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갈림길
“하…… 나는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었군.”
호곽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합천관이 가로막고 있던 협곡을 지나온 지도 벌써 반나절.
그사이 호곽은 그 말을 서른 번 이상 했을 것이다.
“그 말고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지.”
남궁진현이 서른 번째 같은 위로를 해 주었다.
그래서 이젠 별로 위로 같지도 않았다.
“내가 호영장주 호곽인데…… 비영창이라는 별호가 우습군그래.”
호곽이 우울한 손길로 삼첨양인도를 쓰다듬었다.
젊은 시절, 호곽이 그 괄괄한 성질머리로 어떤 사고를 일으켜 왔는지 모두 지켜본 남궁진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비영창의 비가 날 비(飛)가 아니라 들끓을 비(沸)라는 얘기도 있었지. 자네가 기어코 호영장을 물려받았다 했을 땐 서북 강호가 횡액을 맞나 싶었다네.”
그 말에 호곽은 한층 더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그 비영창인 것을. 그런데 정작 창은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언제 적 얘기를 하냐며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호곽이 이렇게 나오자 남궁진현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자네, 진심으로 서운한 모양이군.”
“왜 아니겠나.”
호곽의 눈이 꿈을 꾸듯 가늘어졌다.
“……놀라웠지.”
남궁진현은 그 한마디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그래.”
방금 전 합천관을 상대할 때 지강백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생각도 못 해 봤네. 그 나이에 그런 경지라니.”
“많은 일이 있었겠지. 그 눈도 그렇고…… 저승 강을 헤엄쳐 돌아온 자 아니겠나.”
“그렇지. 나는 결코 겪어 보지 못했던 그 어떤 깨달음이 있었겠지.”
호곽이 미간을 찌푸리며 삼첨양인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초조하네.”
“무엇이?”
“내가 벌써 한참은 늙었을까 봐.”
잠시 남궁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확실히 그런 면이 있지. 곁에 있는 자들을 자극하는 것. 무연객이 그에게 비무를 청했던 일을 기억하나?”
“아, 그런 일도 있었지. 자네가 그 비무를 가로챘고.”
남궁진현이 객쩍은 웃음을 흘렸다.
“말했듯이, 그자는 보는 이를 자극하니까. 그것을 호승심이라 불러야 할지 그저 질시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호곽도 동감이었다.
지강백을 보면 자꾸 뭔가가 끓어오른다는 것.
“가문을 맡은 뒤부터는 어른 행세를 하느라 어깨에 매번 힘을 싣고 살아야 하지 않았나. 자네 또한 남궁세가의 이가주라 불리며 알게 모르게 점잔을 떨어 왔겠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아주 팔팔해진 기분이란 말이야.”
“그런데 정작 창을 쓸 일은 없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걸세. 호영장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나도 아직 팔팔한 무인이라는 것을 내 창으로 느끼고 싶단 말이지. 나 아직 안 늙었네. 아직 한창때라고.”
남궁진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어찌 모를 것인가. 그 마음을.
팔이 멀쩡했다면 남궁진현이 친우보다 더 안달복달했을 것이다.
그런 게 무인이었다.
자신보다 앞선 자를 만났을 때.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끓어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감각이 세상 무엇보다 절실해진다. 어떻게든 뒤쫓고 싶어서, 넘어서고 싶어서. 곁에 나란히 서고 싶어서.
남궁진현은 자신이 외팔로 지강백을 찾은 것은 이러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복수나 강호의 안녕 같은 일은 사실 곁가지였다.
지강백은 무인의 본질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일깨우는 자였다.
“……뒤늦게라도 찾게 돼서 다행인 건가.”
남궁진현의 혼잣말을 친우가 또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그래, 다행이지. 무인의 마음이 여기 이렇게 펄떡펄떡 살아 있었다는 게. 내내 그렇게 점잔 빼고 살았다면 이 마음도 퍽 억울했을 걸세.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이리 펄펄 날뛰는데 정작 손은 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때마침 기회가 온 듯싶었다.
“장주님!”
미리 앞서 달려가 길을 살펴보게 했던 호영장의 무인이 호곽을 향해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길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무리와 마주치게 될 것 같습니다.”
텅!
호곽이 저도 모르게 삼첨양인도를 들썩였다.
“뭐라고? 어떤 무리였느냐.”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되, 옷차림이 제각각이었습니다.”
“무복을 입지는 않았다라……. 한곳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소리겠군.”
곁에서 듣고 있던 남궁진현이 말을 보탰다.
“혹은 무복에 구애받지 않는 곳이라든가.”
