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87화 (87/346)

제87화 어둠의 뒷면

“하, 이런…….”

범광이 방금 전해진 전서를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

백사준에게서 온 것이었다.

종남파의 두 제자를 놓쳤으며 추격대마저 몰살당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시체의 처리 방안과 이어서 다른 추격대의 상황을 묻고 있었다.

몇 줄 되지 않는 얇은 천 쪼가리의 내용은 무거웠다.

덩달아 범광의 한숨도 무거워졌다.

“말씀을…… 어떻게 올려야 하나.”

그의 한숨은 지월을 향하는 것이었다.

서역 정벌을 기치로 무림맹이 출범한 지 달포.

스스로 맹주가 되어 맹을 마교 사냥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은 지월은 여전히 방장실 밖으로 출입을 삼가는 중이었다.

지월이 지시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놈들의 목을 가져올 것.

모든 것은 그 이후로 미뤄졌다. 그 외에는 자신을 찾지 말라 했다.

덕분에 범광은 졸지에 무림맹이 되어 버린 소림 본산의 내외적인 일을 홀로 모두 떠맡아 정신이 없었다.

몸이 서너 개가 되어도 모자랄 일과에 시달리다 보니 다른 일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장실의 자잘한 심부름을 돕는 사미승이 그에게 말을 붙여 왔다.

―저어…… 감원 스님.

―무슨 일이냐?

―그게 저어……

말을 붙이고도 한참을 주저주저했다. 뭔가 곤란한 얘기를 하려는가 싶었다.

―어서 말하여라.

―그게…….

그렇게 어렵사리 얘기가 이어졌다.

―방장 스님께서 요새 좀…… 이상하십니다.

―이상하다니?

―밥을 자꾸 거르십니다.

―공사가 다망해 입맛이 없으신가 보구나. 늘 조용하던 경내가 요새 갑자기 부산하니 그럴 법도 하다. 네가 좀 잘 보아 드리려무나.

―그리고 자꾸…….

―자꾸?

―방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나십니다. 잘…… 씻지 않으시는 듯하고…… 그리고 방을 항시 어둡게 해 두시고……

감원은 몹시 바쁜 와중이었고, 그래서 자연 별일이 아니라 여겼다. 냄새가 난다거나 씻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개인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좀 씻겨 드리려무나.

그렇게 감원은 사미승을 내보냈다.

―그럼 이만 나가보거라.

―……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사미승이 미적대며 방을 나섰다.

그 전에 눈이 한 번 마주쳤다. 아직 어린 맑은 눈에 원망이 그렁대고 있었다.

그때는 그러고 말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눈이 한동안 기억에 남아 마음이 언짢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고, 사미승은 더 이상 같은 일로 범광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일단 말씀을 드려야겠군.”

범광은 전서를 챙겨 몸을 일으켰다.

그때 사미승이 말을 꺼낸 이후 방장실을 직접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 * *

“방장.”

범광은 굳게 문이 닫힌 방장실 앞에 멈춰 서 지월을 불렀다.

사실 전서의 내용을 전달하는 일이라면 다른 이에게 심부름을 시켜도 될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저와 대면을 꺼리는 지월을 굳이 찾아온 것은 백사준이 뒤에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종남의 반격이 예상. 주살첩에 대한 재고가 필요함.

반격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종남이라는 이름은 이미 강호에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주살첩을 목에 걸고 쫓기는 제자 둘이 전부였다. 그중 하나는 종남이라는 껍데기를 이용한 마교였다.

차라리 마교의 반격이라 하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종남파 둘째 제자의 신분은 마교의 소교주였고, 그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마땅히 서역에서의 역공을 대비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미 이 점에 대해서는 맹에서도 충분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종남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일개 감원이 혼자 파악할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니 백사준도 그렇게 덧붙였을 것이다.

―맹주 확인 요망.

“방장.”

방장실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 것이 아니라면 지월은 벌써부터 제 기척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범광은 문고리를 잡았다.

“방장. 문을 열겠습니다.”

“……지 마!”

뒤늦게서야 지월의 거부가 들려왔지만 범광은 그대로 문을 열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감이 좋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방문을 연 범광은 저도 모르게 주춤 멈춰 섰다.

“이, 이게……?”

방은 아주 어두웠다.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창을 모두 막아 둔 탓이었다.

“방……장?”

게다가 그 역한 냄새.

단순히 역하다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가장 더럽고 어두운 밑바닥에 고이고 고인 냄새가 그러할 것이다.

범광은 저도 모르게 호흡을 막으며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에는 방 안이 너무 어두웠다. 범광은 안력을 돋우며 말했다.

