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단서
그 시각 범광은 객잔 안에 있지 않았다.
때마침 볼일이 생겨 잠시 자리를 비웠던 범광은 다시 잔평객잔을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심각했다. 한 손으로 쥐고 있는 전서가 구겨진 모양새 또한 심각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문득 걸음을 멈춘 범광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높고 새파란 하늘은 무심히 아래를 굽어볼 뿐이었다.
“나는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이냐.”
방금 전.
잔평객잔에 도착한 범광은 각 문파별로 처소 배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전갈이 도착했다.
제갈가에서 따로 뵙기를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워낙 잡음이 많은 맹인지라 이번에도 처소 배정 문제로 불만이 있겠거니 했다.
한사코 저를 따라오라는 제갈가의 가신을 따라 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니 그곳에는 제갈가의 소가주인 제갈단우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예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제갈단우가 함께 있는 사람이 의외였다.
부상으로 기식엄엄하다던 백사준이 그에게 천으로 감싼 둥그런 물건을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증거요.
―예? 무슨 증거입니까?
백사준은 엄숙했고 제갈단우의 눈에는 고통이 스쳐 갔다.
천을 풀어보니 그 안에는,
―마, 맙소사!
제갈현기의 머리가 있었다.
그것도, 머리칼이 하얗게 변색된 채로.
백사준이 입을 열었다.
―감원께서 마지막으로 제갈가주를 본 게 언제였소?
―예? 그게……
―내 알기론 백룡호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제갈가주는 분명 이 꼴이 아니었소. 기억하시오?
―그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 머리칼이 희다면 누군들 몰라 봤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갈가주에게 마교의 손이 뻗은 것은 백룡호로 떠난 직후, 또는 직전이라는 소리가 되오. 실제로 백룡호로 출발하는 마차에 오른 뒤 목소리만 듣고 직접 얼굴을 대면한 적은 없다고 여기 계신 소가주께서 말씀하셨소.
제갈단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거들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마차에 오르기 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소?
이어지는 백사준의 말에 범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 나는 내 눈으로 목도했소. 제갈가주가 백룡호로 말머리를 돌리기 직전, 누구를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
범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허면, 백 소방주께서는 맹 내부에 마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그리 믿소.
범광은 그때서야 제갈단우와 백사준이 한쪽 뺨에 똑같아 보이는 상처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 상처는…… 혹 저를 따로 불러내신 것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백사준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저가 할 말을 했다.
―그게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시오?
범광은 백사준의 눈이 무섭다 느꼈다.
십자 모양의 상처가 얼굴에만이 아니라 눈 속에도 난 듯했다.
―물론 궁금합니다. 맹원이라면 누구나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누굽니까?
백사준은 흉터가 웅크리고 있는 눈으로 감원을 뚜렷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맹주요.
―……네?
처음에는 귀가 이상해졌다 여겼다.
―누구……라고요?
―껍데기가 바꿔치기 됐다 하였소.
―껍데기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백사준은 소매를 휘둘러 소리를 지우며 말했다.
―범광께서도 짐작은 하고 계셨을 줄 아오. 다만 확신이 부족했을 뿐.
―저는 대체 백 소방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맹주가…… 아니, 대사께서 종종 기이한 행동을 취하셨을 것이오. 천하무도회의 그 날, 대사께서는 이미 목숨을 잃으시고 마교가 그 껍데기를 취했다 했소.
범광은 그 모든 말을 들은 적이 없던 방금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무슨 불경한 말입니까! 어찌 감히!
―감원도 이미 알고 계실 거요. 왜냐면 내가 그러했으니까.
백사준은 거듭 말했다. 몇 번이고 지월이 지월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고.
말투며 태도며 생각하는 것이며 모든 것이 달랐다고.
―맹주께서는 섬서에서 이 몸과 한 약조도 기억하지 못하셨소. 분명 천하무도회 이전의 일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실 게요. 왜냐면 그 날을 기점으로 대사께서는 더 이상 대사가 아닌 탓이오.
―저, 저는…… 저는…… 도무지 믿을 수가……
범광은 감원이 된 세월 내내 견고히 자라 온 지월에 대한 신뢰를 부여잡으려 애썼다.
―지금 당장 내 말을 다 믿으라는 것은 아니외다.
백사준이 한 발짝 물러났다.
―다만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소. 대사께 천하무도회 이전의 일을, 가능한 감원관 단둘만이 알고 있을 것 같은 얘기를 물어보시오. 대사께서 그것을 모른다면, 그때는 다시 내 말을 떠올려 주시오.
범광은 저를 꿰뚫을 듯 응시하는 백사준의 눈을 외면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범광이 휙 등을 돌렸다.
―감원!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를 애써 듣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더 저 눈을 마주했다간 의혹은 덫이 되어 곧장 발목을 걸어 올 듯싶었다.
“……허나 내 눈을 가린다 해서 진실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범광은 혼란과 침묵 끝에 결론을 내렸다.
백사준의 말대로 의혹이 있다면 스스로 해결을 하면 되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지월의 처소로 향했다.
막 이 층 계단으로 올라서는 그때,
“으악!”
