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세 번째 조력
용천휘는 이제껏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몸이 가벼웠다. 이제껏 육신은 늘 무거운 것인 줄 알았던 그에게 그 느낌은 충격이었다.
“…….”
용천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조금도 무겁거나 아프지 않았다. 사지를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들이닥치던, 손톱 밑을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는 부채보다 무거운 물건도 얼마든지 들 수 있었다.
용천휘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두 발로 바닥을 짚었다. 수라안이 발현되어 그에게 이제껏 볼 수 없던 세상을 보여 주었다.
휘이이잉.
용천휘는 제 머릿속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천산의 바람을 맞이했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는 천산 꼭대기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천 년 전, 그가 대천혈성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너는 나이며 내가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다.
용천휘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대천혈성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천신이었고, 천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천산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는 천신의 본체를 대신해 세상을 움직이는 그림자였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 자. 나를 대신하는 자. 내 모든 권능이 네게도 이어질 것이다.
용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먼 곳을 보던 눈이 현실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보았다.
“세상이…… 이런 것이구나.”
용천휘가 미소 지었다.
제백사십팔 대 천신의 탄생이었다.
* * *
“살아…… 계셨습니까.”
말재주가 없다는 것은 이럴 때 안타까웠다.
지강백은 무언가 다른 말을 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살려 준 목숨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팔을 잃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검을 휘두르던 팔을.
“다행입니다.”
남궁진현은 그 자리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지강백을 훑었다.
“너는 달라졌구나.”
“……예.”
“나는 십 년을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일 년도 걸리지 않았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나는 너와 마주친 그때부터 이런 날이 오리라 예감했을지도 모르지.”
“…….”
지강백은 여전히 남궁진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팔을 잃은 남궁진현에게도 길을 비켜 달라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궁진현이 그를 향해 아주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기에 후회는 없다. 한 팔을 잃음으로써 얻은 미련은 네게 맡기겠다.”
“……그것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섬격검은 쓸모없을지 몰라도 남궁세가의 이가주는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
지강백이 잠시 말할 틈을 잃는 사이,
“그래! 호영장주도 그렇다! 내가 어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느냔 말이다!”
호곽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안색이 고르지 못한 얼굴은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모습이었다.
“섬격검의 징표 따위! 없어도 됐단 말이다! 고작해야 영웅건 하나가 무어라고! 그까짓 것 없이 호영장으로 왔어도 내 기꺼이 너를 도왔을 것이다!”
호곽과 예순여덟의 무인은 길을 막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함께 가기 위해 온 것이었다.
물론 호곽은 지강백이 끝까지 호영장의 도움이 필요 없다 했으면 차라리 길을 막겠다는 심정이었지만.
“그런데 왜 안 온 게냐! 오죽했으면 내가 먼저 너를 찾아 나섰겠느냐!”
“아…….”
지강백이 호곽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는 설마 호곽이 그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남궁진현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보면 정양을 다 마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를 찾아왔다. 팔 하나를 잃게 만든 그를.
“호영장주십니다.”
그래서 지강백이 한 말은 이러했다.
“그건 무슨 뜻이냐?”
“그리고 남궁세가의 이가주십니다. 상대는 무림맹입니다.”
남궁진현이 말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지월이 아니었으니.”
“그걸…… 아셨습니까?”
“소림에서 나는 그자와 단독으로 맞섰다. 그리고 그자가 감춰야 할 모습을 보았다.”
남궁진현에게는 섬격검이라는 별호에 걸맞은 초식이 하나 있었다.
섬전뢰라는 것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검면에 빛을 반사시켜 상대의 눈을 일정 시간 동안 멀게 만드는 것이었다.
“섬전뢰는 실패하지 않았다. 분명 그자는 눈이 멀어야 했다.”
번쩍이는 강렬한 빛이 지월의 동공을 정면으로 비췄다.
그러나 지월은 눈을 한 번 깜박이지도 않았다. 새카만 동공은 오로지 지월이 보고 있는 것에 초점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움직이는 시체였다. 적어도 내가 알던 지월 대사는 아니었다.”
팔을 잃고, 천하제일쾌검이 아닌 그냥 환부(患夫)가 된 남궁진현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강호가 굴러가는 향방을 지켜보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었지. 나는 네가 마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마교가 아닌 자를 마교라 몰아세우는 인간에게는 목적이 있다는 뜻.”
무림맹은 이미 충분히 잘못된 곳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종남과 사천당문이 사라졌다.
