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23화
45장 호수 위의 격전(3)
황대원은 무척이나 고민했다.
진백천이 먼저 정도회로 가 있으라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따르기 힘들었다.
‘호위무사인 내가 회주님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래서 황대원은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설수련을 비롯한 당소예와 아영을 먼저 정도회로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당소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 무사님이 이곳에 남는다면 저도 남을래요.”
“당 소저. 호위 때문에 그렇다면 걱정 마십시오. 이미 정도회의 무사들을 요청한 상황입니다.”
“제가 그런 것 때문에 남는 줄 아세요? 저도 회주님의 시녀라고요. 이대로 혼자 정도회로 떠날 수 없어요. 같이 떠나온 이상 같이 들어갈 거예요!”
당소예의 고집은 대단했다.
황대원이 몇 번이나 더 말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후우. 역시 회주님의 시녀 아니랄까 봐.’
하지만 주변의 아영이나 설수련이 보기에는 황대원도 마찬가지였다.
진백천과 함께 오래 돌아다닌 세 명은 알게 모르게 서로 닮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기 전에 정도회의 무사들이 응현에 도착했다.
진백천을 의식해서인지 일행을 데리러 온 것은 천군지사대와 마찬가지로 정도회의 무력대대 중 하나인 응풍검대였다.
그들이라면 충분히 이들의 안전을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소예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피웠다.
“후우. 그러면 알겠습니다. 당 소저는 저와 함께 며칠 더 있으시죠.”
대신 아영을 비롯해 설수련은 무사들과 함께 정도회로 향했다.
먼저 도착할 검왕을 생각해서라도 이곳에 머무는 것은 옳지 않았다.
아영도 나지막이 남겠다고 꿍얼거렸지만 당소예와 황대원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 정도회에서 뵙겠습니다.”
설수련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영은 한참이나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의외인 것은 도홍경이었다.
진백천이 사라지고 바로 갈 줄 알았던 그는 끝까지 자리에 남았다.
다리의 부상 때문이라고는 하나 겨우 그런 것 때문은 아니란 걸 눈치껏 알 수 있었다.
“크흠. 형님이 갑자기 일을 보러 가셨는데 동생이 그냥 갈 수야 있겠습니까.”
“자네 생각보다 의리가 있군.”
“형님과 누님은 막내인 제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 말에 왠지 당소예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까지도 도홍경이 누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크흠. 그건 그렇고 이젠 어떻게 해요? 무작정 기다리기도 그렇잖아요.”
“회주님과 함께 사라진 유석경 성주의 금의위들이 대기 중입니다. 그들과 잠시 지암정에서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그들이 아는 진백천이라면 괴물 뱃속에 들어갔다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빠져나올 인물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은 꼬박 호수를 돌아다녔다.
말이 호수이지, 그 둘레를 도는 것만으로도 꼬박 일주야가 걸릴 만큼 커다랬다.
또한 호수에 안개가 잔뜩 껴서 그 안을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후우. 제 발만 괜찮아도 안을 돌아볼 텐데 아쉽습니다.”
“저 호수를 배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고?”
“물론이죠. 제가 이래 봬도 모산의 도사입니다.”
당소예가 못 미더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도홍경이 움찔했다.
“험험. 그러면 저는 호수나 살피겠습니다.”
그리고 개안부(開眼符)를 붙인 뒤 지암정(池巖亭)에 앉아서 호수를 쳐다봤다.
정말로 호수 안이 보이는지 어쩐지 몰라도 이리저리 살피긴 했다.
“호수 안쪽에 작은 섬이 있긴 하네요.”
“섬? 그곳에 회주님이 계셔?”
“누가 살 만큼 큰 섬은 아닙니다. 작아요.”
당소예는 곧 그에게 관심을 잃고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여전히 얼마 전 있었던 괴물의 납치 사건에 관한 이야기 중이었다.
몇몇은 호수에 사는 수호신의 짓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불을 내뿜는 것까지 봤잖아. 진짜 괴물이었다고.”
“그거야 모르지. 겨우 불을 내뿜는 것 정도로 뭘.”
“그럼 자네. 이번에 납치된 자들 중에 광동성의 성주와 정도회의 회주가 있다는 사실은 아나?”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그 안줏거리로 진백천과 유석경에 대해 떠들어댔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돌아올 리 없다는 말을 듣고 있자니 서서히 열불이 치솟았다.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황대원이 당소예의 팔을 붙잡았다.
