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그 후의 이야기 (1)
쾅!
잘 자란 아름드리나무가 넘어갔다.
이어서 냅다 욕설이 들려왔다.
“아, 이 무식한 새끼들! 또 이빨 다 나갔잖아! 도끼질 한 번도 안 해 봤냐?”
턱수염이 더부룩한 장한이 이가 나간 도끼날을 쓸어 보며 수하들에게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는 중이었다.
수하 중 하나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귀를 털었다.
“으아, 웬 목청이 그래 좋소. 아주 산사람 다 됐네. 니미, 수적이 언제 도끼질을 해 봤겠소. 괜한 사람 잡지 마소.”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맞습니다, 채주. 뱃놈들이 나무 벨 일이 뭐 있겠습니까.”
“원 참. 손에 익지도 않은 일을 두고 뭐 이리 채근이쇼. 다들 열심히 하는 중이구만.”
왕위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터진 입이라고 아주 잘도 씨불여라그래! 익지도 않긴 뭐가 익지도 않아! 이 산에서 나무 베기 시작한 지 벌써 석 달짼데! 그만하면 다들 나무꾼이 아니라 나무꾼 할아버지라도 됐겠다!”
수적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뭔 되도 않는 소리요, 채주. 도끼 잡고 석 달 만에 나무꾼이라니. 뭐 노 잡고 한 달이면 다 뱃놈 된답니까?”
“아, 그래야 빨리 되도 않는 산 살림 때려치울 게 아니냐! 이놈들 후딱 베어서! 그래 후딱 집 올려 드리고! 그리고 수채로 돌아가야지! 아주 이놈의 산 모기라면 내 이가 갈려 죽겠다!”
왕위환은 어째 너무 갈아 크기가 좀 줄어든 듯한 개이빨을 드러내며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수적들은 속지 않았다.
“빨리 내려가긴 누가. 속을 걸 속으라지.”
“카악, 퉤. 내 말이.”
“처음에는 무덤만 파 주고 가자더니…… 원, 별. 하여간 채주도 내뱉는 말하고 속내하고 뭐 그리 다르오. 웃기지도 않게.”
수적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후딱 볼일을 마치고 내려가자던 왕위환이 사실은 그들이 석 달째 종남산에 머물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처음에는 무덤 파는 것만 도와주자 했다.
그 정도는 수적들도 불만 없이 거들었다. 사문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났는데 제 손으로 무덤 파는 심정이 오죽하랴 싶었다.
봉분을 올리고 좋은 바위를 가져가 비석을 세웠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지강백이 곰만 한 바위를 무슨 두부 자르듯 슥슥 잘라 네모 반듯하게 다듬어 그럴싸한 비석을 만드는 것을 보고는 왕위환의 눈이 뒤집어졌다.
비석이 근사하게 섰으니 이제 제상을 차릴 차례지 않냐고 했다.
죽은 제자들의 숫자가 꽤 되는 터라 제사 음식을 만드는 데만 해도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수적들은 제상 핑계를 대고 술이며 고기며 흰쌀들을 양껏 사다 날랐다.
기왕 제사 음식이 생겼으니 또 머물 핑계가 생겼다. 단둘이 다 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쩡한 음식을 버릴 수도 없으니 이걸 다 먹을 동안 있자 했다.
그러다 보니 무림맹에서 불 싸지른 본전이 두고두고 눈에 밟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왕 신세 지는 것, 본전을 새로 올리는 것도 돕자 했다.
수적들은 우리 숫자가 몇인데 까짓 본전 하나 짓는 게 큰일이랴 싶어 그러고마 했다.
그리고 도끼질을 시작한 지 석 달째였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다 못해 이젠 굳은살이 박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어울리지도 않는 나무꾼 노릇을 때려치우고 그만 돌아가자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무딘 칼 한 자루가 바위를 슥슥 깎아 내던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대는 탓이었다.
살면서 또 언제 저런 광경을 보랴 싶었다. 개중에는 산적 놈도 제자로 받았던 종남파인데 수적 놈도 글자 하나 다를 뿐이라며 내심 마음속으로 제자가 될 생각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왕위환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만 핑계가 떨어질 만하면 새 핑계를 냅다 물어 오는 인간이었으니 당분간은 수채에 돌아갈 일이 없겠다 싶었다.
