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거래
“그 팔다리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날 죽이겠다고? 웃기지 마. 사형은 지금 걸음마조차 할 수 없어.”
지강백은 굳은 팔다리를 대신해서 이를 씹었다.
“죽이……겠다. 죽여서……”
“현실을 받아들여. 복수를 하겠다면 최소한 두 발로 걸을 수는 있어야지.”
용천휘의 눈이 면포에 가려져 있는 지강백의 왼쪽 눈을 향했다.
아직은 누구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복수라는 것. 대상이 틀렸어. 나는 사부님을 죽이지 않았어. 사부님을 죽인 건 지월이야. 사형은 내가 아니라 지월을 죽여야 해.”
지강백은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핏물을 내뱉었다.
“뭐라는 거냐! 네가 아니었다면 그럴 일은 없었어! 네가 마교가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과연 그럴까?”
용천휘가 지강백의 말을 가로챘다.
“그 날 지월의 손에 죽은 자는 사부님뿐만이 아니야. 그 자들이 모두 마교여서 죽었다고 생각해? 지월은 남궁진현의 팔을 잘랐지. 남궁진현도 마교였어?”
지강백의 입술 새로 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개소리…… 마라. 모든 것은 너로 시작되었어. 네가 마교였기 때문에,”
“지월은 내가 대명천교의 다음 대 주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내가 종남파를 그와 접촉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것도, 그래서 종남파는 마교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도.”
용천휘의 말은 지강백뿐 아니라 모두를 놀라게 했다.
무림맹주가 된 지월이 지금 보이는 행보와는 거리가 너무도 먼 탓이었다.
작금의 강호는 마교라는 이름이 스쳐가기만 했어도 무림맹의 척살대가 뜬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중이었다.
“뭐라고?”
“천하무도회가 있기 전날. 지월과 거래를 했지. 교에는 내게 반발하는 세력이 있어. 나는 그자를 이매라 불러 왔어. 유령처럼 도무지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자라서. 나는 이매가 천하무도회에 숨어들었다는 증거를 찾았고, 그자를 없애기 위해 지월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그 대가로 다음 대의 중원행은 없을 것이라 했지. 이게 지월과 나의 거래였어.”
적하조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저어 댔다.
“그럼 무림맹 같은 건 만들어질 필요도 없었다는 소린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용천휘는 지강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차분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거래가 성사되기 전, 이매가 지월을 죽였어.”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믿기 어려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뭐?”
“으음? 소림 방장이 죽었다는 소리는 내 못 들었는데? 그건 또 무슨 흰소리냐?”
“그리고 지월의 몸을 차지했지. 그다음부터 모든 일이 시작된 거야.”
“뭐시라!”
쾅!
독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엎어지며 새장을 넘어트렸다. 놀란 까마귀가 까악까악 짖어 댔고 독귀는 평소처럼 달래는 게 아니라 이놈의 마누라가 눈치가 왜 이렇게 없냐며 화를 냈다.
적하조는 제발 그놈의 새 좀 조용히 시키라 말하다 기어코 한 대 얻어맞았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죽은 사람 몸을 차지한다는 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맞아! 그건 강시보다 더 터무니없잖아!”
용천휘는 계속 떠들어 대는 독귀나 적하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믿게 만들어야 할 사람은 지강백 하나였다.
“내 말이 거짓인 것 같아?”
“네가 언제 진실을 말한 적은 있었나?”
“대명천교의 힘은 단순히 무학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야. 죽은 사람의 몸을 뒤집어쓰는 술법도 있어. 내게 사형의 무공을 빌려 쓸 수 있게 하는 술법이 있듯이.”
우당탕!
이번에는 적하조가 뒤로 넘어졌다.
“앗……! 그럼 그게 그거구나! 그때, 무공을 쓸 줄 모른다더니 거짓말이었던 거! 그게 무공을 훔쳐 쓰는 거였어? 아니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독귀가 적하조의 멱살을 붙들고 앞뒤로 흔들어 댔다.
“응? 무공을 훔쳐 써? 그게 뭐냐! 너 혼자만 뭘 본 게야!”
“아니, 영감. 일단 이거나 좀 놓으시고……”
까마귀가 깍깍 울어 대는 통에 독귀는 어쩔 수 없이 적하조를 놓아주었다.
“내 무공을…… 훔쳐 썼다고?”
“내내 말했듯이, 내 몸은 너무 엉망이라 무공을 익힐 수 없으니까.”
“그럼 그때……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가…….”
“맞아. 적혈대법이 이어지는 동안 피술자는 의식을 잃게 돼.”
“……그렇다면 너는 처음부터 내 무공을 훔칠 목적으로 종남파의 제자가 된 것이냐?”
그 질문에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용천휘는 시큼한 냄새가 날 것 같은 표정으로 지강백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 내 목적은 처음부터 지월이었어. 나는 지월을 만날 때까지만 종남파를 이용하려고 했어.”
“…….”
