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25화
47장 철중화의 정혼자(1)
진백천의 훈련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격체전력을 빙자한 구타를 시전하면 유석경은 최대한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 진백천이 때리기 시작했을 때는 금의위들이 기겁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격체전력임을 알고 감탄했다.
“크윽!”
그것이 확실한 이유는 며칠이나 두들겨 맞았음에도 유석경의 몸에는 멍 자국 하나 없었다.
오히려 때리면 때릴수록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이제 좀 버틸 만해?”
“죽도록 아프지만 신기하게도 몸에 힘이 돋는군.”
이것은 유석경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력 운용이 다소 떨어지는 진백천에게도 또 다른 훈련이 되었다.
그러한 구타가 끝나면 유석경은 곧바로 마보(馬步)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훈련을 계속하는 이유는 두 다리와 허리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강한 상체의 힘을 가졌다 해도 그 지지기반이 약하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형님. 마보 훈련은 처음 무공을 배울 때나 하는 건데 큰 효과가 있습니까?”
“당연하지. 그렇지 않으면 왜 무공 훈련을 하면서 가장 먼저 하겠어. 어떤 동작이든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하체가 필요해.”
도홍경은 다소 동의할 수 없는지 입을 삐죽였다.
술법을 중시하다 보니 외공을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유석경의 경우는 그런 것만을 위한 하체는 아니었다.
버티기 위한 것.
수련할 때와 실전은 엄연히 달랐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흥분감 속에서 준비한 것 따위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주먹은 유석경의 뇌리를 단번에 날려 버릴지도 몰랐다.
‘아무리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말이지.’
그렇게 된다면 허무하게 승부가 끝나버릴지도 몰랐다.
진백천은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하체 스스로 충격을 버틸 만큼 각인시키는 중이었다.
‘몸의 기억은 뇌의 기억보다 강렬하지.’
쓰러지기 직전까지 계속되는 수련은 실전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실제로 많은 무인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에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존재했다.
수백, 수천 번 휘두른 검이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뻗어 나오는 법이었다.
이러한 진백천의 가르침은 지켜보는 다른 무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황대원은 쉴 때마다 똑같이 마보 자세를 취했다.
유일하게 마차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은 당소예와 도홍경 뿐이었다.
“소예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언제 가려고 그러냐?”
“저 말입니까? 다리가 다 나아야 가죠. 괜히 또 움직이다가 이상한 놈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대충 다 나은 거 같은데?”
“아직 뼈마디가 쑤십니다.”
거짓은 아닌 듯 움직일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 내가 내력 좀 불어넣어 줄까?”
“으으. 사양입니다!”
진백천이 주먹을 들고 묻자 화들짝 놀라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멈춤과 나아감을 반복하는 마차는 곧 진주언가가 위치한 진주(晉州)에 도착했다.
바로 근처에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이 있었지만, 그곳보다 더 발전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전부 이곳에 있는 진주언가 덕분이었다.
사람이 이곳에 몰리니 자연스레 상단과 상점이 생겨나고 마을의 규모가 커졌다.
만약 진주언가가 마음만 먹었다면 오대세가는 진즉에 육대세가로 불렸을 터였다.
“와아. 정말 커요.”
“그렇지?”
유석경은 진주에 도착하자마자 벌써부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언해원을 떠올리는 눈동자가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진백천은 자연스레 진주언가가 위치한 방향으로 향하는 그를 붙잡았다.
“백천. 왜 그러는가? 진주언가는 이쪽이야.”
“아니, 그 전에 차나 한잔하자고.”
진백천은 별말 없이 그들을 끌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 방향이 도심이 아닌 뒷길에 있는 다소 허름한 곳이었다.
진백천은 그곳에서 하오문의 비밀표식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공을 익힌 듯 보이는 점소이가 눈을 빛내며 자리를 안내했다.
“간단한 다과와 차 좀 내오게.”
“네. 공자님.”
금의위들은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딱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유석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는 언가에서도 마실 수 있는데?”
