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억조창생(億兆蒼生) - 이 수많은 세상 사람들(2)
지강백의 시각혈에 채희유의 손톱이 박혀 있었다. 손톱을 타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지강백을 중독시킨 채희유가, 아니 그녀의 몸을 빌린 용천무가 손톱을 뽑아 거기에 묻은 지강백의 피를 핥았다.
“너도 이매로 만들어 주지. 이 계집의 몸이 독인이라는 게 그런 면에서는 쓸모가 많…… 윽!”
갑자기 채희유가 제 목을 움켜쥐었다.
“이, 이 계집이……! 으학!”
금천진혼대법이 완전하지 못한 탓이었다. 채희유는 제물로서 온전히 준비가 된 상태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불완전한 상태로 채희유의 몸에 들어온 용천무의 혼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상공!”
잠시 정신을 차린 채희유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중독된 채 마비된 지강백을 끌어안고 그에게 입김을 불어 넣었다.
“어, 어서…… 어서!”
마비가 풀리는지 지강백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채희유의 얼굴에 안도가 번져 가는 것도 잠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다시 몸을 차지한 용천무가 지강백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또다시 독기가 한 움큼 지강백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잔경련을 일으키듯 떨려 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목덜미를 중심으로 독기가 까맣게 번져 나갔다.
“안 돼! 하지 마!”
이번에는 채희유였다.
채희유는 버둥이며 손을 뻗어 지강백의 상처를 덮었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검게 번지던 독기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채희유는 언제 또다시 용천무가 제 몸을 차지할지 몰라 불안했다.
“해독이 돼서 몸을 움직이실 수 있게 되면 바로 저를 찌르세요.”
채희유의 말에 지강백의 턱이 떨려 왔다. 아마도 고개를 젓고 싶은 듯했다.
채희유는 지강백의 몸에 흘러 들어간 독기를 빨아들이며 안타깝다는 듯 몸을 흔들었다.
“심장 바로 아래 독단이 있습니다. 정확히 그곳을 찌르셔야 해요. 제가 죽으면 제 몸은 곧장 그자가 차지할 겁니다. 하지만 독단이 깨지면 제 몸은 소용이 없어질 거예요.”
“안 됩…… 다른 방……법이 없……”
지강백이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몇 마디를 내뱉었다.
그만큼 해독이 되고 있다는 증거에 채희유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자의 본신을 죽여야…… 아!”
채희유의 동공이 벌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은 아주 차고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미친년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독인이 제 독단을 알려 줘서 뭘 어쩌게.”
용천무가 양 손톱을 치켜세웠다. 손톱이 새파랬다.
그가 열 개의 손톱으로 지강백의 목을 움켜잡았다.
“약점을 들었으니 두고 보면 안 되겠지. 너는 내 가장 충실한 이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강백은 이미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해독이 된 상태였다.
그가 제 목을 붙든 용천무의 양 손목을 움켜잡았다.
“뭐……!”
용천무가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평범한 여자의 몸이었다. 힘으로는 지강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채 소저.”
지강백은 용천무의 눈 안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다른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용천무가 있는 힘껏 독기를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 그년은 죽었어! 네놈도 그만 이매가 되어라!”
용천무와 지강백의 몸이 자욱한 자색 운무에 휘감겼다. 일각 안에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녹여 없앨 수 있는 가공할 독무였다.
지강백은 내력을 전부 끌어올려 버텼다. 하지만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채 소저! 거기 계신 것을 압니다. 다른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익! 죽었다잖아!”
“채 소저! 저는 채 소저를 잃을 수 없습니다!”
“아니라고! ……으윽!”
잠깐, 용천무의 표정이 흔들렸다.
“채 소저?”
“…….”
채희유가 맞았다.
지강백은 저를 응시하는 슬픈 눈을 보았다.
채희유가 그를 보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후 그 붉은 입술 새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채 소저!”
지강백이 채희유를 덥석 끌어안았다.
“놓으세요!”
채희유가 진저리를 치며 그를 밀어냈다.
저를 미는 힘이 아닌, 진심 같은 그 목소리가 지강백으로 하여금 팔심을 풀게 했다.
“여기서…… 나가세요…….”
“채 소저.”
“독단을…… 터지게 했으니…… 곧 저는 녹아…… 독수가 될 겁……니다. 절대 저를 건드리지 마시고…… 제 피에 닿지 않……”
채희유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채 소저!”
