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호법위 (1)
진가운송은 언제나 바빴다.
다른 걸출한 표국들도 요새는 이래저래 몸을 사려 가며 노는 시기였지만 역으로 진가운송이 할 일은 더 늘어났다.
“으아…… 나는 언제 쉬어 보나.”
진가운송의 대표이자 쟁자수이자 회계담당이기도 한 진호역이 말을 달리며 한숨을 쉬었다.
윤기가 자르르 도는 갈색 말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빠르기로 대로를 내달리는 중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얘기였지만, 사실 진가운송은 하오문의 섬서 분타와 같은 곳이었다.
그 덕에 다른 쟁쟁한 표국들 틈바구니에서도 이제껏 별 사고 없이 운송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워워. 여기 어디쯤인 것 같은데…… 오라, 저긴가 보다.”
진호역이 고개를 빼고 전방을 살폈다.
대로에서 두어 골목쯤 들어간 곳에 고만고만한 크기의 장원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높은 담에 큼직한 규모를 가진 사합원이었다. 함양에서 제법 이름 있는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고장다웠다.
“여기 중간 집이라 했겠다.”
의뢰를 받은 집을 찾아낸 진호역이 말에서 내려 대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진가운송에서 왔습니다.”
듣기로는 집이 비어 있다 했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예의상 하는 일이었다. 빈 집이라고 해서 막 들어가면 도둑으로 오인받기 십상이었으니까.
그가 오늘 할 일은 집안 동쪽의 범전(梵殿: 불당)에 서찰을 하나 두고 오는 것이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진호역이 대문을 밀었다.
끼이익, 쿵.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저절로 문이 닫혔다.
여기까지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텅!
빗장이 저절로 내려왔다.
“……응?”
진호역이 홱 고개를 돌려 빗장을 바라보다 눈을 비볐다.
“지금 뭐가……?”
그때였다.
발밑이 물컹, 꺼져 가는 기분이 든 것은.
“으윽!”
다시 고개를 돌리자 평범한 장원의 모습을 하고 있던 광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붉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붉었다.
벽이고 천장이고 바닥이고 모두 붉고 물컹거렸다. 마치 커다란 짐승의 몸속 어딘가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으…… 으아아아!”
당황한 진호역이 대문으로 달려갔다.
“으아! 문이 어디 간 거야!”
그사이 빗장이 걸렸던 대문은 사라지고 없었다.
“으, 으아아!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진호역은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길이고 방향이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 잠깐. 그 전에.”
하지만 의뢰는 의뢰였다.
진호역은 품을 뒤져 이곳에 전해 달라 건네받은 서찰을 아무 데나 내려놓았다.
“범전에 두라 했지만 지금 이 마당에 범전이 어딘지 찾을 수는 없으니까.”
달캉.
둘둘 말려 비단 자락에 감싸인 서찰에서는 뭔가 단단한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게 조금 신기하긴 했다. 왜냐면 진호역이 알기론 그런 소리를 낼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음?”
그리고 서찰에서 소리가 울리는 순간,
“……헉!”
진호역이 입을 딱 벌렸다.
눈앞의 풍경이 또 씻은 듯 뒤바뀌어 있었다. 그가 처음 본대로 평범한 부잣집 장원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야!”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피처럼 진득한 붉은색 가사를 걸친 이었는데, 나이를 통 짐작할 수 없는 기묘한 모습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진호역이 물었다. 그러나 중은 대답 없이 손을 뻗어 서찰을 집어 들었다.
비단이 풀리고 돌돌 말려 있던 서찰이 열렸다.
“어…….”
여기서 진호역은 또 한 번 당황했다. 바로 서찰 때문이었다.
서찰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 안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서찰로 보낸 종이도 이상했다. 이리저리 일정하게 접힌 모양새를 보면 아무래도 저것은 서찰용 종이가 아니라 부채에서 부챗살을 뜯어내고 남은 선면(扇面: 부채 얼굴)이었다.
“이제야……!”
적색 가사의 승려가 아무 글자도 없는 서찰을 들여다보고는 탄식을 토했다.
진호역은 아직도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어서 이 괴상한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저, 저어…… 서찰은 틀림없이 전했으니 저는 그럼 이만……”
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승려는 서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용기를 얻은 진호역이 대문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서둘러 빗장을 열고 대문을 빠져나오자,
“……음?”
그는 여전히 장원 안에 있었다. 마치, 장원 밖에서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맞은편에는 적색 가사의 승려가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진호역은 지금에서야 승려의 발밑에 그림자가 없음을 보았다.
