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114화 (114/346)

제114화 스승의 은덕

고요했다.

마치 거대한 무덤 속에 발을 집어넣은 것 같았다.

“흡……!”

“이, 이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지강백 일행뿐이었다.

무림맹의 정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으로 차마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무림맹에 속한 사람들은 마치 지강백 일행을 환영하는 것처럼 나란히 서서 가운데 길을 비워 두고 있었다.

천에 달하는 구파일방의 사람들이 전부 머리칼이 새하얬다.

이매가 된 것이다.

그들의 끝에는 지월이 아닌 자가 있었다.

검게 변한 피부가 구겨진 종잇장처럼 우그러진 괴상한 모습으로.

“잘도 모여들었군.”

용천무는 수화문으로 이어진 계단의 난간에 걸터앉아 지강백을 비롯한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들이 모두 저 하나를 죽이려고 온 사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적하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지월 대사가 아닌 걸 알겠다. 아직도 몰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네.”

남궁진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눈치를 챘을 것이다.”

“음? 아니, 뭐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

적하조가 굳은 얼굴로 이매들을 돌아보았다.

“……아아! 그래서 무림맹 사람들을 죄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구나! 정체를 들켰으니까!”

이매들은 인형처럼 말없이 서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완전히 침묵하는 모습은 낯설고도 섬뜩했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그들 모두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굳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지만, 용천무가 마음먹기에 따라 곧 적이 되어 덤벼들 것이다.

무고한 피가 얼마나 흐를지 알 수 없었다.

“저, 저 악귀 같은 놈! 생각해 보면 이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다 저놈한테 속았을 뿐이잖아!”

적하조가 용천무를 향해 악을 썼다.

용천무가 고개를 돌려 적하조를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입을 조심해라. 이 몸이 누군지 알고 함부로 지껄이는 게냐.”

“조심하긴 뭘 조심해! 네가 누군지 아냐고? 그래, 잘 안다! 마교 교주의 사생아잖아. 사생아로 태어난 게 억울하면 지네 집안에서 싸울 것이지 왜 중원까지 와서 이 짓거리야!”

“갈!”

용천무가 소리를 질렀다.

가늠할 수 없는 내력이 실려 있는 음성은 그 자체로 음공이나 다를 바 없었다.

“으윽!”

적하조가 인상을 쓰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이 그래야 했다.

적하조는 귀를 막은 채로도 기어코 할 말을 했다.

“이 사람들이나 멀쩡하게 돌려놔! 그래야 죽을 때 조금이라도 곱게 죽지!”

“버러지가 잘도 지껄여 대는구나!”

용천무가 앉은 자리에서 왼 손바닥을 내밀었다.

적하조를 노린 대륜회겁륜장이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캉!

그 앞을 지강백이 막아섰다. 칼로 장을 받아치는데 엉뚱하게도 쇳소리가 울렸다.

“놈……!”

용천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짐작하던 지강백이 아니었다.

“그새…… 성장했더냐?”

지강백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너처럼 죽은 몸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살아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제 정체가 모두 들통 났다는 당혹감은 용천무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래 봤자 중원의 버러지 중 하나렷다! 중원 땅에서 이 몸을 넘을 수 있는 자가 있더냐!”

용천무가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가사 자락이 폭우에 휩쓸린 것처럼 펄럭였다. 전신의 힘을 모두 개방한 지월의 주변으로 기의 바람이 몰아쳤다.

“말했듯이, 살아 있는 사람은 계속 성장하니까. 네가 차지한 그 몸이 죽은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것과는 달리.”

카카가각!

지강백의 검이 거친 검울음을 토했다. 곧 검신에서 파르스름한 검강이 솟구쳤다.

동시에 지강백의 왼쪽 눈이 붉어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몸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어디가 망가지고, 어디를 쓸 수 없는지.”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용천무의 오른팔이었다.

반은 썩어서 뭉개진 팔은 이미 팔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수라안은 소매 안에 감춰진 그 팔의 민낯을 낱낱이 보여 주었다. 지강백은 지월의 오른팔에서 오뢰정인의 흔적을 보았다.

뭔가가 울컥 치솟았다.

“사부님…….”

