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폭로
“급히 알려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다시 한 번 감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천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문을 열어 줄 생각이 없었다.
“잠깐 기다려라.”
용천무는 태연히 대꾸한 뒤 백연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으…… 윽,”
용천무는 발버둥 치는 백연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아직 백연을 죽일지 말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일부러 손에 힘을 늦추고 고통에 서서히 질식해 가는 백연을 구경했다.
“두어 번은 더 피를 채울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산 채로 찢어 죽여도 시원찮고. 이를 어쩌나.”
용천무의 혼잣말이 소름처럼 피부 위를 번져 갔다.
탕탕!
“방장! 급한 일입니다. 마교의 행적이 드러났다 합니다.”
“……쯧. 그랬느냐?”
용천무는 결국 백연을 놓았다.
여기서 죽이기에는 피가 아까웠다. 이곳은 소림과는 또 달라서 시체를 숨기기에도 더는 적당하지 않았다.
사미승들은 더 이상 그의 처소에 심부름을 하러 오지 않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인간들은 죄다 무인이었다.
용천무가 채희유에게 눈짓을 했다.
채희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백연을 끌고 함께 벽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방장. 문을 열어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려라.”
용천무는 소매 아래 감춰진 오른팔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나서야 말했다.
“이제 됐다. 들어와라.”
“예, 방장.”
오른팔을 볼 때마다 거머리처럼 들러붙던 양영천이 떠올라 새삼 분노가 치솟았다. 다 죽어 가는 늙은이가 무슨 힘이 남아 제 오른팔을 이렇게 만들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지월의 몸은 앞으로 몇 년 정도는 더 무리 없이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종남이라는 말만 들어도 넌더리가 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용천무는 문을 넘어오는 범광과 백사준, 그리고 문익상을 보았다.
낯선 자를 본 용천무의 표정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왜 얼굴을 모르는 자가 있는 게냐?”
“하오문주입니다, 방장. 마교의 행적을 전하러 왔습니다.”
“내가 직접 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더냐?”
용천무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향이 넉넉하니 시취를 들킬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불안했다.
특히나 얼굴을 모르는 자는 더욱 그러했다. 지월은 알되 자신은 모르는 자일 수도 있는 탓이었다.
“직접 듣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소이다, 대사.”
문익상이 입을 열었다.
용천무는 그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림의 천하제일인을 눈앞에 두고도 그는 어두운 방구석이나 한 바퀴 둘러보고 있었다.
문익상의 시선 하나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곳을 맹주실로 정하시었소? 어둡고 음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구려.”
“……무어라?”
“아니, 여기는 흡사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시체들을 묻어야 할 곳으로 보이는데 말이외다. 게다가 냄새는 또 왜 이리 역한지 모르겠소. 정말로 어디 썩어 가는 시체라도 하나 있는 것 같소. 어디 보자. 정말로 시체가 있다면…… 옳지, 저 벽장이 좀 수상한 듯도 한,”
“입 다물어라!”
용천무가 왈칵 소리를 질렀다.
범광과 백사준이 바로 곁에 있지 않았다면 곧장 혀를 뽑았을 것이다.
지월의 몸이 손쓸 도리 없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게 문익상에게는 행운이었다.
용천무는 행여나 또 다른 상처가 생길까 봐 극도로 운신을 자제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오감은 점점 둔화되어 이제는 상처가 생겨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럴 때 부상이라도 입게 된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 해도.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라. 마교의 행적을 고하기 위해 왔으면 얌전히 네 할 일이나 하고 사라지거라.”
용천무가 짜증스럽게 입술을 비틀었다.
문익상은 그 모습을 관찰하듯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헌데 대사께서는 몇 해 전에 이 문 모와 강호에서 마주쳤던 일을 기억 못 하시는 모양이오. 아니 그렇소이까?”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게냐?”
“그때 대사께서는 약간의 호칭 정리를 하지 않으셨소이까. 이 문 모도 명색이 하오문이라는 일개 문파를 이끄는 자인데 말을 높이는 게 당연하다 하셨지. 아, 뭐 그런 건 중요치 않고 말이외다. 내 마교에 관해 이런 얘기를 들었소.”
문익상은 용천무가 파고들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교의 소교주가, 그림자가 되었다 했소. 그게 무슨 뜻인지 대사께서는 혹시 아시는 바가 있소이까?”
“뭐……라고?”
문익상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모두 똑똑히 보았다.
지월이 아닌 자의 얼굴에 번져 가는 경악을.