지강백이 채희유를 안아 들었다.
채희유는 한사코 그를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건드리지 말…… 그래선 안 됩……”
“방법을……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방법을……”
“그런 건 없…… 이미 늦었습…… 제발 그만 가세……요,”
“안 됩니다. 저도 안 됩니다.”
이미 늦었다.
칠공에서 흘러내린 흑수가 옷자락을, 피부를 녹이기 시작했다.
“닿지 마……세요. 저는 독인이라……”
“그래도 안 됩니다. 방법이…… 방법이 없겠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없……”
동공마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채희유는 더는 지강백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몸이 가벼워졌다.
채희유는 지강백이 저를 내려놓았음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쥐려고 해도 쥘 것이 없었을 것이다.
“좋아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비로소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채희유는 독수로 변해 가는 제 모습이 지강백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알 수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제가 먼저였습니다.”
답이 들려왔다.
아직 귀가 녹지 않아 다행이었다.
저를 놓고도 지강백은 아직 그 독기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 사실이 애가 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답이 듣고 싶었다.
“그 뒤로 쭉…… 좋아했어요.”
“제가 더 많이 좋아합니다.”
“계속…… 계속…… 한시도 빼먹지 않고…… 계속 좋아……했…….”
“제가 더 많이 좋아할 겁니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해 주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따듯했다.
“앞으로도, 계속. 제가 훨씬 더 많이 좋아할 겁니다.”
다행이었다. 그가 저를 놓아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것이라는 그의 말이 남았다.
모든 게 다행이었다.
채희유는 웃으며 고요히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곧 그녀의 미소도 녹아 흘렀다.
* * *
“으, 으으…….”
쾅!
관이 엎어졌다. 진득한 흰 물이 흘러넘쳤다.
용천무가 관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가 잘 움직이지 않는 두 팔로 조금씩 조금씩, 힘겹게 기어갔다.
“뭐, 뭐든…… 뭐든지 제물이 될 육신을 찾으면…….”
그러면 살 수 있었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히 오늘 무림맹에는 수백 구의 시체가 만들어졌다. 어떻게든 시체 더미 속에 숨어 적당한 육신을 발견해 차근히 대법을 진행하면 될 것이다.
용천무는 기를 쓰고 기었다.
이미 흐물대는 살갗은 까지고 쓸려 피투성이가 되었다.
대법으로 취한 타인의 육신과는 다르게 본신은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
“흐으…….”
용천무가 신음을 흘렸다.
“저, 저기까지만…… 조, 조금만 더…….”
흐릿한 시야에 저 멀리서 어른대는 시체들이 들어왔다.
기를 쓰고 기어간 용천무가 시체들 속을 파고들었다.
“하으, 하아…….”
안도감이 느껴졌다.
용천무는 부패하기 시작한 시취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잠시만…….”
이대로 눈을 감고 있다 달이 뜨면 대법을 시작할 것이다.
다행이었다. 저는 살아났다.
그는 이름조차 허락받지 못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태어났으나 살아 있었다.
오히려 천신의 그림자라는 교주가 죽었다. 저는 교주를 죽이고 살아남았다.
이번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앞으로도 살 것이다.
죽는 것은 다음번 그림자인 용천휘가 되어야 했다.
“두고 봐라. 내가 꼭……”
용천무가 전신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으드득 이를 갈았다.
곧 달이 뜰 것이다.
이 고통은 그때까지만 이어질 것이다.
용천무는 그런 생각으로 겨우 육신을 달랬다.
하지만 밤은 생각만큼 빨리 오지 않았고, 고통은 밤을 기다리는 시간보다 길게 이어졌다.
* * *
안락하게 그를 덮고 있던 시체가 들썩였다.
용천무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이 부셨다. 아직 밤이 되지 않은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조여 왔다.
털썩!
이불처럼 포근하던 시체가 사라졌다.
“이자가 맞소. 내가 확인한 시체가 아닌 시체는 분명 이자였소.”
용천무는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살막주 적길연의 목소리라는 것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허락하시면 제가 없애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목소리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범광이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제독실에서 용천무의 장에 맞아 극심한 내상을 입은 그를, 백연이 데리고 도망쳤다.
백연은 제 몸속의 대승범천신공을 주입해 범광을 살렸다.
범광은 백연의 시신 앞에 맹세했다.
