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119화 (119/346)

제119화 그 후의 이야기 (2)

위는 파랬고 아래는 하얬다.

파란 것은 하늘이고 흰 것은 땅이었다.

보는 것은 온통 희고 푸른 것 두 종류였다.

그 두 개의 선명한 경계가 이곳이 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아…… 오늘도 무료하군.”

천산의 꼭대기, 인간은 감히 걸음 하지 못하는 그곳에 홀로 앉은 용천휘가 따분한 눈으로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잠시 후 하얀 눈밭에 까만 점이 하나 생겨났다.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점은 천산의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용천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저 아래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용천휘가 씩 웃으며 그에게 술병을 흔들었다.

“어서 오라고.”

다시 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꾸 이래 부르지 마십시오, 소야. 거 잠 좀 편하게 잡시다. 살아생전 그리 부려 먹었으면 됐지.

아니, 오늘은 술로 낚으시려는 겁니까?

나 참.

그 비슷한 말이었다.

“크…….”

필목현이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술병을 도로 건넸다.

“아무래도 요놈은 너무 사치스럽지 말입니다.”

용천휘는 필목현이 건넨 술병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천산의 인간이 사바세계를 향해 사치스럽다 하다니. 호영장의 개가 웃겠군.”

“아니, 이미 죽은 몸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지요. 산목숨이 사치 아닙니까.”

“……그런가.”

용천휘가 또 한 번 술병을 기울였다. 찰랑거리는 맑은 술이 목울대를 넘어갔다.

호영장주가 친우를 위해 고이 쟁여 두고 있다는 그 백로주였다. 그때 어쩌다 한 번 냄새를 맡은 뒤로 필목현은 종종 그때 그 술을 맛봐야 했다며 안타까운 소리를 해 댔다.

“그런데 소야는 어찌 자꾸 여기 계십니까? 아무리 그림자라 해도 천산에 오래 머무는 것은 무리가 갑니다.”

“교는 너무 심심해.”

“나 참. 그리 무료하시면 이매라도 좀 풀어 놓으시든지요. 교에 대환단 떨어질 때 안 됐습니까? 소림에 가서 몇 알 가져오라 하십시오.”

“그건 됐어. 이매라면 지긋지긋하니까. 당장은 안 보고 싶다.”

“백룡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양반은 벌써 동면에 들어갔어. 동면을 마치고 다시 천 년짜리 수행에 들어간다더라고.”

“나 참. 아주 장하십니다. 백룡을 그리 귀찮게 만드시다니.”

“뭐 어때. 어차피 그 양반도 세상이 무료해 하품이나 하고 앉았던걸.”

“예에, 뭐…….”

필목현이 쓰게 웃었다.

백룡이나 용천휘나.

더는 인간이 아닌 그들은 아무래도 세상일이 시시한 모양이었다.

필목현은 하나의 절대가 된 그들이 그 힘의 대가로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고독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보통의 인간이었고, 인간으로 죽었으므로.

하지만 날마다 심심하다고 벌써 죽은 혼을 불러내는 용천휘를 보면 딱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래도 너무 자주 부르지는 마십시오. 하도 불러 대시니 이제는 제가 죽은 것도 종종 까먹지 뭡니까.”

필목현의 투정에 용천휘가 술병을 까닥 움직였다.

“앓는 소리 하지 마. 어차피 너도 잠자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잖아.”

“아이고, 그거라도 편히 해야지 말입니다. 살아 있을 때 소야의 수발을 드느라 제가 그래 고생하지 않았습니까. 원 참. 그새 다 잊어버리신 겝니까?”

“고생은 무슨. 누릴 건 다 누려 놓고.”

“웬걸요. 죽어 보니 알겠습니다만 잠이 보약입니다. 그만한 게 없지요.”

“약도 과하면 독이 되지.”

“아니, 그러니까 저는 이미 죽었단 말입니다! 사자(死者)에게 잠이 과할 게 뭐 있습니까?”

참다못한 필목현이 왈칵 성질을 냈다.

죽어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필목현은 여전히 용천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타박은, 그러니까 왜 아직 저 같은 인간을 곁에 두지 않느냐는 걱정과 우려였다.

“새 삼좌위는 어떻습니까?”

“아직 없어.”

필목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지 마시지요? 이러다 혼이라도 머물라 하시겠습니다?”

“자만하긴. 물색 중이야. 쓸 만한 인간이 없더라고.”

“아이고, 없지요. 그야 저만 한 인재가 어찌 흔하겠습니까. 아무리 교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그래도……”

필목현의 눈이 흐려졌다.

