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95화 (95/346)

제95화 두 번째 문

“이놈!”

백연은 다시 대력금강장을 시전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슷!

그러나 지강백이 칼끝으로 땅 위에 금을 긋는 순간 마치 무언가에 씻긴 듯 초식이 무마되었다.

“이 금은 넘어오지 마십시오.”

“……뭐라고?”

“사문(死門)입니다. 대사께서 방금 경계를 부순 탓에 눈에 보이지는 않겠습니다만.”

“헛소리!”

백연이 버럭 노기를 터트렸다.

“지금껏 진을 이용해 무림맹을 가지고 놀지 않았더냐! 이제 와 사문이라 넘어서지 말라니! 그 또한 간악한 수작질이 아니더냐!”

백연이 소매를 휘둘렀다.

매서운 바람이 지강백을 향해 쏘아졌다. 지강백은 또다시 칼을 허공에 그어 백연의 장력을 무산시켰다.

“이 무슨 사술이더냐!”

얼핏 보면 지강백이 아무렇지도 않게 초식을 무위로 돌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 진과 진 사이의 틈새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틈새는 수라안으로만 볼 수 있었다. 백연에게는 지강백이 기막힌 사술을 쓰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백연은 사대금강 출신이었다.

그는 승려라기보다는 노련한 싸움꾼에 더 가까웠다. 본디 신체 단련과 근거리 가격을 위주로 하는 소림 무공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리는 싸움을 했다.

백연은 일 보를 앞으로 내디디며 공세를 장에서 권으로 전환했다.

“안 됩니다!”

지강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붉은 눈이 번뜩였다. 지강백은 진과 진 사이를 잇는 틈을 베어 버렸다.

우우웅, 쿵!

겹으로 연결되어 있던 진이 닫혔다.

백연은 홀로 단절된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이런!”

백연이 당황해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이 뻗은 골목길뿐이었다.

“다들 어디 있느냐!”

백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함께 온 이들을 불렀다.

주위는 금방 어두워졌다. 안개라도 낀 듯 어둑한 잿빛 공간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방향이나 방위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없었다.

“어디냐!”

백연은 섣불리 걸음을 떼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때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깁니다, 대사.

“누구더냐! 어디에 있느냐?”

―이쪽입니다.

백연은 청력을 한껏 돋우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찾았다.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쪽입니다.

듣고 보니 곽비연의 목소리 같았다.

백연은 순전히 청력에 의존해 걸음을 옮겼다.

―이쪽입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듯했다. 몽롱한 안개 밭을 걷는 백연의 걸음도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다 백연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옆을 돌아보자 그쪽도 막혀 있었다. 할 수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

방금 지나왔던 길도 사라져 있었다. 뒤쪽도 그저 벽이었다. 백연은 사방이 완전히 막힌 곳에 서 있었다.

당황이 삽시간에 증식했다.

“어, 어디란 말이냐! 어느 쪽인 게야!”

―이쪽입니다, 이쪽!

어떻게 해서든 저 목소리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압!”

백연은 정면의 벽을 향해 대력금강장을 쏟아 냈다.

내력의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모조리 쏟아부은 대력금강장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퍼엉!

벽이 무너져 내렸다. 부서지다 못해 아예 가루가 된 돌이 안개와 뒤섞였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몸이 휘청거렸다.

발밑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처음 느꼈던 진동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였다. 그때는 진동을 감지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절정 고수인 그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을 정도였다.

“이게……”

백연은 한 호흡이 지난 뒤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진을 부순 것이다.

제갈가의 사람들조차 생문을 찾지 못해 쩔쩔매던 그 복잡하고 위험한 진식을.

지금껏 들려오던 목소리가 사라진 곽비연의 것이 아니라 제 마음속의 환청임을 알았다.

“으아악!”

“으윽! 사, 살려……!”

비명 소리가 백연의 뒤통수를 때렸다.

짙던 안개는 어느샌가 말끔히 걷혀 있었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무너져 내리는 벽들이 보였다.

이제껏 진식에 의한 허상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던 끝도 없던 돌담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길은 좁고 벽은 너무 높았다.

도저히 몸을 숨길 틈이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서서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죽음을 보고 있어야 했다.

“고개를 숙이십시오!”

짧은 외침이 들려왔다.

백연은 떨어지는 돌 무리의 사이사이를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지강백이었다.

오히려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그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백연은 그저 눈을 뜨고 지켜보았다.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검을.

