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94화 (94/346)

제94화 사성진

우우우우웅!

발밑이 흔들렸다.

“빌어먹을, 설마 벌써?”

사성진의 변화를 감지한 하오문주 문익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직 반도 오지 못했는데…….”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직껏 다리가 다 낫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라오던 독귀가 속도를 높여 다가왔다.

“그럼 어찌 되는 게냐?”

문익상이 한숨을 쉬었다.

하오문의 본거지에서 파 내려간 수로는 호수 밑바닥을 통과해 백룡호의 반대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오문도들은 지금 호수 아래를 걷고 있는 셈이었다.

“위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사성진에는 생문이 두 개, 그리고 사문이 세 개가 있었다.

문주가 되면 본산의 사성진을 보강하는 일은 어느샌가 하오문의 전통이 되었다.

대를 이을수록 진에 진을 더해 복잡해진 사성진에는 장점이라 할 수도, 단점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 하나 있었다. 복잡한 구조 탓에 생문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만큼 사문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진을 파훼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부수기도 어렵다는 소리였다.

“이렇게나 큰 진동이 있는 것으로 봐선 첫 번째 사문이 깨어진 듯싶소이다. 그러진 않기를 바라오만 세 개의 사문이 모두 깨어지면…….”

“깨어지면?”

“백룡호에 가둬 둔 물이 역류해 본진을 삼키게 되어 있소.”

“허…… 그럼 이 밑은 어찌 되는 게냐?”

“그 여파로 무너져 내릴 게요.”

“헙……!”

독귀가 숨을 삼켰다. 그것은 부지런히 그들을 뒤따라 걷던 하오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주. 그럼 여기서 꼼짝없이 죽게 된단 말씀입니까?”

문익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수밖에. 다들 속도를 높여라!”

타다닷.

갑자기 빨라진 걸음이 수로 안을 울렸다.

증폭된 불안감이 어둠에 그림자를 더했다.

* * *

“…….”

빠르게 질주하는 마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돌변했다.

차갑게 내려가는 온도를 느낀 용천무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변화의 원인은 파루나였다.

그녀의 감정 변화에 따라 독기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용천무는 파루나가 대체 무슨 짓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이매가 죽었다.”

“……저런? 실패했다는 소린가?”

채희유는 짧은 고갯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용천무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대체 언제까지…… 아냐, 생각해 보니 내게는 파루나가 있지.”

그가 채희유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 몸을 더 쓸 만해 보이도록 만들 수 있나? 직접 가야겠어.”

“직접?”

채희유의 눈에 녹색 이채가 반짝였다.

“그래. 그간 이 몸이 망가진 걸 들킬까 밖으로 나서질 못했지. 하지만 지금은 파루나가 있으니 그럴 염려는 없겠지. 안 그런가?”

채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출 수 없는 기대감과 흥분이 용천무에게 열기로 다가왔다.

용천무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가 놈을 싫어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파루나께서는 대체 왜 그러는 게지?”

그는 파루나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파루나란 대개 둘 중의 하나였다.

집착적일 정도로 충성하든지, 아니면 미치든지.

그는 채희유가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천휘는 이제껏 채희유를 진짜 파루나로 만든 적이 없었고, 그것은 파루나의 능력과는 별개로 교 내에서 파루나의 입지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교주의 여자가 되지 못한 파루나는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 독인에 불과했다. 어떤 파루나도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았다.

채희유에게는 용천휘를 배신할 이유가 충분했다.

용천무는 그래서 채희유를 회유할 수 있었다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름만으로도 당장 살기가 반응할 정도로 깊은 증오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금제로 얼굴이 망가진 탓인가? 하지만 그건 놈의 탓이 아니라 네 탓이잖아?”

“…….”

채희유는 대답 대신 한 움큼의 독기를 내뱉었다.

용천무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워, 진정하라고. 하여간 알겠어. 그렇게나 놈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

“……빨리 가기나 하라.”

“알았어. 알았다고.”

용천무는 창을 두드려 마차를 세웠다.

일전에 채희유에게 당했던 손끝이 검게 변색된 채였다.

잠시 후.

지월이 내린 새로운 명령에 따라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사천으로 향하던 무림맹은 다시 인원을 나누어 그 일부가 말머리를 돌렸다. 백룡호를 향해서였다.

촌음이라도 빠르게 용천휘의 마지막을 보고 싶다는 파루나의 염원이 더해진 탓인지 지월이 탄 마차가 선두에 서서 가장 빠르게 달려갔다.

* * *

사문 하나가 무너져 내린 여파는 상당했다.

진식 전체에 금이 간 것과 같았다. 그러면서 진식 속에 감춰져 있던 생문과 사문이 노출되는 일이 생겨났다.