진호역이 소리를 질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중원인은 나가지 못한다.”
승려가 입을 열었다.
진호역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더듬거렸다.
“……예? 중원인이라니 저 말씀입니까, 대인? 아니, 대사?”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진가운송을 운영하면서 나름 못 볼 꼴도 많이 보고 목숨이 위태로울 일도 퍽 많이 겪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무엇도 오늘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문주가 직접 의뢰하는 것이라 했을 때 보통 일이 아니라고 짐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후회해도 늦었고, 어떻게 해서든 저는 무고한 심부름꾼임을 강조해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대…… 대가라니요? 저야 의뢰를 받아 서찰을 전한 죄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희 진가운송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고객의 기쁨을 최우선으로 하는 곳으로, 혹 미흡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나 열린 마음과 열린 귀로 받아드려 시정을 할 준비가,”
적색 가사의 승려가 진호역을 향해 몸을 쑥 기울였다.
그림자가 없어 가뜩이나 온갖 무서운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움직이니 아예 몸이 허공으로 불쑥 들렸다.
“흐…… 흐아아아아!”
코앞에서 대면하고 있는 승려가 사람이 아니라 무슨 도깨비불이라도 되는 것 같아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진호역을 더 기겁하게 만든 것은 이어지는 승려의 말이었다.
“염소 백 마리가 필요하다.”
“으, 으헉! 아, 아니 백…… 백 마리? 백 마리씩이나?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구해 오라 하시면 구해 드려야지요. 그것이 저희 진가운송입니다. 사, 사흘! 사흘만 말미를 주시지요.”
승려의 얼굴이 더 가까이 왔다. 아니, 얼굴만 더 가까이 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승려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커져 있었다. 진호역은 이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 시진.”
“바, 반 시진이라니요? 아니, 이런 주택가에서 무슨 놈의 염소를 백 마리씩이나 구해 온답니까? 사흘이란 것도 다 저희 진가운송이나 되니까 한 말인데…… 아니, 대사. 이게 아니라…… 저희 진가운송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고객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생각하는 곳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도 않는,”
“불가능한가?”
“바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승려의 동공이 좌우로 움직였다.
보름달만 한 얼굴이니 동공은 주먹만 했다. 진호역은 자신이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렇다면 나가지 못한다.”
이제는 정말로 눈물이 차올랐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진호역이 눈물 섞인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아니, 대사. 그러지 마시고…… 뭐 다른 것은 없겠습니까. 옛말에도 이가 아니면 잇몸이라 하지 않습니까.”
저라고 제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람 상대해 온 장사치 세월이 있기에 입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대답이 들렸다.
“적토마 한 마리의 피가 온전히 필요하다.”
“뭐라고요, 적토마?”
갑자기 귀가 번쩍 뜨였다.
적토마란 후한 때의 무장이 탔다는 명마를 일컫는 것으로, 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다 하면 마시장에서는 부르는 게 값인 몸이었다.
물론 염소와는 비교할 게 아니었다. 염소 백 마리라 한들 적토마의 후손 한 마리보다 비쌀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이, 때마침 지금 타고 온 말이 적토마의 피가 섞인 놈이었다.
진가운송의 소중한 사업 밑천이긴 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들 때가 아니었다.
“그, 그런 거라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않고서! 때마침 제가 바로 저 문 밖에 한 마리 묶어 두지 않았겠습니까!”
승려의 눈이 다시 좌우로 움직였다.
“가져오라.”
“예, 알겠습니다! 문만 열어주시지요.”
기이이잉, 쿵!
다음 순간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 * *
“마…… 맙소사.”
진호역은 눈알이 시릴 정도로 눈을 비볐다.
그의 옆에는 방금 전 목이 잘려 죽은 말이 쓰러져 있었다. 잘린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잠시, 그 피가 고스란히 승려의 발밑으로 고여 들었다.
우우우웅.
땅이, 집 전체가 흔들렸다.
승려의 발아래로 고인 피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림자는 그림자에 멈추지 않고 계속 쑥쑥 자라났다.
그림자가 사람 하나만큼 더 자랄 때마다 못 보던 사람이 나타났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비고 나면 하나둘씩 늘어 있었다.
“허, 허…….”
적색 가사를 입은 사람이 모두 오십 명.
처음 나타났던 승려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엇비슷하게 생긴 자들이 하나같이 호랑이 같은 눈매를 가진 날렵한 준마에 올라 있었다.
