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의뢰
질긴 그물은 지강백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어 댄 칼질 한 번에 조각이 되었다.
살갗을 완전히 죄고 있던 천잠사가 그렇게나 깨끗하게 갈리는 것을 본 하오문주는 저항을 포기했다.
여기서 도망치려 해 봤자 손해가 더 클 터였다.
종남의 첫째 제자인지, 마교의 주요 인물인지 모를 지강백은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하오문주는 계산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 무얼 원하나?”
문익상은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장포 자락을 탁탁 털어 앉는 모습이 제집 안방에 앉아 객이라도 맞는 태도였다.
“의뢰.”
용천휘가 말했다.
적하조를 붙들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는 의식을 잃기 전과도 달라 보였다.
한 번 숨을 내쉴 때마다 급격히 몸이 쇠하는 듯했다.
적하조는 용천휘가 입을 한 번 열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살피기에 바빴다.
“거절하지.”
자리까지 깔고 앉은 태도와는 별개로, 문익상은 단칼에 용천휘의 말을 잘라 냈다.
“하오문이 아무리 강호의 심부름꾼 노릇으로 돈을 번다 하나, 그렇기에 손님을 가려 받는 게 도리. 새 손님을 받는다고 오랜 단골의 비위를 거스르면 쓰나. 마교의 심부름은 사양일세.”
“거절할 수 없는 대가를 주지.”
“만 금을 받는다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법.”
정말로 만 금을 준다 해도 마교의 의뢰란 수지가 안 맞는 일이었다.
지금 무림맹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하오문도 언제 무림공적이 될지 몰랐다. 독귀를 설득하기 위해, 여차하면 죽일 각오로 하오문주가 직접 걸음 한 이유도 이 점이었다.
알고 보니 숨은 마교였다는 빨간 딱지가 언제 등짝에 붙을지 모르는 것이다.
문익상은 마교의 소교주라 하는 자의 핏기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를 보면 무림맹을 포함, 온 강호가 나서서 이 난리를 칠 이유가 없지 않을까도 싶었다.
“하물며 대가를 약속한 객의 앞날을 믿기도 어렵다면야.”
용천휘는 살아 있는 저를 멋대로 시체 취급하는 하오문의 발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 금이 우스운 가치를 지닌 대가가 될 것이다.”
“흐음……? 만 금과는 비교가 안 될 가치라. 내 살면서 돈보다 더 중하고 확실한 것은 못 봤다만.”
“강호가 사라지느냐 마느냐 하는 일이니 당연히 돈이 문제가 안 되겠지.”
“음?”
하오문주의 표정이 달라졌다.
용천휘는 그의 변화를 빠르게 낚아챘다.
“단골손님에 대한 정보다. 하오문에서는 무림맹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고 있나?”
“…….”
그 말은 하오문주의 흥미를 끄는 데 충분했다.
* * *
강호에서 하오문의 역할은 잡다한 심부름꾼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도둑, 뒷골목 건달, 기녀…… 삶의 가장 낮은 바닥에 있는 자들이 모여 만든 문은 제대로 된 문파로 인정을 받지도 않았다.
하오문은 무도(武道)를 위한 문파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조직체였다. 실제로 하오문도 중에서는 제대로 된 무공을 쓰지 못하는 자도 태반이었다.
그러나 하오문은 질겼다.
강호의 수많은 문파가 흥했다 스러지는 동안에도 하오문은 생존했다.
하오문은 앞으로도 생존할 것이다.
심부름꾼이 무엇을 얼마나,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
“믿지 못할 노릇이군. 도무지.”
만 금짜리 정보는 하오문주를 놀라다 못해 허탈하게 만들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지월이 죽었고, 무림맹주는 가짜이며, 서역행을 준비한다던 무림맹이 사실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면.
심지어 그 사실을 무림맹조차 모르고 있다 한다면.
“하오문주라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본다.”
“하…… 어째서?”
“하오문은 흐름을 읽는 곳이니까.”
용천휘의 말에 하오문주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이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하오문은 강호의 심부름꾼이었다. 결코 주류가 되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따라서 하오문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눈치를 키워야 했다.
하오문은 늘 강자의 편에 섰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흐름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하오문이라면 무림맹의 행보가 이상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테지.”
“으음…….”
하오문주는 그렇다 아니다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하오문이 무림맹의 행보를 재고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방장실에 틀어박혀 모습을 필사적으로 감추는 무림맹주.
서역 정벌을 차일피일 미루며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마교 색출에 혈안이 된 무림맹.
종남의 두 제자를 뒤쫓으며 오히려 길을 잃어 가는 것 같은 추격대.
무림맹은 갈수록 서역과 멀어지고 있었다. 하오문주라면 그 모순을 모를 수가 없었다.
“지월이 죽어 마교와 바꿔치기 되었다고 하면…… 하, 여전히 믿기는 어렵지만 그렇다면 아귀가 딱 들어맞는군.”
하오문주는 계산이 빠른 인간이었다.
