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억조창생(億兆蒼生) - 이 수많은 세상 사람들(1)
악몽이었다.
아니, 지옥이었다.
그들이 사천당문으로 오던 중 잠시 길을 잃었던 그곳에 조금 더 머물렀다면 거기가 지옥이 됐을 것이라 했다.
그 말을 지금 실감할 수 있었다.
“흐으…… 제, 제발…….”
적하조는 울면서 빌었다.
하늘 위든 땅 밑이든 누군가 듣는 이가 있다면 제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발……”
적하조가 장강수로십팔채에서 함께 따라온 수적의 입 안에 마지막 남은 탄구를 밀어 넣었다.
“흐윽, 윽…….”
눈물이 투루룩 쉴 새 없이 턱 끝으로 떨어졌다.
머리칼이 새하얗게 변한 수적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탄구를 삼켰다.
퍼엉!
수적이 적하조의 눈앞에서 비산했다.
쏟아지는 피 비를 맞으며 적하조가 흐느꼈다.
“안 된다, 이놈아!”
독귀의 음성에 적하조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이매가 보였다. 독귀가 달려와 저를 밀쳐 냈다. 이매는 그를 대신해 독귀의 어깨를 물었다.
“영감! 영감! 영가암!”
적하조가 절규했다. 독귀가 그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저리 가라고, 도망치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영가암!”
적하조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는 독귀의 어깨를 붙들고 맨 손가락으로 상처를 헤집었다. 이매독이 퍼지기 전에 상처를 도려내자고 했다.
“아파, 이놈아! 까악!”
독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좀 참아요! 참으란 말이야! 흐어어엉!”
“아픈 것을 어찌 참으란 말이냐, 까악! 난 놔두고 어서 도망쳐라! 까악!”
“참으라고!”
“도망 쳐…… 까…….”
평소에 늘 웃기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독귀의 새소리가 잦아들었다.
적하조는 희끗하게 세어 가고 있던 독귀의 머리칼이 완전히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카악!”
독귀가 입을 벌렸다.
적하조는 목덜미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저 멀리서는 남궁진현이 호곽을 물었다. 남궁진현에게 씹힌 손가락을 잘라 내려던 호곽은 그 전에 벌써 머리카락이 변하기 시작했다.
백사준은 이매로 변한 개방 제자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머리가 깨지며 뇌수가 흘렀다. 백사준이 그의 시체를 붙들고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그런 백사준의 발꿈치를, 또 다른 개방 제자가 물어뜯었다.
하오문주는 그때 그대로 도망칠 것을 뭘 또 얻어먹겠다고 여길 따라 들어왔을까 후회했다. 후회하며 이매의 얼굴을 내리쳐 이빨을 부수었다. 이빨을 부수며 다른 이매와 마주쳤다.
왕위환이 구악을 물었다. 구악은 수적을 물고 수적은 또 다른 누군가를 물려다 목이 잘렸다.
“…….”
쿵!
이매가 되어 버린 이들을 대신해서 마지막까지 절망하던 하나 남은 사람도 쓰러졌다.
그로서 새하얀 지옥이 펼쳐졌다.
“그으으…….”
이매 중 하나가 목에서 그륵 소리를 냈다.
이매들의 고개가 일제히 장원 안쪽을 향해 돌아갔다.
내원 어딘가에서, 정확히는 범전 앞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크으으으…….”
이매들이 범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지강백의 눈에 핏기가 돋아났다.
“…….”
그는 이 사람들을 벨 수 없었다.
죽는 게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완전히 사라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베고 나면 끝이었다.
강호에는 더 이상 종남파를 마교라 부를 사람이 없어지겠지만 그 사실을 알아줄 사람도 더는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지강백이 칼을 쥐며 욕설을 내뱉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이매들을 모두 덮을 정도로 거대한 검막을 펼칠 수도 있었다.
검막은 이매들을 덮어 이들을 모두 제 무게만큼의 핏덩이로 만들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지강백이 느끼는 것은 무력감이었다.
고작 욕설을 뱉어 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스스로의 무력감에 치가 떨렸다.
“제가……”
제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부님.
지강백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양영천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산 자가 아무리 절박하게 외쳐도 결코 들을 수 없는 곳에 머문다는 뜻이었다.
이매가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지강백은 그가 독귀임을 알아보았다.
독귀가 저를 아가라고 불렀던 날이 떠올랐다. 지강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사부 양영천이 가끔 기분이 좋을 땐 그처럼 저를 아가라고 불렀던 기억이 맞물렸던 탓이었다.
“독공.”
지강백이 그를 불렀다.
독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강백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힘껏 물었다.
“어르신은 평생 제 업이 될 것입니다.”
지강백이 칼을 치켜들었다.
물기는 없었지만 꼭 우는 것 같은 시선이 독귀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하나도 잊지 않을 것이다.
모두 기억할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지강백이 절을 하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동시에 이미 집어삼킨 줄 알았던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그가 검을 세웠다.
십이성의 대천강검이 독귀의 목을 단숨에 잘라 냈을 것이다.
