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120화 (120/346)

제120화 부활 (終)

“여기가 온천입니까? 예?”

아주 돈이 많아 보이는 일행이었다.

주렁주렁 짐들이 실린 짐마차도 물론이거니와, 옷차림새만을 봐도 그랬다.

하다못해 가신으로 보이는 청년까지 말도 못 할 정도로 비싼 가죽신을 신었다.

짐을 보면 분명 먼 거리를 여행했을 텐데,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말끔한 차림새는 그들이 지닌 재력을 여실히 드러내고도 남았다.

“입이 똑바로 붙어 계신다면 어디 답을 좀 하시지요, 소야. 제가 온천에 간다고 신이 나서 짐을 꾸렸던 것을 생각하면…… 우어, 대체 온천이 무슨 놈의 산꼭대기에 있습니까!”

가신의 이름은 필량호.

그가 모시는 도련님의 이름은 용천휘였다.

“아아…… 온천은 거짓말이었어.”

“아니, 이제서 거짓말이라고 그리 당당히 말씀하시면 속은 저는 뭐가 됩니까?”

용천휘가 눈을 깜박였다.

백일몽처럼 나른한 그 움직임은 햇살 아래 드러나는 관옥 같은 생김새와 어우러져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을 던졌다.

“몰랐다는 게 더 수상하네. 네 숙부는 내가 온천에 간다고 하면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아채던데.”

필량호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언제 적 삼좌위 얘기를 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제가 삼좌위입니다!”

그는 필목현의 질자였다.

내내 곁을 비워 두던 용천휘는 결국 그를 삼좌위로 들였다.

대대로 삼좌위에게 하사되는 축시와 축지의 권능을 다루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반대가 있었지만, 애초에 용천휘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유능한 삼좌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 분수에 넘는 자리를 차지한 삼좌위지.”

필량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익, 소야! 계속 그리 말씀하실 겁니까? 그럼 저 그만둘 겁니다!”

“그래. 다른 이십좌우위들이 아주 기뻐하겠군. 네 자리를 노리는 것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필량호가 싹 표정을 바꾸었다.

“생각해 보니 삼림욕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산이야 오를 땐 힘들지언정 다 오르고 나면 세상 다시 없을 감격이 아니겠습니까. 자, 가십시다. 어이, 너희들도 어서 움직여라. 이러다 해가 다 지겠다.”

아닌 게 아니라 산세가 유독 험하기는 했다.

이곳은 섬서에서도 가파르고 험준하기로 이름 높은 종남산이었으므로.

* * *

“아이고, 아이고오! 아이고, 작은 사형!”

산을 오른 보람이 있었다.

용천휘 일행은 눈물 콧물이 어우러진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무공 실력은 아직 어림없지만, 순전히 연륜과 경력으로 장로의 자리에 오른 구악은 지객당을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 놓았다.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요! 흐헝, 진짜. 자주 좀 오시지 않으시고요! 이리 한 번 보기가 힘들어서 어쩝니까요.”

용천휘가 구악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그저 하는 말이었지만 구악이 내온 차가 입맛에 안 맞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요새는 사정이 좀 어때? 쓸 만한 제자는 많이 들어왔나?”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입문하겠다는 놈들은 지금도 줄을 서 있습니다만 개중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들은 가뭄에 콩 나는 식인지라…… 아니, 그런데 장문께서는 도통 제자 고르는 일엔 관심을 안 두시지 뭡니까. 그냥 오는 대로 다 받으라고만 하시고…… 에휴. 대체 구파일방 어디가 그렇게 입문 인심이 후하답니까. 마땅히 근골과 자질을 따져 사람을 가려야지요.”

그러고 신세 한탄이 줄줄 이어졌다.

얼마 전까지 근골이 좋은 제자를 구하겠다며 하산도 종종 하던 지강백은 이젠 좀 게을러졌다.

개울가 옆의 작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러다 홀로 산 정상에 오르는 일도 많았다.

작은 집에 살기 시작한 그의 정혼녀가 말하기에는 그곳이 구검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 그렇다고 했다.

“정혼녀라니…… 아직도 혼인을 안 했어?”

“그게…… 아, 나 참.”

또 뭔지 모를 한탄이 주르륵 이어졌다.

