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이식
“으음…….”
채희유가 저녁거리와 함께 막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지강백이 낮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상공!”
채희유가 침상을 향해 달려갔다.
감은 눈꺼풀 안에서 동공이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독한 악몽이라도 꾸는 듯했다.
“아, 안…… 사, 사부님…… 안…… 개자식, 네가……! 으윽,”
성치 않은 팔다리가 허공을 휘저었다.
채희유가 지강백의 이마를 눌렀다.
“잊으세요. 기억해 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다 잊고 편해지세요.”
파스스…….
망각독이 스며들자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지강백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
“후우.”
채희유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녹색으로 변한 눈에는 아직도 긴장이 어려 있었다.
망각독이 지속되는 시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십칠 년간 쌓아온 정순한 내공이 독기에 상당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곧 기억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독을 더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강백에게 사용한 망각독의 양은 이미 아슬아슬했다. 양을 더 늘렸다간 의식을 잃는 게 아니라 아예 이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
채희유가 잠든 지강백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갈등이 표정 위에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기억을 되찾은 지강백이 어떻게 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이다.
지금 강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신이 그 혼란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숭산에서의 악몽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악몽은 지강백이 시체로 발견될 때까지 끝나지 않을 터였다.
“그건 안 돼.”
그는 이곳에 이대로 머물러야 했다.
자신이 새 몸을 얻을 때까지, 교가 새로운 주인을 맞아 중원의 이 모든 환란이 종식될 때까지, 무사히 살아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평생 망각독에 중도된 채 지내야 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평생 팔다리를 마음대로 쓸 수 없어도 괜찮았다.
그 무엇도 지강백이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상공을 위한 겁니다.”
채희유가 벽장을 뒤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침이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고 작은 이 침은 채희유의 손에 들리면 그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 팔다리를 못 쓰게 하는 것 정도는 쉬웠다.
채희유가 이불을 걷었다. 약과 면포로 곱게 싸놓은 상처투성이 몸이 드러났다.
채희유는 면포 위를 조심스레 쓸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상공이 어찌 되더라도 제가 항상 곁에서 보살펴드릴 테니까요.”
녹색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채희유는 다정한 손길로 지강백의 백해혈에 깊숙이 침을 꽂아 넣었다.
“으음…….”
지강백이 옅게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다.
“쉿. 조금만 참으세요.”
이어서 그 다정한 손이 비유혈과 위중혈, 그리고 미룡혈에 침을 박았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침은 아주 깊이 몸을 파고들어가 피부 위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뽑아낼 수 없을 것처럼.
* * *
탕!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막 마지막 침을 꽂아 넣은 채희유가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느닷없는 침입자를 경계하듯 녹색 눈이 짙어졌다.
“사형은 무사한가?”
“……!”
어느샌가 어두워진 문 밖에서 흰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그림자보다 더 창백한 얼굴을 한 용천휘였다.
“여, 여긴 어떻게…….”
그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단지 더럽고 헝클어진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개방도의 시체에서 벗겨낸 듯한 넝마조각을 걸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 넝마를 주워 입는 대신 원래 입고 있던 것들을 벗어던졌다.
세상 모든 것을 제 눈 아래로 보던, 그 매끄럽고 우아한 껍데기 같은 것을.
“고생을 좀 했지. 보다시피.”
“…….”
“그러나 네가 내 파루나인 이상 나는 결국 네 흔적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 또한 파루나의 운명이었다.
수라안의 주인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끊어질 운명이었다. 채희유는 그중 하나가 자신이 아닌 용천휘가 되길 바랐다.
그런데, 그 또한 살아남았다.
지긋지긋하게. 저 반쪽짜리 몸을 하고서도.
채희유는 심장에서부터 치솟는 독기를 억눌렀다. 그를 멀쩡히 살려 보낸 지월에게 화가 났다. 그토록 무능한 인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연 그를 계속 신뢰해도 되는 것일까.
조만간 교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이 시점에.
“후우…….”
채희유는 잘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을 다독여 거짓 안도를 지어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소림에서의 일이 실패한 것은 유감입니다만.”
“그래, 유감이지. 그래도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야. 나는 드디어 이매의 정체를 알아냈다.”
채희유의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그러셨습니까?”