어찌 모를 것인가.

지월에게 그런 상처를 남긴 것이 누군지를.

지강백이 입술을 짓씹어 자칫 흔들리려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는 오로지 검 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파르스름하던 검강은 색이 짙어지다 못해 시린 백색이 되었다.

용천무의 눈빛이 달라졌다.

“성장했다더니…… 그래도 이 몸은 중원제일인이다!”

우르릉, 쾅!

용천무가 소매를 흔들어 연달아 대륜회겁륜장을 뿌려 냈다.

이미 초식을 벗어난 지월의 무공은 형태가 없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웠고 위력적이었다.

시작은 대륜회겁륜장이었으나 공기의 파동에 따라, 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장은 지공이 되기도 했고 권풍이 되기도 했다.

수라안이 짙어졌다.

카캉, 캉! 스으읏, 슷!

지강백은 쉬임 없이 날아드는 내기의 덩어리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검강으로 받아쳤다.

“읏……!”

용천무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얼핏 보기에는 용천무의 공격을 지강백이 모두 막아 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 이상이었다.

지강백은 방어와 동시에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읏. 제대로 쳐다도 못 보겠네.”

적하조가 뒷걸음질을 치며 인상을 썼다.

그의 말대로 내력이 약한 이들은 두 눈에 힘을 주고 있기도 어려웠다.

감히 누구도 저 둘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행은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차근히 거리를 좁힌 지강백이 말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오른발을 반보 앞으로 내디디며 그것을 축으로 삼아 신형을 솟구쳤다.

“하압!”

기합 소리가 울렸다.

수라안이 용천무를 붉은 점과 선으로 해체했다. 지강백은 그중 이음이 끊어져 검은 구멍처럼 보이는 부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슷!

털썩!

검이 잘라 낸 것은 용천무의 오른팔이었다.

“……흐, 흐…… 으아아악!”

용천무가 한발 늦게 비명을 질렀다.

감각이 둔화될 대로 둔해진 그는 제 팔이 잘리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팔이 지면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광경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제 팔임을 이해했다.

“네, 네 이놈!”

“지월 대사는 내게 칠 년을 말씀하셨지. 하지만 나는 칠 년을 앞당겼다. 그리고 그건 모두가 사부님의 은덕이겠군.”

용천무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사부……? 주제도 모르고 나서다 내게 머리통이 쪼개긴 그 버러지에게 무슨 놈의 은덕이냐!”

파스스스…….

용천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불영선하보였다.

몸이 움직일 때의 잔상과 잔상을 겹쳐 마치 운무에 감싸인 듯 신형을 감추는 위력을 발휘했다.

감각이 둔화됐다는 것에도 좋은 점은 하나 있었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오른팔을 쓰지 않은 지 꽤 시간이 지난 터라 잘려 나갔다 해도 딱히 불편할 점은 없었다.

탓, 타다닷!

불영선하보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용천무는 지풍을 날려 보냈다.

캉, 캉, 캉, 캉!

지강백은 검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운 그 위력적인 지풍들을 칼날로 받아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움직임이었으나, 사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불영선하보와 동시에 전개되는 일지선은 속도를 더해 위력을 높였다. 모든 게 극에 달하면 속도 또한 힘이 된다는 것을 지강백은 지금 알았다.

수라안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정확히 받아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수라안은 날 때부터 제 눈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지강백의 왼쪽 눈이 마치 점멸하는 것처럼 붉은빛을 뿌려 댔다.

“한 가지는 알겠군. 너는 그 몸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꺼리고 있어.”

“……내가 그렇다고?”

“아니라 할 수는 없겠지.”

탓!

지강백은 일지선을 퉁겨 내며 회심퇴로 지면을 걷어찼다. 그 반동으로 그의 몸은 쏘아진 활처럼 용천무를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용천무의 표정이 변했다.

“그럴 줄 알았지.”

슷!

용천무가 그 자세 그대로 갑자기 지강백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공간을 뚝 잘라 낸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극에 달한 금강부동신법이 만들어 내는 무서운 결과였다.

“죽어라!”

휘익!

용천무가 갈퀴처럼 세운 왼손을 휘둘렀다.