“당 소저 참으십시오. 호사가들이야 항상 저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황 무사님은 화도 나지 않으세요?”
“화야 나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회주님은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시니까요.”
“칫.”
당소예는 황대원의 말을 듣다 보니 화가 가라앉았다.
약 오르는 건 이 시간에도 왠지 진백천은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분명 시시덕거리고 계시겠지.’
“회주님 나타나면 잔소리해 줄 거예요.”
황대원은 그저 씨익 웃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날따라 호수에 안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도홍경이 말한 대로 호수의 정중앙에는 작은 섬이 있었다.
“호오. 저 섬, 뭔가 특이한데요?”
“특이하다고?”
도홍경은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작은 배가 메여 있습니다. 분명 사람이 사는 것 같진 않은데 말이죠.”
“안 보인다고 거짓말하지 마.”
“에헤. 모산파 도사는 거짓말 안 합니다.”
그때였다.
도홍경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입을 떡 벌렸다.
“어어어?!”
“왜 그래?”
“형님입니다! 유석경 성주님과 땅을 파고 나왔습니다.”
“자네 그게 무슨 말이지?”
도홍경의 말은 금의위들에게까지 흘러갔다.
그들은 다급하게 다가와 물었다.
“형님과 성주님이 배를 타고 이쪽으로…… 허어.”
도홍경은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중계 비슷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집중해서 들었다.
“왜 또 그래?”
“또 다른 배입니다. 그 괴물을 닮은 배입니다.”
“저, 정말이다! 저기 봐!”
괴물의 머리는 멀리서도 명확하게 보였다.
술을 마시고 있던 몇몇 자들도 그것을 발견하고 소란스러워졌다.
“도홍경! 저 괴물은 뭐야! 빨리 말해봐!”
당소예의 재촉에 도홍경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어! 지금 형님이 전투 중이십니다! 괴물같이 생긴 배에서 나온 여자랑 싸우고 있어요. 그런데 저 여자 보통이 아닌데요? 허어. 가진바 내력이 엄청난 듯 보입니다.”
배는 빠르게 내륙을 향해 다가왔다.
사람들은 점차 드러나는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이 괴물이니, 수호신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철판을 덧댄 배에 수어피(水魚皮)를 뒤집어쓴 가짜였다.
“당장 회주님을 도우러 가야 한다!”
황대원은 조각배라도 띄우려 했지만 도홍경이 그를 말렸다.
“잠시만요. 형님이 곧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홍경은 도복편왕을 처리할 때의 진백천의 진면목을 지켜봤었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해도 진백천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도홍경의 말은 곧 사실이 되었다.
진백천이 괴물의 목을 밟고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 여자를 떨쳐냈다.
재차 휘둘러진 거친 강기는 괴물의 머리를 박살 내며 배마저 함몰시켰다.
콰아아아앙!
그 충격으로 물이 사방에 튀며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진백천은 어느새 유석경이 있는 배로 올라탄 상태였다.
조금 전의 물보라 탓인지 호수 위로 찬란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대박.”
잠시 어벙하게 서 있던 사람들은 절로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사람들을 납치해가던 괴물이 박살 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놀람은 내륙에 올라선 진백천을 보고 더 심해졌다.
몇몇 사람들이 진백천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저분은 정도회의 회주님이시잖아! 저번에 내가 본 적이 있다고!”
“회주님이 사람들을 납치해가는 괴물을 퇴치하신 건가? 그렇다면 말이 되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진백천은 꼼짝없이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혀 버렸다.
뭔가의 대답을 바라는 듯한 사람들의 눈초리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호수에서 괴물처럼 사람들을 납치하던 것은 십대악인 중 하나인 흡정마녀 이화란이었습니다.”
“허억! 흡정마녀?! 들어본 적 있어! 젊은 남자의 정기만을 빼간다는 악녀잖아!”
“그런 자가 호수에 숨어 있었다니!”
십대악인이라면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진 이들이었다.
악인곡(惡人曲)에 갇히지 않은 이들 중에서는 제일 유명한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함께 빠져나온 유석경의 증언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광동성의 성주가 함께 빠져나왔는데 감히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성주님! 말씀하신 시체를 건져 올렸습니다!”