그의 정체에 관한 마지막 의혹마저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사람이 그림자가 되었다는 저 괴상한 말을 단박에 알아들을 중원인은 아무도 없었다. 지월이 정말 지월이었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지월은 단숨에 알아들었다.
오로지 대명천교의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그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그럴 리가 없다. 그 혈주침은 분명……!”
당황한 용천무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혈주침? 그것은 또 무엇이외까, 대사?”
“……!”
“마교에 대해 이 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신 듯한데…… 어찌 아셨습니까?”
용천무가 자신이 한 실수를 깨달았다.
눈빛이 돌변했다.
“이 쥐새끼들이…… 혓바닥 하나로 이 몸을 떠보려 했구나.”
범광이 하오문주와 용천무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눈빛이 단단했다. 그만큼 각오를 했다는 뜻이었다.
이제껏 진실을 알기 두려워 피한 것은 자신이었다. 범광은 더는 지월을 마주 보는 것을 피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저도 물을 것이 있습니다, 방장. 계율원주를 어찌하셨습니까?”
“그걸 왜 내게 묻는 게냐.”
“소림의 계율원은 가장 공정해야 할 곳으로, 방장이라 할지라도 계율원에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계율원주를 해하기라도 했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용천무가 범광의 말을 끊었다.
“웃기는군. 그래서 날 어쩌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네가, 나를?”
범광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여기 있는 셋 전부를 합해도 지월의 상대로는 터무니없다는 것을.
백사준이 소리쳤다.
“감원! 왜 이러시는 게요! 여기 온 목적을 잊었소?”
백연의 행방을 염탐하려던 것뿐이었다.
백사준은 범광이 갑자기 지월이 아닌 자와 정면으로 맞서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다 함께 죽자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범광이 용천무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감히 그분을 어쩔 수는 없겠지. 그러나 껍데기 정도는 어찌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으으으……
말을 주고받는 도중에도 용천무의 가사 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내 그간의 정을 보아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저 떨거지들을 데리고 썩 꺼져라. 이제껏처럼 아무것도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있겠다면 계속 숨을 쉬도록 허락하겠다.”
보기만 해도 뒷목이 서늘해져 왔다.
“감원! 여기서 나갑시다!”
백사준이 소리쳤으나 범광은 듣지 않았다.
“방장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겠지. 그분의 정순한 내력으로 네 어찌 사람 노릇을 하고 있다만 이미 사라진 생기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범광은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을 이해했다.
지월에서 풍기던 피가 썩는 냄새와 음습한 시취, 색이 죽은 동공과 멈추지 않던 출혈 같은 것들을.
시체가 되었으니 한 번 생긴 상처가 나을 리 없었다.
오뢰정인에 당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지월이 알아채지 못한 채 내버려 두고 있었던 사실이 기억났다.
토독토독,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피는 결코 멎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멎지 않는 피는 따로 보충을 했을 것이다. 사람의 목을 물어뜯는 것으로.
감쪽같이 사라진 사미승들의 시체와 잔평객잔의 점소이, 창문 아래 죽어 있던 고양이도 모두 이해가 됐다.
범광의 눈에 뿌연 물막이 피어났다.
“내 그분을 이제 그만 보내드려야겠다. 너 아닌 누구도 그분의 시신을 이리 다룰 수는 없다.”
범광의 양 손목이 구부러졌다.
소림의 응조공이었다.
그는 지월에게 응조공을 사사하였고, 그래서 범광의 응조공은 소림의 그 어느 누구보다 완벽하다는 평을 들어 왔다.
“하압!”
범광이 출수했다.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는 한 수였다.
그가 노린 것은 용천무의 오른팔이었다. 이미 오뢰정인으로 인한 상처가 누적된 팔에 응조공의 한 수마저 더해지면 치명타가 될 것이다.
범광은 그것으로 제 역할을 다 했다 여겼다.
그 외에는 뒤에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지월이 아닌 자의 몸 상태를 고스란히 보고 있을 테니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냐!”
용천무가 왼손을 내밀었다.
퍼엉!
정면에서, 그것도 근거리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가해지는 복마장의 위력은 엄청나다는 말이 부족했다.
“크윽!”
범광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그러나 그가 몸을 돌보지 않고 전개했던 응조공도 확실히 제 역할을 해냈다.
“이, 이런……!”
지월의 팔뚝이 길게 갈라진 채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핏줄기는 범광의 손가락 모양을 따라 다섯 줄기였다.
