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81화 (81/346)

제81화 대면

―상공

꿀처럼 상냥한 음성이 저를 불렀다.

지강백은 고개를 돌렸다.

―채 소저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무얼 하고 계시는지요?

―아무것도요

여인의 미소가 진해졌다.

―예. 잘하고 계십니다. 계속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지강백이 여인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는 “예.” 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늘 제 곁에 있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슬퍼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한마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저……는,

―상공?

―……누굽니까

지강백의 말에 여인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러지 말고 알려 주십시오. 저는 누굽니까. 저는 대체,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 강백아!

지강백이 홱 등을 돌렸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그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예서 뭣하고 있는 게냐! 네 품에 그것을 품고도 속 편히 있는 게냐!

―……예?

지강백이 놀라 제 품 안을 뒤졌다.

딱딱한 것과 부들부들한 것이 만져졌다. 딱딱한 것은 목패였고 부들부들한 것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토시였다.

―아……?

토시를 손에 쥐자 눈앞에 턱수염이 북슬대는 장한이 나타났다.

―그거 내 거요, 큰형님.

―?

―이리 내시오. 보아하니 큰형님은 그게 필요 없으시겠소.

―…….

―나중에 보자 했으면 싸게 만나러 와야 할 게 아니요. 왜 예서 뭉그적대고 있는 게요?

장한은 성큼성큼 걸어와 지강백에게서 토시를 확 낚아챘다. 지강백은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버텼다.

―큰형님!

장한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고함 소리와 함께 장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일그러지는 게 아니었다. 일그러지다 못해 사그라졌다. 장한은 한 줌의 붉은 모래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아…… 안 돼!

지강백은 허공을 향해 손발을 허우적댔다.

―상공!

하얀 여인이 엄한 얼굴로 지강백을 다그쳤다. 그녀가 저를 똑바로 쳐다보자 어찌 된 일인지 손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지강백은 꽁꽁 묶인 팔다리가 고통스러워 소리를 쳤다.

―저를 놓으십시오! 저는 ……합니다!

―무얼 하신단 말씀입니까? 상공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저는 ……해야 합니다!

―하실 수 없습니다.

팔다리가 돌이라도 매단 듯 점점 묵직해졌다. 계속 그렇게 바닥 없는 곳으로 가라앉아 가는 듯했다.

―저는 복수해야 합니다!

지강백이 안간힘을 쥐어짜 외쳤다.

여인이 그를 보며 싸늘히 웃었다.

―복수요? 과연 하실 수 있겠습니까?

―……?

―팔다리도 없이 어찌 복수를 한단 말입니까?

―……!

지강백이 제 사지를 살폈다. 팔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으아아아아!

지강백이 비명을 질렀다.

그조차도 돌을 매달아 저 차고 깊은 강물 속에 가라앉아 갔다.

―으아아아아아아!

지강백은 가라앉아 가는 몸을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안 돼. 여기서 가라앉을 수는 없어.

복수해야 한다.

사부님의 복수를. 아우들의 복수를.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나다. 내가 마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마교가 된 것은 그가…….

“개자식! 죽여 버릴 테다!”

지강백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날 것처럼 앞으로 퉁겼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곧 균형을 잃고 다시 침상 위로 쓰러졌다.

“……읏!”

그가 혀를 깨무는 동안 주변에서는 귀에 익은 음성들이 들려왔다.

“와! 깼다, 깼어! 정신을 차렸어!”

“것 봐라, 이놈아! 내 반드시 깨운다 하지 않았냐, 까악! 며칠만 기다리면 될 것을 그새를 못 참고 이 늙은 몸을 그리 닦달을 해 대고…… 쯧쯧. 이 어르신이 왜 독공인지 이제 알겠냐, 까악.”

“이봐, 친구. 눈 좀 떠 봐. 괜찮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응?”

지강백은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걱정이 가득한 앳된 얼굴이 오른 눈에 들어왔다. 살수 주제에 피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던 희한한 인물이었다는 게 기억났다. 머리 위로 화려한 보라색 깃털을 꽂은 기괴한 노인의 모습도 보였다.

살막의 살수와 하오문의 독귀였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조합에 지강백이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어디지?”

“여긴 독귀 영감의 약방이야. 정신이 들어? 내 이름! 내 이름 기억나?”

