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범이 사라진 굴의 사정
“더는 못 간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마부석에서 내려선 독귀가 한 말이었다.
독귀는 마차 안으로 들어와 용천휘를 살폈다.
입술이 완전히 보랏빛이었다.
“이놈을 이래 방치하면 죽는다. 석 달까지 갈 것도 없어. 당장 뭐라도 구해서 먹여야 할 게야.”
남녕까진 이틀 정도만 더 달리면 되는 거리였다.
한시라도 더 빨리 달려가 무림맹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지만 독귀는 완고했다.
“시체를 태우고 달릴 수는 없잖으냐.”
적하조가 지강백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그게……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네가 아무리 얘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편이기도 하고…… 그간 같이 도망쳐 다닌 정(情)도 있을 거고…… 어어, 그리고 또…… 얘가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어차피 지금 안 죽여도 석 달밖에 못 산대.”
그러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마저 글썽였다.
용천휘는 창백함이 무거운 그늘이 되어 버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남 얼굴에 멋대로 짠물 떨구지 마.”
“이게……! 남은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필요 없어.”
용천휘는 적하조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독귀는 오기만으로도 사람이 저럴 수 있냐며 혀를 찼다.
“흑곰의 담즙이라면 도움이 될 거야. 누구든 가서 구해 와.”
“……쯧쯧.”
독귀가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혀를 찼다.
다 죽어 가는 놈이 저러기도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게 아니라면 천년화리의 내단도 괜찮아. 설화초 열매나 공청석유도 괜찮고. 정 없으면 산삼이라도 가져와.”
“아, 뭬야?”
독귀가 화를 냈다.
“듣다듣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게 어디 가져오라면 가져와지는 놈들이냐? 남들은 평생 살면서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하는 놈들을 가지고!”
“지금 구해 올 수 있는 것만 얘기한 거야.”
“아, 차라리 소림에 가서 대환단을 훔쳐 오라고 해라!”
다음 말이 들려오기까지 잠시 묘한 침묵이 있었다.
“……지금 소림에 남아 있는 대환단은 없다.”
“음? 그걸 어찌 아냐?”
대환단은 보통 십 년을 주기로 만들어졌다. 다음 대의 대환단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필목현은 마지막 남은 한 알의 대환단을 훔쳤다.
“구할 수 없다면 얘길 꺼내지 마. 그 정도 약이 아니라면 소용없다. 마차나 몰도록.”
용천휘는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독귀가 대놓고 욕을 해 댔다.
“이런 미친놈을 다 봤나. 이 독공 어르신이 어떤 분인 줄 알고. 바짓단을 붙들고 제발 아무 약이나 한 술 먹여달라 눈물로 애원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용천휘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럴 경우 마음이 더 약한 쪽이 지는 것이었다.
“그게…… 정말 그런 게 아니면 안 되느냐? 잠깐 몸보신 좀 하자는 건데 뭐가 그리 거창해야 되냐.”
“…….”
“아, 진짜 이러기냐?”
용천휘는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독귀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 네놈 마음대로 해라! 그 꼬락서니가 됐어도 마교의 소교주라 이거지! 에잉, 쯧쯧.”
별다른 소득 없이 독귀와 적하조가 다시 마부석에 올랐다.
마차 안에는 달라진 게 없는 용천휘와, 그런 그에게서 벽 하나를 쌓아 두고 있는 것처럼 무관심한 지강백이 남았다.
“걱정하지 마, 사형.”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줄이고 있던 용천휘가 어느 순간 불쑥 내뱉었다.
“사형과 한 거래는 확실히 마무리 지을 테니. 그 전에는 안 죽어.”
“…….”
지강백은 답하지 않았다.
일행이 탄 마차는 더 지체하는 일 없이 곧장 남녕을 향해 달려갔다.
* * *
“남녕이라? 그게 확실한가?”
“소식이 자세한 것으로 보아 이번에는 확실한 듯합니다.”
개방의 백사준을 대신해 임시로 무림맹 추격대를 맡게 된 제갈현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남녕이라니…… 때마침 가는 길이 아니던가.”
마교의 잔당들이 남녕을 향해 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어지는 자세한 보고는 더 이상의 의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무림맹은 지금 사천으로 이동 중이었다.
남녕은 사천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전력의 일부를 차출해 길을 살짝 트는 것은 그리 번거롭지도 않을 터였다.
이번에야말로 앓던 이처럼 지긋지긋하던 마교를 도륙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제갈현기는 추격대의 관할이 제갈세가 쪽으로 막 넘어온 시점에서 이런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도 몹시 흡족했다.
견제와 알력 다툼이 일상이었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였다.
무림맹이라는 한 울타리에 묶였다 해도 그 오랜 습성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맹주에게 보고를 올려야겠군.”
제갈현기는 이참에 추격대뿐만이 아니라 무림맹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항마대까지 다루고 싶었다.
이 정도로 확실한 기회라면 무림맹주는 제 손을 들어줄 것이다.