공기의 흐름이, 갑자기 잘려 나간 것처럼 뚝 멎지 않았다면.
“……?”
지강백이 고개를 들었고 동시에 수라안이 발현되었다.
수라안이 허공에 생겨난 균열을 보여 주었다. 균열은 정확히 지강백과 이매들을 양측으로 나누었고, 이매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더는 지강백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시간을 딱 맞춰 도착했군.”
용천휘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언젠가 보았던 수십 명의 호법위들이 그와 함께였다.
용천휘는 길을 잃었던 그곳에서 불쑥 나타났던 것처럼, 지금도 전혀 흔적 없이 그 자리에 생겨났다.
“어떻게 된 거냐?”
“결계를 그렸지. 사실 이것 때문에 좀 멀리 갔었어.”
용천휘의 말에 지강백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나?”
“설마.”
용천휘의 오른쪽 눈이 붉어졌다.
눈을 나눠 가진 그때부터 지강백은 용천휘를 보고 있으면 꼭 거울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천신이라고 해도 미래를 보는 건 아니야. 단지 흐름을 읽을 뿐이지. 나는 흐름을 살폈고, 그래서 짐작했지.”
“뭐를?”
“저들을.”
용천휘가 지강백의 어깨를 툭 쳤다.
“가 봐, 사형. 이자들은 내가 맡을게.”
“어떻게 하려는 거냐?”
“말했듯이, 결계를 칠거야. 사형이 우리 거래를 완수하는 동안.”
“그자를 죽이면 이 사람들이 되돌아오나?”
“그건 아니야. 대신 이매들은 얌전해질 거야. 지금 이매들에게 씌워진 명령은 하나야. 지월이 아닌 자를 지킬 것.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중이니 그자를 죽이면 더는 움직이지 않아.”
“되돌릴 방법은 없나?”
“있어.”
용천휘는 딱 잘라 지금 가장 절실한 말을 들려주었다.
“그러니 사형은 걱정 말고 거래를 완수하고 와.”
저절로 입이 움직였다.
지강백은 결코 용천휘에게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말을 했다.
“……고맙다.”
그리고 지강백이 몸을 돌렸다.
* * *
“빌어먹을…… 이제 이 몸은 쓸 수가 없어!”
용천무가 흘러내리는 내장을 배 속으로 쑤셔 넣으며 말했다.
이어서 그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던 채희유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었다.
채희유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저항했지만 이미 용천무는 범전 앞이었다.
“아쉽지만 그 몸이라도 써야 해!”
살막주로 가장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간 다음 훗날을 도모해야 했다.
“네년을 갈아 마셔도 시원찮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으니…….”
용천무가 씹어뱉고 싶다는 듯 채희유를 노려보았다.
채희유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쾅!
범전에 도달한 용천무가 문을 발로 걷어찼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채희유를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채희유가 고통으로 인해 이를 물고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왜 없는 거야!”
다음 순간 용천무가 소리를 질렀다.
없었다. 본신을 감춰 둔 관 옆에 나란히 누워 있어야 할 살막주의 몸이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거야!”
용천무가 채희유의 멱살을 쥐었다.
“아아!”
채희유의 여린 몸이 대롱대롱 들렸다. 용천무가 채희유를 앞뒤로 흔들며 소리쳤다.
“네가 감추었나? 응? 이번에도 네가 놓아준 거야? 그 땡중처럼?”
“아, 아니…… 아니……!”
“아니긴 뭐가 아냐!”
쾅!
용천무가 채희유를 방금 전까지 살막주의 몸이 놓여 있던 곳에 강제로 눕혔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파루나의 몸이라도 쓰겠어. 계집 몸속에 들어가는 기분이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지만, 별수 없지. 급하니 아무 껍데기라도 쓸 수밖에.”
채희유가 양팔과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어차피 네년도 대법을 쓰려고 했잖아? 잘된 일이야. 스스로 제물이 된다는 걸 빼면.”
용천무가 힘으로 채희유를 내리눌렀다.
몸을 움직임에 따라 배가 갈라지며 억지로 쑤셔 넣었던 내장이 다시 흘러내렸다.
용천무가 혀를 찼다.
“빌어먹을. 한시도 더는 못 버티겠군.”
우당탕, 쾅!
용천무는 제 본신이 들어 있는 관을 열었다. 본신은 뿌옇고 희한한 향이 나는 걸쭉한 물에 잠겨 있었다. 용천무는 채희유를 들어 그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으흡!”
채희유가 어쩔 수 없이 그 이상한 물을 들이켰다.
“더 마셔. 배가 찢어질 때까지 마시라고. 원래는 이렇게 하면 안 되지만 급하니 별수 있나.”
채희유의 머리를 단단히 붙든 용천무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야 간신히 고개를 들도록 해 주었다.
“으흡…… 쿨럭! 하지…… 마,”
“닥쳐! 네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지껄이는 거야! 너는 내게서 대법만 빼앗으려고 했잖아. 간악한 계집 같으니. 그게 다 놈을 위한 거였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파루나 주제에 되도 않는 사랑 놀음에 넋이 빠져서는.”
첨벙!
