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74화 (74/346)

제74화 도주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낮부터 소실봉에 들러붙던 먹구름은 기어이 폭우가 되었다.

지강백은 온몸을 두들기는 비를 느끼며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다섯. 아니, 여섯.”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미 반은 저승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직도 그만한 감이 남아 있었나.”

뿌연 비의 장막을 찢으며 여섯 명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지강백은 그중 가장 앞선 자를 알아보았다.

뇌풍권 황보엽.

황보세가의 가주이자 천왕삼권과 뇌진검법 두 개의 무공으로 산동제일의 고수라는 말을 듣는 이었다.

“귀는 아직 괜찮습니다.”

답하는 지강백의 오른쪽 눈이 꿈틀대듯 경련을 일으켰다.

한쪽 눈으로만 보는 것이 그렇게나 눈에 무리를 준다는 것을 지강백은 처음으로 알았다.

시야가 반으로 줄어드는 것은 물론, 상대의 위치나 동작을 파악하는 데도 미묘한 차이가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공격이 엇나갔으며 실수가 늘었다, 상처는 더욱 많이 쌓여 갔다.

황보엽은 지강백의 왼쪽 눈에 박혀 있는 검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이 박아 넣은 것이었다.

그 전에 그의 검은 지강백이 부러트렸다.

자루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남겨 놓고 부러진 검이었다. 남아 있는 검봉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지강백은 진작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지강백의 벽운천강권을 받아 낸 가신이 아니었다면 그 또한 벌써 소실봉의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황보엽은 눈에 박힌 조각을 뽑을 새도 없이 이제껏 추격을 따돌려 왔던 상대에게 한 번쯤은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그가 마교가 아니었다면 검 대신 술잔을 건넸으리라.

“이제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않겠나? 구파일방의 추격은 숭산을 벗어나면 더욱 치밀하고 정교해질 걸세.”

진심이었다.

황보엽은 근래 들어 이렇게 자신을 탄복하게 하는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심지어 그가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생기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서 승복하고 중원의 사람이 되는 게 어떻겠나? 마교를 떠나게. 그게 자네가 목숨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 될 터.”

“그럴 수 없습니다.”

상대는 어깨뼈가 드러나는 오른팔을 움직여 자세를 잡았다.

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도 제게 종남의 제자가 아닌 다른 것이 되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황보엽이 혀를 찼다.

“자네 몸을 보게. 그 몸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지강백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괜찮다면 말을 하는 기운이라도 아끼고 싶습니다만.”

그 대신 황보엽을 포함한 여섯을 상대하겠다는 얘기였다.

황보엽이 지강백을 대신하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 말을 받은 것은 하나 남은 눈이었다.

아니요, 안타깝지 않습니다.

제 무엇도 안타깝지 않습니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제 앞을 막아서시는 사부님의 등을 보았습니다.

사부님을 대신해서 제가 살았습니다. 사제들을 대신해서 저 혼자 살았습니다.

그러니 제 무엇도 안타까워선 안 됩니다.

지강백은 오른 눈을 한 번 깜박거렸다.

물기가 없는 눈이었다.

하나 남은 눈은 언제나 뜨여 있어야 했다. 행여나 눈물이 고여 흐려지면 안 되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아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그 날까지.

“그럼.”

지강백이 검을 치켜들었다.

피로 물든 그것은 끝이 잘려 나간 목검이 아니었다. 그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만들어 낸 수많은 시체들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진검이었다.

사부가 죽었다.

사제들이 죽었다.

그리고 지강백은 살고자 남을 죽였다.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십칠 년 만에 처음으로 저지른 살인이었다.

혈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 * *

“……이 저주받을……마교……네놈 시체는……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귀신도 되지 못할……으헉!”

털썩!

여섯 번째 시체가 쓰러졌다.

“……컥!”

동시에 지강백이 피를 토하며 고꾸라졌다.

왼쪽 옆구리에서 피가 강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마를 사선으로 가로지른 상처 덕에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비가…… 그치기 전에,”

비가 그치면 추적이 한결 쉽고 빨라질 것이다.

그 전에 도망쳐야 했다.