몇 번을 묻고 또 물어도 혼인 이전의 시간을 더 오래 갖고 싶다는, 도통 이해 못 할 말이나 늘어놓는다 했다.

장문인이 아직 성혼도 아니 했으면 남들 보기에도 좀 그렇지 않냐는 구악의 하소연에 용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애도 빨리 낳아야 하고.”

“아, 암요! 암요 그렇지요!”

“정혼녀가 병이 있었다 하지 않았나?”

“아이고, 아닙니다요. 그런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시지요. 그러니 여인의 몸으로 혼자 이런 산 생활도 잘하고 계신 게 아닙니까요.”

“부잣집 외동딸이라고 안 했어? 그 집에서는 뭐라고 안 해?”

그 말에는 구악이 눈을 흘겼다.

“뭐라고 하긴요?”

“매파가 오간 것도 아니라며. 부모 입장에서는 귀한 딸이 외딴 산골짜기에 혼자 머문다 하면 꺼려 할 것도 같은데.”

“꺼리긴요, 그 무슨! 혼인 상대가 무려! 무려 우리 장문이신데! 중원 천지 어떤 집에서 이런 분을 마다한답니까요!”

“아아. 그래.”

용천휘가 습관적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려다가 아차 싶던지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사형은 어디 있지? 왜 이리 안 나타나? 이 몸이 멀리서 왔는데.”

“아이고, 그게 잠시만…… 이리도 기별이 안 닿는 걸 보면 또 산꼭대기에 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요. 정혼녀댁이라면 벌써 오셨을 텐데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요, 작은 사형. 차라도 다시 올릴까요?”

“아니, 됐어.”

용천휘가 도톰한 손님용 방석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곳저곳에서 하도 손님이 자주 오다 보니 종남파에 이런 것도 생겨났다.

“내가 찾아가지.”

“음? 산꼭대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아, 예. 그럼 다녀오십쇼. 오실 땐 두 분이 함께이시지요?”

“아마도.”

구악이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럼 저녁거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요. 작은 사형께서는 혹시 뭐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응?”

아차 하는 사이에 용천휘가 사라져 있었다.

“허허…….”

한숨은 구악을 대신해서 필량호가 내쉬었다.

“산이라 하니 길이 연결된 모양입니다. 너무 놀라지 마시지요.”

“으음?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요?”

“그런 게 있습니다. 하아…… 저는 어쩌다 저런 분을 모시게 된 건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구악은 제 본분을 잊지 않았다.

즉시 눈을 짝 찢어 필량호를 타박했던 것이다.

“아니, 가신이 어찌 말씀을 그리 함부로 하십니까요? 입을 조심하시지요. 종남의 산문입니다. 용 사형은 저희 장문의 사제 되시고요.”

필량호가 입술을 비죽댔다.

“아니, 뭐 어디 그쪽하고만 연이 있나. 우리는 교주인 것을…….”

“지금 뭐라셨습니까요?”

“아니, 됐습니다. 그나저나 저녁 찬은 뭘 하실 작정이십니까? 아시다시피 저희 도련님께서는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요.”

“허허…… 음식은 재료보다 정성이지요.”

“그런 말이 통할 도련님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모릅니다!”

구악은 자꾸만 용천휘의 험담을 하려고 드는 필량호를 한껏 째려봐 주고 지객당을 나섰다.

“에이, 저런 인간을 가신이라고…… 쯧쯧. 교주면 뭐하나. 우리 작은 사형의 삶도 퍽 고달프겠네.”

그래도 입맛이 까다롭다는 점은 걱정스러웠다.

아무래도 저녁 식단은 부잣집 외동 따님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 듯했다.

그녀는 현명하고 반듯하며 우아하고 교양 넘치는 데다 지강백을 끔찍이 위하는 사람이었으니 반드시 좋은 저녁거리를 찾아 줄 터였다.

* * *

우르릉, 쿵!

용천휘는 거대한 소음을 들었다.

꼭 용트림 같은 소리라 생각하며 그가 어깨를 흠칫했다.

“하…… 제기랄.”

이어서 지강백의 나지막한 욕설이 들려왔다.

방향을 가늠한 용천휘가 지강백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형.”

“……사람 좀 그만 놀라게 해라.”

불쑥 나타난 용천휘에게 지강백이 싫은 소리를 했다.

“놀라지도 않았으면서.”

용천휘가 지강백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바위 옆에 걸터앉았다.

