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101화 (101/346)

제101화 호법위 (2)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오십 명의 사람이 오십 마리의 말에 올라 이쪽을 응시했다.

하나같이 붉은 가사를 입은 승려들은 모두가 한사람인 것처럼 구분이 가지 않았다. 붉은 갈기를 지닌 말들도 그러했다.

마치 오십 장의 똑같은 그림을 한데 늘어놓고 보는 듯했다.

“허…….”

“어, 어…….”

적하조는 입만 벙긋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드는 것은 이질감이었다.

땅이며 풀이며 공기며…… 중원의 모든 것과는 조금도 뒤섞이지 않는 존재감이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저들이 적의감을 드러내면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두려웠다.

가장 앞에 선 승려가 말했다.

“나를 부른 자는 어디에 있는가.”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나였는데 오십 개의 입이 일제히 움직였다.

“어, 그러니까 그게……”

당황했던지 적하조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지면을 밟고 선 두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들은 용천휘를 찾아온 마교일 것이다.

하지만 용천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라 했다. 적이든지, 아군이든지.

“이, 일단 확인부터 해, 해야 한다.”

“확인이라고 했느냐?”

“너는 네 발로 땅을 밟고 선 자인가?”

적하조의 말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싸늘해진 오십 쌍의 눈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중원인이 어찌 천교의 진언(眞言)을 아는가.”

“대, 대답하라. 그래야만 안내를 해 줄 수 있다.”

시선에 이어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중원인 하나의 목숨은 모래 한 알과 같다. 천교의 수호인을 시험하지 마라.”

적하조는 저 오십 쌍의 눈이 일제히 날카로운 수리검이 되어 제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으, 으……?”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시선이 실체화되었다. 승려의 시선은 기실 살기였다. 그는 살기를 무기로 쓰고 있었다.

그대로 버티고 있다면 미간이 조각나게 될 것이다.

“여기 있다. 너를 부른 자가.”

그때 용천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슷.

오십 쌍의 시선이 적하조에게서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용천휘를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보는군. 나는 우선 전령이 도착할 것이라 생각했다.”

적색 가사의 승려는 대명천교의 호법위였다.

호법위는 이십좌위와 동등하되 같지 않은 존재였다.

교주의 뜻으로 움직이는 이십좌위와는 달리 호법위는 오로지 교리를 따르는 자였다. 이십좌위가 교주의 친위라면 호법위는 교의 수호자였다.

호법위는 결코 사사로운 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전령도 통하지 않은 채 직접 나타났다는 것은 교의 적법한 승계자인 용천휘의 신변을 교의 문제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용천휘가 말을 마치는 순간 말에 올라 있던 승려의 몸이 땅에 내려서 있었다.

소리는 하나였고, 동작은 오십 개였다.

무릎을 꿇은 호법위가 두 손을 교차해 가슴 앞에 모았다.

“대천의 불꽃, 생과 사의 경계에서 길이 영명할지니. 오십의 호법위가 대명하신 천신의 그림자를 뵙습니다.”

용천휘의 오른쪽 눈이 붉어졌다.

“……너는 내게 진실을 가져왔는가.”

오십 명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천신 앞에 진실은 하나입니다.”

“그래…….”

용천휘가 비로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교주가 승천하셨다. 너는 알고 있었나.”

용천휘가 입을 뗐다.

호법위는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애석히도 교주께서는 천신의 그림자께서 탄생하는 순간 이미 반신의 지위를 잃으셨습니다. 교주의 생사는 그때부터 호법위가 간여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용천휘의 표정이 뒤틀렸다.

“호법위다운 발언이로군. 수라안의 주인만이 네 관심사라 이건가.”

“천신은 생사불문의 존재. 천신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천신의 그림자를 통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천신의 수호자는 그림자를 받듭니다.”

“그렇다면 누가 교주를 죽였는지도 관심이 없다는 소린가.”

“그자가 천신의 그림자를 빼앗으려 한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잘도 지껄이는군. 수라안만 문제가 된다고? 이번 대의 수라안은 내게 이미 주어졌다. 이번 대에 진이 발동할 리는 없어. 그러니 네가 문제시할 일도 없겠군그래.”

