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회귀백서 121화
45장 호수 위의 격전(1)
“그래? 그러면 한번 누가 죽나 해볼까? 네놈이 아무 빠르다고 해도 이걸 피할 수 있을까?”
참다못한 진백천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유석경이 그를 멈춰 세웠다.
그 모습을 보고 이청이 더욱더 의기양양해졌다.
“네놈들 지금까지 나를 우습게 봤지? 오물이나 치우고 무시만 당한다고 말이야!”
“뭔 개소리냐.”
“닥쳐! 네놈들도 겉으로는 아닌척해도 나를 무시했잖아!”
한번 터져 나오자 자격지심에 절여 있던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쏟아져나왔다.
진백천과 유석경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대체 네놈들보다 부족한 게 뭔데! 나는 위령세가의 소가주다! 밖에 나가면 나도 손끝 하나 꿈쩍이지 않고 살아왔다고!”
어느덧 그의 혼잣말은 진백천과 유석경이 아닌 다른 이들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쏠 거야 말 거야?”
“아직까지도 내가 우습게 보이지? 네놈들 목숨은 내가 쥐고 있다!”
“잠깐. 이봐. 이청. 진정하게. 우리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어.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서로 힘을 합쳐 나가야 하지 않겠나?”
지극히 이성적인 유석경의 말이었지만 그런 말 따위 유석경에게 통할 리 없었다.
오히려 지긋지긋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비웃었다.
“이성을 따진다고? 그거야 내가 3년 동안 똥을 치우기 전이고! 이제부터는 내가 왕이야! 알겠어? 죽기 싫으면 다들 내 말을 들어!”
유석경과 진백천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이청의 기가 살았다.
자신이 든 천자비통에 위축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말이 없지? 어서 무릎이라도 꿇어라!”
“멍청한 놈. 그 무기가 제대로 작동할 거라 생각하는 거냐?”
“뭐?”
진백천의 말에 이청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해 봐라. 100년이 훌쩍 지난 물건이야. 독에 우모침이 전부 녹아버렸을걸?”
“……그럴 리가 없다!”
당당한 말투와 다르게 이미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청이 무기를 들고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자 진백천이 선심 쓰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해 주지.”
“……나, 나를 속이려고 하는 거지?”
“싫으면 뭐. 쏴보고 두들겨 맞던지.”
진백천이 팔을 걷으며 말하자 이청이 화들짝 놀라며 천자비통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오락가락하는 모습에 유석경이 혀를 찼다.
진백천은 천자비통을 들어 올렸다.
‘사용 방법이 오른쪽으로 돌리라는 거였지?’
바로 옆에 있는 갑옷을 향하고 끝부분을 돌렸다.
철컥-
그러자 폭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독침이 쏟아졌다.
흠집 하나 없던 강철의 갑옷에 우모침이 박히며 고물처럼 우그러졌다.
만약 진백천이라도 이 천자비통을 바로 앞에서 맞았더라면 꽤나 타격을 입었을 위력이었다.
“호오. 엄청난데?”
이청은 망가진 갑옷을 보며 입을 떠억 하고 벌렸다.
그리고 재빨리 다른 천자비통을 찾으려 하지만 그거 하나뿐이었다.
“너, 너 분명 고장 났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그렇고 혼은 나야겠지?”
“……그, 그게……!”
진백천은 이청의 멱살을 잡고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내력 없는 주먹이라고 해도 입고 있던 갑옷이 일그러지며 벽에 처박혔다.
쿠우웅!
“커헉!”
입가에서 피를 토해내는 게 내상을 입은 듯 보였다.
만약 갑옷이 없었다면 진즉 죽었을 상처였다.
“살, 살려주십시오. 밖에 나이든 노모가 계십니다!”
“너 잘사는 세가의 자식이라며?”
이청은 눈물을 쏟아내며 또다시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진백천이 재차 주먹을 뻗으려는데 뒤편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거기 있구나!”
목소리는 벽 뒤에서 들려왔다.
콰아아앙!
이화란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벽을 향해 공력을 쏟아부었다.
진백천은 유석경을 뒤로 물리며 혹시 모를 사태에 경계했다.
하지만 벽은 희뿌연 먼지를 뿜어낼 뿐 부서지지는 않았다.
“그 더러운 오물길이 이곳으로 붙어 있었구나! 당장 네놈들을 찾아 살을 찢어먹고 골수를 뽑아 마실 테다아아아!”
“주, 죽고 싶지 않아아!”
이청은 그 틈을 타 재빨리 안쪽으로 도망갔다.
그 살기 어린 목소리에 하얗게 질린 유석경과 달리 진백천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어차피 이 벽을 뚫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았다.