까마득한 만장애(萬丈崖)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바위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게 만들었다.

정작 바람만 불어도 흔들대는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태연한 것과는 별개로.

“그래서, 구검은?”

지강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졌다.”

졌다는 말처럼 신색이 별로였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었고 입가는 파리했다.

대체 어떤 무위를 지닌 자가 지강백을 저 꼴로 만들었는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쯧쯧…… 대체 상대가 누구였는데?”

이어지는 답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용.”

“……아, 그래. 그럼 살아남은 게 용하네.”

구검은 머릿속에서 구현되는 가상의 비무였지만, 구검의 경지가 깊어질수록 현실과 가상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강백의 지금 몰골은 그의 구검이 거의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는 방증이었다.

“한 마리라면 괜찮았을 텐데…….”

“뭐?”

용천휘가 인상을 썼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 다른 한 마리가 더 나타나서…….”

다시 떠올려도 아찔한 모양인지 지강백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털었다.

“위험했다.”

“……아아. 그래. 그랬군.”

용천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로, 그에게 용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안 되겠다고.

“너는 무슨 일로 왔나?”

용천휘가 느긋하게 자세를 늦추며 대꾸했다.

“내가 뭐 일이 있어야 오나. 그냥 안부차 왔지.”

“웃기는 소리. 그저 안부를 묻기 위해서는 너무 먼 거리다.”

용천휘가 피식 웃었다.

“가끔 그러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지강백의 땀을 식혔다.

방금 전 아찔했던 순간의 긴장감과 패배감도 그렇게 식었다.

“그래도 멀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무뚝뚝한 말투에 용천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한테만 이러겠지. 정혼녀한테는 좀 다정하겠지.”

“갑자기 왜 말을 돌리나.”

“사형이 아직 혼인을 못 올리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그게 혹시 너무 정떨어지는 말투 때문이 아닌가 해서.”

“네가 걱정할 거 없다.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애는 좀 빨리 낳지 그래?”

“애는 무슨…… 앞서가지 마라.”

“설마 이제껏 손만 잡아 본 건 아니겠지.”

지강백이 벌떡 일어섰다.

“내려가자.”

“어라? 반응이 수상한데. 그럼 아니야?”

“내려가자니까.”

지강백이 훌쩍 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놀랄 것도 없이 튀어나온 바위를 가볍게 밟은 그가 벌써 저 절벽 아래로 내려섰다.

“난 가겠다.”

“나 참. 수줍어하기는.”

슷.

다음 순간 용천휘는 지강백의 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지강백은 용천휘가 집요하게 어젯밤 일을 캐물으려 들까 걱정이 됐던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대천혈성이 남긴 진을 옮기는 일은 어떻게 되고 있나?”

“으음…… 사형은 이제 놀리는 재미가 덜해졌군. 역공이라니. 그것도 제법 빠른데.”

“네 힘으로는 안 되나?”

“게다가 제법 아프기까지.”

용천휘가 표정을 바꿨다.

“사실 그래서 왔어.”

“…….”

그 표정이 지강백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지강백은 용천휘가 저런 표정을 지을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진이 움직여.”

“……그건 무슨 뜻이지?”

“수라안을 물려받기 위한 진은 한 대에 한 번씩, 천신의 그림자가 탄생하면 저절로 발동이 돼. 그림자는 그것을 느끼고 진을 찾아가게 되어 있어. 진이 발동하는 장소는 제각각이야. 중원 땅이라는 것만 빼고.”

“그런데?”

“진을 옮기려면 진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지. 그래서 가능한 많은 곳을 다녀봤어.”

그간 천산 전부를 뒤졌다.

그래도 용천휘는 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수라안의 권능이 주어진 이번 대에는 진이 발동할 일이 없으니 흔적을 찾기가 더욱 난해했다.

그래서 흔적을 찾는 대신 진의 근간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으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다 뭔가 알아낸 것 같아.”

“뭐를?”

확실하진 않았다. 아직까진 추측이고 짐작이었다.

“진이 중원 땅에 발동되는 이유.”

“그게 뭔데?”

“아마도,”

용천휘가 침을 삼켰다.

그림자가 되고 난 이후로 이렇게나 긴장감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야 충돌이 있을 테니까.”

용천휘의 긴장감이 지강백에게로 옮겨 갔다.