“이런 망할!”
용천무가 노성을 터트렸다. 분노로 인해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 죽어라! 이 버러지 같은 것들!”
문익상이 즉시 신법을 전개하며 백사준을 향해 소리쳤다.
“뭐하고 있는 게요? 어서 몸을 피하시오!”
“그러나 감원이……!”
“이미 틀렸을 게요! 소방주 목숨이나 구하시구려!”
문익상은 벽 한쪽에 늘어서 있는 빈 약장들을 끌어냈다.
사천당문의 제독실이니만큼 그것들은 독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텅 빈 것들이었다.
“어서!”
문익상은 곡예라도 하듯 재빨리 약장들을 여기저기 늘어놓았다.
급한 대로 사성진을 짜는 것이었다.
“이쪽이오!”
“……흐!”
가시 같은 한숨을 토해 낸 백사준이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문익상의 뒤를 따랐다.
“감히! 달아나게 놔둘 줄 아느냐!”
용천무가 그들을 쫓아왔다. 그러나 용천무는 지월이 아니었고, 그는 사성진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어디로 갔느냐!”
콰앙!
용천무는 끝도 없이 늘어선 빈 약장들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 저쪽으로 달려갔던 문익상과 백사준은 그새 자취를 감추었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용천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곱게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릴 테다!”
쾅!
약장들로 가려진 시야가 답답했던 용천무는 닥치는 대로 약장들을 때려 부쉈다.
하지만 아무리 부숴도 약장들은 끝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빈 약장들이 이렇게 많을 리도 없었고, 도망치는 와중에 이것들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늘어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진……이겠군.”
용천무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올랐다.
“감히, 나를…… 이 몸을 희롱해?”
스으으으……
가사 자락이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전신의 내력을 모두 개방한 용천무의 눈이 붉어졌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간 것이다.
“없어져라!”
퍼엉!
기의 폭발이 일어났다.
사 층 전각 꼭대기의 기왓장까지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뒤를 이었다.
* * *
‘대체 무슨 일이냐!’
그 거대한 진동은 무림맹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감지할 수 있었다.
살막주 적길연도 그중 하나였다.
천잠투의에 의지해 은신술을 펼치고 있던 그는 하마터면 은신을 풀 뻔했다.
‘곤란하군. 계속 물건을 찾아봐야 하나.’
청력과 안력을 높여 주변을 살피니 무림맹에도 적잖은 혼란이 몰려온 듯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적길연은 이를 질근 물고 방향을 가늠했다.
‘아니면 이쯤에서 적당히 몸을 빼야 하나.’
문제는 아직 죽지 않은 시체를 보관할 만한 곳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체처럼 보인다 해도 시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음식물을 먹고 숨을 쉬어야 했다. 보살피는 사람이 매번 드나들어도 괜찮은 곳이어야 했다.
‘그러니 어디 땅속에 파묻어 두지는 않았을 테고…….’
담과 담 사이의 좁은 틈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에 섞여 이동 중이었던 적길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뢰받은 물건을 찾는 일은 요원해 보였고, 때마침 무림맹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자존심이나 미련을 접고 그만 무림맹을 벗어나야 하는 시점인지 몰랐다.
‘유감스럽지만 기회는 다시 만들면 될 터이니…….’
적길연이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이었다.
“……?”
그때 적길연은 코끝을 스치는 독특한 향을 맡았다.
달고, 진하고, 그러면서도 역한 냄새였다.
‘이건 아무래도 독 종류인 듯싶은데?’
적길연은 본능적으로 냄새를 쫓았다.
사천당문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무림맹 본진이 된 이곳에 갑자기 독 향이 풍겨 올 리는 없는 것이다.
냄새를 따라 움직이던 적길연은 근원지가 범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 범전이 있었어!’
죽은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 둔 범전은 부잣집일수록 크고 화려하지만, 그만큼 산 자들에게는 쓸모없는 곳이었다.
‘매일 공양할 음식을 들고 드나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지. 게다가 지금은 사천당문이 아닌 무림맹. 당씨 귀신들을 보러 갈 인간은 아무도 없지. 범전에는 완전히 인기척이 끊어졌을 것이다.’
아직 시체가 되지 않은 용천무의 본신은 범전에 숨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적길연의 짐작은 맞았다.
이 독 향은 채희유가 범전 주변에 둘러놓은 독의 결계가 방금 전 깨어지며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저곳이다!’
적길연이 확신을 안고 범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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