용천휘의 신분과 지금의 얘기만으로도 그는 대부분의 상황을 짐작했다.
“그렇다면 무림맹은 서역 정벌을 핑계로 무엇을 하려 함인가?”
“내 목을 잘라 서역으로 보낼 작정이다. 대명천교는 복수라는 명분으로 중원 땅을 침범하겠지. 지월이 아닌 자의 목적은 그 혼란 속에서 대명천교의 주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월은 현 중원의 일인자. 그가 마음먹는다면 그 어떤 혈란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
문익상이 한숨을 뱉어 냈다.
“무림맹이고 나발이고…… 그저 쑥대밭이 되겠군.”
“허나 나는 그가 일으킬 혈란을 막을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중원이 아닌, 대명천교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월이 아닌 자를 없애는 순간 서쪽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약조할 수 있다.”
이것은 계산을 하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중원의 운명이 뒤바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오문주는 생각을 매듭지으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확히 하오문에 바라는 일이 뭐지?”
본론이 나왔다.
용천휘가 하오문을 세 번째 조력으로 택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익명성과 기민성이었다.
“나는 수족을 잃었다. 교에서는 내 상황을 모르고 있다. 대명천교의 주인으로서 나는 내가 가진 힘을 정당히 사용할 권리를 찾고 싶다.”
“서역까지 가는 심부름을 해 달라? 그것이 꼭 하오문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건가?”
“하지만 교에는 완전한 내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에 이매들이 얼마나, 어떻게 숨어 있는지 모른다.”
요컨대 그런 말이었다.
삼좌위와 파루나의 보좌를 잃게 된 용천휘는 그들을 대신할 교의 인물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중 누가 지월의 탈을 쓴 그자와 손이 닿아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대명천교에 침투해 용천휘의 사람을 가려내어 비밀리에 기별을 넣을 것.
용천휘가 하오문에 요구하는 바는 그러했다.
그러나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원에서는 이제껏 마교의 정확한 위치조차 한 번이라도 파악한 적이 없었다.
“마교에 잠입하라니……? 하오문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게 아닌지?”
“나의 신물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나는 하오문이 아니라면 이 일을 맡길 곳이 없다고 믿는다.”
“신뢰는 고맙지만 이쪽의 생존은 또 다른 문제인지라. 소교주의 말대로 강호에 곧 그런 파란이 닥칠 예정이라면 하오문 같은 약체는 몸을 사려야 마땅하지 않겠나?”
이에 대한 답은 의외였다.
“말했듯이, 나는 하오문이 강호의 흐름을 읽는 곳이라 생각한다. 하오문은 그 흐름 속에서 늘 승자의 편에 섰다. 그것은 바꿔 말해 하오문이 정한 자가 승자가 된다는 뜻이다.”
“허……? 허허? 허어…… 그것참.”
하오문주의 기묘한 표정이 한층 깊어졌다.
이제껏 내내 강호의 가장 더러운 심부름을 도맡아 했지만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살다살다 마교의 소교주께 이런 말을 듣다니.”
용천휘는 이방인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강호 무림을 공정히 바라볼 수 있는지도 몰랐다.
하오문주는 처음으로 쉽게 계산이 되지 않는 영역과 마주했다.
마교가 잠식했다는 무림맹과 혈혈단신이 되어 교와 단절된 소교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느니 차라리 발을 빼서 달아나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승자를 정할 힘이 자신에게 있다면…….
“얘기 잘 들었소. 귀한 정보 감사하오.”
문익상이 말투를 싹 바꿔 포권을 해 보였다.
입장을 바꿨음을 그렇게 태도 하나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허나 소교주의 말대로 하오문은 흐름을 읽는 곳. 승산이 없는 자와는 거래하지 않소.”
문익상은 그 힘을 휘둘러 보고 싶었다.
이제껏 강자에 기대서기 위해 언제나 눈칫밥을 먹으며 버티고 생존해 왔다. 문익상은 한 번쯤 하오문이 다른 역할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소교주 쪽에 승산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오. 소교주의 의뢰는 그때 받아들이지.”
용천휘가 물었다.
“어떤 방식의 확인을 원하는가?”
“남녕을 맡아 주시오.”
남녕은 하오문의 근거지가 있는 곳이었다.
“약방에서의 일로 하오문은 대명천교와의 연관성을 부정할 길이 없게 되었소. 소교주의 목을 따다 바쳤다면 그래도 살아날 길이 있었겠으나 지금은 요원한 일이 되었지.”
하오문주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가 처음부터 독귀를 배신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은 하오문에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올 것이외다. 곧장 남녕을 치겠지. 나는 하오문주로서 남녕의 문도들을 최대한 도피시킬 것이오. 그사이 남녕의 입구를 막아 주시오.”
“무력을 증명하란 소린가.”
“이곳은 강호지 않소.”
하오문주의 제안은 대명천교에 잠입해 달라는 의뢰만큼이나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려왔다.