지강백이 좌측으로 다급히 몸을 꺾으며 검날을 세웠다.

수라안이 반짝였다. 마치 원래 그렇게 되려고 했던 것처럼, 용천무의 중지와 약지에 검날이 정확히 파고들었다.

외공 계열의 모든 무공이 그렇듯 응조공에도 단련하며 생기는 조문(罩門: 약점)이 있었다.

지월의 조문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응조공은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칼날에 걸렸다.

용천무의 얼굴이 시든 열매처럼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조문을 안 거지?”

“그걸 네가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하군.”

“그, 그게…….”

혼란스러워하던 용천무는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 눈……! 설마 그게 수라안이었더냐!”

용천무는 한 번도 수라안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수라안은 용천휘의 것이었다. 그가 대면한 교주는 이미 수라안을 잃은 상태였다.

“몰랐던 건가. 그렇다면 너는 네 집안에서도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됐다는 거로군.”

“이익! 닥쳐라!”

용천무가 왼 손가락에 검을 끼워 넣은 채로 대력금강장을 뿜어냈다.

퍼엉!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읏,”

츠츳!

눈이 시린 백색의 검강에 미묘한 금이 생겨났다.

용천무는 피투성이가 된 왼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깨어나라! 깨어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라!”

내력이 실린 음성은 이매들을 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우어어어…….”

“으하……!”

일천에 달하는 이매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이런!!”

“시작되는 건가!”

지강백 일행이 각자 병기를 들어 올리며 이매들에게 맞섰다.

쐐액!

지강백은 등 뒤에서 몰아닥치는 기척들을 느꼈다.

서른이 넘는 이매들이 그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이 구파일방의 절정 고수들이었다.

“이런 것을 동족상잔이라고 한다지. 어디 한번 즐겨 봐라. 이 개싸움을.”

용천무가 그 틈을 노려 달아났다.

지강백은 등 뒤에서 날아드는 검을 걷어 내며 일행을 살폈다.

호곽이 지강백을 향해 소리쳤다.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어서 놈을 처리하게!”

지강백이 망설였다.

이매가 되어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긴 하나 이들은 모두 구파일방의 고수들이었다.

일행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적의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놈을 처리하는 게 우선일세!”

왼팔로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 남궁진현이 그 말을 거들었다.

“아까 보았나? 이들은 그자의 말에 따라 반응하고 있어. 그자를 처리하면 모두 해결될 걸세. 자네가 이들을 모두 상대하고 있는 것보다 그자를 없애는 게 훨씬 더 나아.”

남궁진현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카앙!

지강백은 곤륜파 제자들의 검을 잘라 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믿고 맡기래도! ……흐압!”

그 말을 증명하듯 호곽의 삼첨양인도가 호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촤앗!

누군가의 핏물이 길게 튀어 바닥을 덮은 미장석을 적셨다.

그 누군가도 어쩌면 일행과 연이 있던 인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둘러 돌아오겠습니다.”

용천무를 빨리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강백은 착잡한 마음을 억지로 접고, 용천무가 사라진 길을 내달렸다.

* * *

용천무가 달려간 곳은 범전이었다.

그곳에는 모두 세 명이 있었다.

관에 담긴 용천무의 본신과, 그 본신을 해하기 위해 잠입했으나 채희유의 결계를 넘지 못하고 족적을 들킨 살막주 적길연.

그리고 그를 진천금혼대법에 이용해 용천무의 새로운 육신으로 만들 준비를 마친 채희유였다.

이제 용천무가 대법의 핵심이 되는 요문(要文)을 알려 주면 채희유는 금천진혼대법의 전부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

“결계를 풀어 줘! 빌어먹을!”

용천무가 범전 입구에서 소리를 질렀다.

“문을 열면 된다.”

채희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용천무가 벌컥 들이닥쳤다.

그의 온몸에서 풍겨 오는 역한 비린내에 채희유가 인상을 썼다.

“준비는? 준비는 다 된 거야?”

“그래.”

용천무가 자신의 본신과 나란히 놓인 살막주를 보며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기껏 구한 새 몸이 고작 살수라니…….”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족해! 부족하다고!”

용천무가 채희유의 얼굴 앞에 잘려 나간 오른팔을 들고 흔들었다.