반드시 지월이 아닌 자의 목숨을 거두겠다고. 그 살업이 그를 평생 안락하게 잠들지 못하게 하더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며칠에 걸쳐 내상을 다스린 범광은 안전히 머물 곳을 찾아 범전으로 숨어들었다. 때마침 금천진혼대법의 제물이 될 뻔한 살막주를 발견하고 우선 그를 살렸다.
살막주는 범광의 추궁과혈로 정신을 차렸고, 용천휘가 말해 준 용천무의 정체를 일러 주었다.
“뜻대로 하십시오.”
범광이 허락을 구하는 자는 지강백이었다.
지강백 앞에서는 범광 또한 백사준과 마찬가지로 죄인이었다.
범광이 지강백에게 깊이 읍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범광이 돌아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하……!”
용천무가 기를 쓰고 몸을 뒤집었다.
그가 안간힘을 다해 버둥대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도망치려는 것인가.”
범광의 말에는 딱하다는 기색조차 없었다.
범광은 단 한 걸음으로 용천무를 따라잡았다. 그가 몸을 낮춰 용천무와 시선을 맞추었다.
용천무의 흐릿한 시야에도 범광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괴롭고 거친, 아직도 상처가 생생한 그런 표정이었다.
용천무가 저지른 업의 일부가 범광의 표정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범광이 손을 치켜들었다. 갈퀴처럼 굽어드는 손은 응조공이었다.
“으…… 아, 안…… 나, 나는…… 시간이 필요…… 으으……”
저는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했다.
교를 장악하고 교의 주인이 되어야 했다. 천신의 그림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를 이렇게 만든 게 천신의 뜻이라면 그런 천신은 엿이나 먹으라고 말해 줄 터였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죽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죽지도 못한 버러지에 불과했다.
“아, 안…… 나는 그림자…… 따위, 다 죽여…… 없앨…… 천신은,”
용천무는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그러나 남들의 귀에는 그저 알 수 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범광은 제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자비심을 지워 없앤 다음 말을 이었다.
“네 혼은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다. 억겁의 시간 동안 구천을 헤매며 살업의 무게를 깨닫거라.”
“아아…… 안!”
퍼억!
응조공이 용천무의 등을 꿰뚫었다. 그대로 심장을 쥔 범광은 연약하게 꿈틀대는 그것을 그대로 터트려 버렸다.
“……!”
단말마도 지르지 못한 채 용천무가 죽었다.
그가 저지른 업에 비하면 죽음은 이토록 간단하고 허무했다.
털썩.
범광이 손을 놓자 구멍이 뻥 뚫린 용천무의 시신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제 그는 한 줌의 흙이 될 것이다.
혼이 지닌 업의 무게와는 상관없이.
그가 제 원을 이기지 못해 귀신이 된다 하더라도, 흙으로 돌아간 육신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할 터였다.
그런 게 죽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끝인 겁니까.”
범광이 고개를 들어 지강백을 향해 물었다.
지강백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닙니다.”
“허면…… 또 무엇이 남았습니까.”
범광의 음성에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그는 무림맹의 참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두려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아직도 끝내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저희의 몫이 아닙니다.”
지강백의 답은 한시름을 덜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몫입니까.”
“그건…….”
그것은 용천휘의 몫이었다.
이 모든 참사를 중원으로 이끌고 온 장본인인 그가.
* * *
“이것도 네가 말한 결계인가?”
살아남은 자들이 한곳에 모였다.
지강백과 범광, 살막주는 용천휘의 곁에서 그가 이매들을 묶어 둔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 진에 더 가까워.”
지강백이 처음 봤을 때와는 모양새가 달라져 있었다.
수라안으로 보지 않아도 이쪽과 저쪽을 구분 짓는 경계가 확연했다.
그리고 그 경계의 한 지점마다 붉은 가사를 걸친 대명천교의 호법위들이 서 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그 붉은 점이 정확히 하나의 도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내가 그랬지. 할 수 있는 한 되돌려 놓겠다고.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용천휘는 채희유가 남긴 독기로 인해 미간에 검은 기운이 몰려 있는 지강백을 향해 말했다.
지강백은 죽기 직전까지 중독이 됐고, 지금도 내공의 힘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몇 달에 걸친 정양과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영약들의 힘이 필요할 터였다.
용천휘는 지강백이 중독된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들어가, 사형.”
“저 안으로 말이냐?”