“…….”

호법위는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답하지 않았다.

용천휘가 짜증을 섞어 말했다.

“누가 교주를 시해했는지는 알고 있나?”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게 호법위냐?”

“허나 짐작합니다.”

“말해 봐.”

호법위가 고개를 들었다.

“천신이십니다.”

용천휘의 표정이 쪼개진 것처럼 돌변했다.

“뭐……라고?”

수라안의 권능은 일대에 한했다.

교주가 대천혈성의 진정한 후계임을 인정받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 수라안이었다.

교주가 수라안을 갖기 위한 자격을 모두 갖추게 되면 중원 땅 어딘가에 대천혈성이 남긴 진이 열렸다.

교주는 계시를 받아 중원행을 결하고, 수라안을 얻는다.

이것은 천 년에 이르도록 이어진 천신의 길이었다.

“내가…… 태어나는 순간 교주는 수라안의 권능을 잃은…… 것이로군.”

“그러합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한창 나이에 천신의 권위를 잃어버린 교주는 그 괴리감을 견디지 못했다.

교주는 수라안을 얻는 진을 다시 열려고 했다.

진이 발동하는 조건은 대천혈성의 새로운 피가 자격을 갖추게 되는 때였다.

교주는 새로운 아이를 얻었다. 그것이 용천무였다.

진을 열기 위해 온갖 방법이 행해졌다. 하지만 방법은 쉬이 드러나지 않았고 그 결과로 얻은 것은 온갖 대법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산 채로 박제되어 죽지도 못하게 된 용천무의 육신뿐이었다.

용천휘는 이제껏 몰랐던 얘기였다.

이제야 사실을 알게 된 그가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걸…… 내가 이제껏 몰랐단 말이냐?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왜!”

“이십좌위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십좌위는 탄생과 동시에 천신의 그림자께 서약을 한 상태.”

따라서 교주는 이십좌위 중 누구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호법위에게 일련의 과정이 노출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진을 여는 방법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호법위밖에 없었다.

호법위는 모든 것을 천신의 뜻에 맡기겠다 했다.

용천휘의 탄생이 이례적이듯, 교주의 결정도 정상과 어긋났다. 어떤 것이 천신의 뜻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허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용천휘가 수라안을 지니고 태어난 것은 분명 용천휘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이후로 제가 할 일은 하나였습니다. 천신의 그림자께서 제자리에 오르시길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는……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이냐. 교주가 죽은 걸 알면서도, 내가 이매들에게 쫓기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천신의 뜻이라면 그림자께서도 스스로 제자리를 찾으실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신의 뜻을 증명하셔야 합니다.”

“증명? 그러다 내가 죽으면? 천신의 수호자라는 너희들은 그조차도 팔짱 끼고 지켜만 보겠다는 소리냐!”

“저희가 수호하는 것은 천신의 뜻입니다.”

“젠장할!”

용천휘가 욕설을 내뱉었다. 미간이 굽은 강처럼 구불거렸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시간이 한 호흡 흐른 뒤였다.

“……그래도 내가 이번 대의 그림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교주가 승천한 이상 대천혈성의 피를 이은 자는 나와 그 사생아뿐이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는 놈의 편을 들 게 아니라면 너희들은 나를 지켜야 한다.”

이어지는 답은 의외였다.

“누구로부터 말입니까?”

용천휘의 신형이 또 한 번 흔들렸다.

“……? 뭐라고?”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천신께서 두 핏줄을 가늠하는 시기입니다. 그 뜻이 둘 중 어디에 있는지 저희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뜻을 지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를 죽이려는 이매들을 너희들이 모른단 말이냐! 이십좌위들은 이미 서약을 마쳤다. 그들이 사생아의 편을 들어 이매를 부리고 있다면 그것은 천신에 대한 반역이다. 마땅히 너희 호법위들이 나서서 처리해야 될 일이야!”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호법위는 딱 잘라 결론을 내렸다.

“이십좌위가 서약을 어겼다면 그것은 마땅히 호법위의 소관입니다. 허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없었…… 없었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이매들은 끊이지 않고 나를 노렸나!”

