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80화 (80/346)

제80화 두 번째 조력

슷!

쿵!

열 번째 무인이 열 번째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적하조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이 모든 게 꿈인가 싶었다. 붉은 운무를 두른 용천휘는 거대한 날개가 달린 붉은 용처럼 보였다.

그는 꿈처럼 가볍고 허무하게, 현실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깨끗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열 개의 시체를 만들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나 짧은 시간이었다.

“마…… 말도 안……”

적하조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용천휘가 적에게서 빼앗아 든 칼을 던지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으욱!”

그가 갑자기 몸을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엇! 왜 그래!”

적하조가 달려가 용천휘를 부축했다. 용천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새하얘진 입가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내상을 입은 거야? 대체 언제?”

“그런 거…… 아냐.”

“그럼?”

“지병 같은 거야.”

용천휘는 눈을 감고 몇 번 호흡을 골랐다.

날개처럼 그를 품고 있던 붉은 기운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좀 기다려. 시간이 지나면 차츰 나아지니까.”

용천휘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으응.”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적하조의 눈에는 벌써 호기심이 걱정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 뭐 하나 물어도 돼?”

“안 돼.”

“……그러지 말고.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지금 우리는 생사의 고락을 함께하고 있잖아. 나한테 못 해 줄 말이 뭐 있어?”

“네가 아는 게 적을수록 좋아.”

“어째서! 나는 이미 너희를 돕기로 결정한 시점에서 내 목숨을 건 거라고!”

적하조가 씩씩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음성을 낮춰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응? 알려 주면 안 돼? 나 궁금한 건 완전 못 참는단 말이야.”

용천휘가 눈을 떴다.

“가자.”

“……뭐? 좀 갑작스럽지 않아? 벌써 다 나은 거야? 이렇게 빨리?”

사실을 얘기하자면 다 낫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적혈혼은 없었다. 그 말은 적혈대법을 쓸 때마다 그가 감당해야 하는 반소효응을 막아 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였다.

달포 간의 도주로 인해 몸은 더욱 상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언제까지 적혈대법을 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무림맹이 그의 목을 치는 것보다 빨리,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미적대고 있을수록 위험해진다.”

용천휘는 이를 꾹 물고 몸을 일으켰다.

“앗, 내가 도와줄게.”

적하조가 다급히 용천휘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왜 그래?”

용천휘의 손바닥이 문제였다. 껍질이 까지고 마디에는 물집이 잡혀 있는 손. 용천휘의 손을 잡은 적하조의 손에도 피가 묻어 나왔다.

“아…… 수레를 끌어서 그렇구나.”

용천휘가 손을 잡아 뺐다.

“가자.”

“뭐? 내가 끌게. 그 손으로 어쩌겠단 거야.”

“아니. 너는 어쨌거나 살수잖아. 주변을 경계해.”

적하조는 어쨌거나 살수라는 말에 욱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으로 말싸움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용천휘가 두말없이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너……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아.”

수레를 끄느라 힘을 주던 용천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적하조가 그 뒤를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세상에 아쉬운 거 하나 없이 저 혼자 잘났다 하는 인간형 아니었어? 그래서 진짜 재수 없었는데. 지금은 막 허름한 옷도 그냥 입고, 또…….”

그때는 분명히 사형이 곤란해지는 걸 구경하고 싶다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왜…….

적하조의 중얼거림은 용천휘가 이렇게 말하면서 끝이 낫다.

“주변, 경계해. 긴장 늦추지 마. 사형과 내 목숨이 너한테 달렸어.”

“어…… 젠장.”

적하조가 투덜대며 청력과 안력을 돋우었다.

그때와는 아주 많이 달라 보이는 용천휘의 등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 * *

“여기야.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끝에서 두 번째 집이라고 했어.”

“…….”

적하조와 용천휘는 산양과 순양을 잇는 관도에 자리한 작은 현으로 들어섰다.

작다고는 해도 인근에서는 제일 큰 약전이 열리는 통에 오가는 사람이 많은 활발한 곳이었다.

다시 섬서로 오겠다고 주장한 용천휘가 적하조에게 부탁한 것은 하오문의 약방이 위치한 곳이었다.

용천휘는 이 근방 어딘가에 하오문의 약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설련실을 대신해 공청석유가 들어간 환단을 구해 온 지강백이 외상으로 사 왔다며 하오문을 언급했던 것이다.

하오문의 약방이라면 설련실이 아닌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용천휘는, 하오문의 약방을 맡고 있는 독귀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용천휘가 말이 없자 적하조가 덧붙였다.

“여기 맞아! 확실해! 살막의 정보력이 보증하는 곳이야!”

“알아.”

“응?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통로를 찾느라.”

뒷골목 아주 깊은 곳에, 간판 하나 없이 있는 하오문의 약방은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미로 같았다.

골목 초입부터 하오문의 사성진이 두 겹으로 깔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적하조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댔다.

“통로?”

용천휘의 한쪽 눈이 붉어졌다.