“그래. 사형에게도 되돌릴 것이 있으니까.”
지강백은 잠시 입을 다물고 용천휘를 바라보았다.
용천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이미 아는 듯했다.
“우리 사이의 빚이 청산되지 않았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내 생각에 말이야, 그 빚은 내 육신이 더 이상 그림자가 될 수 없을 때까지 이어질 것 같더라고.”
“그건 무슨 소리냐.”
“내가 아직 할 일이 있단 소리야.”
용천휘는 움직이려 들지 않는 지강백을 경계 너머로 밀었다.
지강백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다른 이매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마치 그 안의 공간만 세상과는 단절되어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범광이 물었다.
“무얼 하려는 겁니까?”
용천휘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주 밝고 흰, 주먹보다 약간 작은 구슬이었다.
그러나 단지 구슬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게 보는 것만으로도 구슬이 품은 상서로운 기운이 밀려왔다.
그것은 아마도 구슬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인간은 그 정체를 모르는 아주 커다란 기운일 것이다.
“주술.”
용천휘의 간단한 답은 범광과 살막주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용천휘가 고개를 슬쩍 돌려 살막주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내 약조를 받았다. 나는 내가 이 땅에 머무는 한 네 아들이 무사할 것이라 말했고, 지금 내가 한 말을 지킬 셈이다.”
“그 구슬이 이자들을 되돌리는 약이라도 되는 게요?”
“아니.”
그림자가 없는 용천휘가 구슬을 한 번 쓰다듬었다.
“이걸 먹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건 약이 아니야. 내가 만든 진을 발동시키기 위한 힘이지.”
“그게 무엇이오?”
용천휘는 대답 대신 경계 너머에 정지되어 있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애석하게도 이매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매향은 본디 역할이 다하면 스스로 소멸하는 의지 같은 것. 거기에 미지의 독이 더해진 저들은 의지가 소멸하지 않아도 종국에는 몸이 소멸하게 됐을 것이다.”
살막주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다.”
“다른 방법?”
“백룡에게는 세월을 관장하는 힘이 있지. 그것을 빌려 왔다. 큰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용천휘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백룡의 여의주였다.
천신의 그림자라 하더라도 인간의 몸으로 용과 대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용천휘는 제가 받은 권능을 전부 쏟아 백룡을 만났고 여의주를 빌렸다.
구슬을 쥔 용천휘가 천천히 경계 안으로 들어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이 실재한다는 걸 알면 그 바보가 용 사냥을 나선다고 하는 게 아닌지 몰라. 이건 절대 비밀로 해야지.”
지강백이 들어섰을 때는 아무 변화도 없던 경계 안쪽은, 용천휘의 걸음을 따라 무섭도록 기민하게 반응했다.
“……읏!”
“이런…….”
범광과 살막주가 쏟아지는 빛에 눈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우우우우우.
경계가 살아 있는 것처럼 울음을 토했다.
알지 못할 도형을 이루고 있는 호법위들이 손에 쥔 선장을 바닥에 꽂았다.
선장 위에 손을 얹은 그들이 입술을 달싹여 알아들을 수 없는 주(呪)를 외웠다. 그 소리가 경계의 울음과 더해져 거대한 파동이 되었다.
우우우우웅……
빛무리가 번져 갔다. 경계의 중앙을 축으로 무섭게 회전하는 듯했다.
그리고,
파아아앗.
거대한 빛의 폭발이 있었다.
범광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계속 보려고 했다간 눈이 멀었을 것이다.
범광이 눈을 뜬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쩌면 순간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아빠! 아니, 아버지!”
범광은 몹시 낯선 소리를 들었다.
한차례 살생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무림맹의 터에서 듣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반가움과 놀라움은 마치 제 것처럼 생생히 다가왔다.
체면을 잊고 살막주가 되돌아온 막내아들을 덥석 끌어안았다. 다 큰 막내아들은 부친에게 매달려 흐엉, 울음을 터트렸다.
이매로 변했던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범광이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 끝이구나.”
무림맹의 발족과 함께 생겨났던 그 모든 거짓과 고통이 이젠 사라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토록 가슴을 괴롭히던 것들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움푹 파인 빈 구덩이가 남은 듯했다.
빈 구덩이로 고여 드는 것은 안도와 한숨이었다. 허무도 섞여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안도가 훨씬 더 컸다.
“감원!”
“감원! 살아계셨습니까?”
