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24화
46장 의형제를 얻다
‘허허. 저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군.’
진백천은 마차에서 섣불리 내리지 않았다.
염라혈소(閻羅血笑) 철용.
겉으로만 보면 염라대를 이끄는 장로급의 인물이었지만 단순히 봐서는 안 되었다.
마교의 4호법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것은 절대 실력 탓이 아니었다.
‘약간 아둔한 성격 탓이었지.’
그가 익힌 염라천보권(閻羅千步拳)은 수많은 강호의 명숙을 쓰러뜨렸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똑똑한 인물이었다면 마교의 4호법은 그 구성이 바뀌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진백천은 그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겨도 본전, 지면 죽는 싸움을 누가 하고 싶겠어?’
이미 회귀 전에 여러 차례 그를 다뤄봤던 진백천이었다.
약삭빠른 그이기에 철용은 다른 방식으로 속여넘겼다.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가야 한동안 피곤해지지 않으려나.’
“진백천! 어서 나오거라! 설마 그때의 약속을 어기려는 것은 아니겠지?!”
철용의 권갑에 무지막지한 권강이 맺혔다.
가볍게 떨어낸 기운이 땅이 움푹 패였다.
쿠웅-
금의위들조차 뒤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진백천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생각을 정했다.
마차를 열고 내리자 황대원과 도홍경이 양쪽에 호위처럼 붙어섰다.
“아이고. 철용 선배님 아니십니까! 그동안 어디 있다 나타나신 겁니까? 꽤나 찾았습니다!”
진백천은 마치 오래된 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철용에게 다가갔다.
정작 친근한 환대에 철용이 두 눈을 꿈뻑였다.
“크흠! 그거야 후배가 알 바 아니고. 시간이 되었다! 어서 나와 건곤일척을 나눠보자!”
철용은 진백천이 더 말하기 전에 서둘러 자세를 취했다.
당장에라도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다.
황대원이 당황하며 도끼를 움켜쥐었지만 진백천이 여유롭게 말렸다.
“선배님.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리 정 없이 굴면 되겠습니까? 제가 술을 준비했으니 한잔하시죠?”
“……술?”
철용이 무공을 제외하고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술과…….
“고기도 준비하겠습니다!”
……고기였다.
진백천의 말에 철용이 뒤를 힐끔 쳐다봤다.
대기 중인 염라대의 무인들이었다.
염라대의 무인들 또한 철용을 닮아 어딘가 어리숙했다.
마교내에서도 무공은 뛰어나지만 약간 모자란 이들만 모아놓은 곳이 염라대였다.
마뇌는 이런 이들을 제대로 굴리기 위해서 머리가 좋고 자신의 명을 따르는 자를 붙여놨다.
유난히 날카로운 눈을 가진 자가 철용에게 다급하게 전음을 날렸다.
‘저놈이 이들을 다루기 위해 마뇌가 붙여놓은 놈이겠지.’
-이것 또한 진백천의 술수입니다. 전처럼 장로님을 속여 넘기려는 겁니다.
진백천은 서둘러 도홍경과 황대원에게 눈치를 주며 술과 고기를 준비했다.
다행히 유석경이 가지고 있던 백금아(白錦兒)와 소강주(紹綱酒)가 마차에 한가득 실려 있었다.
큰 멧돼지 한 마리를 통으로 굽기 시작하니 철용의 눈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후배는 참으로 맛있는 술을 가지고 다니는군.”
술을 좋아하는 철용이지만, 그동안 싸구려 탁주나 마셨다.
워낙 대식가이자 애주가였기에 가지고 나왔던 돈을 진즉에 다 쓴 상태였기 때문이다.
-장로님. 속으시면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진백천 회주를 단번에 쳐 죽이고…… 커헉!
진백천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을 튕기며 전음을 날리는 놈의 급소에 맞췄다.
철용이 놀라서 뒤돌아봤지만 급소를 움켜쥔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선배님. 저자들은 제가 알아서 챙겨줄 테니 저와 함께 한잔하시죠. 승부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크흠. 그럴까?”
