다혈질의 팽중혁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보면 고개를 조아렸고 잘 보이려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자들은 누구도 그렇지 않았다.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뭔데 반말질이야?”
“뭐라? 반말질?”
언해원은 진백천에게 시비를 거는 팽중혁을 보며 솟구치는 입가를 숨기기 어려웠다.
-멍청한 놈! 빡대가리답게 앞뒤 안 가리고 덤비는구나!
그녀는 스리슬쩍 진백천의 뒤로 돌아가며 유석경 옆에 섰다.
유석경이 붉어진 얼굴로 쳐다봤지만 그는 관심 밖이었다.
진백천은 이 상황을 언해원이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팽중혁의 두 눈은 돌아간 상태였다.
“어딜 물러나려고! 겁이라도 잔뜩 집어삼켰느냐?”
“허허. 여기 진주언가 아닌가? 왜 이렇게 하북팽가 빡대가…… 아니, 무인이 나대?”
자기도 모르게 빡대가리란 말이 나올뻔하자 뒤편에서 언해원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자 팽중혁의 이성을 유지하던 끈이 뚝-하고 끊어져 버렸다.
“이놈들! 누군지 몰라도 당장 무릎을 꿇고 빌지 않으면 목을 베어주겠다!”
스르르릉-
서슬 퍼런 도가 예기를 흘리며 진백천을 향했다.
하지만 막상 분위기는 기묘하게 흘러갔다.
팽중혁이 도를 꺼내 들자 그에 따라 진백천의 기세도 급변한 것이다.
“무인이 무기를 꺼낼 때는 자신도 벨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거겠지?”
진백천도 팽중혁 앞에 마주 서며 독고구검을 뽑았다.
한없이 낮게 가라앉은 눈빛이 눅눅히 팽중혁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스스슥-
정제되지 않은 그의 살기와 달리 닿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베일 것 같이 예리했다.
등줄기가 곤두서며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제서야 눈앞의 진백천이 자신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누구지?”
“그 질문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진백천은 느릿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단지 검을 들었을 뿐이지만 금방이라도 폭포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꿀꺽-
팽중혁이 마른침을 삼키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진주언가의 무인은 물론이고 열린 문으로 처음 보는 이들도 구경 중이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된다!’
머리가 좋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읽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지금 도를 내린다면 진주언가뿐만 아니라 팽가 내에서의 입지도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팽가에서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바로 물러서는 것이었으니까.
‘기어코 매를 벌겠다 이거지?’
진백천도 이미 그러한 팽가의 습성을 잘 알았다.
아마 한 번을 휘두를 수 있다면 그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터였다.
‘그 한 번은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일 테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문을 뚫고 나간다는 도법이었다.
하지만 그거야 팽가의 가주나 가능한 것이고, 팽중혁은 기껏해야 한 마리였다.
팽중혁은 천천히 도를 내리며 기세를 끌어모았다.
두 눈이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진백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한번 마음껏 펼쳐봐. 후회하지 않게.”
팽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목소리에서도 전해지는 여유로움은 허세가 아니었다.
“팽가를 우습게 보는가?”
“팽가가 아니라 너를 우습게 보지.”
그 말이 신호탄인 것처럼 팽중혁의 도가 사납게 앞으로 뻗어 나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얼핏 호랑이가 포효와 비슷했다.
‘그래 봤자 아기 호랑이일 뿐이야.’
벽력마검보다 강하거나 단호하지도 못했고.
검왕이나 흑백신의보다도 집요하지 못했다.
단지 흉내 내기뿐이라 진백천의 실망감만 커질 뿐이었다.
‘기대심이 너무 컸나?’
기대심이라는 것을 갖기에는 현재의 진백천이 너무 강해진 탓도 있었다.
진백천은 태천검을 펼칠 필요도 없이 검을 빠르게 내리그었다.
검에 맺힌 검기는 호랑이의 목을 쳐내듯 도를 밀쳐냈다.
카앙!
균형을 잃은 팽중혁의 몸이 빙글 돌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말, 말도 안 된다! 어찌 그렇게 쉽게!”
“쉽게고 어렵고 자시고. 일단 맞고 물어봐.”
진백천은 손목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걸개구타권(乞丐毆打拳)이라고. 너 같은 놈들 정신 차리게 해주는 게 있거든.”
“……걸개…… 구타권?”
팽중혁은 그 이름에서 뭔가를 떠올렸는지 경악한 얼굴로 올려다봤다.
“설마 당신이 진백천 회주?”
“맞아. 들어봤지?”
“잠, 잠깐 나는……!”
“자기소개는 이따가 하라고.”
진백천은 씩이 웃으며 주먹을 내뻗었다.
개방의 적의단도 후드려 팼는데 하북팽가라고 봐줄 리 없었다.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팽중혁은 공기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유석경을 두드릴 때와 다르게 그는 점점 푸르딩딩하게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쓰러졌을 때는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부은 상태였다.