지강백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천휘는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백사준이 그가 마교임을 지목했을 때, 지강백이 달려와 그를 등 뒤로 감췄던 그 순간의 기분을.
그때 처음으로 애초에 이렇게 엮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유감이었다. 진심으로.
용천휘는 모든 것을 우습게 여겼다.
그에게는 종남파에 신분을 숨기고 입문한 것이 반쯤은 중원 유람과 같았다. 정작 적혈마 대상으로서 지월을 확인하는 것은 조금 까다롭겠다 싶었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가진 힘을 믿었다. 파루나와 삼좌위를, 중원 따위 언제든 가볍게 짓밟을 수 있는 교의 힘과 제 수라안을.
그러나 그는 삼좌위를 잃었고 파루나는 그를 배신했다. 교 안에 얼마나 많은 배신자가 자리하고 있는지 그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무공을 쓸 수 없는 반쪽의 몸으로 태어난 그는 자신이 허락받은 유일한 권능인 수라안마저 반을 잃었다.
자신이 유람하듯 교를 떠나 있는 동안 이매는 강호에 파고들어 저보다 한발 앞서 지월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무림맹이라는 제법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그를 쥐처럼 독 안으로 몰아넣었다.
이 모든 것을 불러온 것은 그의 교만이었다.
진심으로 유감이었다.
제 교만함이 불러온 대가를, 지강백이 함께 걸머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니 생각해 봐. 사형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복수해야 하는지를. 지월이 살아 있었다면 이 꼴이 날 일은 없었어. 사부님이 돌아가실 일도, 사형이 무림공적이 될 일도 없었겠지. 종남파는 건재했을 거야. 사형이 천하무도회에서 성과를 냈다면 그보다 더 괜찮았겠지. 나는 내 손으로 이매를 처리한 다음 누구보다 빨리 천하무도회를 떠났을 거야. 아무런 사고도, 피해도 남기지 않고서.”
그렇게 됐다면 좋았을 것이다.
파루나의 배신을 진작 알아챌 수 있었다면, 그래서 지월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그들은 지금 독귀의 약방에 숨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 사형은 나를 죽여선 안 돼. 내가 죽으면 지월이 지월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줄 자가 없을 테니까. 종남파는 영원히 마교로서 남겠지. 사형은, 종남파의 마지막 제자로서 그건 두고 볼 수 없을 테고.”
용천휘는 그렇게 빚을 갚고 싶었다.
“제대로 된 복수를 해, 사형. 내가 사형을 돕겠어.”
지강백이 오른 눈을 치켜떴다.
“왜?”
“나 역시 이매를 처리해야 하니까. 사형의 복수는 곧 나의 복수야.”
지강백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어서 얼굴 전체가 일그러졌다.
“웃기지…… 마라. 내 복수는 절대 네 복수와 같지 않아.”
“사형……”
“그게 어떻게 같을 수 있겠나! 모두가 그랬어. 너를 믿지 말라고! 네가 마교일 것이라고 했지. 나는 어리석게도, 사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말들을 외면했다. 나는 너를 믿었어. 내게 진실을 말해 주던 사람들은 타인이었고, 너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네가 내 사제라 믿었다. 하지만 네게 사문은 고작 지월 대사를 만나기 위한, 고작 그뿐인, 아무것도 아닌 수단에 불과했던 거야!”
“…….”
“누구보다도 빨리 천하무도회를 떠났을 거라고? 그래,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거였어.”
한 자 한 자 씹듯이 내뱉는 지강백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용천휘는 그 작은 소리가 제 고막을 긁을 때마다 짧은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내게는 목숨보다 귀한 것이지. 나의 복수는 절대 네 복수가 될 수 없다.”
지강백의 눈에서 붉은 기가 섞인 눈물이 한 줄기 느리게 흘러내렸다.
아마도 무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지강백의 눈물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한 줌의 잿더미로 사라진 사문 전체의 무게를 품은 눈물이었다.
그래서 터무니없이 느렸다. 느린 만큼 그것을 봐야 하는 시간도 길었다. 촌음의 시간이 억겁과 같다는 무간도에 떨어진 기분이 이럴 것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그 느리고 무거운 말에는 어떠한 여지도 없었다.
지강백은 반드시 용천휘를 죽일 것이다. 용천휘는 그 점을 타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지강백에게 진 빚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지금 지강백의 눈물이 무거운 것처럼.
“그래……? 꼭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그래.”
“그래, 그렇군.”
문제는 자신이 그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알려 주지. 사형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이렇게 말한 용천휘가 몸을 기울였다.
그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철썩!
지강백의 얼굴이 훌쩍 돌아갔다. 용천휘가 그를 후려친 것이다.
“으악! 무슨 짓이야!”
적하조가 펄쩍 날뛰었다. 그가 용천휘를 향해 달려들려는 것을, 독귀가 새장으로 가로막아 움직임을 막았다.
“영감!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왜 나를 말려요! 저놈이 지금 내 친구를 때렸는데!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친구를!”