사자도 얼마든지 그런 눈을 할 수 있었다. 두고 온 자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잠 못 드는 눈을.

“……어서 마음을 여십시오, 소야. 너무 고독한 것도 병이 됩니다.”

용천휘도 그만 필목현의 눈을 감겨 주고 싶었다.

“……그리하지.”

“예, 소야.”

하얀 눈 위에 드리워진 필목현의 무게가 점차 옅어져 갔다. 다시 망자의 세계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아, 그런데 잠깐.”

용천휘가 필목현의 소매를 붙들었다.

필목현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이, 왜 또 그러십니까? 또 뭘 시키시려고요?”

“좀 봐줘. 네가 제일 적격일 일이라서 그래.”

“아이고, 참. 뭐 제가 교내에서도 걸출한 능력자이긴 했지요. 뭘 바라십니까?”

“길 안내를 좀 해 줘.”

“길 안내라니. 누구한테요?”

“방금 천산에 들어선 자.”

필목현의 눈이 좁아졌다.

“……이제야 오다니. 꽤 늦은 것 아닙니까?”

“그만큼 오래 길을 잃었다는 소리지. 더 늦기 전에 안내해 줘.”

“예, 뭐. 그러지요.”

필목현이 눈보라처럼 스르륵 멀어져 갔다.

“다음에는 좀 천천히 부르십시오. 적어도 칠주야는 재우신 뒤에 말입니다.”

용천휘가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다음에도 한 병 가져다 놓지.”

“어이구, 참. 그리 말씀하시니 삼 일로 봐 드리지요. 대신 기름진 안줏거리도 좀 같이 들고 오십시오.”

“망자가 바라는 것도 많지.”

“두고 온 게 많아서 그럽니다. 그리 타박하시면 저 안 옵니다?”

“어디서 협박이야. 어서 가 봐.”

“예, 소야.”

필목현이 사라졌다.

용천휘는 빈 술병을 내려놓고 눈밭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새파란 하늘은 끝도 없었다.

“아무래도 여기는 너무 심심해.”

용천휘가 콧등을 작게 구기며 말했다.

대답이라도 하듯 작은 눈바람이 휘잉 불어와 용천휘의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갑자기 용천휘가 두 눈을 떴다.

“그래. 온천이라도 가야겠어.”

그가 말하는 온천은 사막을 건너 저쪽, 종남산에 있을 터였다.

* * *

“하…… 하아…… 추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속이었다.

채희유는 하늘과 땅의 경계가 완전히 어그러진, 온통 흰 공간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여기가 어디…… 아, 추워…….”

빨갛게 언 손끝은 아무리 입김을 불어도 따듯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래도록 길을 잃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추워.”

채희유가 칼 같은 바람에 맞서 옷자락을 힘껏 여미며 눈을 감았다.

“따듯한 데로 가고 싶어.”

그때였다.

“이쪽이다.”

“……?”

채희유가 눈을 크게 떴다.

눈보라 속에서 인형이 나타났다.

큰 체구에 넉넉한 품을 지닌 풍채 좋은 중년의 사내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쯧쯧…… 천신의 사람이 천산에서 길을 잃다니. 너는 아무래도 이곳에 머물 자가 아닌 모양이다. 이쪽이다. 따라와라.”

사내는 제 장포를 벗어 차갑게 언 몸에 둘러 주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가 천산……이란 곳입니까?”

“……허허. 그조차도 잊은 게냐. 그토록 오래 길을 헤맨 이유가 있었구나.”

중년의 사내는 안쓰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장포 위로 그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를 보내신 게로군.”

“……? 누가 누굴 보냈단 말입니까?”

“알 것 없다. 아니, 알지 않아도 좋을 일이다.”

채희유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는…… 어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곳은 너무 춥고……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그런데,”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한결 다정해졌다.

“걱정 마라. 길을 찾아 주마. 그래도 된다 하셨다.”

그 다정함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채희유는 곧 얼어서 눈 알갱이가 될 것 같은 눈물을 닦아 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이쪽이다. 내가 갈 수 있는 데까지는 안내하마.”

“정말 감사합니다.”

채희유는 중년의 사내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걷는 동안 죽을 것 같던 추위가 조금씩 사그라졌다. 어느샌가 눈보라가 멎었다.

얼었던 발이 이제는 녹았다 싶을 무렵, 새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아…….”

채희유가 몸을 꽁꽁 가리던 장포를 내리고 얼굴을 드러냈다.

“아…… 아름답습니다.”