‘혹시 오물길로 내려온다 해도 혼자서는 물줄기를 통해 올 수도 없어.’
“이놈들 대답해라! 어서 모습을 드러내!”
진백천은 이화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물러섰다.
그저 유석경을 끌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청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사, 살려주십시오!”
이청은 불빛 하나 없는 공간에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오죽하면 진백천이 나타나자 그의 뒤로 몸을 숨겼다.
“저, 저기에 누군가 있습니다!”
“알았으니까 당장 떨어져.”
진백천은 그를 밀쳐냈다.
“석경. 이놈이 또 이상한 짓 하면 봐주지 말고 바로 목을 꺾어버려.”
“그러지.”
진백천은 주변을 둘러보다 떨어져 있는 횃대를 발견했다.
내공을 이용해 그 끝에 불을 피우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이청이 보고 놀란 듯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흐음. 이건 또 뭐지?”
살아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전부 백골이 되어 죽을 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굴에 쓴 가면이 특이했다.
“……원숭이?”
진백천이 비쳐 보이는 자는 몸을 굽히고 네발로 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자들 또한 하나같이 동물의 가면을 쓴 상태였다.
“전부 다 동물을 흉내 내는 건가?”
“그렇군. 이자는 양 가면을 쓰고 있어.”
“이, 이자는 토끼 가면입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총 6명이었다.
원숭이와 토끼, 양, 말, 소, 닭이었다.
진백천은 이들을 보고 대충 정체를 알아차렸다.
“십이지괴(十二支怪)인가?”
“십이지괴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어. 12마리 동물을 흉내 낸 괴이한 자들 맞지? 지금은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맞아. 실제로는 무림방파였는데 사파로 낙인을 찍히고 나서는 남만야수궁에 흡수되었지.”
진백천 또한 자세히는 모르고 듣기만 했을 뿐이었다.
한때 강호를 주름잡았다고 하더니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런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복장도 전부 검은 옷을 입은 것을 보면 좋은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니야.”
그들의 몸은 하나둘씩 어딘가 뭉개진 상태였다.
양가면을 쓴 놈은 가슴뼈가 박살 나 있고, 닭가면은 목이 꺾여 있었다.
분명 그것이 이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상처들일 터였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이 가면뿐이네.”
진백천은 원숭이 가면을 벗겨서 살폈다.
두 눈이 퀭한 백골은 작은 충격에도 무너지며 가루가 되었다.
“푸우. 괜히 건드렸네.”
진백천은 가면을 품속에 넣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백천. 뒤에 시체가 더 있어.”
유석경의 말대로였다.
적어도 수십 구로 보이는 백골이 널브러져 있었다.
십이지괴는 아니고 갑옷을 입은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십이지괴와 싸웠던 이들로 보였다.
그런 사체들이 죽어가면서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문이었다.
문에는 정 황조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평범한 장소는 아닌 거 같은데?”
“십이지괴가 저 안으로 들어가려 한 건가?”
진백천은 문을 열려다 멈춰섰다.
괜히 자신이 모르는 기관진식이라도 발동되면 골치 아팠다.
“이청. 문 열어.”
“……제가 말입니까?”
이청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비명을 지르는 듯한 거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열린 문의 안쪽은 지독한 어둠 속이었다.
진백천은 사방에 놓인 횃대를 여러 개 더 주워서 불을 붙였다.
방 안이 곧 밝아지며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하군!”
방 안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관리되지 않았음에도 화려했다.
황금실로 수놓은 비단과 잘 끼워 맞춰진 대리석 바닥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방 안에는 뒤돌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사체 한 구가 전부였다.
“이곳에 나가는 길이 있어야 할 텐데.”
진백천은 주변을 둘러보며 나갈 탈출구를 살폈다.
보물이 아무리 많아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진백천과 다르게 이청은 주변의 보물을 되는대로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이내 가부좌를 튼 남자에게까지 다가갔다.
머리를 묶은 황금을 빼내려던 그는 뭔가를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뒤로 넘어졌다.
“허어억! 사, 살아 있다! 살아 있어! 죄,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이놈들이 끌고 와서……!”
이청은 횡설수설하며 뒤로 물러났다.
‘살아 있다고?’
그런 것 치고는 온몸에 내려앉은 먼지가 너무 많았다.
가까이서 보니 놀랍게도 남자의 얼굴은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였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차가운 피부는 죽은 지 오래된 사체였다.
‘단지 부패가 되지 않았을 뿐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이청은 계속해서 고개를 박고 용서를 빌었다.
“용, 용서해 주세요! 이곳에서 나가겠습니다!”
“……흐음. 시끄러워. 이자는 이미 속이 텅텅 빈 사체이니까.”