“충돌이라니? 그건…… 희생을 말하는 것이냐?”

“응. 희생. 산 자의 피.”

“……사람의 피를 먹는 진이라니.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없애야겠군.”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대체 왜 진이 그토록 많은 제물을 필요로 하는지가 문제였다.

“확인할 게 있어.”

“뭘?”

“진이 발동했을 때 죽은 사람의 숫자.”

용천휘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언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사람처럼.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그 숫자는 매번 일치했을 거야. 정확히, 미리 정해진 대로.”

늘 익숙한 종남산의 바람이 갑자기 한기가 되었다.

지강백은 용천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야 그 시체들이 제물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저 수라안을 허락하는 것이 아닌, 그 속에 감춰진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용천휘의 한쪽 눈이 붉어졌다.

자연스럽게 지강백의 왼쪽 눈도 반응했다.

아주 비슷한 모습이 된 사형제가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불어오겠군.”

“그래. 내가 다른 그림자들과는 달리 날 때부터 수라안의 권능을 지닌 것과 연관이 있을 거야. 이변은 항상 때를 의미하니까.”

“너는 그것을 천신의 뜻이라 했다.”

“그렇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천신의 뜻이 무엇을 위하는 건지는 아무도 몰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천신이 그저 인간을 위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거야.”

휘이이잉.

눈보라가 불어오는 잿빛의 산자락.

그곳에 홀로 서 있는 자가 용천휘의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과연.”

뼈에 가죽만 남은 퀭한 모습에 입고 있는 옷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먼지로 화할 것 같은 모습.

그는 죽은 지 아주 오래된 자였다.

천산에 그림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그 그림자일 것이다.

“명석한 자로군. 나의 부활을 예고할 자로 부족함이 없겠어.”

절그럭.

그가 한 발을 내디뎠다. 뼈가 어그러지는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나는 기꺼이 그대를 환영하겠다.”

절그럭.

또 한 발이 움직였다.

뼈가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어그러진 뼈가 맞춰지는 소리였다.

절그럭.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그는 조금씩 반듯해졌다. 피와 살이 돋아났다.

마침내 그가 인간의 모습이 되었을 때.

“오라, 그림자여. 그리하여 나의 피와 살이 돼라.”

그가 눈을 떴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드러나는 두 눈은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읏!”

“헉!”

그가 눈을 뜨는 순간, 용천휘와 지강백이 신형을 비틀거렸다.

지진의 한복판에 선 것처럼 흔들리던 몸을 바로 하고 나자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맙소사.”

용천휘가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지강백의 왼쪽 눈이 잿빛이 되었다. 자신의 오른쪽 눈도 그럴 터였다.

“수라안이…… 사라졌다.”

지강백의 말에 용천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옮겨 간 거야.”

“어디로?”

“원래 수라안의 주인한테.”

그자의 이름은 대천혈성이었다.

곧 바람이 불어올 터였다.

대천혈성이 몰고 올 살육과 광기의 피바람이.

“내가 언젠가 했던 말, 기억해?”

용천휘가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지금은 그의 입술에 묻은 붉은색조차 불길해 보였다.

“사형과 내가 눈을 하나씩 나눠 가진 데는 내가 모를 인과가 있었다고.”

“그래. 기억한다.”

“그 인과가 사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거라면 사형은 어떻게 하겠어? 사부와 사제들이 죽고, 지월이 죽고 팔중신개가 행방을 잃고, 중원 무림의 힘이 정확히 반 토막이 나고…… 그런 것들이 모두 뭔가가 시작되기 위한 조짐에 불과했다면.”

“…….”

지강백은 그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오래 두고 생각해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불어온다면 맞설 것이다. 길을 잃는다면 찾을 것이다. 그 길마저 사라진다면 헤쳐 나갈 것이다.”

“그래……. 그게 사형이지.”

각기 제 길을 찾았어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의 인과에 묶여 있었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나란히 서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용천휘는 지강백의 왼쪽 눈이, 지강백은 용천휘의 오른쪽 눈이 되어서.

“뭐든 와라. 어서.”

용천휘가 서쪽에서 불어오는 불길한 바람을 마주했다. 지강백이 그 옆에 섰다.

그 모습이 꼭 등진 채 서로를 기대고 있는 하늘과 땅처럼 보였다.

언제까지라도 그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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