대명천교를 불러들일 수 없다면 용천휘가 가진 힘은 지금 여기 있는 네 명이 전부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은 용천휘가 아닌, 지강백에게서 들려왔다.
“남녕을 맡을 테니 하오문은 의뢰를 맡으십시오.”
하오문주의 시선이 용천휘를 떠나 지강백에게 닿았다.
하오문의 정예 다섯을 눈 몇 번 깜박이는 사이에 시체로 만들었던 자였다.
하지만 문익상이 보았던 것도 전부는 아니었다.
문익상은 그가 무얼 얼마나 더 품고 있는지 궁금했다.
종남파가 이제는 그저 한 줌의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듣기로는 그를 도주시키기 위해 종남파의 인물 여럿이 그 자리에서 지월의 장을 대신 받아 냈다 했다.
종남파가 마교로 몰린 것은 정체를 감추고 숨어든 소교주 탓이었고, 하루아침에 사문을 모두 잃은 제자는 온 무림으로부터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마교의 소교주와 함께였고, 한쪽 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붉은색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과연 무엇을 품고 있을까.
“허…… 자신이 있는 모양이로군.”
지강백은 그 말에는 가타부타 답이 없이 다른 이야길 꺼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 어떤 것을 말씀하시오?”
상처를 입고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 잿빛 동공에 이채가 스쳐 갔다.
“어차피 무림맹에서 등을 돌리기로 했다면, 가능한 일을 크게 벌여 주십시오.”
“음?”
그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던 문익상이 되물었다.
지강백은 이렇게 답했다.
“남녕에 주살첩이 내려진 인물이 있음을 무림맹에 알리십시오.”
문익상은 비로소 지강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능한 많은 인물이 남녕으로 모여들도록.”
“……!”
그가,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를.
지강백은 복수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용천휘가 대명천교의 힘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교의 일이었다.
지강백은 그 시간을 참고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제 손으로 가능한 많은 인간을, 가능한 빨리 처리하길 원할 뿐이었다.
* * *
“사형은 미쳤어.”
달리는 마차 안은 고르지 못한 침묵으로 한창 몸살을 앓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용천휘의 목소리가 침묵을 잘게 부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련한 짓이야. 남녕에서 일을 키우겠다는 건.”
일행은 하오문의 위장마차를 이용해 섬서에서 남녕으로 달려가는 길이었다.
용모파기가 잘 알려진 사형제 덕에 마차는 자연히 적하조와 독귀가 끌게 되었다. 마부석은 적하조의 쉬임 없는 수다로 조용한 틈이 없었으나 마차 안은 정반대였다.
이제껏 무언(無言)을 갑옷처럼 휘감고 있던 지강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동참할 필요는 없다. 내키지 않는다면 언제든 빠져라.”
“이제 와 빠지라고?”
용천휘가 푸른색이 감도는 입술을 비틀었다.
“싫든 좋든 사형은 이미 거래에 응했어. 공동의 적을 함께 없애자는 게 우리의 거래였지. 사형이 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도움이 안 돼.”
“남녕을 맡은 것은 거래의 일환이다.”
“되도록 크게 판을 벌이라고 한 건 사형이었잖아. 대체 어쩔 생각이야? 혼자서 무림맹 전부를 죽이겠다는 거야?”
지강백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이 무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강백은 그렇게 할 것이다. 언젠가 백사준에게 말했던 대로 자신을 마교라 믿는 모든 사람을 죽여서라도 종남의 위치를 바로잡을 생각이었다.
핏기를 잃은 입술만큼이나 용천휘의 눈도 싸늘해졌다.
“듣던 중 가장 병신 같은 소리로군. 사형이 죽여야 할 상대는 하나야. 죽여 봤자 득 될 것도 없는 무림맹의 잔챙이들에 그렇게 공을 들여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사람 죽이는 취미라도 생겼어?”
“……네가 반대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지강백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용천휘가 감긴 눈꺼풀을 찌를 것처럼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사부님이 퍽도 기꺼워하시겠군. 사형이 복수라는 핑계를 대고 살인귀의 길을 걷는 것을 보면.”
그리고,
“……!”
퍼억!
다음 순간 용천휘는 멱살을 붙들려 달리는 마차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미는 자세가 되었다.
덜컹대는 문짝이 어깨를 때렸다. 바퀴에서 퉁겨 오는 흙먼지가 창백한 얼굴을 거칠게 할퀴었다.
지강백이 가볍게 손을 놓는 순간 용천휘는 마차 아래 깔려 육편이 되고 말 것이다.
지강백은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용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복수에는 네 목숨도 포함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읏……”
“너는 사문을 기만하고 나를 배신했다. 네가 재미 삼아 한 거짓말의 대가로 사부님께서 돌아가셨어. 나는 이 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러니 너도 잊지 마라.”
“…….”
“네가 마교를 끌어들여 무슨 짓을 하건 나와는 상관이 없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지강백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용천휘를 끌어올려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다각다각…….
마차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남녕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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