눈밭인 줄만 알았던 곳은 새하얀 꽃밭이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꽃들이 눈부셨다. 그 사이를 나비 하나가 날아갔다.

해가 따듯했다. 채희유는 아예 장포를 던져 버렸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꽃밭 속으로 뛰어갔다.

“따듯해요! 이젠 춥지 않습니다!”

필목현은 그 자리에 서서 채희유가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가에 그늘이 졌다.

용천휘를 볼 때와는 또 다른 애잔함이 그늘 속에 웅크렸다.

“그래…… 그리 천진하고 고운 여인이고 싶었던 게로구나.”

나비가 초르르 채희유를 따라갔다. 꽃보다 더 곱게 생긴 나비는 그녀의 주변을 살랑대다 냉큼 머리 위에 앉았다.

원래도 고운 머릿결에 장식이 더해지니 눈이 시도록 고왔다.

필목현은 오래도록 서서 채희유가 새하얀 빛무리 속으로 한껏 달려가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았다.

* * *

왜앵.

파리 한 마리가 한가로이 날아가는 객잔이었다.

낮에는 다관 겸 반포를 겸하고 있는 객잔은 늘 손님이 없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불친절하고 맛없기로 입소문이 돈 탓이었다.

그래도 망하지 않는 것은, 손님이 없다는 이유로 찾는 이들이 간혹 있는 탓이었다.

오늘도 텅 빈 객잔을 홀로 지키고 있던 점소이는 무료한 나머지 아예 문밖으로 나왔다. 지나가는 여객(旅客)을 상대로 호객 행위라도 할까 해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어쩌다 오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하품도 지겨워진 점소이는 담 위에서 졸고 있는 길고양이를 말동무 삼아 시답잖은 인근의 소문들을 떠들었다.

“야야, 나비야. 너 혹시 그 얘기 들었냐?”

“냐아.”

나른한 그 소리는 인간들의 일은 별 관심 없다 말하는 듯했지만 점소이는 꿋꿋했다.

“요기 왜 고개 두 개 넘어 그 부잣집 있잖냐. 영화전장이라고, 돈놀이하는 그 집 말이다. 그 집에 아무도 모르는 딸이 하나 있었다더라.”

“냐아아.”

“왜 다들 몰랐냐 하면, 그 딸이 날 때부터 지병이 있었다지 뭐냐. 그래도 네댓 살 때까진 괜찮았는데 한 번은 열이 올라 픽 쓰러지더니 내내 눈 한 번 못 뜨고 반송장으로 있었대. 그래서 아무도 몰랐던 게지.”

“냐아흠.”

“그런데!”

갑자기 점소이가 목청을 키우는 바람에 고양이가 놀라 몸을 훌쩍 일으켰다.

점소이는 고양이가 도망갈까 봐 양발을 꼭 붙들고 말을 이었다.

“냐, 냐아아아…….”

버둥대는 고양이는 아랑곳없었다. 왜냐면 이다음이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그 딸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대!”

착각일까.

고양이에게도 비로소 흥미가 생겨난 듯 보였다.

“냐아아?”

“그래, 그래! 놀랍지 않냐! 그 집이 그래서 난리가 났다더라. 그간 눈 한 번 못 뜨는 딸을 밤낮으로 보살피면서 만날 저짝 천산 쪽, 제일 용하다는 백룡님께 물 떠 놓고 빈 그 정성이 드디어 통한 게지!”

“냐아!”

“그래, 그래. 그렇다고. 그래서 조만간 아주 거하게 잔치를 벌인다고 하더라. 용신님께 공양한다고 소를 열 마리쯤 잡을 거래.”

“냐아! 냐앙냥!”

고양이는 소고기란 얘기에 마음이 동하는지 눈을 반짝이며 냥냥거렸다.

조만간 점소이가 발을 놓아주는 대로 고개 두 개를 건너 잔칫집을 찾아가리라 마음먹고 있을 터였다.

“어휴. 나도 가고 싶네. 그 잔칫집.”

점소이가 마침내 고양이를 놓아주었다.

“냥!”

고양이가 날쌔게 사라졌다. 고양이가 달려가는 방향을 확인한 점소이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런데 그 딸이 그렇게 미인이라던데. 소고기도 탐나지만 그 얼굴 한 번만 봤으면 좋겠네.”

점소이는 삐걱대는 현판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고, 내 팔자. 내가 진작 장가갈 나이를 넘어섰지만…… 가업이 이 모양인 탓에 어디 매파가 한번 나서 보지도 않고…… 에휴.”

그래, 남의 집 경사야 아무리 놀라워도 남의 집 얘기였다.