“그건……,”
“남궁가의 사람들이 청포를 주로 입는다 하지만 그것은 정해진 게 아니지. 오대세가라면 옷이 다를 수 있네.”
“하, 그렇지.”
남궁진현은 호곽의 눈이 번쩍대는 것을 보았다.
“남궁세가와 사천당가는 아닐 테니 황보가나 제갈가, 혹은 언가라는 소리겠군. 내 진작 호영장이 그들보다 못할 까닭이 무언지 궁금했지.”
호곽의 입가가 씨익 벌어졌다.
“그에게 전해 주게. 이번 건은 호영장이 맡겠다고.”
“그럴 텐가?”
“암. 걱정 말고 기다리라 하게나. 나는 시간 끌 것 없이 지금 당장 달려가겠네.”
호곽이 삼첨양인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호영장의 사람들은 들어라! 우리는 먼저 전진한다!”
“예, 장주님!”
호영장주를 포함한 예순여덟의 무인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섰다.
말발굽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가 쾌청했다.
그러나 일은 호곽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 *
“후…….”
앞서 갔던 호곽은 반나절이 못 돼 다시 원래의 일행과 합류했다.
예순여덟은 숫자가 네 곱이 되었다.
펄펄 끓는 무인의 피를 증명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던 이들이, 사실 적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꺼지듯 한숨을 내쉰 호곽이 지강백과 남궁진현의 앞으로 누군가를 이끌었다.
“이쪽은 각기 제갈세가와 진주언가의 소가주시네. 우군으로서 합류를 원한다 말하셨네. 이쪽은……,”
제갈단우가 앞으로 나서며 먼저 인사를 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군요. ……종남의 지 소협.”
뺨에 난 흉터가 가늘게 흔들렸다.
흉터를 만든 당사자인 지강백을 마주하는 표정은 복잡했다.
완전한 호의는 아니었지만 완전한 적의도 없었다.
실상을 안 이상 무림맹으로부터 돌아설 수밖에 없었지만, 제갈단우는 아직 지강백이라는 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강백은 그에게 있어 일종의 난제였다.
그 날, 무당의 천일장을 한 수에 날려 버리던 지강백을 목격했던 스물둘의 후기지수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림맹에 맞서는 일이 터무니없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종남의 일대제자는 터무니없는 일을 몇 번이고 해치워 왔다.
종남파 일대제자와 무당파 오장로의 비무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을.
그는 무림맹의 천라지망에서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간의 성취를 몇 단계나 뛰어넘는 절정고수가 되었다.
그 모든 게 말이 안 되지만 그가 이제껏 해 온 일이었다. 무림맹의 궤멸도 아마 그렇게 해치울 것이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았습니다. 곧 황보세가의 남은 인원도 합류할 겁니다. 진주언가와 연이 닿아 있는 진주의 무관들도 힘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제갈단우의 말은 짧았지만 그간의 과정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남은 것은 이제 지강백에게 달려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 소협.”
지강백은 제갈단우의 복잡한 눈빛을 꼭 그다운 곧고 직선적인 표정으로 받아 냈다.
“고맙다. 믿어 줘서.”
뜻밖의 말이었던지 제갈단우가 당황한 얼굴로 뺨을 붉혔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때는 나도…….”
그러나 제갈단우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얘기 같은 것을 하려면 아직도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황보세가까지 합류하면 사천당가를 제외한 오대세가가 전부 모이는 게 되겠군.”
호곽이 말했다.
적이 아니라 아쉬웠다는 마음 같은 것은 잠깐의 투정에 불과했다.
진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적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만큼 무림맹의 힘은 약해지는 것이고. 정말이지 잘 된 일이야.”
지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답하는 동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무림맹의 천라지망에서 살아남은 직후, 그에게 남은 것은 더 이상 사제라 부를 수도 없는 용천휘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적하조와 독귀에 이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와 함께였다.
종남파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강호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던 결심이 다른 것으로 변해 갔다.
“그럼 이제 길을 재촉하자고. 그래야 한시라도 더 빨리 합류할 수 있을 걸세.”
호곽의 채근에 일행이 잠시 늦춰졌던 속도를 높였다.
* * *
“저 멀리 보이는 곳이 성도입니다. 여기서부터 길이 둘로 나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는 제갈단우였다.
합천관과의 일전 이후 제갈가와 진주언가가 합류한데 이어 곧 남궁세가와 황보세가도 도착했다.
멸문한 사천당가를 제외한 오대세가가 모두 합류한 것이다. 강호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이렇게나 극명하게 갈린 예는 이제껏 없었다.