그러나 용천휘는 그것을 보지 못한 듯 지강백을 살폈다.
“사형은…… 일단은 살아 있는 것 같군. 네 덕분이겠지. 수고했다.”
“예, 무사하십니다. 아마도 다시는 무공을 쓰실 수 없겠지만.”
용천휘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정말인가?”
“미룡혈이 크게 상했습니다. 어떻게든 해 보려 했지만…… 두 발로 걷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리고 두 팔도요.”
갓 지어낸 거짓말이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왔다.
“중원 땅에서 계속 이매를 상대하실 생각이라면 소야께서는 다른 적혈마를 찾으셔야 할 듯합니다.”
채희유는 제 거짓말이 마음에 들었다.
용천휘가 저 꼴로 기어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생각해 보면 지강백은 더더욱 엉망이 되어도 좋았다.
용천휘는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교는 저 멀리에 있었고, 이제껏 그가 어디에 있던 신속하게 교와 연결해 주던 삼좌위는 사라졌다. 삼좌위가 부리던 수족들은 자신이 전부 깨끗하게 해치워 버렸다.
지금 교에서는 용천휘가 중원에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이가 태반이었다.
그들은 소교주가 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준비가 안 된 소교주의 중원 난입이 용인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용천휘가 시험해 보고자 했던 적혈마는 천하제일기의 주인이었다.
이게 교의 안위에 얼마나 무모한 행위였는지는 용천휘가 가장 잘 알았다. 그가 자신의 중원행을 철저히 비밀로 부쳐 두었던 이유였다.
그런 고로 용천휘는 지금 철저히 혼자였다.
그가 교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직접 연락을 취해야 했고, 방법이 없는 이상 서역까지 제 발로 직접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체가 드러난 지금.
서역까지 가는 길은 결코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용천휘가 마지막으로 믿을 것은 예비 적혈마로 삼으려 했던 지강백 하나였다. 지강백이 살아남았고 그의 몸이 멀쩡하다고 한다면 용천휘는 지강백을 이용하려 들 수밖에 없었다.
적혈대법에는 시간이라는 커다란 제약이 있었지만, 파루나가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지강백을 실혼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강백은 텅 빈 껍데기가 되겠지만 용천휘는 그가 원하는 때 마음대로 지강백의 무공을 빌려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놔두지 않을 거야.’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 지강백을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눈은?”
“……예?”
그러나 적혈마가 망가진 사실에 대해 아쉬움이나 분노를 드러낼 것이라 예상했던 용천휘가 다른 것을 묻는 바람에 채희유가 잠시 당황했다.
“얼굴을 가려놨잖아. 눈도 상했냐 묻는 것이다.”
“아, 예. 왼쪽 눈으로는 보실 수 없습니다.”
“그래?”
용천휘가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가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지강백을 한동안 응시했다.
채희유는 그 의미를 몰라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필요가 없어진 적혈마에 용천휘가 관심을 둘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불안했다.
“방법이 전혀 없나? 조금도?”
채희유가 굳은 얼굴로 턱을 저었다.
“……예, 없습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어떤 방법이라도 괜찮아. 정말로 없는 건가?”
용천휘의 말이 계속될수록 채희유의 표정도 계속 딱딱해졌다.
“소야께서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미 적혈마로서 필요가 다한 분이십니다. 왜 그토록 마음을 쓰십니까?”
용천휘가 답했다. 채희유로서는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대답이었다.
“이건 내 빚이니까.”
“……예?”
“나는 사형에게 빚을 졌다.”
“……?”
용천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낯설었다.
“믿음을 빚졌고, 그리고 목숨을 빚졌지.”
불과 얼마 전까지 용천휘는 두 마리의 적혈마를 저울에 매달아 무게를 재고 있었다. 어느 쪽이 조금이라도 더 쓸모 있는지 따져 보겠다며.
“……죄송합니다만 무엇이 빚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나는 빚을 갚아야 한다.”
용천휘가 고개를 돌려 채희유를 똑바로 응시했다.
“사형과 내 눈을 나누겠다.”
“……예?”
채희유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수라안은 권능으로, 시력과는 무관히 발휘된다. 보이지 않는 눈에 수라안의 권능을 심는 것은 가능하겠지?”