금의위 중 하나가 눈치 빠르게 호수에 빠져 있던 이화란의 사체를 건져 올렸다.
정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이화란의 사체는 백발의 노파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기괴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피했다.
하지만 십대악인에 대한 이야기는 곧 이어지는 유석경의 말에 묻혔다.
“저 섬 아래에는 전대 황조의 보물이 묻혀 있다. 그러니 서둘러 황실에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하라.”
“……네! 성주님!”
다름 아닌 갑자기 사라진 전대 황조의 유물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보물 이야기에도 항상 등장하는 것이 전대 황조였다.
관과 무림 둘 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창을 비롯해 수백의 금의위들이 호수에 몰려들었다.
황궁에서는 한창 쉬고 있어야 할 사례태감이 화려한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것이 불과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표기장군! 엄청난 일을 해냈군! 전 황조의 보물이라니!”
사례감은 황궁에 있을 때보다 더 크게 웃으며 진백천을 반겼다.
오죽하면 손수 마차에서 내려와 그를 껴안을 정도였다.
진백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반겼다.
사례감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입가를 살짝 가리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전대 황조의 유물이 맞나?”
“맞을 겁니다. 함께 있던 석경이 확인해 줬을 뿐만 아니라. 정 황조의 마지막 황제의 사체도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사례감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게 가지고 있던 일말의 의심도 파헤쳐진 섬에서 유물이 발견되며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정 황조의 문양이 새겨진 무기와 갑옷, 그리고 수많은 유물은 가짜로 만들어낼 수 있을 리 없는 것들이었다.
더구나 썩지 않은 정 황조의 사체는 철저히 가려져서 금의위들에 의해 운반이 되었다.
그리고 진백천조차 몰랐지만 침실 더 아래쪽에는 금은보화로 가득한 석굴이 발견되었다.
진백천을 바라보는 사례감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표기장군이 과연 황실의 복이로군! 복이야!”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진백천에게 상을 내리겠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정작 진백천은 그 상이 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후우. 그래 봤자 보물이나 쓸데없는 관직이겠지.”
그런 모습을 보고 황대원은 재차 감탄했다.
“과연 회주님이십니다! 남들은 평생의 가보로 생각할 일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시다니!”
“강호의 앞날이 풍전등화인데 보물 몇 개가 대수겠어? 기가 막힌 술이면 몰라도…….”
황대원은 굳이 들은 뒷말은 뇌리에서 지우며 진백천에 대한 충성심을 가득 쌓았다.
며칠이 더 지나자 진백천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본격적으로 발굴이 되면서 그것을 구경하는 이들로 인산인해였다.
원체 사람들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성향상 진백천은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지?”
“어디로 가시려고요?”
원래대로라면 하남의 소림사를 들렀다 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아영과 설수련을 정도회로 보냈으니 조금 더 여유롭게 움직여도 되었다.
“하남으로 가기 전에 진주언가나 들려볼까?”
“진주언가요?”
갑작스러운 목적지에 당소예와 황대원이 의문을 가졌다.
“진주언가도 명문세가이니 가기 전에 얼굴을 비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구파일방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이 지역에서는 힘 좀 쓰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유석경이 철중화와 약속한 1년이 다 차가는 것을 보면 진주언가의 정혼남 모집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석경에게 무공을 가르치면서 이동하면 시간은 얼추 맞을 것으로 보였다.
‘어차피 하남으로 넘어가는 그 중간에 진주언가가 있으니까.’
목적지가 정해지자 움직이는 것은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른 때와 다르게 성주인 유석경이 있다 보니 따로 준비할 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던 유석경은 갇혀 있던 때보다 더 수척해져서 나타났다.
꽤나 장한 것은 그런 와중에도 몸에 착용한 쇠고리는 절대 풀지 않은 것이다.
“후우. 뭐가 그렇게 물을 게 많은지.”
진백천과 유석경은 곧바로 마차를 타고 응현을 벗어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주야가 지났다! 후배는 어서 나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겨뤄보자!”
“건곤일척?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축 늘어져서 쉬고 있던 진백천은 창문 밖을 슬쩍 내다봤다.
날카로운 권갑에 붉은 머릿결의 멧돼지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염라혈소(閻羅血笑) 철용!’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