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92화 (92/346)

제92화 결전 (1)

“낭패다…….”

태수진인이 멈춰 서서 이를 갈았다.

기루와 기루가 다닥다닥 붙어선 좁은 골목길은 들어서는 순간 미로가 되었다.

둘씩 짝을 지어 하오문의 근거지를 찾도록 한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도 기별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태수진인은 직접 기루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하오문의 사성진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고, 미리 충분히 염두에 두었다.

계속 걸음을 세고 방향을 확인했다. 이정표가 될 만한 지형도 빈틈없이 확인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태수진인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 어떻게 벌어진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성진에 말려든 듯했다.

“그리 주의를 했는데도…… 아무래도 진을 이중으로 쓴 모양이구나.”

그저 담만 이어져 있을 뿐,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 없는 길고 좁은 골목을 바라보며 태수진인이 인상을 썼다.

일단 진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안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태수진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방을 훑었다.

진이란 혼란과 불안을 이용한 착시에 지나지 않았다. 본질을 꿰뚫으면 생문(生門)은 저절로 열리기 마련이었다.

“어디냐…….”

태수진인은 안력을 돋우었다.

태극혜안이라 불리는 이것은 소림의 천안통처럼 평소라면 보기 어려운 작은 부분까지 세세히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경(庚)에서 무(戊)가 이어지니, 중앙은 계(癸)가 되겠군. 서북 방향이다.”

태수진인은 오행의 원리에 따라 사성진을 파악했다. 생문이 틀림없다 생각한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오 보(五步)를 전진한 그가 갑자기 좌편으로 걸음을 틀어 팔 보를 이었다. 막혀 있던 좌편이 거짓말처럼 길이 되었다.

태수진인은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며 서두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다!”

생문을 찾았다.

휘익!

태수진인의 신형이 솟구쳤다. 이어서 그가 눈앞의 담을 넘어섰다.

다음 순간 눈에 보이는 광경이 씻은 듯 바뀌었다.

담은 있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골목길을 걷고 있던 태수진인은 갑자기 오 층 전각으로 향하는 계단의 난간 위에 서 있게 되었다.

탁, 타닷!

태수진인은 발끝으로 균형을 잡으며 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무당의 초상비였다.

쾅!

그가 계단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

문을 열자마자 그를 맞이한 것은 잘 갈아 놓은 것처럼 날카로운 피비린내였다.

붉은 비단을 치렁치렁 드리워 놓은 넓은 방이 시체로 채워졌다.

바닥에 무당의 도복을 입은 자들의 시체가 쌓여 있지 않았다면 여느 기루겠거니 했을 것이다.

태수진인은 시체 더미 위에 조용히 서 있는 자를 발견했다.

그자였다.

종남의 첫째 제자.

천하무도회의 비무대 위에서 무당의 오장로를 힘으로 제압하는 수를 보이고는, 뒤로는 독을 이용해 비겁한 암습을 저질렀던 마교였다.

“이놈!”

태수진인이 소리쳤다. 흉수를 마주 대하는 심장은 그대로 불이 붙은 듯했다.

“그 목을 내놓아라!”

쐐액!

무당의 절학 중 최고로 평가받는 태극혜검의 초식이 노도와 같은 살기를 등에 업고 펼쳐졌다.

* * *

슷!

지강백은 칠성회두의 초식에 맞서 검날을 눕혔다.

태수진인의 태극혜검은 이장로라는 위치에 걸맞게 노련했다. 이제껏 상대한 제자들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지강백의 칼에 신중함이 더해졌다.

그의 검은 시체 중 하나의 손에서 대충 주워 든 것이었다.

제자의 검을 알아보는 태수진인은 더욱 분노하는 듯했다.

“후안무치한 마교 놈!”

“…….”

마교라는 말이 거슬렸다.

지강백의 감정에 반응해 수라안이 저절로 발현되었다.

태수진인의 몸이 한눈에 들어왔다. 십일 성에 달해 가는 태청신공과 태극혜검의 숙련도가 보였다.

팔을 움직이는 모양새와 미세한 근육의 차이를 통해 어떤 초식을 가장 선호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발의 위치, 시선의 방향, 눈썹의 움직임…… 모든 것이 보였고 모든 것이 다음 동작의 단서가 되었다.

태수진인은 지강백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지강백은 용천휘가 그렇게나 오만방자하게 보였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세상의 전부가 제 발밑에 있는 기분이었다.

“저는 마교가 아닙니다.”

지강백은 반보를 옆으로 움직여 태수진인의 칼을 피했다.

“……음?”