“아이고, 밥때 됐소. 가서 밥 먹고 옵시다.”
수적들 중 누군가가 도끼를 내려놓으며 외쳤다.
일할 때 가장 정확한 것은 역시나 배꼽시계였다.
“벌써 그래 됐냐?”
왕위환이 도끼를 소중히 챙겨 들고는 허리를 폈다.
“우갸각! 어우, 시장하다. 어서 가서 밥 먹고 오자.”
수적 중 하나가 동료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말은 가서 큰형님 밥 차려드리잔 소리지?”
“암만.”
“거, 귀신눈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봐…… 쯧쯧.”
“조심해. 들리면 물릴라.”
다행히도 왕위환은 그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밥이다, 밥. 오늘 찬은 뭘 해야 하나.”
그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코를 씰룩이며 부지런히 산길을 걸어갔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따라 산 모기가 안 보이긴 했다.
* * *
“으잉? 손님이라고?”
그러나 부엌은 이미 분주했다.
왕위환을 비롯한 수적들이 나무 베기에 여념이 없는 사이 종남산에 손님이 찾아왔다.
아주 멀리서 온 손님이었다.
무려 소림의 계율원주인 범광과 그의 사제들이라 했다. 사제들 중 둘은 사대금강이라고도 했다.
“우어…… 내 머리털 나고 이날 이때껏 노질을 했지만 사대금강을 보긴 처음이네.”
“그 사람들은 뭐 다르게 생겼나?”
“아이고, 우리 사문이…… 아니 거, 우리 큰형님 사문이 하도 소박해 놔서 그래 안 보였지만 그래도 명문대파긴 하네. 무려 소림에서 사람이 다 찾아오고 말이지.”
수적들이 복닥복닥 부엌 아궁이 앞에 모여 수군대고 있자 차를 준비하던 구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좀 조용히 못 하냐! 손님들 귀 간지러우시겠다!”
“아 여기서 지객당까지 거리가 얼만데 귀가 간지럽소.”
“사대금강이라잖냐, 사대금강! 귀가 얼마나 밝겠냐!”
“아, 그런가? 원, 그런 어마어마한 고수들을 본 적이 없어 내가 뭘 알아야지.”
“흥. 이 무식하고 견문 짧은 놈들.”
구악이 수적들을 구박했다.
졸지에 욕을 먹은 수적들이 억울하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거참. 귀신눈 형님 그래 안 봤는데 사람 구박하는 데 재주 있소. 내가 뭐 견문이 짧으려 짧겠소. 배 타는 인간들 중 그런 고수들이 몇 없는 걸 어쩌라는 게요.”
구악이 찻상을 탕, 내려놓으며 눈을 흘겼다.
이제 보니 그가 괜히 구박이었던 게 아니었다.
“사대금강이 그리 어마어마하냐? 그럼 우리 대사형은 어떠시겠냐?”
“음……?”
“우리 대사형께서 넉 달…… 아니, 정확히 넉 달하고도 스물일곱 날 전 바로 그 날. 사술에 미쳐 강호전복의 야욕을 드러냈던 그놈을 없애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으셨냐.”
“다 아는 얘기를 왜 새삼 꺼내시오?”
“그놈이 누구한테 사술을 부렸느냐.”
“그야 소림의 방장이었지.”
“소림의 방장이 누구였느냐.”
“지월 대사 아니었소?”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없는 무식하고 견문 짧은 수적들이었다.
“그러니까아! 그 지월 대사가 누구냔 말이다! 무려! 천하제일기를 연달아 다섯 번이나 가져간 명실공히 천하제일인이 아니었느냔 말이다!”
“히엑!”
수적들이 이제야 눈치를 챘다.
“마마마…… 맙소사! 그렇다면 우리 큰형님…… 아니, 우리 채주의 큰형님께서?”
“마마마맙소사! 그럼 지금 천하제일인이……? 바로 우리 채주의 큰형님이라는…… 아니아니, 만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저어짝 계곡에서 빨래할 물 길어다 주고 별식이라며 멧돼지 잡아다 주시는 그 큰형님이……? 처, 천하제일인이라고?”