철용은 의도대로 고기가 구워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진백천은 소강주의 마개를 따고 철용에게 건넸다.
처음이 어렵지 막상 마시기 시작하자 철용은 거침없이 술을 들이켰다.
거기에 돼지의 다리까지 손에 쥐여 주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후배를 만나 내가 호강하는군! 십만대산을 벗어나 이렇게 먹는 것도 오랜만이야!”
“그렇습니까? 제가 자주 모셔야겠군요!”
장로인 철용이 이렇게 먹고 즐기자 염라대의 무인들도 하나둘씩 풀어지며 건네주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날 선 분위기는 순식간에 풀어졌다.
진백천은 철용의 기분이 절정으로 좋아지자 은근슬쩍 준비해놨던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처음 볼 때부터 느꼈지만, 선배님의 인상이 무척이나 익숙합니다. 혹시 고향이 어디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교의 마인들은 보통 십만대산에서 나고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무인이 부족하면 전국 각지의 고아들을 사오거나 납치해 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무골(武骨)이었던 철용은 마교의 인물에 의해 납치당한 대표적인 예였다.
“고향? 후배는 들어도 모를 거야. 절강성의 상산(象山)이라는 곳이지. 바닷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해산물이 아주 맛있지. 어릴 때는 게를 직접 잡아먹기도 했어.”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아련함과 슬픔이 공존했다.
장로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가족을 찾았지만 이미 전부 죽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전부 철용이 납치되던 때 살해당했을 터지만 굳이 마교를 탓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두 번째 고향이 십만대산일 테니까.’
이미 세 번의 회귀 동안 이런 이야기를 철용에게 들었다.
상산에는 철용이 만들어 놓은 가묘가 존재했다.
자신이 죽으면 그곳에 묻히기 위해 직접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만큼 고향에 애착이 강한 인물이야.’
진백천은 과하게 놀라며 철용을 쳐다봤다.
“왜? 후배도 그곳에 가본 적 있나?”
“가본 적 있냐고요? 저희 어머니 고향이 바로 절강성의 상산입니다!”
그의 외침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당소예와 황대원조차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전대 회주였던 진백천의 아버지와 다르게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것과 일찍 병을 얻어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철용은 반쯤 의심에 찬 눈으로 진백천을 쳐다봤다.
“흐음. 설마 나와의 승부를 피하기 위해서 지어내는 거라면…….”
진백천은 재빨리 철용에게 들었던 상산의 풍경을 읊었다.
사계절이 강할 뿐만 아니라 물이 많은 지역이라 봄이 되면 축축히 비가 내렸다.
그만큼 벼농사가 잘 되었고, 해산물이 많아 배곯는 이가 적었다.
“그리고 상산은 특유의 억양을 사용하죠.”
“맞아!”
그 억양을 어색하게나마 따라 하자 철용이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백천을 와락 안았다.
“후배가 내 고향 사람이었다니! 하하하하!”
당소예와 황대원은 놀라서 쳐다봤지만, 곧 안긴 진백천이 입가를 말아 올리자 그럼 그렇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도홍경은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지 눈을 꿈뻑거렸다.
-마교의 장로마저 구워삶는 저 심계라니! 역시 회주님이시다!
-……하아. 형님으로 모시길 잘했어. 뱀이 아니라 이무기가 아닐까 싶다니까.
진백천은 여러 속마음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후배를 만났는데 그냥 보낼 수 없지! 한잔하자고!”
“편하게 동생이라고 하십시오! 저는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좋지! 좋아!”
철용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을 때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헤어지는 사이가 되었다.
“동생. 몸조심하게! 나중에 만나면 그때는 내가 술 한잔 사지!”
“고대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승부를 내지 못해서 어떻게 합니까?”
“승부는 무슨! 의형제 사이에 승부가 무슨 말인가!”
모든 것이 진백천의 의도대로였다.
진백천은 철용에게 가지고 있던 술과 고기를 잔뜩 나눠주었다.
염라혈소(閻羅血笑) 철용을 구워삶은 비용으로는 무척이나 싼 값이었다.