진백천은 눈치 없는 유석경을 보며 혀를 찼다.
“생각해 봐. 무림세가에 금의위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어떻겠어?”
“어떻냐니? 그게 무슨 뜻이지?”
유석경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무림세가가 관군에게 가지는 불편함을 아직 잘 모르는 듯했다.
진백천은 하수불범정수(井水不犯河水)에 대한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지금까지 유석경이 얼마나 진주언가를 불편하게 했는지까지 말이다.
“……내가 배려심이 부족했군.”
유석경은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이 우르르 몰려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제서야 그런 것들이 얼마나 진주언가를 불편하게 했는지를 깨달았다.
“……1년의 시간을 준 것도 그러면…….”
“오지 못하게 막기 위한 것도 분명 있겠지.”
유석경은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찻물을 들이켰다.
그 누구도 주변에서 말해주지 않다 보니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의위들을 떼어놓고 가자고.”
“알았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또 실례를 저지를 뻔했어.”
금의위들은 유석경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미 한번 납치될 뻔한 일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차마 전부 떨어지지 못하고, 일부만 따르기로 했다.
내온 차가 식을 때쯤 누군가 객잔에 들어와 멀찍이 앉았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진백천 회주님. 인사드리겠습니다. 하북 하오문 분타를 담당하고 있는 조춘입니다.
-별건 아니고 현 상황에 대해서 듣고 싶어서.
-문주님과 여교 아가씨에 물으시는 거라면 다른 안가로 이동하신 상태입니다. 잠시 흔들렸던 하오문의 정보망도 이제 막 재가동 되었습니다.
‘다행이군. 혹시나 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보면 하오문의 중요한 정보임에도 진백천에게는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다.
이번 사건을 도운 진백천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의 태도에서조차 느껴졌다.
-의뢰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문주님께서 회주님의 의뢰는 무보수로 하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진주언가의 현재 상태와 철중화 언해원에 대한 자료를 보고 싶군.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전음이었다.
진백천은 대화를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점소이가 만두를 가지고 왔다.
“저희 가게에서 자랑하는 고기만두입니다.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진백천은 유난히 커다란 만두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 밑에는 서신이 깔려 있었다.
“맛있겠네. 인원 당 하나씩 주게.”
진백천은 품속에서 두둑히 은자를 꺼내 셈을 치르고 나왔다.
그리고 몰래 서신을 확인했다.
서신에는 진주언가에 대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의외의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급격하게 무너져 내려가는 중. 하북팽가의 직접적인 압력에 일하던 자들도 그만두고 떠나감. 그나마 지역 유지로써 버티고는 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름.]
회귀 전에도 몰랐던 내용이었다.
진주언가는 그가 신경 써야 할 대상이 아니었고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하북팽가라니.’
진백천의 기억으로 하북팽가를 판단하자면 한마디로 ‘우물 속 개구리’였다.
머리는 뛰어나지 않지만 유독 뛰어난 근골의 무인들이 많이 태어났다.
거기에 위협적인 하북팽가의 도법이 합쳐지니 하북 내에서는 그 누구도 그들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런 점이 그들을 더더욱 우물 속 개구리로 만든 거겠지만.’
하북팽가에 대한 진백천의 생각은 곱지만은 않았다.
지나치게 폐쇄적이며 그만큼 권위적이었다.
도왕(刀王)을 필두로 팽가칠도의 장로들은 힘이 있음에도 정마대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저 하북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어. 오히려 혼란스러운 시기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만 넓혔지.’
그런 이들이었기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흐음. 하북팽가 대신 진주언가를 밀면 조금은 달라지려나.’
진백천은 계속해서 서신을 읽었다.
[진주언가의 가주인 언시경에게는 2명의 자식이 있음. 문제는 가문을 이어야 하는 아들인 언호충이 무공이 지독히 떨어지는 둔재. 그런데도 주색잡기를 즐기니 자연스레 둘째인 언해원을 가솔들이 따르기 시작함.]
