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110화 (110/346)

제110화 검은 강의 진혼(鎭魂)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때로 돌아갔다.

하늘이 가깝던 맑고 청명한 산자락으로.

그녀는 일부러 설익은 염주초 열매를 골랐다. 꼭지 부분을 매만져 배앓이를 하게 만드는 독기를 중화시키는 동안 목덜미가 따듯해졌다.

등 뒤에서 내려앉는 시선 탓이었다.

시선은 늘 부드럽고 정중했지만 가끔, 그녀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짙고 뜨거워지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공연히 제 가슴에도 열기가 시작되었다.

―다 됐습니다.

고개를 돌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언젠가부터 그를 마주 보고 있노라면 울컥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조심 손을 고르고 염주초 열매를 들어 올렸다.

그는 조금 난처한 듯, 뒤통수를 매만지다가 살짝 몸을 낮추고 입을 벌렸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입술에 염주초 열매를 물렸다.

쓴맛이 고역인지 눈가가 작게 일그러졌다.

그 작은 표정 하나에 웃고 싶다가도 다시 울고 싶어졌다.

―꼭 씹어 삼키세요.

그는 성실하게도 열매를 씹어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도 가슴께가 울렁였다.

―그럼 이만.

계속 지켜보다간 가슴에서 자꾸만 뭔가가 새어 나갈 것 같아 일부러 등을 돌렸다.

―잠시만.

그가 벌떡 일어서서 그녀의 앞을 막았다.

따듯하고 청량한 마른 풀 냄새가 다가왔다.

―다른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오늘은 눈을 마주치지 못해서요.

―……예?

어깨에 그의 손이 내려앉았다.

언젠가의 뜨겁고 짙은 시선이 제 눈을 보았다.

―감사합니다.

―아……

눈이 창(窓)이라는 말이 그렇게 사실이 되었다.

가슴에서 새던 것이 눈이라는 창을 통해 후드득 밀려 나갔다.

지강백이 당황해서 손을 놓았다.

―제, 제가 너무 세게 쥐었습니까?

―아니요.

혹 그가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할까 싶어서 채희유는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럼 갑자기 왜 우십니까?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서……

―아, 그럼 잠시 우는 것도 괜찮습니다. 눈물에 함께 흘러내릴 것입니다.

지강백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 주었다.

새 몸을 얻게 되면 왜 우냐는 그 물음에 진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요.

그럼 그는 뭐라고 할까.

―이리 보고만 있어도…… 당장 죽어도 괜찮을 만큼, 그렇게나 너무 좋아서요.

그때처럼 가만히 서서 기다려 줄까.

아니면 턱을 쥐고 입을 맞추려 들까.

―좋아해요.

새 몸이라면 그녀가 먼저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입을 맞춰도 좋을 것이다.

―좋아해요. 세상 무엇보다 좋아합니다.

새 몸이라면 모든 게 다 좋을 것이다.

“이매를 만드는 게 먼저야.”

용천무의 말에 채희유는 감았던 눈을 떴다.

“듣고 있어? 내게는 금천진혼대법이 있다. 하지만 파루나가 이매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은 내게 없어. 그러니까 이매를 먼저 만들도록.”

용천무를 마주하는 채희유의 눈매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혐오스러웠다.

단지 그가 썩어 가는 시체라서가 아니었다. 채희유는 지금 지강백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이 증오스러웠다.

“……안 돼.”

“뭐라고?”

“대법을 먼저 넘겨받겠다.”

용천무가 어이없다는 듯 이를 갈았다.

“그렇겐 안 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법을 넘겨받은 네가 끝까지 내 편에 서리라는 보장이 있어?”

채희유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나는 이미 교에서 등을 돌렸다. 그가 알고 있어.”

“이미 한배를 탔으니 무턱대고 믿으라는 건가? 응?”

“……대법을 내놔. 이대로 계속 시간이 가게 놔둘 순 없어. 내게도 새 몸을 찾을 시간이 필요해.”

“진짜 병신 같은 이유잖아.”

용천무가 차가운 비웃음을 토했다.

“왜 그리 새 몸이 갖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네 입으로 너는 놈의 금제에서 벗어났다 하지 않았나? 파루나의 능력은 지금 최고조고, 그건 우리의 대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지. 새 몸이 지금 당장 필요한 이유가 뭐야?”

그야 한시도 더 견딜 수 없으니까.

한시라도 더 빨리 그 사람의 곁에 있고 싶으니까.

채희유는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대신해 눈을 깜박였다.

“뭐야, 그건. 말하기 싫다는 건가?”

채희유가 한숨처럼 작은 소리를 토했다.

“네가 알 것 없다.”

“아니, 그건 아니지. 우리 사이가 그렇게나 소원한 건 아니잖아?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유일한 네 편이라고.”