“아……!”

곽비연은 제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방금 생문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제갈세가의 인물로, 방계에서도 사생(私生)인 탓에 제갈 성을 쓸 수는 없었지만 진식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 덕에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 제이 항마대에 소속되어 백룡호에 올 수 있었다.

“생문이 사라지다니?”

되묻는 이는 소림의 백연이었다.

“원래도 겹으로 쳐진 진인지라 한번 발동하기 시작하면 맞물려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방금 생문이 보였지만 지금 걸음을 옮기니 사라졌습니다.”

“그럼 어찌 된다는 소리냐?”

백연의 음성이 날카롭게 갈렸다.

마흔다섯이 정원인 항마대는 지금 열 명 남짓한 인원이 고작이었다.

진에서 길을 잃은 자가 반이었고, 진 사이사이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마교에 당한 자가 반이었다.

그만으로도 미칠 노릇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진마저 손 쓸 도리 없이 움직이고 있다 했다.

좀 전부터 발밑으로 계속 우웅대는 진동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 불길한 징조를 모를 리 없었다. 이 거대한 진이 그들 전부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섣불리 점칠 수가 없습니다. 진이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대로 가다간 이백칠십의 전멸도 허튼소리가 아니겠구나!”

백연이 노호를 터트렸다.

앞서 마교를 쫓던 추격대가 두 번씩이나 전멸을 당했다.

그때 마교의 역량을 재고했어야 했다.

정산대가 보내오는 소식은 한결같았다. 서역에서 전력이 합류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고, 마교의 잔당은 둘이 고작이라 했다.

중간에 하오문이 끼어들었다지만 하오문은 전력으로 칠 수도 없었다.

실제도로 하오문의 근거지까지 왔지만 하오문도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오로지 마교의 인물 하나만 보였다.

그런데 그 하나가 벌써 이런 지경을 만든 것이다.

“우리를 진에 끼워 말려 죽이려 들 셈이더냐.”

마교가 소리 없이 한 번 나타날 때마다 거듭 길을 놓쳤던 것을 되짚어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저 혼자서 이백칠십이라는 인원을 맞상대할 수는 없으니 진을 이용하고 있을 것이다.

백연이 이를 갈았다.

“놈……! 어디 끝까지 해 보자. 너는 속히 길을 찾아라. 생문이 사라졌다면 다시 또 나타날 것이다.”

곽비연은 한숨을 삼켰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길을 되돌아가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진 속으로, 곽비연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 *

“……읍!”

제갈단우는 토악질을 참으며 넝마가 된 시신을 끌어냈다.

가주의 시신을 이곳에서 썩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가주님…….”

제갈단우는 제 겉옷을 벗어 시신을 어떻게든 감싸려고 했다.

그러나 팔다리가 뭉개진 채 내장이 흘러나오는 시신은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기 어려웠다.

“전부는 포기하시오, 제갈 소가주.”

“……누구냐!”

제갈단우가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누구…… 백 소방주?”

“그렇소.”

제갈단우는 그의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어찌 오신 겁니까? 추격은 제갈가에서 맡는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들 때가 아니오.”

백사준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가 부상 탓에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 부러진 뼈가 다 붙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이곳에 왔다. 더 이상 올 필요가 없는 곳에.

백사준이 제갈단우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제갈 가주의 목이 필요하오.”

“뭐라고요?”

제갈단우는 순간 그가 미친 건가 싶었다.

그리고 반쯤은 그게 사실인 듯했다.

백사준의 오른쪽 뺨에는 아직 생생한 십자 모양의 칼자국이 뚜렷했다.

그도 마교에 당한 것이다.

“희게 바랜 이 머리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가주도 알잖소. 마교에게 혼을 빼앗기고 그들의 수족이 되었다는 증거요.”

제갈단우는 기가 찬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지금 가주의 시신을 내놓으라는 겁니까! 고작 마교가 등장했다는 증거로 쓰기 위해!”

“생각해 보시오. 제갈 가주의 행적을. 그는 줄곧 무림맹 내부에서만 있었소. 그런 그가 마교의 사술에 걸렸다는 것은 무림맹 내부에 마교가 있다는 증거요.”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어찌 시신을 훼손할 이유가 된다는 겁니까! 비키십시오!”

“천하무도회 당일을 기억하시오? 화산의 현달도인이 목 없는 제자의 시체를 안고 나타났던 것? 그 시체에 왜 목이 사라졌겠소?”

“그게 무슨…… 아니, 그건…….”

“흰 머리칼은 마교의 증거. 다시 말해 누군가 이정혈수 연심환의 목을 잘라 증거를 감추었다는 소리요. 그 또한 소림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었지. 마교는 소림에 있소.”

