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결전 (2)
“가주님은 아직도 소식이 없으신가?”
제갈단우는 초조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총 스물일곱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추격대가 다섯 대, 총 마흔다섯 단위로 묶인 항마대가 세 대.
도합 이백칠십 명이라는 대규모의 전력이 백룡호 주변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뛰어들어 가 마교를 사냥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오늘 사냥의 총지휘를 맡은 제갈현기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차에 탄 채로 진형의 세부 사항을 지시하던 제갈현기였다. 지시를 모두 따랐다 알리자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기에 마차 문을 열었더니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도 제갈단우는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소가주님. 어찌해야 할까요?”
제갈단우와 함께 제삼 추격대에 배정된 제갈가의 무인이 물었다.
제갈단우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갈가의 소가주라는 이유로 추격대 한 대를 맡게 되었다.
“가주님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냐?”
“그렇습니다. 다른 대에서 항의가 거셉니다. 제일 항마대에서는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일각 후에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겠다고도 전해 왔습니다.”
하오문의 근거지라면 뒷길 하나쯤은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 포위만 하고 있는 것은 도망칠 시간을 거저 벌어 주는 짓이었다.
제갈단우는 일 항마대를 맡은 공동파 장로를 떠올렸다. 그 불같은 성질을 보건대 더는 말릴 수도 없을 것이다.
“일각이라.”
그 안에 제갈현기가 돌아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제갈단우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각 후 움직이도록 하자.”
괜찮을 것이다.
마교의 잔당은 둘이 고작이었고, 설령 하오문이 그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하더라도 썩 대단한 전력이 될 수는 없었다.
그에 반해 무림맹은 정예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인원이 이동했다.
실패하려고 해도 실패할 수가 없는 숫자였다.
제갈단우는 꼬리를 무는 생각을 여기서 그만 접었다.
“이왕 이리된 것, 내 힘으로 해 보자. 진형은 확실히 정하셨으니 가주의 부재는 지금 상황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소가주님.”
제갈가의 무인이 상황을 전하기 위해 사라졌다.
그리고 일각 후,
“전진하라!”
“마교를 멸하라!”
제일 항마대가 앞장서서 기루 거리로 뛰어들었다.
일각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 * *
“사성진을 우습게 보지 마라!”
기세 좋게 뛰어들었다지만 항마대는 사성진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진법에 능한 이가 앞장을 섰다. 그 뒤를 따르는 항마 대원들이 지형과 방향을 일일이 확인하는 식이었다.
아직은 초입이라 벌써부터 사성진이 펼쳐질 일은 없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길이 너무 좁다. 이대로는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이다. 아직 진을 건드리지 않았으니 차라리 길을 내는 게 나을 듯하다.”
제일 항마대를 이끄는 공동파 장로가 말했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길을 이렇게나 좁혀 놓았다는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었다.
말려들어 갈수록 적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게 될 것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진법에 능한 소림의 제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머리 위의 해와 골목길을 이룬 담의 그늘을 눈으로 재어 열여섯 방위를 계산해 냈다.
“해의 방향과 그림자의 방향이 일치합니다. 아직 진이 발동하지 않았다는 얘기니 속히 길을 내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군.”
공동파 장로가 안력을 높여 적당한 틈을 찾았다.
“여기가 좋겠다.”
그가 쌍장에 내력을 집중시켰다. 힘으로 길을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아직 이릅니다.”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공동파 장로가 대경해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그리고 놀랐다.
어느샌가 등 뒤에 서 있는 낯선 자 때문이었다.
공동파 장로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행색은 약간 달라졌으나 자신을 종남의 첫째 제자라 하며 구파일방을 기만했던 그였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그의 정체보다 그사이 달라진 기도였다.
첫 등장에도 그는 무당의 일대제자와 오 장로를 차례로 상대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놀라운 무위는 마교라는 말로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공동파 장로조차 한눈에 그의 경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두려움만이 들 뿐이었다.