세력이 늘어나 좋은 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나 더불어 나쁜 점도 있었다.
눈에 띄기 쉽다는 것이었다.
이에 지강백 일행은 속전속결을 다짐했다. 무림맹이 대비할 틈을 주지 않고 전속력으로 사천까지 달려가는 것이었다.
길을 살피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춘 제갈단우는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수로와 육로입니다. 육로는 예상 가능한 길이라 아마도 무림맹에서 대비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장강을 이용하는 수로는 그보다 빠르고 간편하지만 문제는 무림맹에서도 그 점을 알고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제갈단우가 지도에서 장강을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 위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호곽이 물었다.
“위장은 어떤가? 상선에 나눠 타고 여러 번에 걸쳐 움직이는 걸세. 나머지 인원은 지금처럼 육로를 이용할 수도 있고.”
“육로를 이용할 경우 적어도 칠주야 이상은 더 걸릴 것입니다. 수로로 이동하는 일행과 시차가 너무 큽니다.”
“허면 상선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장강을 이용하는 배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그들을 모두 감시할 수는 없을 걸세.”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음?”
제갈단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림맹이라면 물론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장강수로십팔채라면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들이 있었지.”
호곽이 주름진 미간을 세게 문질렀다.
“그들 또한 무림맹 아래로 들어갔던가?”
“정확히 편제가 내려진 것은 아닙니다만 섣불리 점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미끼를 던져 볼만도 하지 않을까? 장강수로십팔채라면 수적(水賊)의 무리. 구파일방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지. 무림맹 또한 물 위에서만 힘을 쓰는 그들을 제대로 된 전력이라 생각지 않았을 걸세.”
호곽과 남궁진현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적하조가 끼어들었다.
“어, 그건 아니지요.”
그는 호곽이 언제 자신을 알아볼지 몰라 계속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다. 그때는 역용을 하고 있었으니 알아볼 리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고수의 안목이란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저가 아는 얘기가 나온 이상 입이 간질대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영문 같은 집단도 갖다 쓰던 무림맹인데. 수적이라고 가릴 건 없잖아요.”
“뭐라고, 사영문?”
남궁진현과 호곽이 동시에 이마를 찌푸렸다.
“그런 더러운 곳까지 손을 뻗다니…… 정도를 모르는군.”
“그렇다면 장강수로십팔채가 수적인 상황을 고려할 이유가 없지. 이미 무림맹과 한패라 봐야 할 걸세.”
제갈단우가 말을 받았다.
“장강수로십팔채의 눈을 피해 이 인원이 장강을 이용할 방도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육로를 택해야 할까요?”
독귀가 투덜거렸다.
“칠주야나 더 걸린다며. 그 시간이면 내 마누라는 그새 썩어 뼈만 남았겠다. 무림맹 놈들이 그동안 가만 놀고 있겠냐?”
그는 성도가 가까워질수록 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남은 독을 점검하고 암기로 사용하는 깃털을 가다듬었다.
죽은 마누라가 자꾸만 꿈에 나온다며 먼 산을 보고 날갯짓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마다 까악까악 새 울음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다들 못 본 척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복수하고 싶다는 영감 마음이야 알겠지만 그래도 사지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적하조가 독귀에게 눈을 흘겼다.
타박하는 듯 보였지만 기실 그것은 걱정이었다.
까마귀 부인이 죽는 날 당했던 부상도 이제 다 나았다지만 마음이 나을 일은 아직도 멀었을 것이다. 적하조는 독귀가 이제 그만 저 자신도 돌보았으면 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오죽 한이 맺혔으면 우리 마누라가 자꾸 그래 꿈에 나오겠냐! 어서 빨리 놈들 정수리에 요 깃털을 콱 박아 달라는 게지! 그래야만 구천을 벗어나 한시바삐 극락정토로 날아갈 게 아니냐!”
흥분한 탓에 독귀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적하조는 이래 놓고 독귀가 또 마누라 미안하오 어쩌오 까악대며 울까 봐 재빨리 어깨를 다독였다.
“알았어요. 고만 좀 앉아서 말씀하세요. 늙은 양반이 왜 이리 기운이 좋아.”
독귀는 수그러드는 대신 지강백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흔들어 댔다.
“아가. 너는 어떠냐?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는 게 낫지 않겠냐?”
적하조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술을 비죽였다.
“꼭 자기 아쉬울 때만 아가래. 멀쩡히 잘 자란 내 친구한테.”
“다 들린다, 들려! 이놈을 생전에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귀애했는데 내가 아가라고 말도 못 하냐!”
