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각성 (2)
아주 고요한 굉음.
지강백은 지금 그러한 상태였다.
두 개의 단전이 이어져 기어코 하나가 되는 과정은 몸이나 내공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먼저 오는 것은 깨달음이었다.
나뉘어 있던 것들이 하나가 되는 까닭.
힘의 시작과 생성의 의미. 본질과 흐름. 이어짐과 결과.
흐르는 것, 정지하는 것.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정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움직였다는 것을 확인한다. 두 눈으로 움직임을 보지는 못하지만 움직인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비가 내린다.
언젠가는 그칠 것이다. 땅에 스며든 비는 개울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비가 바다까지 움직이는 것이다.
눈으로는 그 과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는 있었다. 본다고 모두 아는 것도 아니요, 안다고 해서 남김없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물은 움직인다.
아주 작은 벌레부터 저 거대한 해까지.
벌레의 작은 움직임은 작아서 볼 수 없고 해의 궤적은 너무 커서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움직인다. 태을신공도 현청건기공도 움직이는 것이었다. 움직여 언젠가는 하나가 될 것이다. 비가 결국 바다가 되듯이. 바다가 비로 되돌아오듯이.
다만 너무 느릴 뿐이었다.
지강백은 그 시간을 조금 빠르게 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작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것의 눈에는 저보다 큰 세상 모든 것의 움직임이 아주 빠르기 마련이었다. 벌레가 수백 번 배를 꾸물거려 움직이는 거리를, 인간은 고작 일 보에 움직일 수 있었다.
지강백은 아주 작은 벌레가 되었다.
현청건기공은 눈이 멀 정도의 속도로 자라났다. 현청건기공은 쏟아지는 비였고 태을신공은 흐르는 비였다.
벌레의 속도에는 둘 다 거대한 물이었다. 아무리 배를 밀어 봤자 따라갈 수 없기에 그저 몸을 실었다.
어떤 게 어떤 물인지 벌레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크게 상관도 없었다.
물은 흐르고 흘러 결국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지강백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왼쪽 눈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세상 모든 물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지강백은 조용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
단전은 더 이상 두 개가 아니었다.
태을신공도 현청건기공도 더 이상 다르지 않았다.
지강백이 세상의 일부이듯 몸 안의 기운도 그의 일부였다.
―내 것이구나.
그렇게 깨닫는 순간, 단전이 가득 찼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완전해졌다.
슷!
부러진 창대가 움직였다.
뭉툭한 몽둥이를 닮은 그것이 자꾸만 칼로 보였다.
백사준은 이를 악물고 타구봉을 휘둘렀다.
“받아라!”
지강백이 힐긋 저를 돌아본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지강백은 장난이라도 치듯 저 뒤로 스스륵 물러나 버렸다. 목적을 잃은 타구봉이 허공에서 어색한 춤을 추었다.
탁!
그사이 지강백은 창대로 추격대원의 목을 쳤다. 모든 것이 정지한 가운데 지강백만 홀로 움직이는 것처럼 가볍고 깨끗한 한 수였다.
“…….”
쿵!
추격대원이 쓰러졌다. 목이 괴이하게 비틀려 있는 그를 보고 목이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
백사준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런 죽음을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깨끗하고 짧은 순간에, 그러나 이렇게 확실하게 만들어지는 감정 없는 죽음은 처음이었다.
“으아압!”
그가 내력을 끌어 올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고 나자 조금 정신이 드는 듯했다.
“궁대! 담으로 올라가! 간격을 벌리고 일거에 잡는다! 남은 활을 몽땅 쏟아부어!”
휙, 타타닷!
백사준의 말을 들은 궁대가 일제히 담벼락을 달려 그 위로 올라섰다.
또다시 지강백과 힐긋 눈이 마주쳤다.
스르륵, 마치 물처럼 움직인 지강백이 다음 순간 담 위에 섰다.
“……뭐라고?”
백사준으로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단순히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서 저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강백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저 혼자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쪽이다!”
“올라왔다!”
뒤늦게 지강백을 발견한 궁대가 그를 향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핏, 피비비빗!