“쯧쯧.”
구악이 있는 힘껏 어깨를 펴고 혀를 차 주었다.
“사람이 무식하면 보는 눈이라도 키우랬다. 너희처럼 무식한 눈에 어찌 대사형 같은 크신 분을 담을 수 있었겠느냐. 쯧쯧쯧…….”
수적 하나가 아궁이 앞에서 벌떡 일어섰다.
“귀신눈 형님! 그 상 내가 들고 가겠소. 이리 내시오.”
“아, 언감생심! 어딜 넘봐!”
구악이 꽥 소리를 질렀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은 생각이 이제야 들기 시작했다.
수적 놈들이 어찌나 단순하고 무식한지 저보다 힘 좀 센 사람을 보면 무조건 형님이었다. 오죽하면 개이빨처럼 인간이 되다 만 인간도 채주로 깍듯이 모실 정도였다.
그런 타오르는 장작 같은 단순한 성정에 기름을 부은 듯싶었다.
이제야 말이지만 살막주의 철딱서니 없는 막내아들도 정양할 땐 산 공기가 좋다며 별 같잖은 핑계로 몇 달을 묵다 간 일도 있었다.
그놈이 저는 그림자도 조심스러운 대사형께 친구니 뭐니 하며 하루 종일 딱 들러붙어 다니는 것을 보고 속에서 천불이 났었더랬다.
‘이거…… 이놈들 어디 몰래 데려가 땅에 묻고 와야 하나?’
구악은 한시라도 빨리 이 수적 놈들을 내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나는 객에게 드릴 찻상을 내갈 테니 아궁이 불이나 잘 보고 있어라.”
“거…… 그거 좀 같이 들고 가도……”
“떽!”
구악이 찻상을 들고 거의 달리듯 부엌을 나섰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유운비가 원하는 만큼 빠른 걸음을 만들어 주었다.
* * *
“대접이 변변치 못해 송구합니다. 아직 이것저것 갖춰 가는 중입니다.”
지강백이 범광에게 정중히 차를 건넸다.
범광은 무릎을 단정히 굽히고 앉아 그가 주는 차를 받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별도 없이 급한 마음에 걸음부터 앞선 제가 더 결례지요.”
“더없이 반가운 손님이 그런 말씀은 거두십시오.”
차향이 그윽하게 번졌다.
범광은 차를 목으로 넘긴 다음 말을 이었다.
“오는 길에 서찰을 하나 부탁받았습니다.”
“어디서 온 서찰입니까?”
“살막주의 아드님인 듯합니다.”
범광이 지강백에게 서찰을 건넸다. 지강백이 웃으며 받아 들고 있자 범광이 일독을 권유했다.
“반가우실 텐데 지금 보셔도 됩니다.”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서찰을 펼치자 괴발개발 읽기 힘든 글씨들이 주르륵 이어졌다.
서체에서도 친우가 보이는 듯 해 지강백이 또 웃었다.
―강백아.
……(중략) 해서 나는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나의 길을 찾은 듯하다.
지난번 정양에서 느낀 건데 나는 산 체질인가 봐. 산 밥도 입에 잘 맞고 산 공기도 너무 좋았어. 나는 이대로 도사가 되어 유유자적 무위자연을 즐기며 살고 싶다.
해서 말인데, 내가 종남파에 입문하는 게 어떨까? 독귀 영감도 종남산에 약방이 필요하지 않냐고 묻더라. 물론 가친께서는 여전히 반대가 심하시지만……(후략)
“좋은 내용이 있나 봅니다.”
지강백의 표정을 보며 범광이 말했다.
“예, 뭐…… 살막주에게는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저런.”
내용이 짐작이 가는지 범광도 찻잔에 입술을 대고 작게 웃었다.
“헌데 귀 사(寺)의 일로 한창 번잡하실 때인데 어째서 이 멀리까지 걸음 하셨습니까?”
달칵.
범광이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닌 게 아니라 조심스러운 얘기긴 했다.
지금 소림은 좋은 말로 번잡했고, 다른 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가 서른하나의 나이로 계율원주가 된 것을 봐도 그러했다. 소림에서 중요하기로 따지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는 계율원주의 직책을 백연에 이어 맡을 만한 인물이 도무지 없었다.