“방장. 이 어인 일입니까? 어찌 이리 어둡게 두시고……”

슷!

그 더럽고 역한 냄새가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지월이 범광에게 바싹 붙어 선 것이다. 마치, 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을 가리려는 것처럼.

“나가라.”

범광은 그 어둠에서 풍겨 오는 역한 냄새 속에서 비릿한 혈향을 찾아냈다.

범광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방장……”

“나가!”

휘익!

지월이 팔을 뻗었다. 범광이 권풍에 밀려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쾅!

그리고 문이 닫혔다.

“방장!”

범광이 울렁이는 속을 억지로 달래며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쪽에서 지월이 단단히 붙들고 선 모양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종남파의 잔당을 뒤쫓던 추격대가,”

“놈들의 목을 잘랐느냐?”

종남이라는 얘기에 지월이 숨 가쁘게 말을 잘랐다.

현재 지월을 반응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뿐인 듯했다.

“……아닙니다. 추격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망할!”

지월이 와락 고함을 쳤다. 범광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장이라도 한 대 맞은 듯 뱃속이 울렁댔다.

“대체 뭣들 하고 있는 게냐! 고작 두 놈을! 왜 내가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 게야!”

범광은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킨 뒤에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개방의 말로는…… 종남의 반격이 예상된다 하였습니다. 맹주께서 이를 확인하심이……”

“확인?”

지월이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낮고 괴이한, 소름이 끼친다고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 웃음소리가 킬킬 번져 나왔다.

“진작 불을 놓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라 한 종남에 무슨 놈의 확인이 더 필요하단 말이냐? 여기 모인 중원 놈들은 죄다 눈깔 병신이라는 소리더냐!”

“……예?”

범광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완전히 달라진 지월의 언사는 추격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가라! 두 놈의 목을 가져오기 전까진 다신 나를 찾지 마라!”

“…….”

범광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언제나 지월을 믿었다. 평생을 곁에서 지월을 보필한 범광에게 인간 지월을 향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무림맹을 세운 지월의 행보가 아무리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범광은 그를 믿었다. 반드시 뜻하는 바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한평생을 일구었던 그 믿음마저 흔들릴 것 같았다.

지월은 평소의 지월이 아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월이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범광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방장. 혹 말씀하지 못하신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제게 일러 주시면…….”

“당장 꺼지라 하지 않았더냐!”

퍼엉!

문을 통과한 장력이 범광을 후려쳤다.

“으윽!”

범광이 피를 뿌리며 저만치 밀려났다.

호흡을 몇 차례 고른 뒤에야 신형을 바로잡은 범광이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좌했다.

보는 이가 없는 모습은 들어주는 이 없는 마음처럼 안타까웠다.

“……예.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허나 제발…… 혹여 몸이 상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고……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라도 찾으십시오. ……부디.”

말을 마친 범광이 깊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갈무리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하필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굳게 닫힌 문 앞에 고인 희미한 핏자국이었다.

누군가 한 번 닦아 낸 듯, 흔적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범광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바닥의 자국 옆에 손을 갖다 댔다.

“세 치 반…….”

길이를 재어 보기 위함이었다.

범광은 그 치수가 불길했다. 딱 어린아이의 발 크기라 하면 알맞을 그 치수가.

“…….”

범광이 몸을 일으켰다.

확인할 게 있었다.

* * *

“그게 정말이냐?”

몇 번을 물어도 답은 같았다.

“예, 감원님. 오늘은 통 얼굴이 안 보였습니다.”

사미승들을 관리하는 응법사미의 대답이었다.

범광이 물은 것은 방장실의 심부름을 돕는 어린 사미승의 행방이었다.

“어디 멀리 심부름을 보낸 것은 아니냐?”

“글쎄요……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만. 그리고 그렇게 어린 사미승을 멀리 보낼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있단 말이냐!”

초조해진 범광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응법사미가 고개를 움츠렸다.

“저…… 요새 종종 일이 힘들다며 혼자 숨어 있기도 하고 해서 보는 대로 혼을 낸 적이 있는데…… 지금도 혹 그런 게 아닐는지요.”

“그래?”

범광이 응법사미를 채근했다.

“어서 가서 찾아보고 내게 말을…… 아니다. 어서 찾아서 내게 오라 일러라.”

“예, 알겠습니다.”

“급한 일이니 서둘러야 한다. 되도록 많은 이를 데려다 함께 찾아보거라.”

“예.”

응법사미가 뒤돌아 후다닥 달려갔다.

“…….”