“백천. 그게 무슨 말이야?”
겉은 멀쩡해 보여도 몸 안은 이미 바싹 마른 상태였다.
진백천의 설명을 듣고 유석경이 화들짝 놀랐다.
“……강시 같은 건가?”
“그건 아니야. 쉽게 말하면 이자를 죽인 독이나 뭔가가 방부제 역할을 한 거지.”
“독?”
“맞아. 혹시 모르니까 가까이 다가가지 마.”
진백천은 사체를 살피다 바닥에 적힌 것을 발견했다.
남자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대리석의 바닥에 손가락으로 새겨넣은 것이었다.
이청과 유석경은 그 내용을 궁금해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독이 있다는 진백천의 말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도 이런 내력이었다니. 상당한 고수였나 보군.”
[나는 십이지괴의 독에 당해 몸이 굳어가는 중이다. 짐승보다 못한 그들을 믿은 나의 허술함 탓이다. 아니면 정 황조의 1,000년 역사를 이끌 무공을 만들려는 나의 욕심을 탓한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
‘무공을 만들려고 했다고?’
[……그들은 무공을 만들면서도 언제든 나를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무공이 만들어지자 나를 비롯해 무인들에게 독을 먹였다. 그들 중 6인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6명의 십이지괴가 만들어낸 무공을 훔쳐갔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간 것은 십이용천공(十二龍天功)은 초반부의 6초식일 뿐. 후반부의 6초식은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결국 대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십이용천공(十二龍天功)이라.’
이런 자가 최강이라 말할 정도면 분명 평범하지 않은 무공이었다.
[……이곳을 찾는 자는 분명 정 황조의 뒤를 잇는 자일 터. 탈출구로 통하는 천장의 구멍을 찾아 그곳에 숨겨둔 십이용천공의 후반부를 취하라. 그리고 부디 나의 복수와 정 황조를 이끌어주길.]
그것으로 글은 끝이 났다.
‘쯧. 아쉽지만 정 황조가 끊어진 지 오래야.”
진백천은 방금 읽은 내용을 유석경에게도 설명했다.
그러자 정 황조와 연관이 있던 그는 놀라면서도 예를 차렸다.
“이자가 정 황조의 마지막 황제였다니.”
“결국 인생무상이야. 그치?”
진백천은 혀를 차며 숨겨둔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황제의 말이 맞다면 천장에 밖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 터였다.
천장에는 별자리를 상징하는 천문도(天文圖)가 새겨져 있었다.
그중에 북극성을 상징하는 별이 가장 중앙에 위치했다.
진백천은 그 옆으로 살짝 틈이 난 것을 발견했다.
“저긴가?”
원래대로라면 잘 안 보였을 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살짝 벌어진 틈새였다.
독고구검으로 쿡 찌르자 돌이 옆으로 밀리며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이곳이 밖으로 향하는 탈출구일 거야.”
“대, 대단하십니다!”
이청이 보물을 가득 넣어 뚱뚱해진 몸으로 소리쳤다.
진백천은 보면 볼수록 한심한 놈의 모습에 혀를 찼다.
“대체 너는 어디까지 추해지려고 그러냐?”
“……3년 동안 고생한 값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백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통로 안쪽을 들여다봤다.
어두운 통로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분다는 건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책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십이용천공의 후반부가 담긴 무공비급이었다.
그것을 품속에 넣자 이청이 탐욕스런 눈으로 힐끗거렸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없으니 빨리 나가자.”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기어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진백천은 가장 앞장서서 기어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빛이 들어오는 조그만 틈이 보였다.
‘벌써 탈출구일 리가 없는데?’
틈 아래로 보이는 공간은 진백천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바로 오물 통로가 보이는 욕탕이었다.
그곳 앞에서 이화란은 계속해서 내려갈까 말까 고민 중이었다.
“……아래쪽에 이화란이 있으니까 조심해서 따라와.”
그의 말에 유석경과 이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날카로운 금속음이 통로를 울렸다.
까앙-
화들짝 놀란 진백천과 유석경이 뒤돌아보자 떨어진 금잔을 주워든 이청과 눈이 마주쳤다.
“……저 그, 그게…….”
‘소리가 작아서 흡정마녀가 듣지 못…….’
“거기 있구나!”
할 리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이청의 뒤쪽이 터져나가며 통로가 드러났다.
“허어억! 사, 살려……!”
“닥쳐!”
진백천은 곧바로 장을 뻗어 이청을 통로 밖으로 밀어버렸다.
밀고 들어오려던 이화란과 한데 섞여 아래로 떨어졌다.
“서둘러!”
진백천은 그 틈에 유석경을 끌고 빠르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