범광은 고개를 들어 저를 부르는 사형제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슴의 빈 구덩이가 채워졌다.
범광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이매에서 되돌아온 사형제들이 어색해하면서도 그를 향해 달려와 주었다.
모든 게 끝났다.
범광은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게 새로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 * *
지강백이 용천휘의 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시간을 되돌렸다고?”
“음. 이 진 안에 포함된 것들만. 그 속에서 제한된 시간을.”
지강백의 오른손은 계지가 잘려 나갔던 흔적도 없었다. 독기가 완전히 사라진 몸은 온전히 가벼웠고, 지월의 육신을 상대하면서 얻은 상처들도 모두 사라졌다.
지강백이 아예 용천휘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절박함에 눈물이 핑 돌았을 것이다.
“다시 하자.”
“사형.”
“다시…… 숭산으로 가자. 그래서……”
“다시 하려면 천 년을 기다려야 해. 이 내단에 담긴 기운은 이미 다 써 버렸어.”
“…….”
지강백이 굳었다.
“그리고 사형이 바라는 것은 불가능해. 이 작은 진을 만드는 데도 천 년의 내단이 필요했어. 죽은 사람을 살려 내려면 얼마나 큰 진을 만들어야 하는지 나는 감도 잡을 수 없어. 이 내단의 천 배가 되는 내단이 있다고 해도 부족할 거야.”
“……그럼,”
죽은 사람을 되돌릴 수 없다는 얘기는 백룡이 앞서 용천휘에게 들려준 것이었다. 용천휘 또한 여의주를 빌리며 지강백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했다.
“내가 되돌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용천휘가 양쪽 색이 다른 눈으로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수라안이 사라진 왼쪽 눈이 말간 잿빛이었고, 그것은 수라안을 이식한 지강백의 왼쪽 눈과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그들에게 남은 것이었다.
거래의 대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상처이기도 했다.
“……그렇군.”
지강백이 마침내 용천휘의 어깨를 놓았다.
표정이 쓰고 어두웠다. 그것은 지강백의 가슴에 남은 빈 구덩이의 크기였다.
“하지만 아직 더 할 수 있기도 해.”
용천휘가 제 발밑의 관을 바라보았다.
그 관 속에는 용천무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호법위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했고, 용천휘는 그의 시신을 천산까지 옮겨 갈 생각이었다.
“나는 반쪽의 소교주였지. 내 몸이 완전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지만 나 스스로가 불성실하기도 했어. 나는 내가 가는 길이 천신이 이미 정해 놓은 길이라는 교리를 믿지 않았거든.”
용천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사형을 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나는 사형에게 내 눈을 주며 내 일부를 포기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사형은 그 눈으로 내 몸을 완전한 그림자가 되게 했지.”
그들이 아직 사형제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 인과를 좌시하지 않겠어. 대천혈성이 중원에 남긴 진을 서역으로 가져갈 거야.”
지강백은 용천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는 가능한 전부를 되돌리겠다는 말을 그렇게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내 힘이 대천혈성을 넘어서야 하고, 그건 아마 내 평생이 걸리겠지.”
용천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사형은 당장은 날 못 죽여. 사형 역시 대명천교의 중원행이 매번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 지월이 그랬던 것처럼.”
용천휘의 말이 맞았다.
지강백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도 있었다.
잃었기에 얻은 것이었고 잃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인과였다.
“우리의 빚 청산은 한참 더 미뤄야겠어. 동의해?”
“……그래. 동의한다.”
지강백의 답이 들려오자 호법위들이 걸어와 용천휘의 뒤에 긴 붉은 줄을 그렸다.
용천휘의 모습이 밤이 오기 직전의 그림자처럼 옅어져 갔다.
“이제 사문은 사형에게 맡길게.”
용천휘가 지강백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장문령부와 왕대환의 가죽 토시였다.
지강백이 내내 품에 넣어 다니던 것들이었다. 숭산에서 정신을 잃기 전까지 그것들은 지강백의 품속에 있었다.
그중 하나, 더듬이가 망가진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만이 없었다.
“내 약사가 보관하고 있었던 거야. 아마도 사형에게 돌려줄 시간을 만들지 못했겠지.”
“……그래.”
지강백이 그것들을 꾹 움켜쥐었다.
“그럼.”
용천휘의 모습이 스르륵 멀어져 갔다.
“잘 있어, 사형.”