“……마교가 제 발로 나타난 게냐!”
공동파 장로는 곧 정신을 차리고 벽을 부수려던 쌍장을 뒤로 돌렸다.
지강백은 뒤로 걸음을 물렸다.
유감스럽게도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퍼엉!
공동의 복마장은 지강백이 있었던 자리를 향해 뻗어 나갔다.
하지만 지강백은 이미 몸을 피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자들은 그 주변에 있던 항마대였다.
“엇!”
“……크읏.”
공동파 장로가 한발 늦게 장력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이 간악한 마교 놈!”
공동파 장로가 왈칵 소리를 질렀다.
“어디에 있느냐! 어디로 숨었느냐!”
순순히 답이 들려왔다.
“이쪽입니다.”
“뭐라고?”
공동파 장로는 골목길 반대편의 담 위에 올라가 있는 지강백을 발견했다.
“내 오늘 너를 반드시 없애 먼저 간 제자들을 위로하겠다!”
휘익!
행운유수가 속도를 더했다. 얼음 강을 깬 겨울 물고기처럼 펄쩍 뛰어오른 공동파 장로가 지강백을 노리고 양팔을 휘둘렀다.
그 사이 지강백은 수라안을 일으켰다.
“지금, 이쪽.”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가 손에 든 칼을 크게 휘저었다.
“……읏!”
공동파 장로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출수라 생각했다. 그가 신형을 솟구친 상태에서 양팔을 교차해 가슴을 감추었다.
슷!
지강백은 그 틈에 발끝으로 도약했다. 허공으로 뛰어든 그는 공동파 장로의 머리를 밟고 몸을 뒤집었다.
그의 몸이 우아한 호선을 그리는 동안,
서걱!
지강백의 칼은 공동파 장로가 부수려 했던 벽이 아닌, 그 맞은편 벽을 반으로 갈랐다.
스슷!
지강백의 신형이 그 사이로 사라졌다.
“마교가 도주한다! 잡아라!”
졸지에 머리가 밟히는 모욕을 당한 공동파 장로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항마대가 지강백의 뒤를 쫓아 달렸다.
“……음?”
“이런.”
지강백의 모습은 그 잠깐 사이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항마대의 눈앞에는 끝없는 미로처럼 보이는 비좁은 길이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와 비슷하되, 무언가 몹시 달라 보이는 길이었다.
방향을 가늠할 만한 표식이 전혀 없었다. 그저 끝도 없이 똑같은 길이 이어지고 교차할 뿐이었다.
“이것이…… 사성진인가.”
누군가가 긴장을 토해 냈다.
제일 항마대 전원이 진에 갇혔다.
그리고 그들이 시작이었다.
* * *
지강백은 오 층 전각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 이백칠십의 인원이 여덟 무리로 나뉘어 사성진의 이곳저곳을 연서(鼹鼠: 두더쥐)처럼 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지강백은 수라안을 통해 그들을 지켜보다가, 생문을 발견할 것 같으면 적절히 모습을 드러내 걸음을 방해했다.
수라안으로 보는 사성진과 그 안에 갇힌 무림맹은 마치 혼자서 거대한 장기 말을 옮기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저쪽은 당분간 괜찮을 것 같고.”
하지만 이백칠십이라는 숫자는 결코 사성진만으로는 막아 낼 수 없는 전력이었다.
사성진이 아무리 교묘히 길을 교란시키고 있다 해도 결국은 무너질 터였다.
이번 싸움은 그 시차를 얼마나 잘 계산해 내느냐의 문제였다.
하오문주와의 거래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서는 일단 시간을 끌어야 했다. 무림맹의 무인들을 처리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서쪽이 무너지겠군.”
서쪽은 제갈단우의 제삼 대가 맡은 방향이었다.
진과 기문에 능한 제갈가이다 보니 사성진을 파훼하는 속도도 빨랐다.
슷!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지강백의 신형이 전각의 난간에서 지면을 향해 떨어졌다.