거령문을 비롯한 군소방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무림맹에서는 그 목적이 서역 정벌이라고 하지만 정작 가는 길은 서역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너라면 그 목적을 알 테지. 남궁세가는 너와 뜻을 같이하겠다.”
그 말에 대한 답은 용천휘가 했다.
“잘 됐군.”
용천휘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그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지강백의 옆자리에 서서 말을 했던 탓이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이지?”
호곽이 남궁진현의 앞을 감싸며 삼첨양인도를 고쳐 쥐었다.
“경계하지 마라.”
“……뭐?”
“그럴 필요 없으니. 나는 지금 너희들과 함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용천휘의 말보다 더 당혹스러웠던 것은 그의 존재감이었다.
그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잘생긴 얼굴로 짓는 삐뚜름한 표정이 어딘가 이질적이긴 했지만 지금 그는 아예 세상 밖에서 온 사람 같았다.
게다가 그 몸놀림.
그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미약한 호흡 소리조차 없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벽 저편에서 이편을 보고 있는 듯했다.
“달라졌군. 확실히.”
용천휘를 향해 지강백이 말했다.
“덕택에. 후회하나?”
지강백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용천휘를 살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눈 하나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용천휘를 용서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용천휘가 자신에게 한 일까지 없는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원치도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 빚을 졌다. 그러니 갚아야 했다.
그가 그 어떤 존재가 된다고 해도 후회할 수는 없었다.
“그럼.”
가볍게 대꾸한 용천휘가 말머리를 돌렸다.
“남궁세가와 호영장이 합류한다면 사천까지의 길이 그리 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천으로 모여들고 있는 수뇌부를 제외한 무림맹 병력의 위치는 하오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믿지 못하겠군.”
호곽이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무얼 보고 있는 거지?”
호곽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용천휘의 발밑이었다.
분명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몸처럼 뗄 수 없는 제 그림자가.
용천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 스스로가 그림자이기에 그렇다.”
용천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너는…… 무엇이냐?”
“천신의 그림자이며 동시에 천신이 사바에 드리운 실체이다.”
얼이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묻는 호곽을 향해 용천휘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아직은 작은 그림자지. 빛이 클수록 그림자도 커진다. 나는 이제 막 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대명천교의 교주는 천신의 권능을 담는 그릇이었다.
그릇이 크고 튼튼할수록 발휘할 수 있는 권능도 커졌다.
용천휘는 이제 막 금제를 풀고 제 몸을 찾았을 뿐이었다.
“시간을 더할수록 나는 제대로 된 그림자가 될 것이다. 허나 중원에는 그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사천으로 향할 것이다.”
용천휘가 고개를 돌려 지강백을 보았다.
“우리 거래는 유효해, 사형. 사형은 복수를, 나는 내 자리를. 사천에서 그것들을 주고받자.”
그 말을 할 때의 용천휘는 그저 용천휘 같았다. 비록 그림자는 없었지만.
“그 이후는?”
지강백이 물었다.
“마교는 일대에 거쳐 중원을 넘보지. 네가 새로운 교주가 된 것이라면 중원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미 지월과 약조했어. 내 대에서 중원행은 없는 것으로.”
“지월 대사는 죽었다. 네가 그분과 했던 거래는 이루어지지 못했어.”
“거래가 아닌 약조라고 했잖아. 천신의 눈으로 한 약조야. 지월이 아닌 자를 처단하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나. 내 몫을 다하면 서쪽으로 돌아가겠어. 내가 속한 나의 세계는 서쪽에 있어.”
용천휘는 잠시 말을 끊고 웃었다.
“사형과 나 사이의 빚은 그 이후로 미루자.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후에. 단둘이서.”
지강백은 용천휘의 말을 이해했다.
지강백이 수공의 경지에 이르고 용천휘가 천신의 그림자가 된 지금에도 그들은 가장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해야 할 것이 같았고 갚아야 할 것이 같았다. 되돌려야 할 것이 같았다.
“동의한다.”
“그럼.”
다음 순간 용천휘가 사라졌다.
그는 일행을 벗어나 저 멀리에 있었다.
“사천에서 보자, 사형.”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믿을 수가 없군.”
호곽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려올 때까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저런 자가 실재한다는 것도, 그게 마교라는 것도. 어쩐지……”
이제껏 알고 있던 마교와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
혼란스러워하는 호곽에게 지강백이 말했다.
“사천으로 가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남궁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그렇다면 가 보는 수밖에 없겠군.”
호곽이 삼첨양인도를 힘껏 움켜잡았다.