지강백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하조가 즉각 고개를 돌려 독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기억 못 한다잖아요! 그렇게 큰 소리 탕탕 치더니! 그 망각독이라는 거 한 방울도 못 없앤 거 아냐?”

“새파란 어린 게 뭐라는 게냐, 까악! 아, 멀쩡히 깨어난 것을 보고도 그런 소릴 하는 게야!”

“깨어나면 뭐해요? 기억이 없는데! 날 기억 못 한다잖아!”

지지 않고 서로 삿대질을 해 대는 두 사람은 갓 깨어난 의식을 피곤하게 했다.

“너를 기억 못 한다고는 안 했어. 네 이름을 모르는 것뿐이다.”

지강백의 말에 두 사람이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정말이야? 그럼 다 기억나?”

“기억나…… 아니, 잘 모르겠다.”

지강백은 고개를 돌려 혼란스러운 얼굴로 독귀를 응시했다.

“제가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망각독이란 놈에 절어서 반 시체가 된 것을 내가 살렸지. 아무렴. 이 어르신께서 못 다룰 독이 있을 리가 없지. 어흠.”

“망각독이라니요?”

“거 아주 지독한 놈이지 뭐냐.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 놨지 뭐냐. 네놈은 이 어르신께 아흔아홉 번 절을 해야 할 것이다, 까악.”

“제가 왜 망각독에 당한 겁니까?”

“음?”

뿌듯해하는 얼굴로 한창 어깨를 움찔움찔대던 독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야 그것까진 모르겠다만. 그건 널 업고 온 놈이 알지 않겠냐?”

“업고 왔다니요?”

지강백이 침상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게 누군데 저를…….”

일어서려던 지강백이 동작을 멈췄다. 사실 멈추지 않아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팔다리가 잘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지강백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이번에는 거뭇한 절망의 그림자가 번져 나갔다.

“제가…… 어떻게 된 겁니까? 팔다리가 없어진 겁니까?”

“아, 그게……”

독귀가 무어라 하려는 것을 적하조가 냉큼 끼어들었다.

“아냐! 멀쩡해! 제대로 붙어 있어! 걱정하지 마!”

“그런……데?”

“그냥 잠깐 마비가 온 거래. 독귀 영감이 아직 그건 못 찾아냈어. 다른 용한 의원을 찾으면 낫게 할 수 있을 거야.”

“이놈이 지금 무슨 흰소리를 씨불이는 게냐, 까악!”

퍽!

독귀가 사정없이 적하조의 등짝을 내리쳤다.

“윽…… 이 영감이!”

“독이 약이고 약이 곧 독이니라! 중원 천지에 이 어르신보다 더 나은 의원이 어디 있다고 그딴 소리를 하는 게야, 까악!”

“아니, 그럼 빨리 낫게 하던가!”

“까악! 죽어라, 이놈!”

독귀가 깃털이 잔뜩 달린 팔을 휘저었다. 적하조가 입과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은 “진실을 말하는 내 입을 독으로 위협할 수는 없다!” 고 외치는 중이었지만 하오문의 독귀를 맨몸으로 맞서기에는 자신이 역부족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 할 말 없으니까 힘으로…….”

저만치 물러난 적하조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독귀가 지강백을 딱하게 바라보며 입을 뗐다.

“이 어르신이 애쓰는 중이다. 좀 기다려 봐라. 미리 겁먹지 말고.”

“다시 움직일 수는 있는 겁니까?”

“아, 알아본다잖냐. 그놈의 망각독하고 씨름하느라 사흘 내내 잠도 못 잤단 말이다! 뭘 그래 성급히 보채고 난리냐!”

“저는,”

지강백은 속에서 울컥 치솟는 것을 삼키느라 잠시 말을 끊었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분명 그는 숭산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앞을 막아선 것은 황보세가였다. 어쩐지 연민을 드러내던 황보세가의 가주가 투항을 권유했던 것이 생각났다.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이었다.

일단 그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거기서 죽는다면 모든 게 끝일뿐이었으니.

하지만 그 자리에서 투항한다는 것은, 스스로 마교라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품은 장문령부가 마치 제 심장을 뽑아낸 것처럼 울컥울컥 피를 뿜어내는 듯했다.