천근추를 발휘하자 지강백은 가슴이 섬뜩할 속도로 낙하했다. 은하유영비로 몸을 가볍게 만든 지강백이 지면과 충돌하기 직전, 발끝으로 땅을 걷어찼다.
거짓말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세상의 법칙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스슷.
지면에 닿음과 동시에 방향을 바꾼 지강백은 벌써 제삼 대와 대면하고 있었다.
* * *
“마교다!”
제갈단우가 소리를 따라 홱 고개를 돌렸다.
겹으로 둘러친 사성진을 차근히 파훼해 가던 도중, 갑자기 마교가 나타났다.
“너, 너는……”
지강백과 눈이 마주친 제갈단우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는 당연히 지강백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천일장과 천호를 연달아 패배시켜 후기지수들을 놀라게 했던 그자였다.
비록 왼쪽 얼굴에 상처가 생겼고, 눈을 다친 듯 색이 바랜 기묘한 잿빛 동공을 하고 있었지만 저 생김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네놈은 마교였어!”
그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 분노가 치솟았다.
지강백을 종남파 제자라고 여겼을 때 느껴졌던 기묘한 열패감이 분노가 되는 듯했다.
제 또래인 그가 아예 다른 경지의 실력을 지닐 수는 없었다. 그가 마교이기 때문에, 중원인은 알지 못할 각종 사술을 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강백이 힐긋 제갈단우를 보았다.
슷, 서걱!
가장 앞에 있던 추격대의 목이 말끔하게 잘려 떨어졌다.
보통 자들의 눈에는 지강백이 아무런 조짐도 없이 목을 잘라 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추격대의 출수가 먼저였다. 지강백의 방어와 반격이 너무 빨랐을 뿐이었다.
“나를 알고 있나?”
거짓말 같은 죽음을 만들어 낸 지강백이 물었다.
제갈단우는 재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출수를 준비했다.
“네가 마교임을 감추고 중원의 후기지수들을 농락한 일을 어찌 잊겠느냐!”
지강백은 제갈단우를 기억하지 못했다.
제갈단우는 그가 천일장과 검을 섞는 그때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잘됐군.”
지강백이 혼잣말을 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제갈단우가 검을 앞으로 휘둘러 지강백을 가리켰다.
“무엇들 하느냐! 마교를 없애라!”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었다.
무림맹 측의 인원이 월등히 많다 해도 수적인 이점을 살리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지강백은 순서대로 저를 향해 달려오는 추격대에 맞서 몸을 띄웠다.
타다닷!
지강백이 벽을 밟고 달리기 시작했다. 수평으로 기운 상태에서 그가 칼을 내밀었다.
퍽퍽퍽!
“으윽!”
“컥!”
지강백은 칼날의 방향을 돌려 칼등으로 추격대를 내리쳤다.
이런 빠른 공격에서라면 일일이 목을 베어 내는 것보다 요혈을 가격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는 추격대를 처리한 지강백은 제갈단우의 정면에 섰다.
“으으…… 받아랏!”
달아나기엔 늦었다고 판단한 제갈단우가 이를 악물고 비도를 뿌려 냈다.
제갈세가의 소리비도였다.
여섯 개의 비도가 두 무리로 나뉘어 각기 삼각형과 역삼각형을 그리며 지강백을 향해 날아갔다.
신체가 움직일 수 있는 여섯 방향을 완벽히 차단하는 한 수였다.
슷!
그러나 지강백은 거짓말처럼 비도 사이를 통과했다.
“……마, 말도 안 돼!”
제갈단우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그사이,
사악!
뺨이 뜨거워졌다.
눈을 비비던 손이 뺨으로 내려갔다. 뜨겁고 비린 피가 손바닥을 적셨다.
“이, 이게……?”
제갈단우의 뺨에 십자 흉터를 그려 넣은 지강백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눈썰미가 있는 자라면 알겠지. 내가 방금 쓴 수는 종남의 태을분광검과 은하유영비였다. 그 날 무당의 두 제자를 상대로 보였던 것이니 네 기억에도 있을 것이다.”
