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제삼의 지옥
“…….”
칼을 쥔 손이 멎었다.
남궁진현이 달라 하면 기꺼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허나 사문의 복수를 하고 드리겠습니다.”
남궁진현이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뜨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내가 네놈을 어찌 믿을 수 있느냐. 너를 믿은 대가로 나는 팔을 잃었다. 지금 당장 잘라라.”
“…….”
지강백이 입술을 꾹 물었다.
여전히 갈등이 일어나는 마음과는 달리, 왼손은 제 것이 아닌 양 저절로 움직였다.
슷!
왼손이 검을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사형.”
기척도 없이 나타난 용천휘가 지강백의 왼팔을 붙들었다.
“……?”
“정신 차려, 사형.”
용천휘가 손가락을 들어 지강백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곳에 들어서기 전, 남궁진현이 제 손으로 풀어 건넨 남궁가의 검이 매달려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분명 지강백은 그 검을 왼손으로 쥐고 있었다.
지강백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똑같은 두 개의 검을 번갈아 보았다.
“사형이 정신 차릴 때가 됐다는 소리지.”
남궁진현은 용천휘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강백을 채근했다.
“어서 잘라라, 어서!”
용천휘 또한 그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형이 보고 있는 것은 사형의 머릿속이야.”
“내…… 머릿속?”
“이 공간은 현실이 아니야. 가장 닿기 싫은 가슴 밑바닥 같은 곳이지.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곳. 구천(九天)의 한 곳이자 인간들이 백팔 지옥이라 부르는 곳 중 하나야.”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지옥이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더 헤맨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루를 더 머물게 된다면 목숨을 끊을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리고 너는? 너는 어떻게 여기 있나?”
“누군가 이곳으로 가는 문을 열어 놨어.”
용천휘가 지강백의 손에서 남궁진현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그 검은 곧 안개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지강백이 놀란 얼굴로 용천휘를 마주 보았다.
“그게 누군데?”
용천휘가 한쪽만 붉은 눈으로 지강백을 마주 보았다.
“문을 여는 방법을 아는 사람. 내가 그림자가 된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
지강백은 용천휘의 지금 표정이 낯설다고 느꼈다.
용천휘는 무언가를 안타까워하는 사람처럼 그를 보았다. 지강백이 또렷한 정신으로 그런 용천휘의 표정을 마주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형이 마음을 다칠지언정 몸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겠지.”
“…….”
지강백은 비로소 용천휘의 표정을 이해했다.
그가 말하는 사람은 채희유였다.
“가자. 여기서 나가야지.”
지강백이 몸을 일으켰다.
잔상처럼 희미해진 남궁진현이 노한 얼굴로 그에게 소리쳤다.
“어디를 가는 것이냐! 어서 네 팔을 잘라라!”
지강백이 용천휘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지강백이 걸음을 돌려 남궁진현의 앞에 섰다.
그는 예전에 했어야 했을, 그러나 하지 못했던 일을 했다.
그가 남궁진현 앞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정좌했다.
“구명지은에 감사합니다. 저는 사문의 마지막 사람이었으니 남궁 대협이 베푸신 은혜는 단지 제 목숨 하나가 아닙니다. 무엇으로 갚아도 부족하다는 것을 압니다.”
남궁진현의 입술이 달싹였다.
부족하다, 고 말하는 듯했다.
“허나 제 팔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제 목숨이 그저 제 것이 아니듯, 제 팔 또한 반드시 쓸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강백은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슷!
“……읏,”
엉뚱하게도 신음은 용천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강백이 잘라 낸 오른손 계지(季指: 새끼손가락)가 피에 젖어 바닥을 굴렀다.
“그러니 이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남궁진현이 무어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잠시 더 머물다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지강백은 끝까지 남궁진현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용천휘가 혀를 찼다.
“저 섬격검이 진짜가 아니라는 건 말해 줬잖아. 사형이 손가락을 잘라 주든 팔을 잘라 주든 진짜 섬격검은 모른다고.”