채희유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건, 소야의…… 아니, 수라안은…… 그러니까 수라안이 한쪽만 남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능해.”
용천휘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수라안으로 세상을 보았다. 오른쪽 수라안은 흐름을, 왼쪽 수라안은 구조를 본다. 사형에게 한 눈을 주어도 내게는 여전히 흐름을 보는 눈이 남을 것이다.”
채희유는 비로소 통 알 수 없던 그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껍데기를 벗어던진 그는 남들처럼 제 속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이제껏 그의 거짓에 더 익숙했던 채희유가 그 솔직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수라안은 소야께서 소야임을 증명할 유일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제는 쓸모도 없어진 적혈마와 나누시겠다고요?”
“쓸모가 없어진 것은 상관없다. 그는 나의 사형이다.”
“천하무도회가 끝나면 적혈마의 필요도 끝난다 말씀하시던 분이 소야셨습니다.”
“그건 내가 사형에게 빚을 지기 전이었지.”
이렇게 말하는 용천휘의 머릿속에 지강백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배신하지 마라. 나는 널 믿을 테니.
―증명해. 네가 배신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라고! 그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살리겠다.
숭산에서 혈로를 뚫는 그 바늘 끝 같던 시간 내내 지강백의 말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죽음의 위기가 코앞으로 달려들 때마다 살아서 증명하라는 그 목소리가 오기를 불러왔다.
결국 지강백은 그를 살렸다.
그러니 그도 증명해야 했다.
앞으로는 배신하지 않겠다는 것을.
이미 저지른 배신의 대가는 온전히 지강백이 치렀다. 그는 사부와 사제들을 잃었다. 눈을 잃었으며 팔다리를 잃었다.
그때 지강백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모두 자신이 치렀어야 할 대가였다.
“소야께서 빚에 연연하시다니요. 설령 소야께서 그리 생각하신다고 해도 사형 분께서는,”
“말이 많군.”
채희유를 쳐다보는 용천휘의 눈이 붉게 번들댔다.
“나는 네 생각을 묻는 게 아니다. 내가 하겠다 말하는 것이다. 준비하도록.”
“……그렇다면.”
채희유가 입을 다물었다.
뱃속으로 꾹 이겨 넣은 걱정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피어올랐다.
반쪽짜리 소교주인 용천휘를 소교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수라안뿐이었다.
그런 수라안마저 반쪽이 된다면…….
‘어쩌면. 내 손으로.’
결코 손댈 수 없다 믿어왔던 용천휘를 제 손으로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슴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 *
“……으음.”
용천휘가 짧게 침음을 내뱉었다.
절반의 권능이 사라지는 기분은 거짓말로도 참을 만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다 끝나셨습니까?”
“아마도.”
용천휘는 지강백의 왼쪽 눈에 얹고 있던 손을 떼었다.
지강백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라 제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터였다.
“그럼.”
채희유는 용천휘의 미간과 눈 주변에 빽빽하게 꽂아놓은 침에 손을 뻗었다.
“눈을 감으십시오.”
“그래.”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침을 뽑는 채희유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그녀가 침을 하나씩 뽑을 때마다 눈꺼풀 위에 용천휘의 피로 써놓은 주문(呪文)이 조금씩 옅어져 갔다.
용천휘도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된 모양이군.”
“그런 듯합니다. 사형 분이 깨어나셔야 좀 더 정확히 알게 될 테지만.”
용천휘가 두 눈을 감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당분간 면포를 푸르지 말고 놔두도록. 수라안에 대한 것은 천천히 말해 줘도 늦지 않아.”
무슨 생각을 했던지 그가 피식 웃었다.
“저 바보는 그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화부터 낼 거야. 훤히 보이는군.”
“…….”
채희유는 그새 침을 하나 더 뽑아냈다. 하나를 뽑아낼 때마다 갈등과 긴장이 더해졌다. 심장이 제멋대로 널을 뛰었다.
이 침을 뽑아내는 게 아니라,
뽑아내는 척하면서,
그대로 미간 깊숙이 꽂아 넣는다면…….
“예.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사형 분께서는 조금도 기꺼워하지 않으실 겁니다.”