“거, 거짓말 마라! 네놈은 마교가 분명…… 억!”
퍼억!
지강백은 그 날 천호의 복부를 후려쳤던 것처럼 제갈단우의 얼굴을 쳤다.
“이것은 벽운천강권이다.”
“으윽!”
제갈단우가 부러진 이를 뱉어 냈다. 일부러 이가 하나만 빠지도록 힘 조절을 했다는 것을 맞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뺨에 같은 흉터를 가진 이를 찾아라. 그들은 내가 마교가 아님을 알 것이다.”
제갈단우가 악을 썼다.
“차라리 죽여라! 마교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대체 왜……!”
그러다 제갈단우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매우 잘못된 질문임을 스스로 느꼈던 것이다.
마교가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강호에 자신의 정체가 모두 드러나고, 그래서 쫓기고 있는 처지라면 그가 할 일은 둘 중의 하나였다.
달아나든가, 죽이든가.
그런데 굳이 살려서 자신은 마교가 아니라는 증거를 하나씩 남기고 있었다.
“한 가지 알려 주지.”
지강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에 든 칼로 그 옆의 벽을 긁었다.
“이 벽은 건드리지 마라.”
지강백은 벽에 표식을 남기는 것이었다.
“백룡호 주변에 설치된 사성진은 한두 개가 아니다. 이중으로 된 곳도 있고 삼중으로 된 곳도 있다. 천간과 오행을 따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네 머리가 아주 좋은 게 아니라면 진을 파훼하겠다는 생각은 접고 얌전히 생문이나 찾아서 돌아가.”
“……뭐라는 거야! 왜 그런 소리를……!”
“특히나 이 벽은 건드리지 마라. 갑(甲)과 진(辰)이 교차해 목(木)의 뿌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속임일 뿐이다. 여긴 역진을 감춰 둔 곳이라 함부로 건드리면 진 전체의 사문(死門)이 될 수 있어. 사문이 열리면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한다.”
하오문도가 모두 무사히 백룡호를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사성진이 버티고 있어야 했다.
지금은 진이 무사히 해지되는 것도, 억지로 망가지는 것도 곤란했다.
“그러니까 마교가 그걸 왜 상관……!”
도무지 이해 못 할 소리를 하는 지강백을 향해 제갈단우가 목에 핏대를 세우는 그때였다.
갑자기 제갈단우의 눈이 어리둥절해졌다.
“……가주님!”
지강백의 등 뒤로, 사라졌던 제갈현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제갈단우는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마교를 상대로 쩔쩔매는 꼴을 들켰을 거라 생각하면 걱정이 일기도 했지만 그래도 가주는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죽인다.”
제갈현기가 다짜고짜 지강백을 향해 덤벼들었다.
“가주님! 제가 거들겠습니다!”
제갈단우가 품 안에서 비도를 꺼내 들며 제갈현기의 옆으로 신형을 옮겼다.
그런데, 퍽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제갈현기가 장(掌)을 들어 제갈단우를 후려쳤던 것이다.
“윽!”
졸지에 장법에 얻어맞은 제갈단우가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죽인다.”
제갈현기는 제갈단우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지강백을 향해 제갈가의 절기인 응혈신조를 전개했다.
제갈단우를 공격한 것은 순전히 그가 동선에 방해가 된 탓인 듯했다.
제갈현기를 마주하는 지강백의 왼쪽 눈이 붉어졌다.
“……당했군.”
그는 이매향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수라안을 통해 제갈현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제갈현기는 넓적한 두건 같은 것으로 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슷!
지강백의 칼이 제갈현기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두건이 반으로 갈렸다.
“가……가주님!”
도깨비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흰 머리칼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그것을 목격한 제갈단우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가주님!”
제갈현기는 장자의 애타는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죽인다.”
쐐액!