“알아. 하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굳이 오른 손가락을 잘라 낼 건 또 뭐야. 검을 쥐는 손이잖아.”
“검을 쥐지 않는 손이라면 의미가 없다.”
“나 참.”
용천휘의 눈이 잠시 더 피로 물든 손에 머물렀다.
“손가락이 하나 없어졌다는 것은 꽤 많은 것을 의미할 텐데. 괜찮겠어? 사형은 천하제일기의 주인을 상대해야 해.”
“각오한 바다.”
“그렇게 많은 걸 겪고도 끝내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건 높이 사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미련했어.”
“길이나 안내해.”
용천휘가 지강백의 손을 잡았다.
“이쪽이야.”
“손은 놔라.”
“눈을 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
“눈을 감으라고? 왜?”
“섬격검에게 손가락을 줬으니 다음에 나올 인간한테는 뭘 더 줄지 몰라서. 어서 눈 감아.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감고 있어.”
지강백이 눈을 감았다.
때마침 저 멀리서 슬며시 생겨나던 왕대환의 모습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용천휘는 지강백을 대신해서 왕대환의 잔상에 까닥 눈인사를 보냈다.
양영천이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였다면 지강백은 눈을 감고서도 기어코 알아보았을 것이다.
“절대 뜨지 마.”
지강백의 손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용천휘는 여전한 안개 밭 속에서 한 발 한 발 신중히 걸음을 옮겼다.
* * *
“이제 됐어. 눈 떠.”
용천휘의 목소리에 지강백이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끝도 없는 안개 밭을 대신해 어둑하고 습기 찬, 낯선 공간이었다.
지강백은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로 기묘한 곳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무…… 속인가?”
아주 거대한 나무의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송진에 젖은 거칠고 축축한 나뭇결의 모양 같은 것이 보였다.
“사형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군.”
용천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가장 중심에는 뭐가 보여?”
“중심이라니?”
“사형이 생각할 때 중심처럼 보이는 곳을 보면 돼.”
지강백은 가장 나중에 눈길이 닿는 곳을 가리켰다.
“저곳.”
“뭐가 있어?”
커다란 벌집이 보였다.
수천, 수만 마리의 벌들이 우글대며 벌집의 크고 작은 틈새를 넘나들었다.
“벌집.”
“수라안으로 봐.”
왼쪽 눈이 붉어졌다. 마치 보조를 맞추듯 용천휘의 오른쪽 눈이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내가 안내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나가는 문은 사형이 열어야 해.”
“그건 왜지?”
“내 눈은 이제 흐름만을 볼 수 있으니까.”
완벽한 한 쌍의 수라안일 때와 다르다는 얘기였다.
지금 용천휘는 지강백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지강백이 그렇듯이.
“열 수 있겠어? 나는 함께 나갈 수 없어. 아직 성도에 도착하지 못했거든. 여기는 천산과 이어져 있어서 와 볼 수 있었던 거야. 사형 혼자 문을 열고 나가야 해.”
“해 보겠다.”
지강백이 검을 치켜세우고 벌집 앞으로 향했다.
위이잉!
애애애앵!
수천 마리의 벌들이 숫자를 불렸다. 수만이 아니라 수십만이 될지도 몰랐다.
“……아니, 해야겠지.”
지강백은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호흡을 따라 마음이 가라앉았다. 깊이, 더 깊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 지강백의 마음속에 펼쳐진 것은 비 오는 숭산의 광경이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지워지지 않는 주름처럼 입가에 매단 노승이 비를 맞고 있었다.
노승은 소매를 내저었다. 그 모습이 꼭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팔랑이는 소매를 따라 나비들이 날개를 흔들었다.
그 작은 바람에 세차게 쏟아지던 빗방울들이 밀려갔다.
노승의 미소는 깊어졌고, 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맑아졌다.
지강백은 노승을 마주하며 저도 웃어 보였다.
‘대사께서는 평생 비를 맞으실 일이 없을 듯합니다.’
노승이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도 그리될 걸세. 칠 년이 지나면.’
지강백이 답했다.
‘아니요.’