“내 뒤를 따라와. 발 헛디디지 말고.”

“으응……? 왜 그러는데?”

“진이야.”

“응? 무공은 할 줄 모른다면서 진은 알아?”

용천휘는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다.

“우이 씨. 같이 가.”

적하조가 서둘러 용천휘의 발자국을 밟아 갔다.

진이 있다는 말에 긴장하며 조심스레 움직인 탓인지 미로 같은 골목길은 금방 끝이 났다.

“멈춰.”

용천휘가 어느 허름한 문 앞에 멈춰 섰다.

“응? 여기?”

적하조가 옹색하게 생긴 문고리를 잡았다.

“이거 열면 되나?”

“아직. 건드리지 마.”

적하조는 용천휘의 한쪽 눈이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것을 보았다.

“헉……! 그 눈은 또 뭐야?”

용천휘는 이번에도 그의 질문을 무시했다.

“문 전체가 기문진식이야.”

“뭐? 그걸 어떻게 알아?”

“탄구 있지?”

“그건 있지만…… 너 자꾸 대답 안 해 줄 거야?”

“던져.”

적하조가 입을 딱 벌렸다.

“하오문의 약방에 탄구를 던지자고? 미쳤어? 독귀는 성격이 엄청나게 나쁜 미친 인간이라던데!”

“방법이 없어.”

용천휘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너나 나나 지금 여기서 이 문을 열 재주는 없어. 부수는 수밖에.”

“독귀는 어쩔 건데! 그 미친 인간이 독이라도 풀면 어쩌라는 거야?”

“죽이진 않을 거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순 없잖아. 독귀는 지금 현재 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니라면 사형의 중독을 해결할 방도가 없어.”

“으…… 제길.”

적하조가 이를 갈면서도 품속을 뒤져 탄구를 꺼내 들었다.

“나도 모르겠다. 방도가 없다니 해야지. 뒤로 물러서.”

“문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너머로 던져. 그게 더 안전해.”

“젠장. 알겠어.”

그가 이를 질근 물고 탄구를 던져 냈다.

퍼엉!

문 안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까악, 까악 대는 성난 새의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우리 마누라 낮잠 자는데 탄구를 던지고 지랄인 게냐, 까악!”

쾅!

전체가 기문진식이나 다름없다던 문이 왈칵 열렸다.

노기충천한 독귀가 깃털을 매단 소매를 잔뜩 부풀리며 적하조와 용천휘를 향해 양팔을 휘둘렀다.

“이 미친놈들아! 고 야들야들한 모가질 내놓을 준비는 되어 있으렷다!”

“아, 아니 그게…….”

들입다 살기를 내뿜는 독귀의 모습에 겁을 먹은 탓인지, 아니면 독귀의 남다른 기괴한 모습에 놀란 게 우선이었던지 적하조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 어떻게 죽여 줄까? 응? 산 채로 살을 발라 육포로 만들어 주랴!”

적하조가 용천휘를 마구 곁눈질했다.

빨리 뭔가 좀 해 보라는 뜻이었다. 용천휘가 적절한 틈을 타 독귀 앞으로 나섰다.

“빚을 갚으러 왔다.”

독귀가 날개를 퍼덕이듯 양팔을 붕붕거렸다.

“빚? 네놈 낯짝은 오늘 처음 보는데 빚은 무슨 놈의 빚이란 말이냐!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목이나 내놔라, 까악!”

공력을 운용하자 독귀의 온몸에 매단 깃털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용천휘의 다음 말에 깃털은 다시 원래대로 가라앉았다.

“공공화단이라던데.”

“음?”

독귀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황금 새장 안에 든 까마귀가 까악, 하고 울었다.

“네놈이 설련실이 필요하다던 그 계집……은 아닌데?”

“내 사형이 외상을 졌다고 하더군. 나는 그 빚을 갚으러 왔다.”

“허……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독귀가 표정을 풀었다. 부풀던 살기도 은근슬쩍 가라앉았다.

“계집은 다 나았느냐? 물론 내 공공화단이면 효과가 부족할 리는 없겠다만. 아니, 그런데 왜 그놈이 안 온 게야? 내 분명 그놈에게 내준 건데.”

독귀가 서운한 듯 투덜대며 새장 안으로 손을 뻗어 까마귀를 어루만졌다. 까마귀가 푸드덕대며 독귀의 손등을 쪼았다. 독귀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눈썹 한 올 찡그리지 않았다.

“어이쿠, 마누라. 서운한가 보오. 젊은 놈이 이리 엉덩짝이 무거울 줄 내 알았나. 쯧쯧…… 뭐, 기왕 갚으러 왔다니 돈이나 내놔 봐라. 이백 냥이다. 에누리 없다.”

“돈은 없다.”

독귀가 당장 도끼눈을 떴다.

“뭬야, 이놈아? 지금 이 어르신을 두고 장난을 치냐?”

“대신 다른 것으로 치르지.”

“아, 어떤 건데 돈을 대신해?”