“이매들을 부린 것은 전대의 그림자셨습니다.”

“뭐……?”

용천휘의 안색이 희게 바랬다.

“……미쳤구나. 교주는 진작 승천했다. 교주가 어떻게 이매를 부릴 수 있다는 말이냐.”

“승천하기 전까지는 전대의 뜻이었습니다. 그 이후는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니……! 그게 지금 네 입으로 할 소리냐!”

“이십좌위 중 직접 이매를 부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호법위가 나설 일도 없었습니다.”

“하, 잘도! 그렇다면 너희는 왜 내 부름에 응했나! 왜 여기에 서 있나!”

“그림자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만,”

호법위가 고개를 들었다.

오십 개의 시선이 용천휘를 꿰뚫을 것처럼 쳐다보았다.

“허나 지금은 그 또한 수호자의 일이 아닙니다.”

“…….”

눈꺼풀 사이로 절망이 내려앉았다.

호법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용천휘는 알 수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그림자는 반쪽. 나머지 반을 앗아간 것이 천신의 뜻이라면 저희 수호자는 그 뜻을 지켜야 합니다.”

호법위가 말하는 것은 수라안이었다.

수라안이 한쪽 눈에만 남아 있는 이유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수라안이 나뉜 것은 지금 천신께서 그림자로 두실 분이 둘인 것과 그 뜻이 이어질 터. 저희는 지켜보겠습니다.”

“나를…… 저울질하겠다는 것이로군. 너희가, 나를.”

“다만 한 가지는 약속드리겠습니다. 천신께서 뜻을 두신 것은 오로지 두 분. 교의 수호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천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지키겠습니다.”

툭, 투둑.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를 뿌렸다.

“……살아남아야만 받들겠다는 것이냐. 이, 나를.”

“천신께서 뜻을 보여 주시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그를…… 천신의 뜻이라 확신하나?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그 육신을? 평생 남의 시신에 기생해야 하는 그 고깃덩이를? 너희들은 그것을 천신의 그림자로 받들 텐가? 중원인의 껍데기라 하더라도?”

호법위가 몸을 일으켰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가슴 앞에 손을 교차시킨 그가 말했다.

“대천의 불꽃, 생과 사의 경계에서 길이 영명할지니. 꺼진 것은 불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남으십시오.”

휙.

호법위가 다시 붉은 잔상이 되었다.

두두두두!

붉은 잔상이 멀어져 갔다. 폭우 같던 말발굽 소리는 순간이었다.

호법위는 한낮의 꿈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욱!”

호법위가 떠난 빈자리를 지켜보던 용천휘가 갑자기 허물어졌다.

가까스로 지면을 짚고 버틴 그가 피를 한 움큼 내뱉었다.

옷자락이 피로 물들었다. 양손도 그러했다. 마음은 더 할 터였다.

“이, 이런! 괜찮아?”

적하조가 용천휘 곁에 주저앉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이 더 울상이었다.

“…….”

“너무하잖아. 이대로 가다간 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라도 해 보지 그랬어.”

소용없는 얘기였다.

그들은 그조차 천신의 뜻이라 할 것이다.

적하조는 조심스레 용천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제껏 그를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눈은 폐허 같았다.

“그럼 이제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보다 못한 독귀가 적하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너는 그 말을 지금 꼭 해야 쓰겠냐!”

“아, 아니…… 그래도 살길은 궁리해야죠. 백이도 떠난 이 마당에.”

“그놈이 괜히 떠났냐. 지 혼자 어떻게 해 본다고 갔잖느냐.”

“그럼 뭐해요. 어디 얌전히 처박혀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란 소리잖아요. 백이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혼자란 말이에요. 혼자서 무림맹 전부를 때려 부수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일 년? 이 년? 그리고 그렇다 한들 얘한테는 무슨 의미가 있냐구요. 얘는 벌써 죽었을 텐……”

말을 하다 말고 적하조가 안색을 바꾸었다.

“……아, 이런!”

자신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지금 깨닫게 된 것이다.

“……얘가 죽으면 안 되잖아!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그럼 저 호법위라는 것들은 그놈을 그림잔지 뭐시기로 받들 것 같던데! 그럼 백이는 무림맹뿐만이 아니라 마교도 전부 상대해야 하고!”