너무 간단한 동작이라 태수진인의 출수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 따질 수 없는 복잡한 과정이 들어 있었다.

수라안 덕에 그 과정이 일거에 생략된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이럴 수가!”

태수진인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지강백의 반보가 결코 단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제껏 태극혜검을 그저 반보 비켜서는 것으로 완벽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을 대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무슨 사술이냐!”

“종남의 북두천강보입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천하무도회에서 이미 보셨을 줄 압니다.”

“……!”

쐐액!

대꾸 대신 검이 날아왔다.

지강백은 상체를 살짝 뒤로 젖혀 팔황개동의 초식을 피하며 동시에 일 보를 앞으로 내디뎠다.

태수진인의 눈은 커지다 못해 비틀리는 듯했다.

지강백이 일부러 보라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보법을 전개했던 것이다.

코앞에서 무당의 절학이 제 목숨을 노리는 이 상황에서, 저 여유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지강백이 전개하는 보법이 북두천강보라는 것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태수진인은 제 머릿속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종남의 무공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아니다…… 아니야! 너는 마교다! 마교가 사술을 부리는 것이다!”

색깔이 다른 한 눈.

그 눈은 분명 마교의 증거일 것이다.

“무당을 기만하지 마라!”

태수진인은 태청신기를 남김없이 끌어 올렸다. 손에 쥐고 있던 검날이 갑자기 쭈욱 늘어났다.

검경이었다.

검에 주입한 태청신기가 가시화된 것이다. 이로써 태수진인의 검은 세상 무엇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최상의 무기가 되었다.

“기만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지강백은 태수진인의 검경을 힐긋 보았다.

곧이어 그의 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무…… 무슨,”

심지어 지강백이 뽑아낸 검경은 더욱 크고 맑았다.

태수진인은 할 말을 잃었다. 전의도 잃었다.

“태화진인은 독살을 당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독을 쓸 줄 모릅니다.”

거울처럼 맑은 검경을 품은 지강백의 눈에 불꽃이 피어났다.

그 날.

지강백은 태화진인을 비무대에서 쓰러트렸다.

태화진인은 내상을 입고 물러났다. 곧이곧대로 그의 정면 승부를 감당해 낸 지강백은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 모습을 사부가 보셨으면 참 좋았을 것이다. 지강백은 몇 번이고 같은 생각을 했다.

그 모습을, 태수진인도 보았을 것이다.

“제게 태화진인을 살해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진인께서는 비무대 위에서 돌아가셨을 겁니다.”

“네가 감히 그 일을 입에 담는 게냐! 그 날은 네놈이 분명,”

“독은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기에 무서운 물건인 줄 압니다. 제가 무당이었다면, 태화진인이 독살을 당했다는 말을 무턱대고 믿을 게 아니라 그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을 먼저 살피려 들었을 것입니다.”

슷, 스슷!

지강백이 칼을 움직였다.

대천강검의 곧은 초식이 살아 있는 교본처럼 차근히 전개되었다.

지강백은 태수진인의 검경을 한 토막씩 잘라 냈다.

겉으로는 검끼리 부딪치는 듯 보여도 이것은 사실 내력을 맞대는 것과 다름없었다.

“으윽! 컥!”

검경이 부러질 때마다 태수진인은 내부가 진탕되는 것을 느끼고 반보씩 뒤로 물러나야 했다.

슷, 캉!

지강백은 태수진인의 검경을 모두 잘라 버렸다.

“으으……”

태수진인은 적지 않은 내상을 입고 입가로 피를 흘렸다.

지강백은 한 올의 감정도 없는 눈으로 그를 보며 마지막으로 손을 움직였다.

“……!”

미처 막을 새도 없었다.

닿는 순간 바위라도 갈라놓을 수 있는 검경이었다. 태수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달아날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지강백의 검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뺨이 뜨거웠다.

태수진인은 손을 뻗어 뺨을 더듬었다. 피투성이 얼굴에는 십자 모양의 칼금이 새겨져 있었다.

“같은 흉터를 가진 자를 찾으십시오. 그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 있다니! 그 무슨 소리냐!”

할 말을 마치 지강백은 더 이상 답을 들려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긴장이 풀린 태수진인이 피를 울컥 토해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상 덕에 속이 쓰려 왔다.

복수는 실패했고 더 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마교는 달아났고 이번 일로 인해 무림맹 내부에서 무당파의 입지가 난처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살폈어야 한다니.”

지강백이 내던지고 간 한 움큼의 의혹이 그를 괴롭혔다.