어릴 적 그림책에서나 보던 그 적토마와 똑같이 생긴말들이었다.
신기한 것은 말이 쉰 마리가 아니라 쉰세 마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네게 빌린 것이다.”
첫 번째 승려가 말 한 마리의 고삐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것은 말을 빌린 값이며,”
두 번째 고삐가 넘어왔다.
“마지막은 오늘 본 것을 잊는 대가다.”
세 번째 고삐를 넘겨주는 승려의 눈이 갑자기 불을 뿜었다.
“으헉!”
진호역은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눈에 흙먼지가 잠깐 들어가는 듯도 했다.
눈이 따끔해 한참 깜박대고 났더니 시야가 맑아졌다.
“……음?”
진호역은 자신이 텅 빈 장원에 말 세 마리와 덩그러니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 이 말이 대금인가?”
한바탕 꿈을 꾸고 깨어난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그래도 그는 보기 드문 준마를 세 마리씩이나 대금으로 받게 되어 기뻤다.
“간만에 문에서 좋은 일거리를 줬네. 서찰만 빈집에 가져다 놨을 뿐인데 말이 세 마리라니. 어이쿠, 다들 발굽이 두툼하고 눈빛이 좋은 게 아주 팔팔 잘도 뛰어다니겠구나.”
신이 난 진호역이 말고삐를 그러쥐고 대문을 나섰다.
진호역의 뒷모습이 충분히 멀어진 뒤였다.
스르륵, 턱.
빗장이 저절로 내려와 대문을 잠갔다.
사람 하나 없는 빈 장원은 시치미를 떼고 다른 집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 * *
“내려.”
마차가 멎었다.
문을 덜컹 잡아채는 지강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용천휘가 다시 혈색을 잃어 가는 입술을 열었다.
“왜?”
“길이 좁아진다. 마차가 다닐 수 없어.”
성도까지 가는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은 이미 무림맹이 차지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부터라도 길을 달리하는 편이 나았다.
지강백은 지름길을 택해 무림맹보다 빨리 사천에 당도할 수 있기를 바랐다.
무림맹의 갑작스러운 이동에는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적하조가 끼어들었다.
“말로 가는 거야? 말은 다 구했어?”
“산길이다. 말은 필요 없어.”
“그럼 걸어가자고?”
적하조가 어깨 너머를 눈짓했다.
“걸을 수 있을까?”
“…….”
지강백이 힐긋 용천휘를 보았다.
한때 사제였던 자를 보는 눈빛이 조금은 복잡해졌다.
“여기서 갈라서자.”
“……뭐라고?”
용천휘가 사라진 부채를 대신하듯 제 손을 내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갈라서자니.”
“전령을 보냈으니 마교가 나서겠지. 나는 마교와 한패가 될 생각이 없다.”
“이미 한패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조금도.”
“어처구니가 없군. 사형 그 왼쪽 눈부터가 마교의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거래의 대가다. 네가 말했듯이. 너와 나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
용천휘가 입술을 꾹 물었다.
“네가 마교를 끌어들여 무슨 짓을 하건 나는 관여치 않겠다. 내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내가 치를 수 있는 대가다.”
“……그래, 그리고 사형은 언젠간 내게 복수할 생각이지.”
지강백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마차를 돌려. 네 길을 가라.”
적하조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 어……? 그럼 나는!”
“너 좋을 대로 해.”
“뭐? 이제 와 그러는 게 어디 있어! 나는 이제껏 너와 생사의 고락을 오르내렸잖아!”
“알아.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라는 얘기다. 너는 살막의 인물이잖아. 살막에서 무림맹으로부터 네 정체를 감춰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그 말에 적하조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막에서 뭘 어쨌다고?”
“하오문주가 이쪽을 거드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무림맹이 움직였지. 하지만 살막으로는 가지 않았다. 네 정체를 모르는 거야.”
“그건…… 그야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어, 그런 거 아냐? 그걸 막에서 감춰 줬다니. 그럼 내내 우리 뒤를 따라오면서 내 흔적을 지워 주기라고 했다는 거야?”
“어찌 됐건 더 이상 끌어도 좋을 게 없단 소리지.”
일행은 적하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독귀도 대경한 채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아직도 다리가 성치 않은 탓에 그리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이놈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사천에 혼자 가겠다니! 거기 무림맹 놈들이 얼마나 몰려들지 알고!”
지강백이 무표정으로 독귀에 맞섰다.
“그러니 부상자는 빠지라는 겁니다.”
“뭬야? 이제 와 쓸모없어졌으니 버리는 게냐?”