일전에 추격대를 맡았던 개방의 백사준은 거듭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팔다리가 부러져서 오기까지 했다.
무림맹의 핵심에서 개방이 밀려날 때가 된 것이다.
이 빈자리를 재빨리 치고 들어가야 했다.
“보승실(補丞室: 보좌실)에 기별을 넣어라. 내 맹주를 친히 뵈어야겠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세가의 가신이 명을 듣고 몸을 물렸다.
제갈현기는 기별이 닿으면 곧장 지월을 찾을 생각으로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제갈현기를 찾아왔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맹주의 허락을 받아서 돌아오는 가신이 아니었다.
무당의 태수진인이었다.
“어인 일이시오?”
제갈현기는 불쑥 드러난 경계심을 예의상 감추며 태수진인을 맞았다.
무당의 이장로인 그는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소식 들었소. 놈들이 남녕으로 가고 있다고.”
“…….”
제갈현기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새 정보가 샌 것이다. 정말이지 무림맹은 범굴이나 다름없었다.
“무당이 가겠소.”
태수진인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제갈현기는 다짜고짜 살초부터 전개하는 성급한 비무에 임한 사람처럼 당황했다.
“추격대는 제갈가가 맡지 않았소?”
“추격대에는 무당의 인원도 적지 않소. 무당은 놈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소이다.”
“그리 따지면 마교에 원한이 없는 문파가 어디 있겠소이까?”
“무당의 경우는 다르지 않소! 오장로가 살해당했소! 그것도 비열한 암습으로! 이 원한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이오!”
태수진인이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를 높였다.
제갈현기는 어린애 같은 떼 좀 쓰지 말라고 한소리 던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무당이 저리 펄펄 뛰면 화산이나 황보세가는 뭐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아니 될 말씀이외다. 이미 맹 내에 조직과 맡은 바가 정해졌는데 어찌 무당이 앞장서 그 질서를 해치려 드시오?”
“질서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원한을 갚겠다는 거잖소!”
“원한이든 아니든 맹보다 사문을 더 앞세우겠다는 말씀 아니오. 이 몸은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단호한 거절에 태수진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 정히 그리 나오시겠소?”
“무당이야말로 예의와 분별을 갖추는 게 어떻소? 지금 같은 태도를 과연 맹주 앞에서도 고집하실 수 있겠소이까?”
“무어라?”
서로를 향한 긴장감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태수진인이 먼저 시위를 놓았다.
“……언젠가는 무당에게 예의 운운한 그 무례를 후회하게 될 것이외다, 제갈 가주.”
“그런 말은 맹주에게 직접 하시구려.”
“…….”
쾅!
입을 꽉 다문 태수진인이 자리를 떠났다.
각자 제집에 들어앉아 있을 때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서로를 의식하고 견제해 왔다.
지금 무림맹이라는 비좁은 굴 안에 몰아넣으니 알게 모르게 있던 알력 다툼은 한층 더 거세졌다.
“이거 가만있으면 안 되겠구나.”
제갈현기는 생각을 굳혔다.
맹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리고 서역 정벌을 완수했을 때 제대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미리부터 머리를 빠듯하게 굴려 두어야 했다.
“남녕에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이번에도 마교를 놓치면 그 역시 백사준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제갈현기는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가능한 모든 수를 동원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비단 제갈현기뿐만이 아니었다.
무당이 먼저 움직였다.
“족적을 숨겨라. 남녕에 도착할 때까지.”
태수진인은 직접 추려 낸 무당의 정예들을 이끌고 무림맹의 추격대보다 한발 앞서 남녕으로 출발했다.
워낙 신속한 처사였던 터라 항마대를 움직이는 데 정신이 팔린 제갈현기는 아직 무당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말을 몰아 남녕에 도착했다.
맹의 정산대가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마교의 잔당이 남녕으로 향한 이유는 하오문 때문이라고 했다.
정확한 사실관계는 정산대에서도 파악하지 못했지만 하오문과 마교는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원한이 있거나였다.
하오문의 약방주가 마교와 한패인 것은 확실했다. 그 점은 개방의 백사준이 이미 확인했다.
문제는 하오문주였다. 하오문 또한 충서를 마치고 무림맹 소속이 되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됐건 간에 하오문의 본거지로 향한다는 말이렷다.”
태수진인은 백룡호의 출렁이는 물결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백룡호 주변에 몰려 있는 기루들 중 하나가 하오문의 본산이라 했다.
하오문이 아무리 제 정체를 잘 감추고 다닌다 해도 개방의 정보꾼들이 다수 포함된 정산대에서 보내온 정보이니 틀림없을 터였다.
“둘씩 짝을 지어 기루 안을 훑어라. 하오문의 본거지라면 분명 수상쩍은 태를 낼 것이다. 특히나 사성진이 갖추어져 있는지 확인해라. 입구에서 길을 잃는다면 더는 볼 것도 없이 그곳이 하오문의 본거지일 것이다.”