시커멓게 변색된 손가락이 채희유의 턱을 쓸었다.

“그리고 내가 다음 대의 대천혈성이 되면, 나 또한 파루나가 필요……”

“건드리지 마!”

탁!

채희유가 용천무의 손을 쳐 냈다.

진심으로 몸서리를 치는 그 표정에 용천무도 얼굴을 구겼다.

“워워, 진정해. 이 몸으로 널 안겠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나도 곧 새 몸을 구할 생각이니. 나는 널 그놈처럼 외면하지 않을……”

채희유가 날카롭게 용천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파루나는 없어. 나는 결코 누구의 파루나도 되지 않아.”

“뭐……?”

용천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또 의외로군. 나는 분명 파루나가……”

용천무가 저와 손을 잡을 세력으로 파루나를 고른 것은 파루나가 진짜 의미로 파루나가 되지 못했음을 아는 탓이었다.

파루나는 대개 교주의 여자로서 사는 게 관례였다.

파루나의 위치는 교주의 여자가 됨으로써 완성이 되는 것이었다. 파루나는 많지도 않았지만 유일하지도 않았다. 교주의 여자가 되지 못한 파루나는 그저 독인으로 살다 죽을 뿐이었다.

용천무는 그래서 파루나에게 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대의 파루나는 채희유가 유일했다. 다른 파루나들은 계속 만들어지는 중이었지만 아직은 불완전했다.

그런 채희유를, 용천휘는 제 여자로 만들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둘 사이는, 정상이 아니라는 것.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것.

그것은 틈이었다.

그래서 그는 파루나에게 손을 뻗었다. 예상은 어긋나지 않아 파루나는 그 손을 잡았다. 이제껏 파루나가 없는 교주란 없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는 벌써 교주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껏 교주의 여자가 되지 않은 채 만족해하는 파루나도 없었다. 그는 채희유 또한 자신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파루나가, 싫다고?”

용천무가 새삼스럽다는 듯 채희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에게서 등을 돌린 거지? 널 진짜 파루나로 만들어 주지 않았던 그를 원망하는 게 아니었나?”

채희유가 고개를 홱 돌려 용천무의 시선을 밀어냈다.

“네가 알 것 없다.”

“아니, 알아야 해.”

용천무의 눈이 매서워졌다.

“설마 배신하는 척만 하고…… 여전히 그를 돕고 있었나? 그랬던 거야?”

“그렇지 않아.”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날 바보로 아는 거야!”

쾅!

용천무가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발을 구르자 바닥이 움푹 꺼졌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지. 그때, 백룡호에서 물길에 휩쓸렸을 때도 수상했어! 어디 그뿐인가? 너는 그 땡중이 도망치도록 내버려 뒀잖아! 설마 일부러 풀어 준 건가? 파루나가 정신을 잃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용천무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채희유는 용천휘를 죽이려다 금제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채희유가 용천휘를 위해 저와 손을 잡은 척하고 있었다면, 그는 진작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채희유가 금천진혼대법을 원하고 있고, 그 때문에 그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놈을 왜 놔줬나! 왜!”

쾅!

자제력을 잃은 용천무가 손을 휘둘렀다.

요새 들어 그는 인내뿐 아니라 자아를 잃어 가고 있었다.

금천진혼대법이 금기이자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한 번 육신을 떠난 혼을 강제로 타인의 몸에 붙들어 놓는 것이 금천진혼대법이었다. 타인의 몸속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혼은 구천을 떠도는 원령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점차 악과 귀에 물들어 가는 것이다.

“……아악!”

용천무가 화풀이처럼 내지른 장에 채희유가 비명을 질렀다.

채희유의 여린 몸이 바싹 여윈 늦가을의 가랑잎처럼 굴러가 벽에 부딪혔다.

채희유의 입술이 피로 물드는 것을 본 용천무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런…… 괜찮아?”

처음부터 채희유를 노렸던 게 아니라 스쳐 간 게 고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채희유는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쿨럭이며 피를 내뱉는 그녀를 보며 용천무의 얼굴에 캄캄한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게…… 젠장. 빨리 몸을 옮겨야 해. 이 몸이 자꾸 망가져 가니까…… 그래서 그래. 그래서 자꾸만 자제력을 잃……”

용천무가 더듬대며 변명을 이었다.

채희유가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눈을 치켜떴다.

“대법을…… 치러. 새 몸을 구해. ……어서.”

“그, 그래. 그렇게 하자고.”

용천무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이 몸을 버리면 무림맹을 움직일 수가 없어. 그러니까 무림맹의 이용 가치가 있을 동안은 계속 이 몸으로 있어야 해. 내 약속하지. 그때가 되면 즉시 대법을 너와 나누겠어. 정말이야.”

“…….”