지강백은 황보엽을 상대하다 부러진 왼팔이 덜렁대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일어섰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피에 젖은 족적이 이어졌다.

쏴아아!

여전히 거셌지만 처음 내릴 때보다 한껏 수그러든 빗줄기가 얼굴을 적시다 못해 눈 속을 파고들었다.

지강백은 눈을 감지 않기 위해 기를 쓰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비틀대는 걸음을 이었다.

“비가……”

그치기 전에……

더…… 좀 더 가야……

가야……

……툭.

눈꺼풀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았다.

“가, 가야…….”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번 감긴 눈꺼풀은 다시 뜰 수 없었다.

스륵, 쿵.

지강백의 몸이 비에 녹아내리듯 허물어졌다. 몇 번이고 어깨가 꿈틀거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미 한참 전에 한계를 지나쳤던 몸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

지강백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작은 소리는 한창 내리는 빗줄기 속에 꿀꺽 삼켜졌다.

곧이어 완전한 정적이 지강백을 사슬처럼 옭아맸다.

미동도 없는 몸은 죽은 지 한참은 지난 짐승의 시체처럼 보였다. 지금이라면 누구라도 지강백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자박.

그리고, 때를 맞춘 듯 정체 모를 걸음이 의식을 잃은 지강백을 향해 다가섰다.

“…….”

지강백과 결코 닿지 않는 거리에 멈춰 선 인형이 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었다.

잠시 후 우포(雨布)로 꼼꼼히 감싸인 손이 뻗어 나와 지강백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 * *

“아직도란 말이냐?”

등줄기가 쭈뼛 굳을 만큼 노기에 찬 음성이었다.

백사준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의 타구봉을 움찔 쥐었다 놓았다.

“아무래도 우중이다 보니……”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지월이 노기를 토하자 방장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백사준은 살갗을 가를 것처럼 날을 세우는 살기에 맞서기 위해 내력을 끌어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읏, 대사!”

“무능한 것들!”

쾅!

지월이 늘 방장실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자그마한 다탁을 내리쳤다.

다탁은 아예 바스라져 가루가 되었다. 백사준은 두 걸음을 더 물러나야 했다. 등에 벽이 닿을 정도였다.

그것은 감원의 자격으로 지월과 함께 자리하고 있던 범광도 마찬가지였다.

지월은 일그러진 얼굴로 신형을 비틀대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살기를 거두었다.

“사람을 더 풀어라. 더 늦기 전에 내 앞에 놈의 시신을 가져와라!”

“외람되오나 대사,”

침을 한 번 꿀꺽 삼켜 뱃속을 다스린 백사준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좀 더 앞을 내다보아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지금은 일을 구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대답보다 시선이 먼저 돌아왔다.

백사준은 어쩐지 너무 날카롭다 느껴지는 지월의 시선이 오늘따라 불편했다.

“……구분이라니?”

“추적은 계속하되, 구파일방이 각자 맡은 바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각자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인원은 넉넉하나 일처리는 불편합니다.”

그게 방금 전 사천당문의 비극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백사준이 깨달은 바였다.

명을 내리는 사람은 제각각이었고 따르는 이도 가지각색이었다.

지금은 구파일방을 하나의 수족처럼 통제하는 일이 필요했다. 일전에 지월과 얘기를 나눴던 대로 무림맹이 조직되어야 할 시점이었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상황일수록 조직은 크게 힘을 발휘할 터였다.

“너무 서두르는 면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허나 지금 시점이기에 모두가 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대사께서 나서 주신다면 상황에 힘입어 수월히 진행될 것이고요. 이후 마교의 추적과 이후의 서역 정벌이 훨씬 탄탄하게 연결될 것입니다.”

“무림맹이라…….”

지월이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그도 괜찮겠군. 아니, 썩 괜찮겠어. 그렇다면 맹주직은 이 몸의 것이 되겠군.”

“물론 그렇겠습니다만.”

백사준은 왠지 모를 위화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림맹을 조직하는 것은 이미 얘기를 마쳐 둔 일이었다. 하지만 지월이 대놓고 맹주직을 탐내는 것 같은 지금의 태도는 충분히 낯설었다.

“……혹여 반대가 있다면, 구파일방이 함께 이야기를 더 나눠야 하겠지요.”