“봤어? 종남파의 그 버러지가 내 오른팔을 잘라 냈다! 중원제일인의 오른팔을! 빌어먹을! 놈은 성장했어! 벌써 이 몸을 넘어섰을지도 몰라! 그런데 너는 고작 내게 이따위 몸에 만족하라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서 요문을 알려 줘.”

“안 돼! 그럴 수 없어! 이 몸으로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절대 그럴 수 없어!”

용천무가 피로 물든 왼손으로 채희유의 어깨를 붙들었다.

“놔!”

채희유가 소스라치게 놀라 몸서리를 쳤다.

“가만히 있어! 지금 이런 걸 가릴 때야? 너나 나나 다 죽게 생겼다고!”

“이매들이 있으니 시간은 넉넉히 벌 수 있어. 새 몸을 얻어 도망치면 될 것이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도망이나 치라는 거야! 여기서도 도망치면 교는 언제 내 것이 되나! 그럴 수는 없어!”

“어쩔 수 없다.”

“그놈 하나만…… 그놈 하나만 없애면 돼. 그놈 말고는 다들 잔챙이들이니까. 대체 그놈은 어디서 그런…… 아!”

용천무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놈 몸을 차지하면 되잖아! 좋아, 좋아! 그런 방법이 있었어! 그놈을 새 몸으로 쓰는 거야!”

순간 채희유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용천무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중원제일인의 몸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자를 어떻게 대법에 이용할 수 있나?”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용천무가 채희유의 어깨를 틀어쥐었다. 채희유는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파루나가 인간 하나 못 다루는 게 말이 돼?”

“아니…… 그런 자라면 나도 상대할 수 없……”

“해야 해!”

용천무가 잡아 뽑을 듯이 채희유의 어깨를 당겨 바싹 눈을 들이댔다.

“잘 들어. 나는 고작 저런 몸 따위에 대법을 넘길 수 없어. 그러니 반드시 그놈의 몸을 가져와.”

“그러다…… 그가 나를 먼저 죽이면? 그 생각은 안 해봤느냐? 뭐든 네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야.”

“네년은 내가 천치인 줄 아나? 네가 쳐 놓은 저 독의 결계는 이 몸으로도 넘나들 수 없어. 네 몸에 가둔 독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해?”

“그는…… 그는 안 돼. 그는……”

“제기랄!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거야! 너는 그놈이 어떤지 본 적도 없잖아! 왜 안 된다고만…… 가만.”

용천무의 눈이 홱 돌아갔다.

“너는 그놈을 잘 알지 않나?”

“……뭐?”

“네가 중원에 와서 한동안 종남에 머물렀잖아. 그런데 그놈을 모른다고? 분명 나는 네가 그놈과 한 마차에 올라 있는 걸 봤는데?”

“…….”

채희유의 동공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누굴 말하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종남파의 그놈 말이다. 반쪽짜리 병신 형님이 노상 놈을 끼고돌았으니 너 역시 그랬을 거잖아? 그런데도 놈을 상대 못 해? 왜지?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있나?”

채희유는 거짓말을 해야 될 때라는 것을 알았다.

능숙하게 감정의 동요를 가리고 무감한 거짓으로 용천무의 의심을 덮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떨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자는…… 나를 죽이려 들 거야. 왜냐면 나를…… 나를 아니까. 내가 소야를 배신한 것을 아니까.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그래. 그러니까 그 전에 네가 놈을 죽여. 그러면 되잖아.”

키기기기긱!

그때 결계에서 반응이 왔다.

누군가가 결계 안으로 침입하려 든다는 뜻이었다.

“제기랄! 벌써 오다니! 자, 어서 가 봐.”

용천무가 채희유의 등을 떠밀었다.

“명심해. 요문 없이는 대법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

채희유가 눈을 꼭 감았다.

지강백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를 대법의 제물로 만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 독의 결계 안에서 중독이 되도록 만들 수도 없었다.

“나, 나는…….”

키이이익!

결계가 요동을 쳤다.

채희유가 입술을 짓씹으며 범전을 나섰다.

이 사이에 물린 여윈 입술에서 피가 방울져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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