당장 제 코가 석 자였다.

“에휴. 오늘은 어디 일박짜리 뜨내기손님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네.”

점소이의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

그 날 정말로 근처를 지나던 손님 몇 명이 잔평객잔을 찾았다.

* * *

“여긴…… 여전하군.”

지강백은 점소이가 내온 차를 조심스럽게 발밑으로 흘려보냈다.

다른 음식은 도저히 먹지 못할 것 같아 차를 주문했지만 그 차조차도 흙물보다 못 했다.

지강백이 찻잔을 깨끗이 비운 것을 보고 점소이가 신이 나 달려왔다.

“어이쿠, 손님. 어째 차는 입에 맞으십니까? 이 차는 이 일대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놈으로, 저희 잔평객잔에만 특별히 가져다 놓은 상품입지요. 손님의 귀하신 미각에 잘 맞는다 하니 제가 다 황송합니다. 어디, 한 잔 더 올리겠습니다. 사양 말고 드십시오.”

점소이가 찻물을 더 부으려 했다.

슷.

“……으엥?”

그러나 그사이 찻잔이 사라졌다.

“어어……? 어라? 이, 이게 어디 갔지?”

점소이가 탁자 위를 두리번거리며 찻잔을 찾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 방금 전에 저 보기 싫은 죽립을 코끝까지 푹 눌러쓴 손님이 다 비운 찻잔을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흔적조차 없다니. 눈을 아무리 비벼도 찻잔은 오간 데가 없었다.

죽립으로 얼굴을 감춘 지강백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찻잔부터 가져오셔야겠습니다.”

“아…… 아이고, 예. 이놈의 눈깔이 삐었나 봅니다. 어서 가서 하나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니, 생각해 보니 차는 됐습니다. 이대로 올라가 쉬고 싶으니 방이나 안내해 주십시오.”

“그, 그럴깝쇼? 그런데 이 차는 정말 최상의 상품으로, 저희 가게에서는 이 귀한 놈을 아주 저렴한 값에 내놓고 있는데 이 기회에 한번 드셔 보심이……”

점소이는 내년에는 저도 장가를 가 보겠다는 일념 하에 어떻게든 객잔의 매상을 올리고자 애를 썼지만, 애석하게도 그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지강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방을 안내해 주십시오.”

“어, 어어 그……그럼 알겠습니다요.”

점소이는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별로 고수 같지도 않았고, 엄청 무식한 무기를 든 것도 아니었는데 어조를 바꾸자 갑자기 덜컥 오한이 들었다.

“거참…… 이쪽입니다.”

“감사합니다.”

지강백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찻잔을 가루로 만들어 날려 보내는 그 수법은, 분명 태을신수에 천강지를 더한 것이 아닌지요.”

건너편 탁자에서 다가온 이가 지강백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비천문의 제십팔 대 후계인 조한벽입니다. 이런 외지에서 천하제일인을 뵙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뭐시라! 천하제일인!”

점소이가 입을 쩍 벌리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내가 뭘 잘못 먹었나 아이고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그려 무려 천하제일인이 오셨던 객잔이 되겠습니다요 자랑이라도 하게 벽에 뭐라도 휘갈겨 써주십쇼 하는 말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

지강백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는 요새 신분을 감춘 강호행 중이었다.

몇 개의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최근 섬서의 두 문파 사이에서 있었던 시비를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천하제일기를 지녔다는 게 이렇게나 번잡한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종남파 앞마당까지 찾아와 부디 억울하게 돌아가신 부친의 죽음을, 천하제일의 정명함으로 낱낱이 헤아려 달라며 제 이마를 깨며 우는데 차마 귀찮게 굴지 말고 그냥 돌아가시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 하산하게 되었다. 볼일은 곧 마쳤으나 기왕 내려온 김에 사부 양영천이 그러했듯 저도 근골이 좋은 제자감이나 구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딜 가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제발 하루만 묵고 가라며 소매를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아직 뼈도 안 여문 장자를 들이대며 초식 하나만 가르쳐 달라는 인간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인간은 그나마 참을 만했다.

어디 정말로 너 같은 새파란 애송이가 천하제일인인지 보자며 덤벼드는 날파리 떼 같은 인간에 비하면.

죽립이 얼마나 고마운 물건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꽁꽁 얼굴을 싸매도 기어코 알아보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지강백이 죽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감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천하제일인께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아직 수련 중인 몸입니다. 술은 기꺼이 함께 나눈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건 아니 됩니다.”

조한벽의 눈이 새파래졌다.