사냥하는 맹수의 발톱을 닮은 손이 지강백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지강백이 제갈현기의 팔 안으로 파고들며 칼날을 돌려세웠다.
퍽!
제갈현기의 오른 손목이 홱 꺾여 덜렁댔다. 이어서 지강백은 제갈현기의 턱 밑을 검봉으로 찍었다.
시각혈을 점혈당한 자는 즉각 혼절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제갈현기는 쓰러지지 않았다.
“신경 쪽이 마비되었다는 건가.”
부러진 오른 손목이 응혈신조를 전개했다.
위력이랄 것도 없는 한 수였다. 그 말은 부상이나 고통도 인지를 못 한다는 뜻이었다.
“지독한 수법이군.”
지강백은 조금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칼날을 돌려세웠다.
빡!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아예 어깨뼈를 부러트린 것이다.
지강백은 제갈현기를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을 몰랐지만 마교가 제갈현기에 건 사술을 풀 수 있다면 종남에 덮어씌워진 거짓을 벗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잔인한…… 당장 손속을 멈춰!”
제갈현기가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제갈단우가 나섰다.
그러나 내상까지 입은 몸으로 썩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죽이려는 게 아니다.”
지강백은 제갈단우가 날린 비도를 가볍게 피해 내며 제갈현기의 왼팔도 마저 부러트렸다.
제갈현기가 신형을 휘청거렸다. 점혈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지강백은 회심퇴로 제갈현기의 흉골을 걷어찼다.
“죽인…….”
제갈현기가 비틀대다 쓰러졌다.
“가주님!”
제갈단우가 제갈현기에게 달려갔다.
지강백은 제갈단우를 향해 말했다.
“몸을 못 쓸 때 묶어 둬라. 마교의 사술에 당한 것 같으니 데려가서 방법을 찾아.”
제갈단우가 기가 막힌지 소리를 질렀다.
“마교는 네놈이잖느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라. 내가 마교라면 왜 술법을 부려 나를 공격하도록 시켰겠나.”
“그, 그건……!”
제갈단우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제갈현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도무지 부정할 수 없었다.
머리칼을 하얗게 세도록 만드는 수법이 마교의 것이라는 사실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마교의 누가 제갈현기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무림맹에서 남녕까지 이동하는 동안 마교의 습격을 받았다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니 또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교가, 마교를 해치기 위해 무림맹의 인물에게 사술을 걸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종남은 마교가 아니다. 그렇다면 종남을 마교라 했던 자들을 의심해야 된다는 소리.”
“…….”
제갈단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십자 흉터가 새겨진 뺨이 쓰라렸다.
“가주님…….”
제갈단우는 간절히 답을 구하는 심정으로 제갈현기를 불렀다.
바로 그때.
“죽인다!”
제갈현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주님!”
제갈단우가 말릴 틈도 없었다.
양쪽 팔이 모두 부러진 제갈현기는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고 무공 또한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그런 몸으로 속도를 높여 달려갔다.
지강백이 작게 혀를 찼다. 양팔을 못 쓰는 상태로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상대를 죽이지 않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휙!
지강백이 가볍게 발을 돌려 몸을 피했다.
“죽인다!”
퍼억!
제갈현기는 지강백을 쫓아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맞은편의 벽을 제 몸으로 들이받아 버렸다.
하필이면 지강백이 칼로 표시를 해 두었던 그 벽이었다.
“가주니임!”
제갈현기가 벽에 부딪치는 순간,
와르르!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 밑에 깔린 제갈현기는 잘 다져진 육편이 되었다.
“……늦었군.”
지강백이 작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우우우우웅!
발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벌레 소리처럼 작게 시작했던 진동은 삽시간에 몸집을 불려 버렸다.
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진 전체가 붕괴되는 것을 최대한 늦추는 일뿐이었다.
지강백은 넋을 놓고 있던 제갈단우의 뒷덜미를 잡아채 끌어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라. 더 빨리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휙!
그리고 지강백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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