그가 조용히 눈을 감고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간 손은 검을 쥐는 모양새도 사뭇 달랐다. 빈 손가락을 의식해 더 신중히, 손가락 하나하나의 쓰임새와 의미를 따져서 쥐게 되었다.
지강백은 그것이 손가락 하나의 빈자리만큼 허전한 것이 아니라 외려 묵직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살아남기 위해 치른 대가였고 빚이었다. 속죄이자 깨달음이었다. 이것은 지강백이 저울의 반대편에 내려놓은 추였다.
그래서 답할 수 있었다.
‘칠 년 뒤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강백의 검이 한없이 가벼운 소맷자락처럼 나부꼈다. 이어서 그의 검은 나비가 되었다. 그 작은 바람이 빗방울을 퉁겨 내듯 수만 마리의 벌을 밀어냈다.
지강백은 검을 휘두르는 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한 마리의 벌도 그의 검을 뚫지 못했다.
마침내 벌집 앞까지 걸어간 지강백이 걸음을 멈췄다.
슷!
정적이 피어났다.
정적은 새로운 칼이 되어 벌집을 반으로 잘랐다.
파스스스스스……
벌집이 부서졌다.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작고 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수만의 벌들도 그렇게 사라졌다.
“모두 베었다.”
지강백이 눈을 떴다.
새하얀 빛이 시야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강백이 빛 속으로 한 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빛이 잠잠히 가라앉고 저 멀리 거대한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닫힌 정문 위로 무림맹이라는 현판이 묵직하게 드리워져 있는 장원이었다.
* * *
“어, 어푸! 어푸! 사, 살려 줘! 살려……”
적하조는 눈을 꽉 감고 팔다리를 버둥대는 중이었다.
꼭 물에 빠진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적하조는 언젠가 백룡호에서 물살에 휩쓸렸던 그때와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다.
팔다리가 빠져라 자맥질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저 물 밑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옷자락을 붙들고 잡아당긴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물귀신인가 싶어 적하조는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저를 잡아당기는 것을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계속 소리를 질러 댔다.
“살려 줘, 강백아! 나 이대로 죽을 것 같…… 어푸우!”
그러는 적하조의 어깨를 누군가가 건드렸다.
“진정하시오. 이제 괜찮으니까.”
“진정하긴 지금 내가 물에 빠져서 죽게 생겼는데 진정은 무슨…… 응?”
뭔가 이상하다 싶었던 적하조가 눈을 번쩍 떴다.
그 목소리가 귀에 익었던 탓이다.
“여, 여기가 어디…… 나, 난 물에 빠졌었는데?”
눈을 떠 보니 이곳은 백룡호도, 물속도 아니었다. 경사가 지긴 했지만 잘 닦인 길 위였다.
적하조는 자신이 사천당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아, 맞다! 그때 갑자기 호영장주가 사라져서 강백이가…… 앗! 네놈은!”
적하조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품을 더듬어 다급하게 암기들을 꺼내 들었다.
“까마귀 부인의 원수! 내가 우리 영감을 대신해 죽여 주마!”
적하조를 흔들어 깨운 것은 백사준이었다. 적하조는 당연히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어어? 그런데 왜 하오문주하고 같이 있는 거야?”
그리고 백사준의 곁에는 문익상이 있었다.
“설마 하오문주가 배신을……!”
적하조가 “그럼 둘 다 죽어라!”고 외치며 암기를 뿌려 내기 직전이었다.
“그런 게 아니오.”
백사준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싸울 의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그쪽과 한편이오. 지월 대사가 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오.”
“뭐라고? 정말?”
적하조가 다소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문익상과 백사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문익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 소방주의 말이 맞소. 지월이 아닌 자의 정체를 캐려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오. 그래서 도망쳐 나왔지. 그런데 갑자기 길이 이상해졌지 뭐요.”
문익상의 눈가가 구겨졌다.
“원 참. 진짜 얼마나 헤맸던지…… 기분으로는 일 년도 넘게 길을 잃었던 것 같소. 물론 굶어 죽지는 않은 걸 보니 일 년까진 안 된 것 같소만.”