“그래도 얘가 영감네 아가는 아니잖아요. 누가 들으면 영감 아들인 줄 알겠네.”
“아, 그런 거 하면 또 어때서!”
“나 참. 넘볼 걸 넘봐요, 영감. 내 친구가 지월이 아닌 그놈을 죽이면 천하제일기가 누구 손에 넘어가겠어요?”
“뭐라고? 천하제일기라니! 내 이제껏 스물 언저리나 갓 된 애송이가 천하제일기를 차지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또 들어서도 안 되는…… 가만,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게냐?”
“아, 생각을 해 봐요. 그럼 그건 누가 가져가겠냐고요.”
“어어……? 진짜 그게 그렇겠네?”
그건 너무 앞서가는 얘기였고, 지금으로써는 하등 필요가 없는 얘기이기도 했다.
“수로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지강백이 말했다.
“칠주야면 무시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제갈단우가 지강백을 돌아보았다.
“장강수로십팔채는 어쩌실 작정입니까?”
제갈단우는 지강백을 편히 대하지 못했다.
그가 느끼는 괴리감 탓이기도 했고, 소림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저질렀던 무례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지강백이 어려웠다.
도무지 같은 또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든 채 어깨가 굽어 있었다.
“무림맹에 준비할 시간을 주면 그만큼 상대해야 할 인원이 늘어난다는 소리. 하지만 수로를 택하면 장강수로십팔채만 상대해도 된다는 뜻 아냐?”
제갈단우가 입을 약간 벌렸다.
“하지만…… 수적 무리라 해도 만만히 볼 게 아닙니다. 일단 숫자만 해도……”
“다 상대할 필요는 없다. 채주만 노리면 돼.”
제갈단우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에 비해 지강백은 백룡호에서 마주쳤던 그때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 점도 제갈단우에게는 지강백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였다.
“녹림도였던 자들을 알고 있다. 의리로 묶인 집단이라 우두머리에 대한 신뢰가 커. 각자의 신념이 아닌 채주에 대한 의리로 움직일 것이다.”
“그건 장강수로십팔채의 총채주를 설득하자는 말입니까?”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그건…….”
제갈단우가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알 도리가 없었다.
강호에 대해 아는 것이 제일 많다는 제갈가의 사람이었지만 도둑 무리의 두목이 어떤 인간일까 하는 것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말이 안 통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질세. 채주가 없어지면 나머지 무리는 알아서 사분오열하겠지.”
호곽이 끼어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지강백이 이렇게 대답했다.
“목적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 성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물길을 이용할 때까지만 채주를 인질로 잡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를 산 채로 붙들고 있겠다고? 물 위에서?”
제갈단우가 우려를 표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수적들이 배를 망가트리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지강백이 저를 보는 시선들을 하나씩 마주하며 말했다.
“어떤 방법을 택해도 위험부담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가장 많이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게 길일 듯싶습니다.”
“시간을 단축한다라. 그렇게 따지면 가장 빠르긴 하겠군.”
적하조가 물었다.
“그럼 장강수로십팔채 채주는 어떻게 납치해? 일단 채주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하잖아?”
여기서 남궁진현이 나섰다.
“그건 내가 방법을 알 것 같네.”
이 길고 구불대는 거대한 강에서 장강수로십팔채의 본채를 찾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안내를 받는 것이었다.
* * *
장강의 모든 나루터는 장강수로십팔채의 관리를 받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강의 이쪽저쪽을 오가는 모든 배들은 허가를 받은 상태였으며, 그 날 벌어들인 뱃삯의 일부를 상납금으로 바쳐야 했다.
이것은 매일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었으며, 채주가 부친상을 당하거나 부채주가 세 번째 첩을 들이거나 하는 날에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나루터는 오늘도 북적였다.
장강의 수많은 나루터 중에서도 이곳은 좀 특별했다. 사천을 흐르는 네 개의 큰 강 중 두 곳이 모이는 곳으로, 그만큼 주요 길목인 데다 배를 이용하려는 사람도 워낙 많은 탓이었다.
항시 북적대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는지라 나루터에서 물을 보려면 저만치 걸어 나가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을 찾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잠시만 주변을 관찰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뱃사공에게 돈을 건네는 사람이 아닌, 돈을 받는 사람을 찾으면 됐다.
“찾았네. 저쪽일세.”
남궁진현이 눈짓으로 한 사내를 가리켰다.
다른 여객들처럼 죽립을 깊이 눌러쓴 그 모습은 얼핏 봐서는 천하제일쾌검이라는 태가 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기도를 감춰서도 그럴 테지만 무엇보다 비어 버린 오른 소매의 탓이 컸다.