“그야 당연한 게 아닙니까! 천하무도회를 빌미로 소림에 왔으니……”

“제갈 가주는 언제부터 머리칼이 샜다고 보시오?”

“……? 그건,”

“마교의 잔당은 소림에서 벗어난 지 오래요. 그런데도 버젓이 마교의 수법이 사용되었소. 둘 중의 하나라는 소리지. 또 다른 마교가 아직 맹에 남아 있거나, 혹은 지금 쫓는 자가 진짜 마교가 아니라거나.”

제갈단우가 침을 삼켰다.

그럴수록 백사준의 뺨에 난 상처가 시야를 헤집고 들어왔다.

그의 시선 또한 제 뺨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교의 정체에 의혹을 품게 됐다는 것.

그것이 자의거나 타의거나 상관없이.

제갈단우가 억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 왜 이런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얘기라면 마땅히 맹의 수뇌부와 먼저 나누셔야…….”

“제갈 소가주라면 이 상황에서 누굴 믿어야 하는지 분간할 수 있겠소? 귀댁의 가주마저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그건…… 그건……”

“그러니 증거가 필요하오.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백사준이 돌연 지팡이를 버리고 제갈단우 앞에 꿇어앉았다.

제갈단우가 어쩔 줄 모르고 그를 말렸다.

“백 소방주님! 제게 이러셔도……!”

“내가 무얼 보았소.”

백사준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제갈단우의 십자 흉터를 저며 왔다.

“내 두 눈으로 보았소. 그게 아직도 믿기지 않고…… 그래서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모르겠소. 허나 이대로 덮어 두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 그 하나는 알겠소. 간곡히 부탁드리오.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시오.”

“무얼…… 무얼 보셨기에 이러십니까?”

제갈단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천하의 백사준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백사준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도드라진 존재였다.

그는 가장 어린 나이에 개방의 소방주가 되었고, 곧이어 개방 전부를 떠맡았다. 그의 재주가 단지 무에 국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어린 취급을 받는 후기지수들에 비해 그는 개방이 관여하는 무림의 대소사에 깊게 개입하고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그가 추격대를 맡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 그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갈 가주가 마지막으로 접촉한 자가 누군지 보았소.”

“……그자가 마교일 거라는 말씀입니까?”

“정황상 그러하다 보오.”

“그자가 누굽니까?”

“…….”

백사준은 대답에 앞서 침을 삼켰다.

상처가 뜨거운지 그가 제 뺨을 더듬었다. 이제 그 동작은 습관이 될 듯싶었다.

이어진 답은 이러했다.

“맹주였소.”

“……! 뭐라고요?”

제갈단우가 입을 크게 벌렸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말은 거대한 벽이 되어 시야를 온통 가리는 듯했다.

* * *

“여기가 생문 같습니다.”

곽비연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쓸었다.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무인들을 등 뒤에 매단 채 계속해서 속성이 변하는 진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것은 신경을 너덜너덜하게 갉아먹는 일이었다.

“확실한 것이냐?”

아마도, 라는 말이 혀에 고인 침 위에서 녹아 버렸다.

지금 백연의 표정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저를 잡아먹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리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진이 자꾸 변해 생문을 찾는 게 힘듭니다. 이쪽에서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다른 쪽에서 건드리면……”

“확실하냐 물었다.”

딱딱 소리가 날 만큼 엄한 표정의 백연을 앞에 두고 곽비연은 또 한 바가지 땀을 흘렸다.

“지금은…… 그래 보입니다.”

“좋다. 그렇다면 문을 열어라.”

“…….”

두 갈래의 길이었다.

직진으로 뻗은 길과 좌측으로 둥글게 휜 길.

곽비연은 직진으로 흐트러짐 없이 걷다 어느 한 지점에서 갑자기 몸을 꺾었다. 그가 양팔을 뻗어 눈앞에 보이는 흰 벽을 밀었다.

그리고.

“……아!”

벽이 밀리는 듯 울렁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거짓말처럼 시야가 뻥 뚫려 버렸다.

“생문이 맞았습니다!”

진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곽비연은 몰랐다.

지금의 진을 벗어나는 생문이, 곧장 다른 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어엇!”

백연이 보는 앞에서 곽비연이 홀연히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앞에는 다시 흰 벽이 생겨났다.

“다들 물러서라!”

백연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양손을 내밀어 쌍장을 뿜어냈다.

퍼엉!

대력금강장이 벽을 후려쳤다.

와르르륵!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백연은 방금 전 사라졌던 곽비연이 아니라, 엉뚱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네놈은……!”

피로 물든 칼을 들고 서 있는 그는 종남의 첫째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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