그가 계율원주가 된 것은 백연의 마지막을 지키기도 했고, 백연이 남긴 무공을 고스란히 이어받기도 한 탓이었다.
무엇보다 범광은 자신이 더 이상 감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장을 지키지 못했다. 방장의 악행도 막지 못했고 그가 뒤바뀐 사실도 너무 늦게야 알았다.
감원은 다른 이가 맡아야 했다.
감원 자리에서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계율원주직이 주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의논을 할까 해서 왔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범광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소림은 아직 방장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방장의 유지랄 게 없었으니까요. 이런 사태는 처음이라 반야당에 드신 원로들께서도 난색을 표하고 계십니다. 허나 이는 오직 소림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파일방이 대부분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무림맹 사태로 인해 사문의 가장 큰 축이 되는 일대제자와 장로급 인물들이 대거 불귀의 객이 되었다.
문파가 다시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테고, 그 전에 앞서 자구책이 필요했다.
“사문의 서열을 재정돈하는 일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소림이 그렇듯이요.”
“그렇군요.”
제자 둘 남은 게 전부인 종남파와는 사정이 다른 얘기였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했다.
개방만 해도 그렇다. 서역으로 출발했던 팔중신개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일장로와 소방주가 패를 나눠 방이 쪼개지고 있다 들었다.
범광이 계율원주가 된 것을 가지고도 소림 내부에서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걸 어쩌면 좋을지.”
“경청하겠습니다.”
지강백은 왜 범광이 굳이 이런 일을 강호 일과는 한 발짝 벗어나 있는 종남산 높은 곳까지 끌고 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다.
“중단된 천하무도회를 재개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지 대협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지강백이 잠시 생각한 후에 답했다.
“나쁘지 않은 얘기 같습니다. 대외적인 일이 있다면 확실히 문파 내부의 결속력에 도움이 될 겁니다.”
긍정적인 답을 듣고 범광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곧 첩지를 만들어 구파일방에 전달하겠습니다.”
“……예?”
지강백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허락이라는 한마디 말이었다.
“허락이라니요?”
“제가 무얼 잘못 말씀드렸습니까?”
오히려 범광이 되물었다.
지강백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천하무도회를 재개하는 데 왜 허락이 필요합니까? 그것도 종남까지 오셔서.”
“마땅히 지 대협의 허락이 필요치 않겠습니까?”
“예?”
범광은 당연한 얘기를 한다는 식이었다.
“지 대협이 아니라면 강호의 대사(大事)를 과연 어느 분께 말씀드리겠습니까.”
“아니, 그게……”
지강백이 당황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당혹감을 털어 냈다.
“그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종남파의 일대제자일 뿐입니다.”
“더는 아니게 되실 겁니다.”
범광이 묘하게 씁쓸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강호란 그런 곳이니까요. 강호가 배분과 명분이라는 체계를 따르는 것 같아도 그 바닥에 깔린 것은 힘입니다.”
“그것이 저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씀입니까?”
“당금 강호에서 어느 누가 지 대협의 말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범광이 난처한 듯 눈썹을 긁적였다.
“부끄럽게도 제가 계율원주라는 중책을 맡게 된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백연 대사께서 제게 남겨 주신 대승범천신공을 바탕으로 제가 무학의 요체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건 소림의 일입니다.”
“소림은 강호의 일부입니다. 일부이자 축소판이지요. 종남의 사정이 다른 곳과 유달리 다른 것입니다.”
범광이 딱 잘라 말했다.
“허면 천하무도회를 재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준비는 소림이 할 터이니 지 대협께서는 시간을 맞춰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지강백이 미간을 찡그렸다.
천하무도회를 거절할 까닭은 없었다. 그는 천하무도회에 한 발을 들여 본 경험이 있었다. 아쉬웠다.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은 그때처럼 지금도 들끓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함이 다가왔다.
“대사께서 그리 생각하고 계신다면 과연 제가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종남은 사정도 있고 하니 이번 천하무도회는 가지 않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 사정상 더 오셔야지 않겠습니까?”
범광은 아주 많은 답을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막힘이 없었다.