누가 짜 맞추기라 한 듯,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죽음과 마교의 증거가 몰아닥치던 천하무도회의 그 날을 떠올리는 태수진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독이다! 무당의 태화진인이 당했다!

그러고 나서 백사준이 등장했다.

백사준은 관 뚜껑을 열며 말했다.

―사인은 동일합니다. 같은 독, 같은 수법. 이는 흉수가 동일하다는 증거입니다.

백사준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

태화진인의 시체를 보지도 않고서.

문득 태수진인은 추격대를 이끌던 백사준이 마교의 역습에 당해 부상을 입은 채 맹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사실을 기억했다.

팔 하나와 다리가 부러졌다 했다.

그리고…….

“……!”

태수진인이 피투성이 얼굴을 다시 한 번 더듬었다.

백사준은 분명 뺨에 십자 모양의 흉터가 생겨났다 했다.

지금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은 짓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개방에서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더냐?”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속단할 수도 없었다.

태수진인은 내상으로 인해 휘청대는 신형을 일으켰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남녕에는 곧 제갈현기가 이끄는 추격대가 당도할 것이다. 그 전에 움직여야 했다.

* * *

“이…… 이런 걸 예상했었어? 정말로?”

적하조는 백룡호의 기루 거리를 향해 새카맣게 몰려오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목소리가 사뭇 떨려 왔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적과 맞서 본 경험도, 그 이전에 제대로 된 적을 상대해 본 경험도 없었다.

“저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한단 소리야? 아무리 여기가 사성진이 깔려 있어서 너희들은 그걸 이용할 수 있다지만…….”

용천휘 역시 적하조와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하오문의 본산은 사성진으로 빈틈없이 무장한 요새였다.

적은 인원으로 대규모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가장 좋은 곳으로 꼽아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적은 인원이 고작 넷일 때에는 다른 문제였다.

더군다나 일행 중에서 제대로 전력이 될 만한 인물은 지강백 하나밖에 없었다.

“그 바보가 알아서 하겠지. 지하는 상황이 어때?”

용천휘는 불쑥 솟구치는 걱정을 누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하오문의 도주는 계속되고 있었다.

본산에 남아 있던 하오문도들은 지하에 마련된 도주로를 따라 이동 중이이었다.

도주로는 백룡호로 이어졌고, 경로를 들키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서강까지 갈 수 있었다.

남녕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겠지만 서강까지만 가도 무림맹의 이목을 따돌리기가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알아서 잘하고 있던데. 독귀 영감은 도움이 안 돼 보였지만 하오문주는 좀 나은 것 같았어.”

적하조는 하오문주가 들으면 펄쩍 뛸 법한 발언을 했다.

하오문주가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던 용천휘는 그 점을 염려하지 않았다.

다만 무림맹 내부의 사정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이쪽에도 큰 약점이었다.

“무당이 단독으로 먼저 움직였다. 그건 무림맹 내부에서도 분열이 있다는 얘기일 텐데…….”

필목현이 있었다면 무림맹 내부의 사정을 염탐하는 것쯤이야 우스웠을 것이다.

용천휘는 새삼 자신의 처지를 느꼈다.

그는 교의 힘과 수라안을 빼면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자일 뿐이었다.

용천휘의 미간에 짙푸른 주름이 잡혔다.

“……결국 호법위가 움직이길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겠군.”

호법위의 힘이라면 지월이 아닌 자와 맞설 수 있었다.

용천휘는 교의 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승리하는 쪽은 당연히 교가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이전이었다.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호법위를 기다릴 수 있을지.

그 전까지 제 몸이 버텨 줄지.

“그러니 시차를 잘 계산해야 해.”

용천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적하조가 물었다.

“음? 무슨 시차?”

“묻지 마.”

“뭐? 치사하게. 또 너희들만 아는 얘기야?”

입술을 아무리 비죽여 봤자 용천휘는 필요한 얘기가 아니라면 결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알아서 답을 듣는 것을 포기한 적하조가 오 층 아래로 눈을 돌렸다.

그가 무엇을 발견한 듯,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저기……! 움직인다!”

용천휘가 적하조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흐름을 읽는 오른쪽 눈이 어느샌가 붉게 변했다.

“그래. 움직인다.”

이쪽을 향해 오는 거대한 살기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막아서는 하나의 움직임도 보였다.

“증명해 봐, 사형.”

용천휘의 오른눈이 지강백을 뒤쫓았다. 그 집요한 시선은 지강백의 발꿈치에 매달린 붉은색의 긴 그림자 같았다.

“사형이 틀리지 않았다는걸.”

용천휘의 혼잣말은 지강백을 향한 간절한 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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