그게 이유였다.
독귀가 대답 대신 눈을 부라리며 적하조가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다.
철썩!
용천휘가 반대편을 한 번 더 후려쳤다.
저쪽으로 돌아갔던 얼굴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입가가 찢어졌다. 갓 만들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지강백의 시선이 포효하듯 거칠어졌다.
“나를 어떻게 죽이려고?”
“…….”
“지금, 이 꼴로 말이야. 나는 이 자리에서 사형을 죽일 수 있어. 사형이 몸이 다 나아서 날 죽이겠다는 순진한 망상이나 하는 동안.”
용천휘가 지강백의 얼굴을 가린 면포를 잡아 뜯었다.
두툼한 면포 뭉치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왼쪽 얼굴이 드러났다.
“굳어 버린 팔다리가 기적처럼 나을 것 같아? 내가 장담하지. 미룡혈이 상한 게 아니라면 사형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내 약사일 테고, 그건 중원의 어떤 의원도 손댈 수 없어. 그건 독술도 의술도 아니야. 그 모든 것에 주술을 더한 것이지.”
용천휘의 등 뒤에서 독귀가 입을 벙긋거렸다. 적하조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복수가 같지 않다고? 그런 게 정 걸린다면 거래라고 생각해. 어차피 나도 지월을 없애야 해. 나는 사형에게 도움을 주고, 사형은 그 도움으로 지월을 없애는 거지. 그게 그렇게 어려워? 왜? 사부님도 하셨던 일인데.”
“……!”
사부님이라는 단어에 지강백이 즉시 반응했다. 용천휘는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기어코 살의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사부님이 내 말을 다 믿어서 나를 제자로 들였던 거라고 생각해? 천만에. 사부님은 거래라고 생각했던 거야. 빈 쌀독을 채울 돈과, 사형이 먹을 대환단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한 거래.”
적하조가 “뭐라고, 대환단? 설마 그 대환단?”이라고 소리쳤고 독귀는 “왜 마교 놈이 대환단을 가지고 있는 게냐. 말세야, 말세. 까악.”이라며 짧은 의견을 피력했다.
“사형의 말대로라면 사문의 명예가 사부에게는 귀하지 않았던 건가? 아니, 그 전에. 목숨보다 귀한 사문이라고 했지. 그 사문에서 유일하게 남은 제자가 사형이야. 그런데 사형은 아무것도 아닌 내 목숨의 취하기 위해 사문이 끝내 마교로 남든 말든 나 몰라라 하겠다는 건가? 그것참 대단한 사문이로군.”
이제껏 침묵하던 지강백의 입술이 달싹댔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네가 감히 지껄일 게 아니……”
“그렇다면 좋아. 그까짓 사문이라면 버려버려. 생각해 보니 사형이 팔다리가 멀쩡해진다고 해도 지월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쩌면 사형도 그게 무서워 진짜 적이 누군지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함부로 말하지 마!”
“그렇게 소리쳐 봤자 내 입은 못 막아. 사형은 지금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나는,”
용천휘가 지강백의 목을 움켜쥐었다.
“사형처럼 머저리가 아니니까 사형이 날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사형을 죽여 주겠어.”
용천휘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들썩거렸다.
“으악, 이젠 못 참아! 이 자식, 그만해! 영감! 나 말리지 마요!”
이렇게 외친 적하조가 새장을 밀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 자식! 그 손 놔!”
적하조가 품 안에서 날이 잘 선 비도를 꺼내 들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적하조가 아무리 사람 죽이는데 소질이 없다고 해도 이 거리에, 용천휘라는 표적이라면 죽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 마.”
적하조를 말린 것은 독귀도, 용천휘도 아니었다.
지강백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아직도 상처가 짙게 들러붙은 입술로 그가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지강백이 뱉어낸 숨은 곧장 용천휘에게 닿았다. 아무것도 아닐 그 감촉은 화상처럼 피부 위를 괴롭게 만들었다.
“거래……하겠다.”
“좋아.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용천휘가 손을 놓았다.
지강백이 털썩,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강백의 몸이 부서진 죽간처럼 비틀린 채 바닥에 처박혔다.
“이런, 괜찮아?”
적하조가 달려와 그를 일으키려 들었다. 그러자 지강백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어, 응? 하지만……”
적하조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손을 뗐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비죽거렸다.
지강백은 적하조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친절은 필요 없었다. 그것은 그를 무르게 만들 터였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까지,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지강백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용천휘를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다른 눈빛이었다. 고통과 분노가 파도가 되어 몰아치던 눈은 이제 고요했다.
그새 두꺼운 벽이 하나 생겨나 그 안에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린 것처럼.
“나를 낫게 해라. 거래한 대로.”
용천휘는 지강백을 일으키는 대신, 그 앞에 몸을 구부렸다.
용천휘의 손이 지강백의 왼쪽 눈을 덮었다.
“일단 이 눈부터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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