지월이 피식 웃었다.

“반대할 자가 있다던가?”

“만일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 자가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이 몸이 아닌 그 누가 맹주를 할 수 있다고.”

“……예?”

위화감이 도를 넘어섰다.

백사준은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지월을 바라보았다.

“못 들은 척하지 말고 나가서 네 할 일을 해라. 맹주를 맞이할 준비가 되면 이 몸을 부르도록.”

“……대사.”

“그리고 달아난 놈들을 반드시 죽여 없애라. 두 놈 모두! 나도 더는 못난 꼴을 참아 넘기지 않겠다.”

계속되는 지월의 언사에 백사준은 입맛이 써지는 것을 느꼈다.

표정이 소리가 날 것처럼 굳었다.

“외람되오나, 대사. 그리할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굳이 죽일 필요가 있는지요. 마교임이 확실한 사제 쪽은 일부러 놓아주어 서역까지 길 안내로 이용하는 것이 백 번은 더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형 쪽은 사실 마교라 하기에는,”

“갈!”

“……읏.”

내력을 실은 고함에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아 백사준은 손을 들어 귀를 막아야 했다.

“마교의 싹을 뿌리째 도려내지는 못할망정! 그 무슨 소리더냐! 분명 두 놈 다 죽이라고 했다!”

백사준이 지지 않고 맞섰다.

“의미가 없을뿐더러 불필요한 일입니다! 종남파와 마교의 연관성이라면 아시다시피,”

휘익!

지월이 앉은 자리에서 손목을 휘둘렀다.

“……욱!”

백사준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목덜미에 칼로 베어 낸 것 같은 자상이 생겨났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덜미를 백사준이 제 손으로 움켜쥐었다.

“무엇이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지는 이 몸이 정할 것이다. 건방지게 혀를 놀리지 말고 시킨 일이나 해라.”

백사준이 울컥해서 소리쳤다.

“대사!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섬서에서 처음 제가 말씀을 올렸을 때 대사께서는 개방의 신세를 지겠다 하셨습니다. 마교를 멸하는 일은 대사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해의 동도가 모두 함께해야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지월이 피식 웃었다.

“마교를 멸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희 같은 것들이 마교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믿느냐? 이 몸이 없이도?”

“……대, 대사?”

백사준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지월이, 이런 사람이었던가.

“천하제일기가 누구 손에 있는지 굳이 입 아프게 얘기할 것은 없겠지. 건방진 소리는 관두고 시키는 일이나 해라.”

“…….”

백사준이 제 귀를 의심하며 서 있자 지월이 회색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 말이 안 들리더냐?”

“……아닙니다.”

백사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방장실을 나섰다.

지금 제 힘으로는 지월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후,”

백사준이 짧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계획한 서역 정벌은 구파일방이 저마다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빈틈없이 돌아감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대업이었다.

그런데 그중 작은 톱니바퀴가 하나 어긋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가주가 죽었으니 더는 캐 볼 곳도 없고…… 환장하겠군.”

망가진 톱니바퀴가 남긴 것은 의혹이었다.

이대로 지월이 무림맹주가 되어도 괜찮을 것인가, 라는 의혹.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거잖아.”

퉁명스러운 혼잣말이 막 싹트기 시작한 의혹을 내리눌렀다.

“지월 대사가 아니라면 무림맹주를 할 사람은 없다. 그가 아니라면 무림맹 따위 지금과 크게 다를 것도 없어.”

그러니 사소한 의혹 같은 것은 접어 두어야 했다.

백사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목숨 정도는 건지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떠올리는 이는 지강백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지강백은 마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자신이 그에게 마교라는 굴레를 씌웠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러게 진작 사제와 연을 끊지 그랬냐고,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치솟는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안 됐구려, 소협.”

진심이었다.

“대신 소협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내 꼭 서역 정벌을 이루겠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속죄였다.

* * *

“너무하셨습니다.”

백사준이 사라지고 나자 이제껏 꾹 참고 말을 아껴 오던 범광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게, 과하셨습니다.”

“그래?”

바스라진 다탁을 앞에 두고 느긋이 앉아 있던 지월이 가만히 눈썹이 치켜떴다.