그것은 사부의 심장이었고, 사제들의 심장이었다. 지강백은 단 한 순간이라도 마교라는 오해를 묵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덟을 죽이고, 그리고…… 그리고 정신을 잃었……”

팔이 부러졌다. 대퇴부에 칼이 꽂혀 있었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러나 자신은 분명히 칼을 휘둘렀다. 칼을 휘둘러 목을 잘라냈다. 쓰러질지언정 움직이고 있었다.

“제가 왜 이렇게 된 겁니까!”

그리고 그는 계속 움직여야 했다.

멈춰서는 안 되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숭산을 벗어나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용천휘를 찾아야 했다.

그 모든 오해를, 죽음을 불러왔던 장본인을.

“그거야 널 업고 온 놈이 알지 않겠냐?”

지강백이 소리쳤다.

“놈이 누굽니까!”

“아, 그게…….”

독귀가 막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단단히 닫혀 있던 문 뒤에서 굳은 듯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달칵, 문이 열리고 용천휘가 들어섰다.

“그건 내 약사야.”

“……!”

눈이 크게 벌어졌다. 두툼한 면포에 가려진 왼쪽 눈의 사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눈 하나가 사라진 다른 눈의 몫까지 다하려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절박해 보였다.

“그 여자가 사형을 데리고 도망쳤어. 숭산에서.”

“…….”

“그리고 망각독을 써서 사형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용천휘는 지강백의 침묵이 만들어 내는 숨 막히는 긴장 위를 걸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슷.

마침내 걸음이 멎었다.

눈이 똑바로 마주치는 위치에 선 용천휘의 뺨이 희미하게 비틀렸다.

“유감이야, 사형.”

지강백은 이전에도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

용천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같은 말을 했다.

유감이라고. 배신인지 사과인지 모를 말을.

“으아아!”

지강백이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휘익!

지강백이 용천휘를 향해 오른팔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칼이라도 들려 있는 것처럼 살기로 벼려진 동작이었다.

* * *

“윽!”

쿵!

그러나 지강백의 오른팔은 용천휘를 베지 못했다. 그를 잡지 못했으며 그에게 닿지도 못했다.

지강백은 허무하게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엇! 괜찮아?”

적하조가 날듯이 달려와 지강백을 붙들었다.

지강백은 괜찮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움직임을 보였던 팔이 경련을 일으키며 제멋대로 비틀리고 있었다.

“으으, 이거 왜 이래! 영감님!”

독귀가 다가와 잔소리를 했다.

“냉큼 들어서 침상 위로 옮기지 않고 뭐하냐!”

“알았어요. 그런데 왜 이러는 건데요, 예? 이봐, 친구. 괜찮아, 응?”

적하조가 지강백을 들어 침상에 눕혔다.

독귀가 급한 대로 지강백의 곡지혈을 비롯한 몇 군데 혈을 짚었다. 뒤틀림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그동안에도 지강백은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시선을 칼로 만들 수 없다는 게 원통할 것이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괴물이 있다고 하면 지강백은 기꺼이 모든 것을 바쳐 그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네가 마교였어! 네가!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던 네가! 내가 널 믿은 대가로 사부님이…… 컥!”

팔다리가 묶인 노기는 울혈이 되었다.

지강백이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갑자기 단전이 들썩이며 온몸의 기혈이 들끓었다.

지강백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는 아직 흡수되지 못한 대환단 세 알의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진작 다스렸어야 될 힘이 그저 넘실대고만 있으니 사소한 충격에도 몸이 거세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독귀가 지강백의 등을 탕탕 두드려 주었다.

“아, 마교 놈이야 어차피 목숨 건지긴 글렀다. 지금 중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안다면 저건 그냥 내버려 둬도 알아서 육편이 될 게야. 지금은 일단 몸 생각부터 하는 게 어떻겠냐? 이러다간 네놈 창자가 먼저 끊어지겠다.”

독귀가 용천휘의 정체를 알고도 지강백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그는 강호의 이인(異人)이었다. 무림맹이 만들어지고 하오문도 맹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하오문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온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맹의 주살첩에 신경을 쓸 까닭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오룡독이면 마교가 아니라 마교의 할아버지가 와도 그러고마 했을 독귀였다.