“더는 다치는 일을 만들지 말자는 겁니다.”
“그럼 내 마누라 복수는! 그건 누가 하냐!”
“제가 하겠습니다.”
“내 마누란데! 내 사지 육신이 멀쩡하면 내가 해야지! 어딜 끼어드느냐! 나는 죽어도 여기서 못 갈라선다. 나는 네놈하고 계속 갈 테다!”
독귀는 지강백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늘어질 기세였다.
적하조도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안 돼. 나는 절대 내 친우를 사지에 혼자 가라고 놔둘 수 없어. 지옥 끝까지 함께 가겠어.”
지강백이 적하조와 독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다.
그래서 사지(死地)로 함께 가자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이 중원 땅에 남은 마지막 제 사람일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
지강백이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종남의 빚은 오로지 내 몫이다. 내가 갚아야 해.”
휙!
그리고 지강백은 그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순간의 순간처럼 느껴지는 일이라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지강백이 떠난 자리에는 마치 미련처럼 희미한 잔상만이 남았다.
“우와…… 이거 진짜 너무한다.”
적하조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간 우리가 고생한 건 생각지도 않고. 네가 백이 살릴 거라고 그렇게나 고생을 했는데. 그것도 몰라주고. 진짜 너무한다.”
볼멘소리는 끝이 없었다.
“영감. 영감도 뭐라고 좀 해 봐요. 기분 나쁘지 않아요? 나 막 서럽고 그러는데……”
“입 다물어라!”
독귀가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바람에 적하조가말을 멈췄다. 둥글둥글 커다란 눈이 억울함을 더해 벌어졌다.
“새들이 움직이잖느냐.”
“……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독귀가 하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크고 작은 새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일행이 지나온 길을 거꾸로 날아가고 있었다.
“새들은 저래 날지 않는다. 저건 무슨 일이 있다는 소리야. 뭔가가 쫓아오고 있는 게다.”
독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래, 맞다.”
수풀들이 우썩대며 일어섰다.
아니, 수풀이 아니었다.
고도의 은형술로 몸을 감추고 있던 사영문(死影門)의 살수들이었다.
같은 살수 집단이라 해도 살막과 사영문은 조금 달랐다. 살막은 독문무공을 바탕으로 하며 강호의 인사들을 주로 상대하는 반면 사영문은 대가만 확실하다면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사영문의 단골 고객은 고리대금업자일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사영문이라니……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잖아! 무림맹이 이래도 되는 거야?”
적하조가 품 안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은형술로 존재감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던 사영문의 살수가 웃었다. 작게 입술을 비트는 그 웃음은 꼭 유령이 짓는 것처럼 보였다.
“금 앞에 목숨이 무엇이며 무림맹이 무엇이랴. 너희들은 이제 다 본 문의 금이 될 것이다.”
“젠장, 이 돈벌레 같은 놈들! 영감! 쟤 데리고 도망쳐요! 여긴 내가 어떻게든 막을게요!”
“너 혼자 가지고 되겠냐!”
“그럼 어떡해요! 몸 멀쩡한 인간은 나밖에 없는데! 어서 가요!”
독귀가 용천휘를 붙들고 신법을 시전했다.
사영문의 살수가 독귀의 등을 보며 웃었다.
“그런 걸음으로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슷!
살수 중 하나가 독귀를 노리고 몸을 움직였다. 그 앞을 적하조가 가로막았다.
“너는 그런 걸음으로 얼마나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보다 느린 주제에.”
입이 열심히 움직이는 만큼 표정도 비장했다.
“절대 못 가.”
그러나 새들은 사영문을 피해 날아오른 게 아니었다.
두두두두두두!
이제껏 새소리에 가려져 있던 말발굽 소리가 지금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죽고 죽일 듯 노려보던 이들을 주춤하게 만들 정도로 충분히.
“뭐, 뭐야…… 저건 또 뭐야!”
곧이어 한 무리의 붉은 잔상이 날아들었다.
죽음의 그림자(死影)라는 말은 사영문이 아니라 저 잔상에 더 어울릴 듯싶었다.
왜냐하면.
“으…… 억?”
붉은 잔상이 마치 파도처럼 불어온다 느꼈을 때,
사아아아아……
사영문의 살수들이 모두 붉은 잔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으, 으아아…….”
적하조는 몸이 굳은 채 그저 신음만 흘렸다.
그때 붉은 잔상이 실체를 갖추었다.
적색 가사를 몸에 두른 오십 명의 승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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