“후우. 오랜만에 속 시원하네.”
“팽, 팽 도련님!”
“아무리 회주라 해도 이럴 수 없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하북팽가의 무인들이 도를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설마 팽중혁이 당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 앞으로 나선 것은 팽가의 무인들보다 더 기백이 넘치는 황대원이었다.
“회주님 앞에 나서려면 나 황대원의 시체를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거친 그의 외침에 팽가의 무인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먼저 무기를 뽑고 휘두른 것은 전부 팽중혁이었다.
주변에서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으니 빼도 박도 못했다.
하지만 정작 진백천은 그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쯧. 귀찮으니까 전부 치워. 진주언가인데 왜 팽가가 설치는 거야?”
“가주님과 오라버니가 잠깐 출타 중이셔서 그래요. 전형적인 호가호위(狐假虎威)죠”
“……언 소저! 말을 조심하시오!”
팽가의 무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노려봤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감히 진백천과 황대원 앞에서 도를 뽑아 들지 못하고 정문으로 빠져나갔다.
“이 치욕은 잊지 않겠소!”
“그래. 다음에는 새끼 호랑이 말고 어른 호랑이로 모시고 오게들.”
진백천의 설렁설렁한 말투에 그들은 이를 악다물며 사라졌다.
언해원은 팽가의 기는 모습을 보고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당 언니의 말대로군! 호인이다!’
언해원은 포권을 취하며 다시금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 올리겠습니다. 진주언가 언해원입니다. 이곳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는 길이 힘드셨을 텐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진백천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호의적인 태도에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활짝 열려 있던 진주언가의 문은 그제서야 닫혔다.
* * *
화산파(華山派) 연화봉.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화산신검은 그 끝자락에서 화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의 노회한 시선에 활달하게 움직이는 제자들에게 닿았다.
얼마 전 피로 물들었던 화산이었지만 그 피비린내는 새롭게 움직일 원동력이 되었다.
분열되었던 장로들이 뭉쳤고 다시금 장문인인 곽철군이 힘을 얻었다.
썩어가던 부위를 도려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터져 나오는 것을 막아냈다.
그 이유에는 분명 폐관을 끝마친 화산신검의 덕이 컸다.
“결국 한때인 것을.”
화산신검의 시선이 연화봉으로 오르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장문인인 곽철군과 그의 제자인 검군(劍君) 유일환이었다.
유일환은 진백천을 만난 후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진백천 회주가 화산의 복이지.’
그것은 화산신검조차 그 나이대에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차기 화산신검은 그의 차지가 될 터였다.
“사형.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곽철군은 하루에 한 번씩은 이렇게 연화봉에 올라 화산신검과 함께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화산신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의 방향을 정했다.
“그러고 보니 회주가 황실에서 큰일을 해냈다지?”
“사례감을 죽이려던 마교의 간자들을 축출해 낸 모양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동창의 무인들을 상대한 것부터 황음각(凰陰閣)에 들어가 보물을 얻었다.
강호의 호사가들은 진백천의 행보에 대해 귀를 쫑긋였다.
오죽하면 그에 대한 책이 발간되어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다.
“난자는 난자로구나. 단순히 뱀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이를 가졌고, 이제는 날개까지 가졌어.”
화산신검은 진백천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실소를 터뜨리곤 했다.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내는 것을 보면 무력(武力)이 아닌 또 다른 힘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유일환은 자꾸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화산신검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일환아.”
“네. 스승님.”
“너도 이제 강호행을 해보는 것이 어떠느냐? 힘을 얻었으니 사람들을 위해 쓰기도 해야지.”
“제자.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하지 않다.”
화산신검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교인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하고 그는 한 차례 더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 경쟁자라 생각하는 자도 있으니 앞으로 더더욱 강해질 터였다.
“안에 쌓기만 해서는 정체될 뿐이다. 나누기도 하고 계속해서 순환해야 더더욱 클 수 있는 법이지.”
유일환이 고개를 숙였다.
“수행이라 생각하거라. 불쌍한 이들을 돕고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떨쳐라. 그래야 검은 더더욱 성장할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검군(劍君) 유일환은 자신의 사제들인 매화검수들을 이끌고 화산파를 나섰다.
모처럼 만의 외출에 사제들은 하나같이 들뜬 상태였다.
“사형. 어디로 가실 겁니까?”
“딱히 생각해둔 곳은 없지만 만나볼 자는 있지.”
전력을 다한 자신의 검을 마음껏 받아줄 수 있는 자.
그리고 언제가 꼭 한번 겨뤄보고 싶은 자.
사제들은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챘다.
정도회 회주 진백천.
유일환은 사제들과 함께 하북으로 향했다.
진백천이 있는 위치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소문이 절로 물어다 주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