사실 그게 검인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백연의 눈에 그것은 살랑대며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보였다.

언 땅을 녹이고, 만물을 적시는 작고 무수한 빗방울처럼.

비가 세상을 덮듯 한 자루의 검이 제 머리 위를 덮었다. 아니, 하늘을 모두 덮었다.

스스스슷…… 콰앙!

곧이어 귀가 먹먹한 폭음이 울렸다.

너무 거대한 소리는 잠시 귀를 멀게 했다.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무음의 상태가 되었다.

다음 순간 백연은 머리 위로 쏟아지던 돌 무리가 한 줌의 흙먼지로 비산하는 것을 보았다.

“아……!”

백연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 압도감을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어떻게 해소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거대하고 거대한, 세상의 한 끝자락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후.”

지강백이 안개를 닮은 흙먼지 속에 내려섰다.

입술과 미간에 미미한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인간의 육신이 감당하기 벅찬 힘을 한꺼번에 쏟아 낸 탓이었다.

“큿…….”

“으욱…….”

여기저기서 살아남은 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부상자들은 더러 있었으나 죽은 이는 없었다.

다들 백연만큼이나 방금 일어난 일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무음이 너무 컸던 탓일지도 몰랐다.

죽음이 너무 가까웠던 탓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 본 저 거대한 검막의 잔상이 너무 강렬해서 일 것이다.

“이…… 이건…… 이건 무어라 부르는 무공이냐.”

백연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대천강검을 펼쳤다 생각했는데…… 중간에 여러 가지가 섞인 듯싶습니다.”

지강백은 방금 전 자신이 펼쳤던 수를 머릿속에 그리며 답했다.

시작은 대천강검이었다.

그것이 태을분광검이 됐고, 그가 아직 익히지 않은 채 머릿속에만 넣어 두고 있던 구궁신행검이 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종남의 검을 벗어난 것도 같았다. 그가 본 모든 무공이 뒤섞였다.

그 수많은 무공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던 것은 우비사였다.

검법도 지법도 아닌, 무공도 무엇도 아닌 깨달음이.

쩡!

지강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이 깨져 버렸다.

“왜…… 왜 나를 살렸느냐.”

백연이 더듬대며 물었다.

지강백은 방금 펼쳤던 검막(劍幕)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검을 미련 없이 버리고 빈손이 되었다.

“너, 너는…… 마교가…… 마교가 왜 나를…… 구했느냐. 너는 우리를 전부 죽여 없애려 하지 않았느냐. 대체 왜…….”

지강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백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육신의 한계를 경험한 그는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전신의 힘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검을 통해 빠져나간 듯했다. 지금은 잠시 눈을 붙이고 쉬고 싶을 뿐이었다.

백연의 실수로 두 번째 사문이 부서진 지금,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다.

“대사께서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는 무림맹을 없애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냐. 너는 분명,”

“저는 무림맹에 사부님과 사제들이 죽은 이유를 묻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건…… 종남이 마교인 탓에…… 마교가 오래도록 종남의 행세를 하며 강호에 혈란을 일으키려…….”

“종남은 마교가 아닙니다.”

슷.

지강백이 백연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백연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모를 일이었다.

무감을 덧씌운 듯한 저 색 없는 잿빛 눈이 왜 저리 사납게 들끓는 것처럼 보이는지.

“종남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확실히 묻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무림맹의 추격대를 죽인 것도, 이 자리의 여러분을 살린 것도 모두 그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 그게……”

“다시는 종남을 마교라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나는…… 나는 그럴 수 없다! 종남이 마교가 아닌 증거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지강백은 빈손임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종남에는 홍엽수가 있었다.

스슷!

지강백이 짧게 손을 휘젓자 백연의 뺨에는 십자 모양의 흉터가 생겨났다.

“그 상처를 통해 증거를 가진 이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지강백은 훌쩍 몸을 돌렸다.

두 번째 사문이 붕괴된 것으로 인해 세 번째 사문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하모문이 무사히 지하 수로를 지났다는 신호가 있을 때까지 그는 세 번째 사문을 지켜야 했다.

지강백의 등을 향해 백연이 소리쳤다.

“기다려라! 그 증거란 대체……!”

뺨에 불인 붙은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화끈대는 것은 가슴 밑바닥에 지펴진 의혹의 불씨였다.

그는 종남의 인물들이 마교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걸 대체 어느 누가 의심할 것인가. 지월이 그리 말했고 개방이 그렇다 했다. 마교가 그토록 지척에 있었음에도 감쪽같이 몰랐던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마교는 그를 살렸다.