“……그래. 가라.”
지강백의 인사를 끝으로 용천휘가 완전히 사라졌다.
“가능한 다신 보지 말자.”
지강백은 그만큼 주고받았으면 됐으리라 생각했다.
서역에서 온 자들이 고스란히 돌아갔으니 중원 또한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야 했다.
“아이고…… 저렇게 가 버리셨습니까요. 용 사형이.”
구악이 한발 늦게 용천휘가 떠난 자리를 찾아와 안타까움을 토했다.
지강백이 손을 들어 구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사형이 아직 한참 어린 사제를 달래는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그래도 뭐 그리 후딱 가 버린답니까. 인사도 않고서. 그간 쌓인 정도 있는뎁쇼.”
적하조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맞아! 쟤 너무 한 거 아냐? 다 같이 이 지옥을 헤쳐 왔는데 회포라도 풀지 않고서! 아버지가 그랬단 말이야. 평생지기가 생겼으면 언제라도 데리고 오라고. 술은 아낌없이 사 준다고 하셨는데.”
독귀가 적하조의 등짝을 찰싹 내리쳤다.
“이런 정신없는 놈. 너 같으면 그래 여기서 뭉그적대고 있겠냐? 무림맹 놈들이 마교 색출한답시고 다들 눈이 벌게져 있던 게 엊그젠데!”
“아얏, 아파. 아니, 뭐 설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겠어요? 정작 나쁜 놈이 지월이 아닌 그놈이었다는 걸 다들 머리가 달렸으면 이제 알 거 아니에요.”
“이놈이! 어디서 어르신께 말대꾸냐, 까악!”
“아이참. 영감도. 할 말 없으니까 그래 나오는 것 좀 봐. 그러지 말고 어서 새장가나 들어요. 더 늙어서 심보만 더 고약해지기 전에.”
“죽어라, 이놈! 까악!”
적하조가 도망쳤고 독귀가 그 뒤를 쫓았다.
둘의 여전한 말싸움은 각자에게 제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지강백이 장문령부를 품에 챙겨 넣고 몸을 돌렸다.
“이제 돌아가자.”
“어디로 말입니까요?”
“종남으로.”
구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럽시다. 저도 어서 돌아가고 싶지 뭡니까요. 남의집살이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서…….”
왕위환이 귀신같이 그 말을 주워들었다.
“귀신눈깔! 너 방금 뭐라고 했냐?”
구악은 의외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쳤다.
“가서 할 일이 아주 많다 이겁니다요. 아직 사부와 사형들 제상도 한 번 차리지 못했습니다요. 그 마음을 채주가 어찌 압니까?”
“아…… 니미. 그렇겠네. 쳇, 별수 없군.”
왕위환이 한쪽 목에 손을 대고 우두둑우두둑 관절을 꺾었다.
도끼를 한쪽 어깨에 걸친 형제들의 모습은 아주 비슷했다.
“할 일이 많다니 내 아우 된 도리로 거들어야지. 그럼 싸게 갑시다. 섬서까지 보통 먼 길이 아니지 않소.”
“으응……? 채주께서 같이 가신다고 말입니까요? 아니, 그럼 수채는 어쩌고요?”
“까짓 잠깐 비우는 게 뭐 어떻겠나. 총채주가 뒤통수 칠 게 아니라면 수채야 잘 있겠지. 섬서라면 예서 물길로 가는 게 더 빠르오. 배 더 탈 수 있겠소? 속이 괜찮으려나?”
구악이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아니, 그래도…… 수채를 비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왕위환이 버럭 성질을 냈다.
“아, 당분간이라고 했잖아! 당분간! 뭐 평생 그놈의 산골짜기서 뭉갤 줄 아나! 내가 그놈의 새소리 벌레 소리가 지겨워서 수적이 된 몸이야! 산 생활은 체질에 안 맞는다! 후딱 가서 일 보고 내려오게 싸게 가자니까! 큰형님 안 움직이실라면 나 혼자 갈 테요!”
모습은 왕대환과 닮았는데 말투나 행동은 염창을 연상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 가자. 고맙다.”
그 덕에 아무도 없는 종남산으로 가는 길이 아주 외롭지만은 않을 듯했다.
왕위환이 슬쩍 웃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이것들아! 우리도 간다! 배 띄울 준비해라!”
“예이, 채주!”
지강백을 시작으로 성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각자 길을 나섰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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