범광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평생 방장을 모신 저로서도 사람이 달라졌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시기가 시기인 것은 알겠지만 너무 강한 면을 고집하시는 것도 반발이 있을 줄 압니다. 더군다나 맹이 조직되기 전 아닙니까.”

범광은 사미승 시절부터 지월의 가장 가까이에 있어 왔다.

지월에 대한 범광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의미가 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방금 전 백사준에게 보였던 모습에도 뜻한 바가 있을 것이다. 범광은 그리 믿었다.

그러나 강호의 모두가 자신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범광이 하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흐음…… 그렇더냐. 뭐, 나도 너무 과했던 것은 인정하지.”

지월은 백사준에게 분노를 퍼붓던 때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그 간극이 잘 이해 가지 않았던 범광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허면 종남의 제자는,”

“그 얘기를 할 참이라면 됐다. 놈은 없어져야 해.”

“……꼭 그리 고집하시는 이유라도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종남의 첫째 제자는 방장께서 따로 부를 만큼 각별히 대하신다 생각했습니다만.”

지월은 입술을 작게 비틀었다.

“사람은 모르는 것이지.”

“……예?”

“달려와 감쌌다. 살아남으라는 말도 지껄이더군. 실컷 이용당하고 배신당한 주제에.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어.”

범광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놈을 아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예?”

“싹을 잘라야지.”

“……?”

범광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지월을 응시했다.

“방장. 그놈이라는 게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월이 힐긋 고개를 돌렸다.

“됐고, 이만 나가 보아라. 필요해지면 부를 테니.”

“방장,”

“귀찮게 굴지 마라. 내 머릿속에 들은 것을 모두 네가 알아야 하겠다는 소리더냐.”

지월은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소매를 거칠게 휘둘렀다.

범광은 애써 치솟는 감정을 다스리며 고개를 숙였다.

“……예, 방장.”

그는 방장실을 떠나기 전 부스러기가 된 다탁의 잔해를 가리켰다.

“그 전에 이것은 치우고 가겠습니다.”

“마음대로.”

범광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그러다 보았다. 지월의 소매 한 곳에 얼룩이 지고 있다는 것을.

“방장! 다치셨습니까?”

“음?”

범광이 안색을 바꾸며 묻자 지월은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저가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지월이 서둘러 소맷자락을 걷었다.

오른팔 안쪽의 살갗에 검푸른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지월이 응조공으로 지강백의 심장을 뽑으려 할 때, 그를 막아서던 양영천의 오뢰정인에 붙들린 곳이었다.

당장 살갗이 찢긴 자상이 아니기에 부상을 입은 줄을 몰랐다. 하지만 살에 남은 자국을 보니 그때 분명 손해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지월이 대경해 소리를 지르자 범광이 그를 말렸다.

“아직 모르고 계셨으면 별것 아닌 상처일 것입니다. 이리 주시면 제가 살펴보겠,”

범광이 지월의 팔을 향해 손을 뻗자 지월이 그 손을 홱 쳐 냈다.

“건드리지 마라!”

퍼억!

운이 좋았다. 아슬아슬하게 지월의 손을 피해 낸 범광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방장…… 어째서 다친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지월이 다쳤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을뿐더러 지금껏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혼란으로 일그러지는 범광을 향해 지월이 더욱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라.”

“……예?”

“그 목숨은 필요가 있어 붙여 둔다는 것을 명심해라.”

“……방장!”

“알아들었으면 당장 나가!”

지월이 왈칵 음성을 높였다.

범광은 저도 모르게 귀를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알겠습니다.”

드르륵. 탁.

방장실을 빠져나온 범광이 제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방금 전 저 방 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대체 무슨…….”

범광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참기 위해 혀를 씹었다.

꼭 사람이 바뀐 것만 같다, 는 말을.

범광이 괴로운 한숨을 토하며 방장실에서 팔대호원으로 이어진 긴 주랑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방장께 알려야 하오! 마교의 시신이 발견되었소!”

범여가 갓 도착한 소식을 안고 달려왔다.

“둘 중 어느 쪽입니까?”

“예선을 치른 첫째 제자라 하였소.”

“…….”

지강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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