열 개가 넘는 화살이 사람 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지강백은 쏟아지는 화살들 사이를 걸었다. 화살은 봄바람처럼 그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했다.
거리를 좁힌 그가 창대를 움직였다.
퍽, 쿵!
퍽, 쿵!
퍽, 쿵!
한 번의 움직임에 한 구의 시체가 생겨났다.
담 아래로 주르륵 떨어지는 시체를 보며 백사준이 고함을 질렀다.
“그만해! 빌어먹을! 나를 상대하라고!”
백사준이 타구봉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신형을 솟구쳤다.
힐긋, 눈이 마주쳤다.
지강백은 백사준과 눈을 마주한 상태에서 창대를 횡으로 그었다.
퍽, 쿵!
시체 하나가 더 생겨났다.
“그만하라니까!”
쐐애액!
타구봉이 정면을 파고들었다. 창대를 우측으로 휘두르느라 지강백의 가슴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지강백은 그 자세에서 허공에 눕듯이 몸을 뒤로 기울였다.
“또 도망칠 생각인가! 어림없다!”
백사준이 왼발을 축으로 삼아 중심을 잡으며 공세를 계속 이었다.
지강백은 상반신이 지면과 수평을 이룰 만큼 몸을 뒤로 젖힌 상태에서 한 발을 들어 올렸다.
퍽!
그리고 백사준의 발목을 걷어찼다.
“억!”
설마하니 저렇게나 위태로운 균형 속에서 다리를 이용할 줄 몰랐던 백사준은 꼼짝없이 얻어맞고 담 아래로 떨어졌다.
“으윽…….”
백사준이 재빨리 손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 전에,
탓!
신을 신지 않은 지강백의 맨발이 백사준의 머리통을 가볍게 밟고 지면으로 내려섰다.
“이익! 가만두지 않겠다!”
백사준이 퉁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강백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고 저만큼 앞서갔다. 게다가,
“……! 이건 또 뭐…….”
원하는 만큼 도약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백사준은 그때서야 제 발목이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쿵!
백사준이 도로 쓰러졌다.
지강백의 등을 쫓아 부릅뜬 눈을 통해 남은 추격대원들이 허무할 정도로 순간에 시체로 변하는 광경이 들어왔다.
“제발, 좀!”
순간이 허무하듯 바람도 허무했다.
지강백은 마지막 추격대원까지 전부 시체로 만들었다.
고개를 돌려 힐긋, 백사준과 눈을 마주친 지강백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백사준이 기를 쓰고 몸을 일으켰다.
슷!
그러나 지강백의 창대가 더 빨랐다. 창날을 잘라내 뭉툭해진 창끝이 눈을 찌를 것처럼 다가왔다.
“……죽일 거면 빨리하시오.”
백사준이 이를 갈며 말했다.
지강백은 대답 대신 창대를 움직였다.
백사준은 일부러 눈에 힘을 주고 창대가 제 목을 치길 기다렸다.
창대는 목을 치는 대신 뺨을 건드렸다.
츳!
뺨이 뜨거웠다, 곧 시원해졌다. 백사준은 창대가 마치 칼처럼 제 뺨을 그어 피를 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짓이오?”
“표시입니다.”
지강백은 무감한 표정으로 뺨을 한 번 더 그었다.
“무슨 표시!”
“제가 마교가 아님을 알고 있는 자라는 표시.”
지강백은 끝에 피가 묻은 창대를 미련 없이 버렸다.
“가서 전하십시오. 종남은 멸문하지 않았다고. 장문도 장로도 없는 문파이나 제자는 있습니다. 그 제자가 사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종남을 마교라 떠드는 이들을 전부 죽여 없애기로 했다는 것도.”
욱신대는 뺨이 제멋대로 떨려 왔다.
“제정신……이 아니군. 혼자서 무림맹 전체를 상대하겠다는 거요?”
“종남을 마교라 칭하는 이들입니다. 무림맹 전체가 그런 이들이라면, 모두 죽여야겠지요.”
“그게 가능할 것 같소?”