‘안팎으로 난리니 언 가주도 마음이 복잡하겠지.’
권가제일문(拳家第一門), 나아가 천하제일권가로 불리던 언가였다.
그런 가문을 언호충이 맡게 된다면 어떤 꼴이 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언호충의 세력이 언해원을 어떻게든 외부로 시집보내려 하고 있음. 철중화라는 명성 덕분에 혼담은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 중. 그중에는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 팽중혁이 노골적으로 언해원을 요구하고 있어서 쉽게 뿌리치기는 힘들어 보임…….]
하북팽가의 팽중혁이 언해원을 원하고 있는 이유는 뻔했다.
첫째는 진주언가를 날로 삼키겠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자신들의 부족한 머리를 언해원으로 채우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러니 진주언가로써는 퍽이나 난감할 따름이었다.
[……철중화 언해원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 듯하지만, 최근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서신을 보내며 무언가를 준비 중.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음.]
서신은 여기까지였다.
짧은 내용이었지만 진백천으로써는 현재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그 무언가는 아마도 정혼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려는 거겠지.’
그렇다면 진백천이 진주언가를 방문하기에는 꽤나 적당한 시기였다.
“백천. 이제 가볼까? 긴장되는군.”
그들은 대로를 따라 진주언가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몇몇 시선이 그들을 훑었지만 딱히 대단한 자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진주언가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뭐지?”
사람들은 진주언가의 담벼락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방금 붙인 것으로 보이는 벽보였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진백천은 안력에 힘을 주고 벽보를 읽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언해원의 정혼자를 모집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벽보 아래 붙은 시 글귀였다.
<어딘가 있을 나의 낭군에게.>
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먼 후일 언젠가 만날 당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때를 기다릴 사랑이 곪아 익기도 전에 썩게 되었으니.>
<하루 빨리 당신을 찾으려 합니다.>
<부디 철없는 저의 야속함을 뒤로하고.>
<홀로 걸어가는 머리 위의 반짝이는 별이 되어 어둠을 물러주십시오.>
<모든 치욕에서 사랑으로 번져갈 기다림을 간직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다 지나 당신이 나를 나무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사랑이라 말하겠습니다.>
철중화가 자신의 상황을 애절하게 풀어놓은 것만 같은 시였다.
‘제법 서정적이긴 해도 이런 걸 보고 무턱대고 감동 받는 사람이…….’
“…다 나 때문일세.”
……있었다.
유석경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시 속에 어둠을 물려줄 이가 자신이라도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소예와 도홍경도 시를 읽으며 감탄했다.
“……그 아가씨가 지금 얼마나 슬퍼하는지 절절하게 느껴져요.”
“흐음. 분명 시적 감각이 뛰어난 분일 것 같군요.”
‘허허. 철중화의 성격을 알면 절대 저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여자에게 이런 말은 실례일 수도 있겠으나 철중화는 돌이라도 아니, 철이라도 씹어먹을 것만 같은 천생 무인이었다.
이런 시를 써서 붙였다는 것을 보면 분명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곧 명확하게 드러났다.
“아가씨가 이런 속병을 앓고 있었다니! 사랑하는 그분과 이어질 수 있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시에 감명받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소문을 빠르게 퍼져나갔다.
하북팽가나 언호충의 사람들이 미처 벽보를 뜯기 전이었다.
진백천은 시끌시끌해지는 상황에 미소를 지었다.
‘재밌어지네.’
“그럼 우리도 들어가 볼까?”
진백천은 당당하게 진주언가 앞으로 다가갔다.
정도회 회주와 광동성의 성주의 방문은 진주언가로써도 반길 터였다.
진백천이 목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리려는데 갑자기 활짝 열렸다.
그리고 마주친 것은 두 명의 남녀였다.
하얀 경장을 입고 면포로 얼굴을 가린 것은 철중화(鐵重花) 언해원이었고.
그 앞의 거친 인상의 남자는 등 뒤의 거도(巨刀)로 보아 팽중혁이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