* * *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염라대의 무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야말로 철용을 이용해 진백천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철용이 생각보다 더 멍청해서 작전에 실패했다. 정도회 회주와 의형제라니. 쯧.’
대체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흘러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몇 차례나 철용을 막으려 했지만 어디선가 날아오는 돌멩이는 자신의 혈도를 짚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아침이었고 이 모양이었다.
“장로님! 지금이라도 저자를 제거해야 합니다!”
“의형제를 뒤에서 치라고? 웃기는 소리! 나는 그렇게 못한다!”
“마뇌(魔腦)님의 명입니다!”
방금까지 희희낙락하며 웃던 철용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손이 허공을 휘젓는가 싶더니 무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커헉!”
염라혈소(閻羅血笑) 철용의 염라천보권(閻羅千步拳)이었다.
“나는 마뇌를 따르지 않는다! 내 위에 계신 것은 오롯이 마천영 교주뿐이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무인은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여기서 고집을 세워봤자 날아가는 것은 자신의 목숨뿐이었다.
‘이렇게 일이 꼬이다니. 마뇌님께 보고부터 해야겠군.’
무인은 빠르게 전서구를 날렸다.
그러나 그조차 마뇌가 강호에 들어선 것은 아직 알지 못했다.
* * *
“안 쫓아오지?”
“네.”
“하아. 숙취 때문에 죽겠네.”
진백천은 마차에 앉아서 몸에 남은 주정을 배출했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진백천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무지막지하게 마시는 것은 무리였다.
주정을 날리는 그에게 유석경이 다가왔다.
어제부터 묻고 싶었지만 눈치를 보기만 하던 중이었다.
“백천. 아까 그자는 뭐지?”
“천마신교 장로 염라혈소(閻羅血笑) 철용.”
“그런 자와 의형제를 맺어도 되는 건가?”
“뭐 어때. 그리고 우리 의형님께서 겉보기와 달리 순수하셔서 말이지.”
진백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제 제법 익숙해졌지?”
“움직이는 것 말인가? 물론이지. 이제 안 끼면 어색할 것 같군.”
왜소했던 몸에도 제법 근육이 자리 잡았다.
움직이는 양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먹는 것보다 두 배는 더 먹었기 때문이었다.
“움직일 토대는 만들어졌으니 슬슬 수련해 볼까?”
진백천은 이미 쉴 때마다 틈틈이 진주언가의 언가권(言家拳)을 상대할 권법을 생각했다.
‘강시 같은 움직임은 그 유(流)함이 부족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뻣뻣한 움직임은 꺾이기 마련이야. 대나무처럼 말이야.’
반격의 움직임은 단 한 수만 노리면 되었다.
문제는 그 한 수를 내뻗기 위해 버텨내야 하는 수많은 공격이었다.
진백천은 우선 그것을 버티기 위한 맷집을 유석경에게 심어줄 생각이었다.
“내가 볼 때 너는 보통의 방법으로는 철중화를 뛰어넘는 무공을 갈고 닦을 수 없어.”
“알고 있어.”
진백천은 결코 허언을 떠벌리거나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했다.
유석경 또한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기분 나빠 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좋아. 그러면 내가 하려는 것에 대해 알려줄게.”
“경청하지.”
“격체전력(隔體傳力). 내력이 부족한 너를 위해서 친해 내가 불어 넣어줄 거야. 동시에 몸이 단단해질 수 있도록 타구법(打毆法)으로 몸을 두드릴 거고. 그렇게 하면 철중화의 공격을 몇 번이나 버텨낼 수 있겠지.”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몸에 쌓인 내력을 쏟아낼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몰랐다.
“흐음. 격체전력이라. 나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 매우 경지가 높은 자만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나니까 가능하지.”
“그러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뭐지?”
유석경의 질문에 진백천은 딱 한 마디로 정의했다.
“버텨.”
“그래. 버티지. 그러니까 뭘 해야 하는지 말해줘.”
“그저 버티면 돼.”
“그게 무슨 말이지?”
진백천은 씨익 웃으며 손을 풀었다.
뚜두둑-
거친 뼈 소리처럼 진백천의 몸에서 서서히 내력이 피어올랐다.
“곧 알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