“사천으로 가서 소협에게 호영장의 쓸모를 보여 주지.”
그는 절대로 농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가자고, 사천으로.”
사천은 결코 멀지 않았다.
호영장과 지강백 일행이 합류해 사천으로 향하는 지금, 남궁세가에서도 움직였다.
그리고 지월이 아닌 자와 맞서고자 하는 무리는 그들뿐이 아니었다.
* * *
“이이…… 이거면 되는 거요?”
하오문주 문익상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은 천진루의 땅문서.
그 맞은편에서 땅문서를 내밀고 있는 것은 용천휘였다.
“부지와 전각, 거기 속한 기녀와 노자들까지. 일체의 것을 포함한 문서지.”
“우우…… 허허, 이래 약속을 지키시는구만. 역시 소교주께서는 배포가 남다르셔야지. 이 문 모가 큰 은혜를 입소.”
문익상이 땅문서를 덥석 쥐었다.
이게 얼마나 절실했던가.
백룡호에 숨겨 둔 본진이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뒤로 문도들은 제각각 몸을 숨겼다.
하오문주 역시 적당히 신분을 감추고 인근의 기루에 숨어들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하오문주의 은거지로는 역시 기루만 한 게 없었다.
그러나 다들 뿔뿔이 흩어진 지금 상황이 몹시 불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철저한 점조직으로 키워 온 하오문은 이번 일을 통해 더 작은 점으로 나뉘었다. 연락은 원활하지 못했고 문도들을 움직이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 문도들을 불러 모아야 했다.
그러나.
“……으잉?”
분명 쥐었던 땅문서가 사라졌다.
문익상이 눈을 비볐다. 감쪽같이 사라진 땅문서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어찌 된……? 아니, 지금 하오문주 눈앞에서 사기를 치는 게요? 마교의 소교주씩이나 되신 분이 어찌 이런 장난질을!”
“아아, 미안하군.”
용천휘가 싱긋 웃었다.
“허나 그 전에 한 가지 더 받아 낼 게 있다.”
“뭐? 그때 그걸로 거래 끝난 거 아니었소? 왜 말을 바꾸시오?”
“하오문주에게 그보다 더한 것을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나 참. 그래서 더 부려 먹겠다는 게요? 아니, 사람이 염치가 없어도 이래 없을 수 있나. 대체 뭐 그리…… ……읍!”
갑자기 하오문주가 입을 콱 닫았다.
언제 어떻게 벌어진 일인지 몰라도 아혈이 눌린 것이다.
“하오문이 그만 무림맹에 투항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내 생각에는.”
“……?”
말을 못하게 된 하오문주가 이제 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대굴대굴 굴렸다.
“하지만 하오문주가 단신으로 무림맹에 갈 수는 없으니 사람을 몇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것이다.”
“……!”
하오문주의 필사적인 눈빛에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는 항의가 적극 깃들어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림맹으로 향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을 합류시켜 주겠다. 그사이 무림맹에서 하오문주의 투항을 환영할 일이 생겨나도록 손을 써 두지.”
말이 끝나고 용천휘가 사라졌다.
걸어서 방을 빠져나간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허…… 허?”
힘이 빠진 하오문주가 이제껏 앉아 있던 의자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허…… 어째 금방이라도 죽을 줄 알았던 양반이 혈색이 좋아 보인다 싶더니…… 그냥 좋아진 게 아닌 모양이야.”
감쪽같이 사라졌던 땅문서가 조용히 다탁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면 모든 게 꿈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밤이라 다행이었다.
낮이었다면 하오문주는 용천휘의 발밑에 그림자가 없음을 눈치 채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 그게…… 후, 그렇다면 꼼짝없이 무림맹에 투항할 방법을 찾아야겠군.”
하오문주가 땅문서를 집어 고이 품에 넣었다.
무림맹에 투항할 방법은 하나였다.
그들이 모르고 있는 정보를 가져가는 것.
어렵지는 않았다. 하오문주는 마교의 소교주를 알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그토록 잡아 없애려고 하는 자의 존재를.
“그…… 뭐, 워낙 배포가 크신 양반이니 내가 입 한 번 놀린 것으로 뭐라 하시진 않겠지.”
하오문주가 이제껏 맺혀 있던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일단은 서찰을 보내 운을 먼저 띄우고…… 흐음. 그렇다면 무림맹주 친전이라 써서 보내야 하나.”
그가 지필묵을 찾아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천으로 미리 갈 서찰을 쓰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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