낯익은 비명 소리를 들었다.
잔평객잔의 게으른 점소이가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것도, 지월의 처소에서.
* * *
휙!
단숨에 몸을 날려 이 층으로 뛰어오른 범광이 소리쳤다.
“방장!”
그는, 방금 너무 기괴한 광경을 보았다.
지월이 점소이의 팔을 붙들고는 뒷목으로 입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목을 물어뜯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으아악! 으악! 살려 줍쇼! 살려 주세요!”
범광을 발견한 점소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방장! 대체 왜 이러십니까!”
대경한 범광이 달려들어 점소이를 잡아당겼다. 지월의 눈이 이쪽을 향한다 싶었다.
슷!
지월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점소이를 놓아 버렸다.
범광과 점소이가 한꺼번에 뒤로 떠밀렸다.
“방을 엿보려 했다.”
지월이 변명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아니, 무슨……! 내가 문 앞에서 안에 계시냐고 그렇게 묻고 또 물었는……!”
기가 차서 발을 동동 구르던 점소이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지월과 눈을 마주한 탓이었다.
무감하게 번들대는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그저 깊고 어두운 구덩이처럼 보였다.
“꺼져라.”
지월이 등을 돌렸다.
순간 범광은 아주 오래된, 고이고 고여 밑바닥부터 썩어 가는 더러운 물비린내를 맡았다.
언젠가 맑은 선기를 흩뿌리던 지월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악취를 흘리게 된 것일까.
“방장!”
범광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염소젖이 좋겠습니까, 말린 생선이 낫겠습니까?”
“……?”
범광이 내뱉은 말은 뜬금없었다. 방금 사람이 죽을 뻔한 상황과는 도통 무게가 맞지 않았다.
“그 무슨 흰소리냐. 비린 것을 어찌 먹으라는 게야.”
지월이 짜증스럽게 내뱉고는 그대로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쾅!
그가 사라지자 역한 냄새도 사라졌다.
점소이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으으……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요. 아니, 무슨 짐승처럼 입을 벌리는데…… 헛, 아니. 이것은 저…… 객의 험담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제가 원체 놀란 나머지 말실수를 잠깐…… 아, 뭐. 아무튼 참말 다행입니다.”
그는 요행인지 무엇 때문인지 멀쩡한 뒷목을 쓰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범광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방장의 처소로 이 방을 고른지 아십니까.”
“……음? 아, 제게 하신 말씀입니까요? 그야 제가 객의 심중을 어찌 알겠습니까요. 그저 우리 같은 것들은 모르는 깊은 뜻이 있겠구나 싶은 게지요.”
“일전에 묵었을 때도 이 방이었습니다. 방장께서는 몸 뉘일 한 장 반짜리 공간이면 어디든 괜찮다 하는 분이시기에 가장 작은 방을 내어 달라 하였습니다.”
“어이쿠, 참말로 대사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덕승(德僧)이올시다.”
“그 방에는 그런데 미리 와 있던 객이 있었습니다.”
점소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아니, 그게 참말입니까? 아니 그래도…… 거 묵으신 게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제 와 환불을 해 드릴 수는 …….”
“아예 제 방인 듯 침상을 편히 쓰고 있는 살진 고양이였습니다. 방장께서는 흔쾌히 당신의 침상을 내주시며 제게 젖이나 생선을 얻어다 주면 안 되겠냐 물으셨습니다.”
“아, 환불이 아닙니까? 어쩌면 그리 훌륭한 덕담이 다 있단 말입니까. 오늘 참말이지 귀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제 점소이 인생 동안 가장 영광된 일이올시다.”
그러면서 지월은 혹시라도 다음에 이곳을 지날 일이 있으면 같은 방에 묵어야겠다고 했다.
혹 다른 객들은 고양이가 이 방에 오래 묵어 온 것을 모르고 쫓아낼까 저어했던 것이다.
“그러던 분이…….”
그가 젖이나 생선 이야기를 꺼내도 그게 무슨 말인지 통 모르는 눈치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하무도회 이전의 일은.
자꾸만 피 묻은 발자국이 어른거렸다.
그때 사라진 사미승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 뒤에 사라진 사미승도 마찬가지였다.
―마교가 껍데기를 차지했다 하오. 대사는 이미 죽었소.
백사준의 말을 떠올리는 범광의 손이 부르르 떨려 왔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온갖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저는 이제…… 어찌해야 된단 말입니까.”
점소이가 아직도 섬뜩한 뒷목을 슬슬 쓰다듬고 있다가 말을 건넸다.
“혹 출출하지는 않으십니까요? 저희 객잔의 자랑, 섬서 제일 숙수께서 아까 전부터 이것저것 온갖 산해진미를 준비하고 계십니다만.”
“…….”
범광이 대답 없는 혼란만을 안고 자리를 떴다.
아직도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지금 지월이, 지월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저 손님? 손님? 아니, 어찌 방 장사만 하라 하십니까요. 원래 객잔에서 제일 이문이 남는 것은 밥장사란 말입니다. 이 많은 분들이 묵기만 하시고 쌀 한 톨 안 드신다는 건 저희로서도 막심한 손해가…… 손님! 손님!”