범광이 응법사미가 사라진 허공에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 희미하던 발자국이 머릿속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언뜻 코끝을 스치던 혈향도 의혹이 아닌 사실이 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이냐…….”

문득 백사준이 덧붙였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맹주 확인 요망.

그 말은 맹주의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맹주를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을까.

한번 시작된 의혹은 걷잡을 수가 없이 자라났다.

“……아니, 설마.”

범광이 억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말발굽처럼 가슴 밑바닥을 두들겨 대는 의혹을 간신히 누른 그가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감원!”

저를 부르는 소리에 범광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십팔나한 중 하나인 범정이었다.

“무슨 일이냐?”

“정문에서 일이 생겼습니다.”

“일?”

퍽 이상한 말이었다.

“정문에서 생긴 일인데 정문에서 해결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소림이 정문을 지키지 못할 리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제껏 없었던 거대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거대한 위기가 이토록 아무런 조짐도 없이 찾아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괴이했다.

“방장을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떤 객인지 신원을 확인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설마 무턱대고 방장을 찾는 이를 객이라 부른 것이냐?”

범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방장의 녹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뭐라고?”

녹장이라 부르는 것은 소림 방장의 신물인 녹옥불장을 뜻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원인 범광조차 녹장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녹장이 확실하더냐? 혹 누군가 가짜를 만들어 와 소란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냐?”

“제 눈에는 확실해 보였습니다. 해서 감원께 온 것입니다.”

“당장 가 봐야겠다.”

범광이 지체 없이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범정이 그 뒤를 따랐다.

* * *

녹옥불장을 가져온 객은 몸이 가녀린 여인이었다.

온몸을 검은색 천으로 빈틈없이 가리고 있긴 했지만 여인이 확실했다.

여인은 정문을 지키는 지객승과 나한승들에게 걸음이 막혀 있는 상태였다.

“소림의 방장을 보러 왔다.”

지객승이 답했다.

“소림의 객들은 신원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방장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방장의 신물이다.”

“예. 저도 눈이 있으니 그게 무엇인지는 압니다. 허나 진실로 본사의 물건인지는 확인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정말 녹장이 맞다면 방장실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없어야 하는 물건입니다.”

여인의 까만 눈이 지객승을 뚫어져라 보았다.

“나는 시간이 없다.”

“확인이 되기 전까지는 소림의 문턱을 넘으실 수 없습니다.”

“…….”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 없는 까만 눈으로 지객승을 올려다보았다.

“어……?”

지객승은 기이할 정도로 까만 눈동자 색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기이하다 느꼈냐면, 인간의 눈이 될 수 없는 녹색이 되는 듯했기 때문이다.

설마 그렇겠냐 싶어 눈을 비비는 동안,

“녹장을 가져왔다는 객이시냐?”

때마침 감원과 십팔나한승이 도달했다.

지객승과 나한승들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오셨습니까. 예, 그러합니다.”

범광은 여인의 모습과,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녹옥불장을 살폈다.

아무리 되짚어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지월과 이런 여인이 알고 지낸다고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월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지내는 그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지월 또한 모를 것이다.

“녹장을 확인하겠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

여인은 마지못한 듯 녹장을 쥔 손을 내밀었다. 범광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녹장을 받아 살폈다.

진짜였다.

그가 몇십 년간 지월의 곁에서 내내 보아 온 녹옥불장이 맞았다.

“……확인했습니다.”

범광이 여인에게 녹옥불장을 돌려주었다.

방장의 신물이란 방장이 없을 경우 방장을 대하듯 다뤄야 하는 물건이었다. 신원을 모르는 자라 해서 함부로 가로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아직 안 됩니다.”

지객승이 반발했다.

그는 여인의 앞으로 나서서 정문을 향해 이어지는 동선을 끊었다.

“방장의 객입니다. 어찌 그리 가벼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시기도 어수선하지 않습니까. 좀 더 기다리시게 한 뒤 방장께 확인을 하는 것도…….”

그때였다.

“……확인하는 것도,”

지객승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왜 그러느냐?”

범광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지객승이 쿵, 쓰러졌다.

“이게 무슨……?”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을 하기도 전이었다.

여인이 쓰러진 지객승을 지그시 밟고 끊어진 동선을 이었다.

“잠깐! 잠시 기다리십시오!”

범광이 여인을 멈추게 했다. 여인이 힐긋 고개를 돌렸다.

“너도 나를 멈추게 할 것인가?”

“……!”

이렇게 묻는 여인의 눈은 아주 선명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면 잠들어라.”

“…….”

그것이 범광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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