채희유는 떨림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됐어. 기뻐하길 바란 건 아니니.”
“기뻐하지도 않을 분께 내어드리기엔 너무 큰 것이 아닌지요? 저는 아직도 소야의 결정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쉽겠군. 지월이 죽었기 때문이다.”
“……예?”
채희유는 하마터면 침을 떨어트릴 뻔했다.
용천휘는 일부러 의도한 것처럼 자꾸만 그녀를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게 틀어졌지. 지월은 죽고, 그의 무공을 빌어 이매를 잡겠다던 나의 뜻도 실패하고.”
“그건……”
“살고자 닥치는 대로 적혈대법을 쓰면서, 몸이 박살 날 것 같은 반소효응에 이가 저리는 데도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대체 지월은 어떻게 죽은 것일까. 대체 누가 지월을 죽일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만.”
“…….”
“지월을 무너트릴 만한 독은 없다. 적어도 그토록 짧은 시간 내에 죽일 수 있는 독은 없어. 사천당문의 가주가 제아무리 지독한 독을 썼다고 해도 지월은 만독불침에 가까운 몸이었다. 그래서 생각했지. 독이 아닐 거라고.”
“…….”
입을 다무는 채희유를 대신해 그녀의 심장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두근, 두근두근.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더군.”
두근. 두근두근.
“그것이…… 무엇입니까?”
“혈해충.”
“…….”
혈해충은 벌레였다.
천산의 북쪽, 일 년 중 한 달만 잠깐 녹아 흐르는 차가운 계곡 물 밑에 조용히 나타났다 얼음과 함께 사라지는 아주 작은 벌레였다.
좁쌀의 좁쌀보다 작은 이 벌레는 투명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벌레였다. 이 벌레의 존재를 아는 것은 교에서도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볼 수도 없는 이 벌레는 그 어떤 독보다 무서웠다.
한번 사람의 몸으로 들어간 혈해충은 미처 눈치챌 사이도 없이, 천산의 그 맑고 시린 계곡에서 그러는 것처럼 흐르는 피를 타고 올라간다.
혈해충이 마지막에 이르는 곳은 머릿속이었다. 조용히 뇌수를 파고든 혈해충은 제 몸이 닿는 것을 삽시간에 녹여 버린다.
이것은 독이 아니었다. 아주아주 작은 벌레일 뿐이었다. 물처럼 시리고 투명해서 마실 것에 섞으면 절대 눈치챌 수 없는 벌레였다.
지월은 혈해충을 마셨을 것이다.
적혈대법을 위해 미리 마시도록 일러두었던 약물에 섞였을 그것을.
그 약물을 준비한 이는 당연히 채희유였다.
슷!
뾰족한 침 끝이 용천휘의 살갗을 살짝 긁었다.
침을 뽑아 들려던 채희유의 손이 너무 떨려 왔던 탓이었다.
“삼좌위라면 혈해충을 지니고 계셨을 수도,”
“나는 그를 장경각에서 찾았다. 과연 네 말대로 그는 소림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내게는 말도 없이.”
“역시…… 삼좌위께서 이매를,”
“그가 내게 무언가를 남겼다. 나는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가 왜 나를 배신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그게……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감은 눈 아래로 용천휘의 표정이 비틀렸다.
“대환단.”
“……예?”
“그는 이매를 만들어 내고 있던 게 아니었어. 대환단을 훔치고 있었던 것이었지. 왜냐면 내가 남은 대환단을 모두 가져오라 일렀으니까. 하지만 교에는 남아 있는 대환단 따위는 없었고, 그는 어차피 소림에 오는 길이니 그곳에서 훔치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삼좌위다운 짓이었지.”
비틀린 표정 사이에 무언가가 고였다.
그것은 체온보다 한참 더 뜨거운 물기였다.
용천휘가 울고 있었다. 눈꺼풀로 가려진 눈 안쪽에 물기가 고였다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삼좌위가 내게 저지른 배신이었다. 그는 명을 이행하지 못한 불충을 그렇게 어물쩍 넘기려 했던 것이지.”
“…….”
채희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하얗게 질린 손만을 떨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짜 배신을 했느냐는, 슬플 정도로 쉽게 알 수 있더군. 삼좌위의 배신을 내게 고한 이겠지.”