그러나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픈 마음도 혼란과 함께 그쳤다.
목덜미가 상한 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얼룩 고양이 한 마리를, 범광이 결국 발견했다.
이 층 처소의 창문에서 집어 던진 듯한 그것을.
소림의 감원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 * *
‘왜 사천이었을까.’
백룡호에서 한발 앞서 몸을 빼낸 무당의 제이 장로 태수진인은 홀로 사천 땅을 밟았다.
한번 일기 시작한 의혹은 도무지 멈출 수 없는 게 되어 버렸다.
태수진인은 사천으로 눈을 돌렸다.
지월의 입에서 비롯된, 급작스러운 사천행에 반드시 이유가 있다 믿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맹의 본부를 사천으로 옮길 이유가 없다. 호북보다 사천이 서역과 가깝긴 하나 지금은 마교 색출이 한창인 때.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지월은 사천행을 강행했다.
사천당가는 종남에 이어 두 번째로 마교의 숨은 첩자임이 밝혀진 곳이었다.
지월이 정말로 마교의 주구라 하면 반드시 사천당가와 연결점이 있을 것이다.
‘찾아낼 것이다. 거짓으로 우롱할 수 없는 증거를 찾아낼 것이다.’
태수진인이 눈앞의 거대한 장원을 올려다보았다.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그 아래로는 몸서리치게 사나운 장강이 굽이쳐 흐르는 장원은 세인들이 사천당문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천하무도회 이후로 여식 둘을 제외한 직계가 전부 죽는 참사를 겪은 사천당문의 대문은 그 날 이후로 굳게 잠겨 있어야 했다.
그리고 대문 전체에 검은 천을 둘러야 했다.
무림맹에 의해 봉문을 당했다는 표식이었다.
“……설마?”
그런데 그 천이 찢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태수진인이 한달음에 달려갔다.
금포(禁布)가 찢겨 있을 뿐 아니라 대문마저도 한 뼘이 넘게 열려 있었다.
“…….”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태수진인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며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섰다.
어지간한 규모의 성이 부럽지 않은 이곳은 하인과 방계가 거주하는 도좌방만 해도 마을 하나 크기였다.
그런데.
“이 무슨 변고가…….”
그 수많은 도좌방이 텅 비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봉문을 당하고 모두 떠난 것인가?”
허나 그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인들이라면 몰라도 방계까지 모두 가문을 등질 수는 없는 법이다.
태수진인은 내원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본디 사천당문의 내원은 가장 깊숙이 숨겨진 채 그 주변이 몽혼진으로 둘러싸여 있다 알려져 있었다.
전원(前院)을 모두 지날 때까지 태수진인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수화문에 이르렀을 때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몽혼진을 이룬다 하는 꽃밭이 모두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태수진인이 속도를 높여 수화문을 넘었다.
타다닷!
그의 발밑에서 말라 죽은 꽃잎들이 신음했다.
“누구 없소! 이 몸은 무당의 태수도인이외다!”
태수진인이 내력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내기가 충만히 실린 음성이 빈집 구석구석을 뒤흔들었다.
“아무도 없소이까!”
아무도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곳을 버리고 떠났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봉문한 곳이다. 대문에 금포가 씌워진 이상 누구도 마음대로 이곳에 들어설 수도, 떠날 수도 없었다.
만일 사천당문에 남은 이들이 모두 이곳을 버리고 떠났다면 무림맹에서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변고가 생겼다고 하기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려면 시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려진 장신구 따위가 간혹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흡,”
처음에는 몰랐던 세밀한 감각이 있었다.
피부를 따끔하게 하고 눈을 시리게 하는, 기묘한 감각이.
몰랐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한 번 인지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기 시작했다.
“으윽!”
태수진인이 따끔한 피부를 긁기 시작했다.
손톱을 따라 피부가 죽죽 갈라졌다. 태수진인은 제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보았다.
“이, 이게……?”
뼈가 드러났다. 이어서 뼈도 흐물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기가 막힌 것은 그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 독이란 말인가?”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도 녹아내리는 탓이리라.
자꾸만 캄캄해지는 시선 안을, 희미한 그림자가 파고들었다.
“누…… 누구냐!”
태수진인이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는 몹시 작아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입술은 진작부터 사라져 있었다.
“누, 누구…… 누가 이런……”
자박.
태수진인의 앞으로 작은 발자국이 다가왔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새하얀 꽃처럼 시리고 찬 얼굴을 한 여인이 텅 빈 사천당문의 내원을 걷고 있었다.
얼굴이며 피부며 모든 것이 새하얬다. 머리칼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처럼 희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눈으로 빚은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색이 있는 것이라고는 선명한 녹색 눈뿐이었다.
자박. 자박자박.
그녀는 흘러내리는 태수진인을 등 뒤로하고 걸었다.
“…….”
곧이어 태수진인은 모두 녹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천당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태수진인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는 이곳에서 사람들만 사라진 게 아니라 그 많던 온갖 종류의 독들도 모두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독을 모두 삼킨 채희유가 파루나와는 또 다른 괴물이 되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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