문익상도, 백사준도 그리 멀쩡해 보이는 모습들은 아니었다.
지치고 고단해 보였다. 백사준은 부상도 입은 듯했다.
“그럼 다들 성도에 도착한 거요?”
문익상의 말에 적하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도착은 했는데…… 길도 맞다고 했는데 사천당문이 안 보이지 뭐예요. 진도 아니라 하고. 아무튼 그렇게 오다가 길을 잃은 거죠.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있지?”
적하조가 두리번대며 일행을 찾았다.
다행히 여기저기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앗, 저기 강백이다!”
적하조가 저 앞에서 지강백을 발견했다. 지강백은 사천당문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강백아!”
적하조가 지강백을 향해 달려갔다.
그 말을 신호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일행들이 지강백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 * *
길을 잃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두어 시진 정도였다.
하지만 그사이 일행은 크고 작은 손해를 보았다.
어떤 이는 목숨을 잃었으며 어떤 이는 목숨을 빼앗았다. 어떤 이는 부상을 입었고, 어떤 이는 부상을 입혔다. 몸의 부상보다 마음의 피로가 더 극심했다.
서로를 적으로 오인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진이 아니었다니. 더 끔찍할 뻔했군.”
그들이 있었던 곳이 정확히 어떤 곳이었는지 듣고 난 남궁진현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다면 지강백처럼 더 깊은 곳까지 갔을 테고, 살아남은 자의 숫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그럼 자네 손은……”
남궁진현의 말에 적하조가 지강백의 손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앗, 너! 너 손이 왜 그래!”
손가락이 잘려 나간 채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발견한 적하조가 수선을 피웠다.
“누가 이랬어! 누가!”
“아닛, 대사형! 손이 어떻게 됐다고요? 이게 무슨 횡액이랍니까요!”
구악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러나 정작 구악은 발목을 다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괜찮아. 네 몸부터 살펴야겠다. 불편한 데는 발이 전부인가?”
지강백이 구악의 발목을 붙들자 적하조가 그를 말렸다.
“부상자는 영감한테 맡겨. 네가 뭐 볼 줄 안다고. 너야말로 누구를 만났는데 손이 이 모양이 됐어? 그게 가능하기나 해?”
그사이 독귀는 제 옷을 찢어 지강백의 손을 감아 주었다.
“영감! 잘 좀 못 해요? 그게 뭐예요. 칼 몇 번 쥐면 다 풀어지겠네. 금창약은 없어요?”
독귀가 눈을 부릅떴다.
“아, 왜 너까지 그러는 게야! 가뜩이나 이놈 다쳐서 마음 심란한데.”
“영감이 심란해 봤자죠. 어디 내 친구만 하려고요.”
결국 지강백이 그들을 말려야 했다.
“필요했던 일이다. 괜찮아.”
“뭐가 필요해?”
지강백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다들 준비가 됐다면 문을 열겠습니다.”
그가 가리킨 것은 굳게 닫혀 있는 무림맹의 정문이었다.
이 문을 넘어서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중간에 잠시 길을 잃었지만 처음의 각오마저도 잃어버리진 않았다.
마교가 제멋대로 헝클어 버린 강호를, 오늘 두 손으로 바로잡을 것이다.
남궁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야 세가를 나설 때부터 되어 있었네. 이제 와 지체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그 역시 걱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런데 자네 손은 괜찮은 건가? 우수(右手)일세. 검을 쥐는 법부터 달라져야 할 텐데.”
“잡을 수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 같은 경지에 있는 자라면 누구보다 저가 지닌 힘의 무게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잠시 물러서십시오.”
지강백은 일행을 등 뒤에 둔 채 홀로 무림맹의 정문 앞에 섰다.
하나하나 의미가 새로워진 손가락이 검을 움직였다.
검이 소리 없이 문을 베었다.
그으응, 쿵!
반으로 갈린 문이 뒤로 넘어갔다.
“들어가겠습니다.”
지강백이 가장 먼저 무림맹에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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