“문파를 재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제자들입니다. 종남도 새 제자를 들이셔야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장담 드리지요. 천하무도회에 오셔서 천하제일기를 가져가십시오. 그럼 제자는 자연히 모여들 것입니다.”
“그건……”
“이런 말씀이 듣기 힘드실 줄은 압니다만, 저 역시 스승을 잃은 제자의 입장에서 한 말씀 드립니다. 과연 스승님께서 사문에 남은 제자에게 가장 바라는 일이 무엇일는지요. 지 대협이라면 마땅히 답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곧 첩지를 보내겠습니다. 이리 강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몹시 반가웠습니다.”
범광은 먼 여정에 반비례하는 간단한 인사를 던졌다.
그는 아주 짧게 머물다 곧장 소림으로 돌아갔다.
천하무도회를 준비하기 위해 몹시 분주해질 것이라 했다.
그로부터 한 달.
종남파에 천하무도회의 첩지가 정식으로 도달했다.
* * *
“어흐흑…… 어흑, 끅끅!”
수적 하나가 울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노량호. 나이 열넷에 장강수로 삼채의 막내로 들어가 노질로 뼈를 여물게 했다. 그간 뱃놈 생활로 어찌나 고생이 심했던지 이젠 뼈가 굵어지다 못해 삭아 갈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울고 있었다.
눈물 콧물이 흘러 수염을 다 적시도록.
보다 못한 개이빨이 핀잔을 줄 때까지.
“고만 좀 못 우냐. 대체 이 좋은 날 왜 지랄인 게야.”
“그게 채주…… 끄윽, 끅! 이놈이 그게…… 너무 마음이 떨려서…… 끄윽, 끅!”
터지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다 보니 자연 딸꾹질이 이어졌다.
노량호가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힘껏 하지는 못하고, 행여 소리가 들릴까 봐 두드리는 시늉에 그쳤다.
“아, 누군들 안 떨리겠냐.”
“아니, 그게…… 끅! 좀 다르기도 하고…… 끄윽!”
노량호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이 뱃놈이 소림사 본산에 오른 것도 영광이올신데 무려 그 자리가 천하무도회이다 보니…… 살면서 또 언제 이런 구경을 다 할까 싶고…… 저기 계신 큰형님이…… 아니아니, 채주님의 큰형님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이 몸이 저런 분과 이제껏 한솥밥 먹었다 생각하면 아주 그냥 진작 소화됐던 쌀알들도 다시 뱉어 차곡차곡 어디 담아 두고 싶은 게…… 끄윽, 끅!”
얘기를 듣다 보니 속이 불편해졌는지 왕위환이 배를 슬슬 쓸었다.
귀신눈 구악이 한숨을 쉬며 노량호를 달랬다.
“알았다, 알았어. 고만해라. 대사형 보실라. 대사형께서 원체 까마득한 분이시니 네놈 이름이나 알까 모르겠다만, 행여나 이 꼴을 보시면 마땅히 마음 쓰실 분이다. 큰일 앞두고 심려 끼쳐 드리지 마라.”
노량호가 딸꾹질을 해 대면서도 눈을 번득였다.
“모르긴! 내 이름 석 자 아시오! 이젠 아침저녁으로 량호야, 하고 부르신단 말이오!”
“그야 대사형이 원체 마음 넉넉하고 머리가 비상하시니 그런 게지! 어쨌거나 고만 좀 그쳐! 대사형이 보시면 어쩌려고!”
“아, 알았소.”
노량호가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는 사이.
삐익!
날카로운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천하무도회의 비무대 위에 선 지강백이 상대를 향해 주먹을 말아 인사를 건넸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도(老道) 또한 마찬가지.”
나이가 지긋이 든 음성이 사뭇 떨려 왔다.
지강백의 상대는 무당파 장문인 태허진인이었다.
태허진인은 소림의 지월, 개방의 풍덕포와 더불어 삼대고수로 꼽히는 자였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는 천하무도회의 마지막 비무라는 뜻이었다.
태허진인이 양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낮춰 태극신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 같은 절정의 고수가 기본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그만큼 제대로 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천하제일기의 주인을 스물하나의 나이로 능히 상대했다는 자. 어디 내 눈으로 확인하리다.”
지강백이 투박한 목검을 들어 올려 대천강검의 첫 번째 자세를 취했다.