용천무가 말투를 바꿔 채희유를 얼렀다.

“무림맹을 이용하는 건 놈을 없앨 때까지만이야. 그러니까 놈을 없애는 게 최우선이라는 거지. 그러려면 이매들이 필요해. 쓸모도 없는 무림맹 놈들을 그렇게라도 쓸모 있게 만들자고. 응?”

“……후.”

채희유가 한숨을 내뱉었다.

도리가 없었다. 일이 그렇게 뒤엉켜 버렸다. 용천휘를 죽이고 나서야 모든 일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럼 약속해. 그를 없애자마자 대법을 넘기기로. 나는 더 이상은 관여하지 않겠어.”

“무, 물론이지. 그렇게 하겠어. 천신의 이름 앞에 맹세하겠다.”

“좋아.”

채희유가 신형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려고?”

“이매를 만들러.”

채희유가 용천무를 뒤로한 채 어둑한 제독실을 나섰다.

비틀대는 걸음이 여윈 어깨를 흔들었다.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가는 길은 그렇게나 힘에 겨웠다.

* * *

철썩, 철썩.

선체에 닿는 물결은 거칠었다.

저를 거스르려는 인간들이 몹시 못마땅한 듯, 강물은 아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작은 별빛들마저 몸을 사리는 모양인지 수면에 부딪치는 순간 흔적없이 사라졌다.

지강백은 뱃머리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끝없이 어두운 강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왕위환의 배는 아주 빠른 속도로 장강을 거슬러 성도로 향하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폐부를 스며들었다.

남궁진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

“…….”

지강백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의 기척을 읽고 있었다.

“정말로 마지막이 될지 가늠해 보고 있었습니다. 남궁 대협은 왜 안 주무셨습니까?”

“팔이 시려 말일세. 가끔 그런다네.”

남궁진현이 지강백의 곁으로 다가왔다.

텅 빈 소매 한쪽이 밤바람에 밀려 흔들렸다. 그것을 보는 지강백의 눈이 강물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갔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그 팔…… 저를 돕다 그리된 것을 압니다.”

“아아.”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남궁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모자람 탓이지. 어찌 그게 소협 탓이겠나.”

“그때 저를 대신해 길을 막지 않으셨다면……”

“둘 중의 하나였지. 소협을 마교로 간주해서 베든가, 아니면 돕든가. 소협을 베었으면 나는 팔을 지켰을지 모르나 양심을 지키지 못했을 걸세.”

“그래도……”

지강백이 안타깝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무인에게 양심과 무공,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과연 무엇을 택할 수 있을지 그는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때론 무 자체가 양심이자 정의이자 신념이 되기도 하는 것이 무인이었다.

“제가 원망스럽진 않으십니까.”

지강백이 망설이다 물었다.

남궁진현이 강물에서 고개를 돌려 지강백을 응시했다.

“그러는 소협은?”

“예?”

“소협 또한 원망스럽지 않은가. 소협을 마교로 몰아가던 구파일방이 말일세.”

그 말은 지강백을 잠시 침묵하게 만들었다. 생각이 많아져서였다.

지강백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입을 열었다.

“분명 그랬습니다. 뜻하지 않게 복수할 수 있을 만한 힘을 얻은 뒤…… 분명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종남을 마교로 몰았던 모든 이들을 죽여 없애겠다고. 그래야 사부님의 무덤을 지을 자격이 생길 것이라고요.”

“그런데?”

“허나 지금은…… 저를 마교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믿어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울추가 조금씩 기우는 기분입니다.”

남궁진현은 지강백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었다. 그 역시 그랬다. 원망과 자책이 날마다 팽팽히 저울의 양편에서 제 무게를 늘려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균형이 찾아왔다.

그때서야 남궁진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백연 대사께서는 한 번 쌓은 업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저울 반대편에 선업을 쌓아 균형을 맞출 수 있을 뿐이라고. 저는…… 그 말뜻이 무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하는 것이다.

남궁진현은 담담한 음성을 덧붙였다.

“그게 내가 지금 이곳에 소협과 함께 서 있는 이유일세.”

할 수 있다면 제 팔이라도 떼어 그에게 달아 주었을 것이다. 용천휘가 제 눈 한 짝을 떼어 나눠 줬던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뒤바꿀 수 없는 과거였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것이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지강백이 남궁진현을 보며 말했다. 한 자 한 자 또렷이 울리는 음성은 뼈가 있는 것처럼 곧고 정직했다.

“남궁대협의 팔을 돌려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 원한은 제가 꼭 되갚겠습니다.”

남궁진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믿네.”

철썩, 철썩.

밤이 물든 강물은 여전히 거세게 배에 부딪혀 왔다.

그 소리는 꼭 강을 건너는 넋들을 달래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성도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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