적하조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이,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백이한테 이 얘기를 해 줘야 해. 지금 무림맹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단걸. 영감. 얘 좀 부탁해요. 난 지금 당장 백이를 찾으러 가야 할 것 같으니.”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럴 것 없어. 여기 있으니까.”

“……어? 백아!”

모습을 드러내는 지강백을 향해 적하조가 원망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말을 외쳤다.

“너, 너…… 간다더니! 우리 버리고!”

지강백은 말발굽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왔다는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그가 용천휘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을 남겨 놓고 멈춰 선 그가 용천휘에게 말했다.

“네가 준 눈이 필요한가?”

“…….”

용천휘는 대답 대신 하나 남은 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용천휘를 마주하는 지강백의 왼쪽 눈도 어느샌가 붉어져 있었다.

“돌려주겠다. 가져가라. 대가는 받은 것으로 치겠다.”

“아니. 그럴 것 없어.”

“그건 고집이냐? 아니면 되도 않는 자존심인가? 이게 있어야만 네 편을 만들 수 있다면 네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용천휘는 한참 동안 침묵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한 대가야. 그리고 나는 그 실수의 일부분도 처리하지 못했어. 그런 내가 대가를 되돌려 받을 수는 없어.”

죽은 사부도, 사제들도, 사문의 이름도. 그는 제가 잃어버리게 한 그 무엇도 되돌려 줄 수 없었다.

그가 줄 수 있었던 것은 눈이 전부였다.

그래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지강백의 수라안은 용천휘에게 남은 유일한 긍지였다.

“그래서 차라리 죽겠다고?”

“그래.”

용천휘가 잘라 말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런 삶은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대명천교의 주인이야. 대천의 불꽃이다. 타지 못할 바엔 차라리 꺼지겠어.”

“…….”

이번에는 지강백이 입을 닫았다. 그러나 용천휘를 마주한 수라안은 입을 대신해 분주했다.

“게다가 내가 눈을 남겨 주면 적어도 사형이 그 사생아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지강백을 보는 용천휘의 눈매가 비틀렸다.

저를 향한 자조도, 지강백을 향한 비웃음도 아니었다.

걱정과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알아 둬, 사형. 지월을 죽이는 것과 대명천교의 주인을 죽이는 것은 엄청나게 다른 일이라는걸. 사형은 대명천교 전체를 상대해야 할 거야. 당장 저 오십 명의 호법위만 하더라도 개개인이 지월과 맞먹을 자들을. 나는 수라안으로도 호법위의 한계를 본 적이 없어.”

“…….”

“사형의 복수는 사형의 손으로 끝낼 수 없을지도 몰라.”

용천휘가 손을 들었다.

피에 젖은 손이 언젠가 지강백이 그에게 했던 것처럼 지강백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그것은 사죄였다.

“배신하지 마.”

“…….”

“나는 사형이 우리 거래를 완수할 거라고 믿어. 믿을 테니 배신하지 마.”

용천휘는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네가 배신하지 말라고 한 순간부터 나는 너를 배신한 적이 없었노라고.

너를 배신했던 것은 상황이었다고. 나를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이젠 그런 변명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곧 죽을 터였다.

반쪽의 수라안을 남긴 채로.

“그럼 묻지.”

지강백이 제 머리를 두들기는 용천휘의 손을 홱 낚아챘다.

“너는 살고 싶은가?”

“……? 무슨 뜻이야?”

“네게 살 의지가 있냐고 묻는 것이다. 아니면 이대로 죽겠다는 게 네 의지인가?”

잘못된 물음이었다.

용천휘는 한 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제 반쪽의 몸이 아무리 저주스러워도, 금단의 대법을 통한 반소 효응이 아무리 괴로워도 절대로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이대로 죽는 거야.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중원 땅에서.”

착각인 걸까.

용천휘는 지강백의 왼쪽 눈이 한층 더 붉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렇다면 살아라.”

“…….”

“내가 거들겠다.”

“……!”

그 말에 용천휘의 오른쪽 눈도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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