“부디.”
태허진인의 말은 틀렸다. 눈으로는 이미 확인을 했다.
일전의 천하무도회를 발칵 뒤엎어 놓았던 종남파의 일대제자.
그러나 그는 곧 마교로 밝혀졌고, 무림맹의 주살첩을 목에 건 채 천라지망에 갇혀 사냥을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로 인해 사문이 사라졌다. 종남파에 남은 모든 것이 강호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종남파의 일대제자는 살아남아 저를 마교로 만들었던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 모든 것 중의 하나가 천하제일기의 주인이었던 지월이었다.
그 사실은 강호를 해일처럼 휩쓸었지만, 정작 믿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종남파의 비극이나 마교에게 몸을 빼앗긴 지월이나 모두 믿지 못할 얘기였지만, 그중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지월이 이제 겨우 약관을 넘어선 무명의 청년에게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거짓말이어야 했다.
그가 지월이 아닌 자의 정체를 밝히고, 마교의 수중에 넘어갔던 사람들을 되돌려 결국 강호 전체를 지켰음을 모두가 알아도 그 하나만큼은 거짓말이어야 했다.
구파일방이 그에게 아무리 큰 빚을 졌더라도 그것만큼은 거짓으로 남아야 했다.
그런 그가 천하무도회에 왔다.
그를 좌시할 수 없던 구파일방의 고수들이 모두 천하무도회에 몰려들었다.
종남의 일대제자는 저를 믿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씩 쓰러트리고 마침내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런 까닭에 태허진인의 말은 몸으로 겪어 확인하겠다, 가 되어야 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으므로.
아니, 믿고 싶지 않았으므로.
“잘 부탁드립니다.”
태허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앗!”
이어서 현묘하기로 치자면 천하제일이라는 무당의 태극신권이 허공을 수놓았다.
* * *
“…….”
“…….”
“…….”
장내는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흐르지 않았다.
비무대 위의 두 사람이나,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나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목을 조이는 긴장만 있을 뿐이었다.
“후.”
지강백이 짧게 숨을 내뱉으면서 겨우 긴장이 깨졌다.
삼 합이었다.
단 삼 합 만에 지강백은 자신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전(前) 천하제일기의 주인 지월과 행방불명된 개방의 풍덕포를 제외하면 강호에서 가장 강한 무인으로 평가되는 무당파 장문인 태허진인은 지강백과 삼 합을 주고받으며 패배를 시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첫 합에 그는 손목이 부러졌다. 나머지 두 합은 순전히 오기였다.
계율원주로서 비무대를 맡은 범광이 비무대 위로 올라가 말했다.
“이번 비무는 종남이 승리했음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의가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승리는 명백했다.
범광이 비무대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신호로 사대금강이 이제껏 소림에서 보관 중이었던 천하제일기를 가져왔다.
범광이 그것을 받아 지강백에게 건넸다.
“받으십시오. 이번 대의 천하제일기는 종남의 차지입니다.”
“아……”
지강백이 천하제일기를 받아 들었다.
깃대를 잡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기를 나부끼게 했다.
그 모습을 비무대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궁진현이 말했다.
“아직 명호조차 없는 이가 천하제일기의 주인이라니. 그야말로 파란이로군.”
이번에도 그의 말이 시작이었다.
장내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어지간히 단련된 고수들조차 나중에는 인상을 쓰며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거대한 소란이었다.
이제껏 이런 일은 없었다.
모두가 그것을 알았다.
이 소란은, 새로운 강호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작 반 년 만인가.”
소란은 지강백이 비무대를 내려서는 순간에도 그치지 않고 장장 반나절을 더 이어졌다.
사라진 사천당문을 대신해 새로운 오대세가의 일원이 된 호영장의 장주 호곽이 남궁진현의 말을 받았다.
“새 시대가 열릴 걸세. 이전과는 아주 다른 강호가 될 거야.”
“그래. 고작 한 사람으로 인해.”
그 한 사람이 비무대를 내려가고 있었다.
손에 들린 천하제일기가 선명하게 바람을 탔다.
훗날 사람들은 새로운 천하제일기의 주인이 탄생한 이 날을 바람조차 새로운 날이었다고 기억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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