“오룡독.”

“……뭐어?”

독귀는 눈가의 주름살이 사라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적잖이 놀랐던지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게 말이 되는……? 응, 그렇다는 말이냐? 오룡독이라니…… 오, 오룡독이라니!”

적하조가 끼어들었다.

“그래, 오룡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건 근 백 년 이래 봤다는 인간이 아무도 없어! 오죽하면 이름이 오룡독이겠냐고. 용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가 모여야 만들어진다는 독이지. 물론 그럴 리는 없고 그렇게나 보기 힘들다는 소리야. 네가 아무리 천잠투의를 대여섯 벌씩 쟁여 두는 집안의 외동아들이라고 해도 오룡독은 안 돼! 그건 너무하잖아!”

독귀가 짜증을 부렸다.

“닥쳐라, 이놈! 어디 독귀 앞에서 독에 대해 더 아는 척 나서고 지랄인 게야, 까악!”

적하조가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틈을 얻은 용천휘가 말했다.

“그래. 흔하지 않은 물건이지. 그 값은 가늠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고작 이백 냥을 갚기 위해 오룡독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한 가지를 더해 셈을 맞추고자 한다.”

신기하게도 용천휘는 지금 이 순간 도무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적하조는 그래서 퍽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 용천휘는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인간이었으니까.

확실히 그는 달라졌다. 뭔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달라진 기분이었다.

“그…… 그게 뭔데?”

“내 사형을 멀쩡히 만들어 놓기를 바란다.”

“엥? 그놈이 어떻게 됐다는 소리냐?”

“해독제가 없는 독에 중독됐다. 해독은 독을 만들어 낸 장본인만 할 수 있어. 그러나 그대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허…….”

독귀는 혀를 찼지만 두 눈에는 이미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 자부하는데, 중원 땅에서 나보다 더 독을 잘 아는 인간은 없을 게다. 사람들이 괜히 나더러 독공이라 칭하는 게 아니지. 해독제가 없는 독이라? 흥, 그딴 게 이 독공 앞에 있을 것 같으냐!”

독귀가 새장 속의 새 머리를 쓰다듬으며 날이 섰던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더군다나 그놈이라면 우리 마누라가 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놈이니 지아비 체면에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오냐, 내 한번 힘을 써 보마. 놈은 어디에 갖다 뒀냐?”

용천휘가 이곳까지 끌고 온 수레를 가리켰다.

“여기 있다. 문을 열어다오.”

그렇게 지강백 일행은 하오문의 약방으로 들어섰다.

* * *

“하……!”

안으로 옮긴 지강백을 살핀 독귀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이놈이 왜 이렇게 됐어?”

지강백은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대신 감은 눈꺼풀이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전신은 끝도 없이 흐르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장 나쁜 것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지였다.

“이것도 독인 게냐?”

“미룡혈이 상했다고 들었다.”

“쯧쯧. 허리 아래가 망가진 모양이로군. 그런데 이놈이 왜 이런 꼴이 된 게야? 그때만 해도 말짱했잖느냐.”

독귀가 연신 혀를 찼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들어 맥문을 쥐어 본 독귀가 인상을 잔뜩 썼다.

“하. 이거야 원. 위아래로 꽉 막혔군. 단전이 몽땅 상한 게냐?”

독귀가 거침없이 손을 놀려 지강백의 단전을 짚어 보았다.

“응? 그건 또 아닌데? 단전이 왜 이렇게 커 있어? 이건 뭐 대환단을 세 알쯤 연달아 삼킨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어찌 된 게야?”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던 용천휘가 독귀의 앞으로 다가섰다.

“할 수 없나?”

독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용천휘를 흘겨보았다.

“이놈이 뭐라는 게야, 지금. 아 환자 방금 살폈다. 척 보면 척 답이 나올 병 같았으면 뭣 하러 예까지 왔느냐?”

“그대가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 성질 하고는. 뭐가 그리 급해서 보채고 지랄이야. 좀 기다려 봐라! 중원 땅에서 내가 모르는 독은 없으니.”

독귀의 말에 용천휘가 눈빛을 굳혔다.

“중원의 독이 아닌 것은 모르나?”

“음?”

“내 사형을 해한 것은 중원의 독이 아니다. 그런 경우라도 그대가 할 수 있겠나?”

“…….”

잠시 입을 다물고 찬찬히 용천휘의 얼굴을 살펴보던 독귀가 다시 입을 뗐다.

“중원의 것이 아니라면…… 마교겠구먼. 네놈들, 무림맹에서 뒤쫓는다는 그 마교 놈이렷다?”

용천휘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

적하조가 어쩔 줄 모르며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야, 이봐. 너무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 버리면 어떡……!”

이어지는 용천휘의 말이 적하조의 걱정을 툭 잘라 냈다.

“하지만 그대에게 오룡독을 약속한 사람이기도 하지.”

“……허, 배짱 하나는 마교답구나.”

독귀가 용천휘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두며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라, 마교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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