“할 겁니다. 제가 해야 할 도리이니.”
지강백이 돌연 백사준의 오른팔을 잡았다.
“그리고 못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른팔에 힘이 들어간다 싶었다.
“……흡!”
뚜둑!
오른팔이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그 바람에 놓친 타구봉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지강백은 볼일을 마쳤다는 듯 백사준에게서 몸을 돌렸다.
부러진 다리로 엉거주춤 서서 부러진 팔을 붙들고 있던 백사준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불가능할 거요! 지 소협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무림맹은 마교를 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요! 무림맹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오! 맹은 서역으로 향해 마교를 멸해야 하오! 소협은 왜 자꾸 그 길을 가로막는 거요! 왜!”
지강백이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무감을 두른 색깔 없는 잿빛의 시선이 백사준을 향했다.
“제 길을 방해한 것은 무림맹입니다.”
“아니오! 무림맹은 오로지 마교를 상대하려는 게요! 지 소협은 마교를 끝까지 감싸지 않았소!”
“하지만 저는 마교가 아닙니다. 백 소방주님도 그 점을아셨습니다.”
“그건…… 그건 어쩔 수 없었소! 어디까지나 그건 대의를 위한 일이었소! 맹은 마교를 멸할 것이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무림맹에 대의 따위는 없습니다. 마교는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보다 더욱 명백한 사실이 어디 있다고!”
그때 지강백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도무지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그리고 가늠할 수도 없는 아주 큰 감정이.
“무림맹주는 지월 대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월 대사는 죽었습니다. 무림맹주는 마교가 아닌 중원을 없애려 들 것입니다.”
“뭐……뭐라고?”
“무림맹의 행보를 되짚어 보십시오. 서역 정벌을 위한다던 무림맹이 가장 먼저 한 짓이 무엇이었는지. 지금껏 무림맹이 나서서 없앤 이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은 모두 마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는 믿지 않소! 그런 터무니없는 말 따위…… 믿을 수 없어! 소협이 거짓말을 하는 거요! 마교가 아니라 발버둥 치는 것뿐이라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입니다.”
백사준은 더 이상 지강백을 붙들어 놓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걸음을 이었다. 하필이면 그 발밑에 백사준이 놓쳐 버린 타구봉이 구르고 있었다.
“아, 안 돼!”
지끈.
지강백은 멈추지 않았고, 타구봉은 그의 발밑에서 반 토막으로 부러졌다. 개방의 방주를 상징하는 신물이 망가진 것이다.
지강백은 계속 그렇게 제 길을 갈 것이다.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밟아 부러트리며.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듣고 있소? 소협은 절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백사준이 땅을 더듬어 부러진 타구봉을 쥐며 울분을 토했다.
사부인 팔중신개가 젊은 시절부터 틈틈이 손수 깎아 다듬어 온 타구봉이었다. 백사준이 소방주가 되는 날 이 타구봉을 하사받았다.
이걸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소방주의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백사준은 들끓는 노기를 억지로 삼켰다.
부러진 타구봉은 아무리 이으려 해도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완전히 어긋난 것이다.
그 모양새가 자꾸만 난항을 겪고 흔들리는 서역 정벌과 겹쳐 보여 백사준의 마음을 괴롭혔다.
십자 모양으로 새겨진 뺨의 흉터가 화끈거렸다.
그 못지않게 지강백이 남긴 말이 귓가에 불을 지폈다.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이냐. 지월 대사가 왜…… 무림맹이 왜…….”
덮어 두면 그뿐일 터무니없는 소리가 이토록 괴로웠다.
―마교를 멸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그렇게 말하던 지월이 너무도 다른 사람 같아 오한이 들던 기억은 지강백이 억지로 남긴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해라.
그때 느꼈던 감정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이 바뀐 것 같다고.
“……!”
백사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확인을 해야 했다. 그때 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해야 했다.
* * *
“어…… 어떻게 된 거야?”
적하조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제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십의 시체가 거짓말처럼 생겨나 있었다.
피도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괴상한 죽음이었다. 피를 흘린 사람은 독귀와 까마귀 부인이 전부였다.