“왜냐면 제가 그 술에 뭔가를 탈 예정이기 때문이지요.”

“……?”

지강백은 그가 조한벽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영문의 살수였다.

“죽어라!”

살수가 입에서 무언가를 뱉어 냈다. 지강백을 향해 곧장 날아온 그것은 탄구였다.

“제기랄.”

몸을 피하면 점소이가 위험해질 것이다.

지강백은 손을 내밀어 권풍을 일으켰다. 탄구가 잠시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지강백은 이어 소매를 휘둘러 탄구를 가둔 채 재빨리 탁자를 밟고 신형을 솟구쳤다.

“으악!”

그다음으로 지강백은 일어서 있는 살수의 목을 밟았다. 살수는 즉시 목이 꺾이며 쓰려졌고, 지강백은 그 반동을 이용해 단숨에 창틀을 밟았다.

“편히 묵긴 글렀군.”

창문을 통해 몸을 빠져나온 그가 폭발 직전의 탄구를 사람이 없는 빈 곳에 던졌다.

콰앙!

길 한 곳이 움푹 패며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 저런…….”

지강백이 미간을 찡그렸다.

탄구의 폭발 범위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말을 타고 오던 사람의 옷자락에 흙먼지가 튀었다.

탁.

지강백이 창틀에서 뛰어내렸다.

가볍게 지면으로 내려선 그가 애먼 피해를 본 사람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쯧.”

말에 타고 있던 이는 색이 고운 비단옷이 그린 듯 잘 어울리는 젊은 여인이었다.

하얀 피부에 맑고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런 흠 없는 고운 얼굴에까지 흙이 묻었다.

“아…… 죄송합니다.”

지강백이 품을 뒤졌다. 혹시라도 얼굴을 닦을 만한 게 나올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고, 여인은 서늘한 눈으로 지강백을 바라보았다.

“이젠 옷까지 더럽히십니까.”

“……예?”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잔평객잔의 점소이라면 그녀가 어제 기적적으로 병마를 털어 냈다는 영화전장의 금지옥엽 외동딸이라는 것을 알아봤을지도 모르지만 지강백은 그녀를 몰랐다.

“언제…… 제가 다른 결례를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머리 장식을 망가트리셨지요.”

“……?”

지강백은 기억 속을 뒤졌다.

이제야 하는 말이었지만 그에게 좋은 혼인 자리가 있다며 매파를 보내는 인간들이 수두룩했다.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제 딸과 마주치게 일을 꾸미는 인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마주친 여인 중에는 화산파 장문인의 딸도 있었다.

혹시 그렇게 마주쳤다 지나친 여인들 중에서 자신이 뭔가 실수를 범한 일이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었다.

“대신 고쳐 주겠다 하셨습니다만 그 약속도 지키지 않으시고…… 내내 망가진 장식을 하고 있어야 했던 부끄러움을 아십니까?”

“…….”

단 한 번이었다.

단 한 명이었다.

그가 머리 장식을 망가트린 것도, 그래서 고쳐 주겠다 약속한 이도.

영화전장의 외동딸이 말에서 내렸다.

그저 멍하니 저를 보는 지강백을 향해 그녀가 제 머리 장식을 떼어 내밀었다.

더듬이가 망가진 나비 모양의 장식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고쳐 주셔야겠습니다. 더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

죽립 밑으로 드러난 아랫입술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말이 되지 못하고 그저 헛숨에 그친 그 소리를, 여인이 알아들었다.

“상공이 틀리셨습니다.”

여인이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난 흰 꽃 같은 웃음을.

“제가 더 많이 좋아했어요. 그러니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왔겠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제가 더 많이 좋아할…… 앗!”

갑자기 어깨가 덥석 당겨지는 바람에 여인은 놀라 입술 끝을 깨물었다.

그러나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헤맨 끝에 다시 돌아온 정인의 품은 그녀의 기억보다 훨씬 더 따듯하고 넉넉했다.

이제 더 이상 추울 일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아닙니다.”

그리고 물기 어린 음성은 따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제가 더 많이 좋아할 겁니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가 머릿속을 헝클었다.

“채 소저가 저를 아무리 좋아하셔도…… 항시 제가 더 많이 좋아할 겁니다.”

채희유는 두 팔을 뻗어 지강백을 안았다.

“예, 예. 뜻대로 하세요. 이젠 다 괜찮으니까.”

이젠 얼마든지 안을 수 있었다.

마음껏 입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젠 다 괜찮으니까.

서로를 안은 두 사람의 어깨 너머 어딘가에서 꽃 피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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