적하조가 안절부절못하며 독귀를 거들었다.

“응, 응. 그렇게 해. 지금 이 몸으로 뭘 하겠다고. 일단은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잖아? 독귀 영감 말대로 저놈은 알아서 죽을 거야.”

그 말에 용천휘는 이렇게 반응했다.

“다행이군.”

독기가 입술을 비죽이며 되물었다.

“뭐가 다행이라는 게냐?”

“미룡혈이 상해 마비가 된 게 아니라는 소리니까.”

“음?”

“오른팔. 사형은 분명히 오른팔을 움직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독귀가 새삼스럽다는 듯 지강백의 팔을 붙잡아 몇 군데 혈도를 눌러보았다.

“으음.”

독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좀 알겠어, 영감?”

적하조가 독귀를 채근했다. 독귀는 눈매를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이놈아.”

“하오문의 약방씩이나 꿰차고 있으면서 뭐 그래?”

“아, 무슨 놈의 수법인지 감도 안 오니 그런 게 아니냐! 단전도 멀쩡하고! 어디 끊어진 데도 없고! 뼈다귀도 잘 아물었는데! 피가 깨끗한 걸 보면 독도 아니고! 대체 왜 몸이 굳은 게야! 아까 어떻게든 움직인 걸 보면 아예 굳은 것 같지도 않다만!”

독귀의 말을 용천휘가 받았다.

“알아낼 방법은 있어.”

“뭔 놈의 방법이냐?”

반색하는 독귀를 향해 용천휘가 말했다.

“사형이 운기조식을 하고 그걸 내가 보는 것이다. 흐름에 이상이 있다면 내 눈에 보이겠지.”

“뭬야? 네 눈은 뭐라도 있냐? 내 눈에 안 보이는 게 네놈한테는 보이게?”

“내 눈은 다르다.”

말을 하는 동안 수라안이 발현되었다. 한쪽 눈만 선명한 핏빛으로 붉어진 용천휘를 보며 독귀가 입을 쩍 벌렸다.

적하조는 이미 두 번째인 탓에 독귀보다는 조금 덜 놀랐다.

“허…… 허허. 그건 또 뭐냐? 마교의 사술인 게냐?”

“흐름을 보는 눈이다.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독귀가 이를 갈았다.

“세상천지에 왜 그딴 게 있는 거야! 그러니까 마교 놈들이 올 때마다 중원 땅을 그래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게지! 이런 괴물딱지 같은 놈들!”

“안심해라. 이 눈은 오직 한 명에게만 허락된 것이니까.”

“아, 그러냐? 마교라고 해서 다 괴물딱지는 아니라는 소리렷다. 그럼 네놈만 없애면 되겠구나. 일단 저놈부터 살려놓은 다음에 말이지.”

독귀가 신이 난 표정으로 지강백의 어깨를 붙들어 세웠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간만에 재미난 일을 찾아 기분이 몹시 좋은 상태였다.

망각독이라는, 이제껏 들어 본 적도 없는 새 독을 알게 됐으며 그 해독제도 제 손으로 만들어 냈다.

그는 독에 미친 인간이었다. 오죽하면 독을 가업으로 삼는 집안에서도 저놈은 감당을 못하겠다며 쫓아냈을 정도였다. 독이라면 전생의 마누라도 갖다 팔 인간이 그였다.

거기에 오룡독까지 약조를 받았으니 세상천지를 얻은 기분이었다.

“들었냐, 아가? 운기조식을 해야 한단다. 어서 해치우고 오룡독을 받아 내자꾸나.”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말투까지 부드러워졌다.

지강백이 독귀의 어깨 너머로 용천휘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기혈이 안정을 찾지 못한 탓에 입가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다.

“필요……없어.”

입을 열 때마다 피가 튀었다.

“네놈 도움…… 같은 건, ……필요…… 없…… 너는 내가 죽여…… 쿨럭,”

“내가 한마디 하지, 사형.”

용천휘가 독귀를 밀치고 지강백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여전히 껍질이 까친 채 있는 손으로 지강백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접촉이 있자 지강백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가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바싹 들이댄 용천휘가 한 자 한 자, 끊어 내듯 또박또박 말했다.

“사형은 날 못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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