용천무가 다시 흰 물에 채희유의 머리를 담갔다.
채희유가 팔을 버둥이며 그에게 손톱을 찔러 넣었다. 곧 맹독이 새어 나와 용천무의 하나 남은 팔을 새카맣게 물들이기 시작했지만 용천무는 눈썹 한 올 까닥하지 않았다.
“내가 네년이 되어 주지. 그래서 네년이 죽고 못 사는 그놈 심장에 독이 바싹 오른 손톱을 꽂아 주지. 그놈은 병신처럼 아무 짓도 못 하고 있다가 독에 맞아 뒈질 거야. 정말이지 파루나다운 결말이 되겠군.”
용천무가 킬킬 웃어 댔다.
채희유가 죽기 직전이 돼서야 다시 고개를 들게 해 준 그가 고개를 바싹 들이밀었다.
“다 마셨어? 좋아, 그럼 다음 단계로 가자고. 그 배 속에 향불을 좀 쑤셔 넣어도 되겠지? 원래는 향에 오래 절여야 하지만 지금은 뭐, 시간이 없으니까.”
채희유의 눈이 짙은 녹색이 되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기이한 자색 운무가 새어 나왔다. 용천무가 그녀를 비웃었다.
“마음대로 하라고! 어차피 이 몸은 글렀어. 더 망가지든 말든 대법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고 있으면 돼.”
채희유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과연 그럴까?”
채희유가 손을 뻗었다.
새파래진 손톱 끝에 투명한 독기가 고여 들었다. 채희유가 그것을 용천무의 본신이 놓인 관 위로 가져갔다.
“뭐 하는 거야!”
“네 본신은 죽일 수 있어.”
“이 망할! 당장 멈춰!”
퍼엉!
용천무가 채희유의 가슴을 향해 대력금강장을 쏟아 냈다.
“……!”
채희유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갔다.
“채 소저!”
지강백이 범전 안으로 뛰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 돼!”
백색의 검강이 불쑥 솟구쳤다. 지강백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망할! 벌써 그 이매들을 처리했다고? 말도 안 돼!”
용천무가 왼팔을 휘둘러 대천강검을 받아 냈다.
하지만 지강백의 검 또한 지월이 그랬던 것처럼 초식을 벗어나 있었다. 대천강검은 소리 없이 태을분광검이, 이어서 태을무형검이 되었다.
초식이 없음에 검로가 보이지 않는 검이 순식간에 왼팔을 꿰뚫었다.
“……뭐?”
용천무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제 팔과 지강백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지강백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팔을 옆으로 움직였다.
슥! 덜컥!
왼팔이 그대로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무슨!”
용천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두 팔이 없는 몸을 뒤로 틀며 지강백을 향해 발을 차올렸다. 항마연환심퇴였다.
슥!
이어서 오른쪽 다리도 잘렸다.
“으, 으아아악!”
몸의 균형을 잃은 용천무가 뒤로 넘어졌다.
지강백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검을 수직으로 치켜세웠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라. 그것으로 네 죄를 씻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다.”
“아, 안 돼!”
지강백이 용천무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으…… 크! 크읏!”
용천무가 울컥울컥 피를 내뱉었다. 그의 입술이 꼭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쉼 없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스륵!
지강백이 심장에 박았던 칼을 뽑았다. 그와 동시에,
“……!”
용천무가 두 눈을 부릅뜬 그대로 완전히 멈춰 버렸다.
“하……!”
멈춰 버린 용천무와는 반대로 지강백은 아주 긴 한숨을 토했다.
그가 손을 뻗어 용천무의 눈을 감겼다.
“이젠 편히 잠드십시오. ……대사.”
그가 감긴 것은 지월의 눈이었다.
사지 중 셋이 잘리고 나서야 지월은 비로소 지월로 돌아왔다.
용천휘가 종남산에 오름으로써 시작된 모든 일들이 비로소 끝이 났다.
지월이 다시 지월이 된 것처럼, 끝이 난 것들도 차근히 제자리를 찾게 될 터였다.
* * *
지강백이 몸을 돌렸다.
“채 소저!”
그가 바닥에 쓰러진 채희유를 안아 들었다.
채희유의 입에서 울컥울컥 피가 흘렀다. 지강백은 채희유의 옷깃을 풀러 명문에 손을 가져갔다.
“괜찮을 겁니다. 괜찮을 겁니다. 죽지 마십시오. 죽으면 안 됩니다.”
지강백이 채희유의 명문을 통해 진기를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 손을 채희유가 붙들었다.
“채 소저!”
채희유가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뭐라 하셨습니까?”
지강백은 채희유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낮춰 그녀의 입술로 귀를 가져갔다.
“……게 아니…… 고,”
아주 작은 소리가 귀를 건드렸다.
지강백은 안타까운 마음에 좀 더 고개를 숙였다. 채희유가 희미하게 웃으며 지강백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그조차도 안타까웠다. 채희유는 아마도 지강백을 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또렷해진 그녀의 말은 지강백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끝……난 게 아니……라고, 이 병신아.”
“……!”
지강백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굳은 것은 표정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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