그보다 더욱 이상했던 것은 지강백이었다.
마차를 구하기 위해 혼자 나섰을 때만 해도 지강백은 홀로 생사의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 다리로 서서 두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
“이, 이제 괜찮아? 괜찮은 거야? 팔다리는 어떻,”
“그래.”
간단한 답으로 이어지는 질문들을 축소한 지강백이 독귀에게로 눈을 돌렸다.
망연자실한 채 죽은 까마귀를 품에 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독귀는 그 누가 봐도 애처로웠다.
“마누라, 마누라…… 또 이리 헤어지다니…… 우리가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 다시 만났는데…… 세상이 어찌 이토록 무심하고 박정한지 모르겠구려. 흐으으으…….”
따듯한 눈물이 벌써 식기 시작한 새를 적셨다.
“영감…….”
보다 못한 적하조가 독귀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를 다독였다.
지강백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너는 독공을 모시고 마차로 이동해라. 또 다른 추격대가 꼬리를 잡기 전에 몸을 감추는 게 낫겠어.”
적하조가 덩달아 붉어진 눈시울을 들어 올렸다.
“응? 나만? 그럼 너는 어쩌고? 그리고 저 사제는?”
“그는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다. 나는 이곳에 남겠다.”
“음? 왜? 추격대가 올 거라며. 도망칠 수 있을 때 함께 도망쳐야지.”
적하조의 의문에 답을 한 것은 용천휘였다.
“추격대를 혼자 죽일 작정이로군.”
“뭐? 혼자?”
적하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얼마나 올 줄 알고. 같이,”
“가라.”
짧은 말을 던진 지강백이 저 홀로 모습을 감추었다.
잡아 볼 새도 없었다. 살수의 눈에도 그것은 너무 빨랐다.
적하조가 입을 쩍 벌렸다.
“저게…… 뭐야?”
“은하유영비.”
“은하유영비라면…… 종남의 무공이야?”
스스로도 뻔한 소리를 물었다 싶었던지 적하조가 말을 돌렸다.
“그런데 혼자 보내도 되는 거야? 추격대가 엄청나게 몰려올지도 모르잖아. 그걸 혼자서 다 상대할 수는 없어.”
그 말에 용천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능할 거야.”
“뭐?”
“우리야 거추장스럽기나 하겠지. 방금 전처럼.”
“어…… 어?”
용천휘의 눈이 내원 여기저기를 나뒹구는 시체들을 가리켰다.
적하조는 이 시체들을 지강백이 혼자서 만들어 냈다는 것을 이제야 받아들였다.
“저, 정말? 어어……어떻게?”
“대환단의 기운을 모두 흡수했어. 이전과는 다른 경지에 올라선 거야.”
“다, 다른 경지? 얼마나?”
“매우 많이.”
적하조는 새삼스럽다는 듯 내원의 시체들을 돌아보았다.
처음 느꼈던 괴이함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피 한 방울 없는, 기이할 정도로 깨끗하고 고요한 죽음은 자꾸만 날 선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적하조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뒷목을 문지르며 물었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건가? 너무 갑자기 그렇게 되면 뭐 좀 이상하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고…… 뭐 그런 거라도 있거나 뭐…… 하여간 그래도 되는 거야? 응?”
“글쎄.”
용천휘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방금 전 지강백이 서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종남파에 숨어든 산적들을 상대할 때도, 길에서 마주친 살수를 처리할 때도, 구대문파의 버릇없는 후기지수들과 맞설 때도 지강백은 그가 처음 파악했던 지강백의 모습에서 어긋남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체들은 달랐다.
그가 아는 지강백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지강백은 달라졌다.
어쩌면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 날 천하무도회에 참석했던 구대문파의 무인들이 전부 뺨에 십자 흉터를 짊어지는 그날까지.
“우리도 이동하자.”
“어. 그런데 어디로 가지?”
“일단 부상을 돌볼 수 있는 데로.”
적하조가 하염없이 울고 있던 독귀를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말 없는 시체들만 남은 하오문의 약방은 거대한 무덤이 된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