거짓말처럼 떨림이 멎었다.
톡.
그와 동시에 용천휘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건 너였어.”
“……!”
채희유가 침을 쥔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용천휘가 눈을 뜬 게 먼저였다. 그는 채희유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챘다.
“아……!”
독이 통하지 않는 이상, 채희유는 무공을 한 초식도 모르는 연약한 여자일 뿐이었다.
용천휘가 아무리 정상의 몸이 아니라 해도 그녀가 힘으로 그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용천휘는 채희유의 팔목을 한껏 꺾으며 외쳤다.
한쪽 눈은 염화처럼 붉었다. 그러나 권능이 사라진 왼쪽 눈은 말간 잿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그를 한층 더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게 내가 사형에게 빚을 갚으려는 이유다. 나는 수라안의 권능에 휘감겨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는 어린애였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았다. 보고자 한다면 그토록 명확히 보이는 것을! 내게 진실을 가리고 있던 것은 오히려 수라안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그 수라안이!”
용천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수라안으로 얻어낸 소교주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이유였다.
그는 자신의 껍데기를 너무 안전하다 믿은 나머지 그 속에 갇혀 조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눈물은 그가 자신을 명확히 보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아악!”
팔목이 비틀리자 채희유가 비명을 질렀다.
용천휘는 고통이 들어찬 새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네가 나를 배신한 이유는 묻지 않겠다. 이전까지의 나는 믿음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 너나 이매나…… 교주나, 그 누구에게도. 그러니 지금 너를 벌하지 않겠다. 내게 자격이 생기면 그때 파루나의 불충을 벌할 것이다.”
채희유가 일그러진 눈으로 용천휘를 노려보았다.
“나중이라면…… 늦지, 않겠……습니까.”
“그걸 결정하는 것은 나다.”
“그러니…… 바로 그게, 잘못됐다는…… 그런…… 말입니다.”
채희유의 녹색 눈이 짙어졌다.
“저는…… 얌전히 다가올 벌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니까요.”
파슷!
채희유가 손톱을 세워 용천휘의 팔뚝에 박았다. 살갗에 박힌 손톱이 순간 검게 물들었다. 손톱을 중심으로 용천휘의 피부도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
아니, 아니었다.
검게 변하는 것 같던 피부는 순간의 착시였던 것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검은 독기는 채희유의 손톱을 따라 역류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용천휘는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소리치는 채희유를 향해 말했다.
“파루나에 걸린 금제는 하나가 아니야. 그리고 그중에는 파루나가 모르는 금제도 있는 법이지. 이렇게까지 만들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 애초부터 어긋난 일에 제대로 된 결과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겠지.”
용천휘가 팽개치듯 채희유를 놓았다. 채희유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정신없이 비명을 질렀다.
채희유가 용천휘를 공격하는 순간 시작된 금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독이 완전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파루나의 몸에서 그 균형을 깨트렸다.
파루나의 종말이었다.
“이것으로 나는 파루나를 멸하겠다. 너는 더 이상 나의 소유가 아니며 네가 나의 파루나라 불릴 일도 없을 것이다.”
“아…… 흐,”
미쳐 날뛰다 못한 독기가 피부를 뚫고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눈처럼 희고 흠 없던 피부가 온갖 색으로 변하다 부풀어 올랐다.
시커멓게 죽은 손톱을 타고 맹독이 툭툭 떨어졌다. 독이 묻은 모든 것이 치이익 타는 소리를 내며 녹아들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채희유는 인간이 아니라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짐승 같은 몰골이 되어갔다.
몸부림치다 쓰러진 채희유의 주위로 사방 반 장짜리의 지옥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냉정하게 지켜보던 용천휘가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침상이었다.
그는 이를 꾹 물고 사지가 굳은 채 잠들어 있는 지강백을 안아 들었다.
“사형은 내가 진 가장 큰 빚이야. 나는 그걸 갚겠어.”
두 사형제의 모습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등 뒤에 남겨진 지옥으로부터.
여인이 타들어 가는 피부를 움켜쥐며 외쳤다.
“저, 절대……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아.
절대로.
여인의 말은 살아 있는 악귀가 되어 홀로 남은 지옥 속을 메아리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