먼저 하오문의 본거지를 찾고, 그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다가 마교가 나타나면 독에 든 쥐처럼 몰아세운다는 게 태수진인이 세운 계획이었다.
물론 마교에서 먼저 하오문의 본거지로 숨어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걸 염두에 둔다면 반드시 본거지가 되는 기루부터 찾아내야 했다.
“놈들의 목은 반드시 무당이 잘라야 한다. 이 점을 명심하고 신속히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장로님.”
무당의 제자들이 표홀한 신법을 발휘해 기루 안으로 스며들었다.
* * *
“뭐라고? 무당이 무얼 어째?”
한발 늦게 보고를 접하게 된 제갈현기는 참기 힘들 정도로 분노했다.
“어찌 무당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나! 무당이 맹의 정산대를 따로 부리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럴 수는 없다!”
제갈세가의 가신은 바늘방석을 밟고 선 듯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개방의 소방주가 직접 정산대를 채근해 이번에 입수된 정보를 무당에 넘기라 했다 하였습니다.”
“뭐라고!”
분노가 극으로 치솟았다.
“개방에서? 허, 제갈세가로 추격대의 관할이 넘어왔음에 앙심을 품은 게지! 개방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졸렬하다. 맹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이 이미 하나가 되었음에도 아직도 제 문파의 잇속만 차리려 드는 겐가!”
쾅!
노기를 넘기지 못한 제갈현기는 기어코 창을 하나 부수었다.
“그냥 넘겨서는 아니 되겠다. 내 이 점을 분명 맹주께 직접 고할 것이다.”
제갈현기는 감원이 주축이 된 보승실에 기별을 넣는 절차를 생략했다.
무림맹주 지월이 별 석연찮은 이유로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지 벌써 오래였다.
맹의 모든 일이 보승실을 통하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다지만 무당의 행태는 그 답답한 절차를 참아 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앞장서라.”
제갈현기는 가신을 앞세워 맹주의 거처로 향했다.
맹주의 거처라고 해 봤자 큼직한 마차에 불과했다. 지금 무림맹은 전력이 사천으로 이동하는 중이었고, 하남에서 사천까지의 긴 거리를 이동하는 수단은 마차가 가장 유용했다.
제갈현기와 가신은 말을 몰아 길고 긴 마차 행렬의 후미로 향했다.
행렬과 너무 동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검은색 마차가 바로 맹주가 타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맹주를 호위해야 하는 사대금강과 십팔나한승조차 거리를 한참 벌리고 있었다.
“맹주. 급히 뵐 일이 있어 이리 왔습니다.”
제갈현기는 마차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목소리로 먼저 기별을 넣었다.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고, 그사이 거리를 벌리고 있던 사대금강이 다가왔다.
“물러서십시오.”
“……?”
제갈현기가 눈썹을 치켜떴다.
“지금 내게 하는 말이냐? 나는 맹주를 뵈러 왔다.”
“이유를 불문하고 접근하는 이가 없도록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나는 맹주로부터 추격대 전부를 다스릴 힘을 위임받은 몸이다. 급히 맹주를 뵈어야 할 이유가 마교를 추적하는 데 있다는 점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그런 일이라면 보승실을 먼저 통해 주십시오. 저희는 명을 받았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절차를 모두 따를 만큼의 여유가 없단 말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뭐라……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맹주!”
제갈현기가 사대금강을 힘으로 밀치며 지월이 탄 마차를 두들겼다.
“맹주! 화급한 일이외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갈 가주님! 명을 따라야 하는 소승들은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맹주가 그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맹의 기강이 이토록 해이해지는 것이외다! 맹의 중임을 맡은바, 더는 묵과할 수 없으니 이 몸 또한 결단을 내리겠소!”
제갈현기는 강제로 마차의 문을 열고자 했다.
사대금강이 이를 말리려 들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실수를 하는 날에는 곧장 혈투가 벌어지게 될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놔두어라.”
마차 안쪽에서 지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장.”
“계속 고집을 피우겠다면 내가 나서야겠지. 너희들은 모두 자리로 돌아가거라.”
“그럼.”
제갈현기와 가신의 앞을 가로막던 사대금강이 신속히 뒤로 물러났다.
덜컹!
사대금강의 기척이 충분히 멀어지고 난 다음 마차 문이 열렸다.
“두 분 다 들어오시게.”
마차 안은 몹시 어두웠다.
마음이 급했던 제갈현기는 그 점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맹주를 뵙소.”
그는 가신을 앞세워 지월의 마차 위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뒤 제갈현기가 마차에서 내렸다.
겉으로 볼 땐 얘기를 잘 마친 듯 아무 일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한 가지.
제갈현기가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머리와 얼굴을 미묘하게 감췄다는 점은 의아스러웠다.
게다가 그와 함께 지월을 대면했던 가신은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으며 이후 어디에서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도 충분히 수상한 일이었다.
“…….”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으니, 그것은 부상을 이유로 잠시 말미를 얻어 맹의 일에서 손을 떼었다 알려진 백사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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