“가지.”
“예.”
지강백과 남궁진현이 사내의 뒤를 따랐다.
뱃사공 몇을 더 거친 사내는 나루터를 벗어나 인근의 한 다관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다관이었다.
끼이익.
그러나 남궁진현과 지강백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
“……?”
다관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텅.
장한 하나가 발로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웬 뜨내기들이 겁도 없이 함부로 발을 들이밀고 지랄들이여? 문이 닫혀 있는 걸 알아볼 눈깔이 없었나?”
그는 호곽의 삼첨양인도보다 사람 머리 하나만큼 더 큰 방천극을 위협처럼 흔들어 보였다.
“당장 꺼져!”
이 다관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수적들이 제집처럼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원래는 멀쩡한 다관이었으나 수적들의 등쌀을 못 이겨 주인이 건물이며 집기며 통째로 내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쪽 나루터를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을 법한 얘기였다.
하지만 지강백과 남궁진현이 알 리 없었다.
“잘됐군.”
지강백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채주에게 볼일이 있다.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뭐?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채주에게 뭐가 있어?”
이어서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겁대가리를 잃은 모양이네, 아니 그런데 멀쩡히 붙어 있는 저 머리통은 대체 뭔데, 그건 사람 머리가 아닌 돌인 모양이지, 어이쿠 저런. 무거워서 어찌 다니나. 이 어르신이 곱게 떼어 주마. 으하하하.
그렇게 저들끼리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언젠가 종남산의 개울터에서 있었던 일과 퍽 비슷했다.
지강백은 이런 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수적들을 바라보는 지강백의 눈이 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시 애틋해졌다.
“물러서 계십시오.”
지강백이 남궁진현에게 말했다.
“힘 조절을 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수적들이 또 한 번 와하하, 웃었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좀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과 다르게 아주 짧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여, 여기요.”
다관을 나온 지강백과 남궁진현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떤 배로 안내를 받았다.
제법 규모가 큰 배였고, 얼핏 보기에도 그저 사람을 실어 나르기만 하는 배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용머리는 날카로운 쇠붙이를 덧씌워 무기가 될 수 있게 했고, 선체는 온통 포문이었다.
“본채는 아니겠군.”
남궁진현이 말했다.
흠씬 두들겨 맞은 태가 역력한 수적이 펄쩍 뛰었다.
“그, 그그…… 무슨 말씀을……! 여, 여기가 맞소!”
그러면서 열심히 눈알을 굴리는 게 누가 봐도 여기가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지강백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몇 군데 거쳐야 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여기도 방금 전 다관처럼 때려 부숴야 다른 곳으로 안내받을 수 있겠단 소리였다.
“동의하네. 소협이 번거롭겠군.”
“괜찮습니다.”
슷.
말을 마치는 순간 지강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뒤이어 남궁진현도 지강백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벌써 저 위, 선루를 밟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수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딸꾹질을 해 댔다.
“히익, 끅! 무, 무슨 사람이……!”
그동안 배로 오가는 무인들을 그렇게나 많이 봤어도 저만한 경지는 처음 봤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설마……”
수적의 머릿속에는 이번에도 지강백에게 늘씬하게 얻어터지는 동료들의 모습이 스쳐 갔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에이, 아닐 거야. 여기가 어딘데. 에이, 그럴 일은 없지.”
울며 겨자 먹기로 지강백을 안내해 준 수적은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곳은 장강수로십팔채의 총 열여덟 수채 중에서 세 번째로, 삼채주 왕위환은 평소에는 포악하고 사납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왕위환의 별호는 견치였는데, 송곳니라는 뜻의 견치가 아니라 개이빨이라는 소리였다.
평소에는 그저 포악할 뿐인 그는 한번 화가 나면 미친 인간이 됐다. 어느 정도로 미치는가 하면, 견치라는 이름을 증명하겠다며 개와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울 정도였다.
그는 개이빨 왕위환 정도라면 능히 저 이상한 인간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물론 실컷 두들겨 맞긴 했지만 실전은 무공 실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든 개든 맨 입으로 물어뜯는 포악성 정도는 갖춰야 기선 제압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놈은 글렀다.
손속이 맵기는 했지만 잔정이 많은지 잔인하게 피를 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두들겨 맞았어도 그가 본 피는 코피가 전부였다.
“놈은 반드시 물고기 밥이 될 것이다. 암, 그렇지.”
수적은 곧 개이빨에 물어뜯겨 강물로 떨어질 지강백의 모습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선루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제삼 수채의 선루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수적뿐 아니라 지강백이나 남궁진현도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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