마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살렸다 했다. 마교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더 죽일 수 있다 했다.

백연은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껏 틈 없이 견고하던 무림맹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긴 했다는 점이었다.

“증거를 내놓아라!”

백연이 외쳤다.

그 물음에 답을 한 것은 지강백이 아니었다.

“……쯧. 마교에 증거가 무슨 필요란 말인가.”

아직도 허공을 떠도는 흙먼지를 헤집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검은 천으로 온통 몸을 휘감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람과.

“……방장!”

지월이었다.

사천으로 향하던 길에 급히 방향을 돌린 그가 때마침 이 시점에 도착한 것이었다.

지월의 거죽을 쓰고 있는 용천무는 자신을 발견한 백연을 향해 말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현혹되다니. 그리 귀가 얇아서야. 그런 늙은이는 내 밑에 있을 필요가 없지.”

탓!

용천무가 백연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 * *

“……!”

지강백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혈관을 도는 피가 차게 얼어붙는 듯했다.

그자가,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다.

지강백은 삽시간에 그 날로 돌아갔다.

저를 막아서던 사부의 등이 한 무리의 붉은 먼지가 되던 그 날로.

―어서 도망치거라, 어서!

사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던 사부의 등은 크고도 작았다. 감사하고도 가슴이 미어졌다.

찢긴 가슴은 그대로 칼이 되어 날마다 지강백의 뱃속을 난자했다.

“사, 사부…….”

손을 뻗으면 지금이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찮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사부의 천령개를 내리찍는 지월의 손을, 지금이라도 붙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부님!”

지강백이 정신없이 달려갔다.

용천무가 양손을 내밀어 백연을 향해 대력금강장을 뿜어냈다.

머리가 텅 비었다. 오로지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만약 그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강백은 기꺼이 제 목숨을 바쳐 양영천을 살려 냈을 것이다.

“사부님!”

지강백은 제 몸으로 백연을 밀어냈다.

검막을 펼치고 진기가 남김없이 고갈된 몸에 대력금강장이 쏟아졌다.

“커헉!”

지강백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사, 사부……”

지강백은 그 와중에도 눈을 들어 양영천을 찾았다.

양영천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한 백연이 있었다.

그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맹주이자 방장인 지월이 저를 해하려 들었다. 이번에도 목숨을 구해 준 것은 마교라던 종남의 첫째 제자였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때마침 잘도 끼어들었구나! 놈은 어디에 있느냐!”

용천무가 쓰러진 지강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정신 차리시오!”

백연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지강백도 사부가 죽던 그 날에서 돌아왔다.

콰앙!

지강백을 노렸던 백보신권이 애꿎은 지면을 후려쳤다.

은하유영비를 발휘해 신형을 반 바퀴 뒤집은 지강백은 두 다리로 땅을 짚고 서서 용천무를 마주 보았다.

“욱!”

지강백이 쏟아지는 피를 참지 않고 뱉어 냈다.

한껏 끓어올라 머릿속을 헝클어 놓던 피가 이제야 차게 식었다.

“쥐새끼처럼 잘도 숨어 다니더니…… 드디어 네놈 목을 거두겠구나.”

용천무가 팔을 저어 펄럭이던 소매를 정리하며 말했다.

까맣게 썩어 가는 오른손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지강백은 감정마저 차게 식히려 애를 썼다.

찾아갈 필요도 없이 그가 제 발로 나타난 것이다.

‘……사부님!’

지강백이 지금 느끼는 모든 심정이 그 한마디로 응축되었다.

진기가 고갈된 몸으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 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강백은 침착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바닥을 구르는 누군가의 검이 보였다. 벽이 무너질 때 검날이 부러져 길이가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강백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사부님의 원수를 갚겠다.”

지강백이 용천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용천무가 피식 웃었다.

“헛소리를 하는군. 원수? 그럴 주제가 된다면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냐.”

“그럼.”

탓!

지강백은 용천무의 말에는 반응하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부러진 검날을 대신하듯 검기가 솟구쳤다.

“……호오?”

지월의 눈빛이 변했다.

투명한 푸른색 검기가 마치 거대한 낫처럼 지월의 목덜미를 노렸다.

“이런.”

지월이 양 소매를 교차해 바람을 일으켰다.

기로 만들어진 바람이었다. 지강백의 검은 그 바람을 가르며 거침없이 지월의 목을 베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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