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73화 (73/346)

제73화 별리(別離)

“여긴 못 지날 것이다.”

지강백은 발끝으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내력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이런 몸으로는 천하제일쾌검을 상대할 수 없었다.

“큿……”

지강백이 상처투성이 한숨을 토해 냈다. 입을 벌릴 때마다 뱃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이 튀었다.

슷!

남궁진현이 그에게 칼을 겨누었다.

“너는 왜 종남파를 사칭했느냐?”

남궁진현의 얇은 눈썹이 분노를 담아 매섭게 꿈틀거렸다.

지강백은 피가 튀는 입술을 열었다.

“……그건 사실이 아닙, 니……”

“마교가 무슨 목적으로 천하무도회에 숨어들어 온 것이냐.”

“그것도 아닙…… 천하무도회로 저를 부른 것은…… 분명 개방과 소림이……”

“그간 중원 땅을 어지럽힌 것으로는 부족했단 말이더냐!”

스슷!

하얀 빛과 다르지 않은 검이 지강백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살갗이 얇게 갈리며 검날이 스며들어 왔다.

지강백은 제 목을 가르는 검을 보면서도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왜 너는! 마교의 몸으로 나를 구하고 내 마부를 구했느냐! 왜 내 친우를 구했느냐!”

지강백은 제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남궁진현을 바라보며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저는…… 마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냐!”

“종남의 일……일대제자입……니다.”

“거짓말 마라! 종남의 제자가 왜 태화 진인을 살해했단 말이냐!”

지강백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제가…… 아닙니다.”

“아니라는 말밖에 할 게 없더냐!”

그 외에는 없었다. 뱃속을 갈라 그 안에 든 것을 꺼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믿지 않으신……다면…… 저로서는 달리 드릴 말이…… 없습……”

슷!

칼이 좀 더 깊게 들어왔다.

지강백이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남궁진현의 팔을 붙들었다.

그를 붙든 손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지금 지강백이 멀쩡한 정신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상처를 돌볼 여유도 없던 그는 계속되는 출혈에 몇 번이고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의지였다.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면…… 아무도 제 말을 믿지 않은…… 채…… 제, 제가 마교가 아니라는 것을……”

“닥쳐라!”

사악!

흰빛이 움직였다.

지강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하거나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터무니없이 무거웠다.

세상 무엇보다 빠른 저 속도 앞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목이 잘리게 되는 걸까.

“…….”

그러나 목을 대신해서 가슴팍이 허전해졌다.

남궁진현의 검은 지강백의 무복을 갈랐다.

드러나는 상반신은 너덜너덜해진 무복만큼이나 엉망이었다.

움푹움푹 떨어져 나간 살점과 피부가 죽은 듯 보이는 검붉은색 장인들, 멈추지 않는 출혈.

“크……”

남궁진현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가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멍청하게 쳐다보는 지강백을 향해 제 영웅건을 풀어 건넸다.

여전히 흔들리는 눈빛은 그가 아직도 갈등하는 중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가라.”

“……예?”

“가란 말이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남궁진현은 잘린 옷깃 사이로 영웅건을 밀어 넣었다.

“호영장으로 가라. 그걸 보여 주면 모른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영웅건은 호영장주 호곽의 것이었다.

남궁진현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을 때, 호곽이 구명지은을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건넨 물건이었다.

호곽은 그 영웅건이 있는 한 자신은 언제나 남궁진현의 사람이라 말했고, 남궁진현은 친우의 뜻을 받아들여 늘 같은 영웅건을 하고 다녔다.

“왜……”

지강백이 어려운 얼굴로 남궁진현을 응시했다.

“어디 살아서 증명해 봐라. 네가 날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남궁진현이 탑림 밖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면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강백이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은혜는,”

남궁진현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닥쳐! 내게 인사를 할 시간이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 나는 너를 믿어 살려 주는 것이 아니다. 살려 줘야 그나마 믿어 볼 여지가 생길 테니 그렇게 해 보겠다는 것이다.”

무어라 할 것인가.

살아서 믿게 해 달라는 사람에게.

지강백은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가 한때나마 용천휘에게 품은 마음도 그와 같았다.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할 것이다.”

남궁진현은 지강백의 등을 떠밀었다.

“가라.”

그리고 그는 자신이 먼저 탑림의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스슷, 쾅!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칼로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강백은 남궁진현이 그의 도주를 돕기 위해 억지로 소란을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감사드립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났다.

지강백은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 * *

“거, 비가 한바탕 올 기세인데 말입니다.”

왕대환이 코를 킁킁대며 말했다.

습기가 잔뜩 배인 숲에서는 축축하고 무거운 바람이 불었다.

그쯤은 양영천도 알았다. 산에서 보낸 계절이 몇 년인데 그걸 모를 것인가.

“비가 내릴 거라 그런가…… 거참.”

왕대환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벌써 그들은 소림을 저만치 앞에 두고 있었다. 눈이 좋은 사람이라면 멋드러진 필체로 소림이라는 두 글자가 쓰인 적송 현판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코앞으로 다가온 소림은, 어쩐지 기묘해 보였다.

줄기줄기 감겨든 먹구름 탓일까.

음산하고 어두운 그 분위기는 천하무도회라는, 강호에서 가장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문에서부터 담을 빙 둘러 지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영 이상했다.

머리털도 수북하니 옷도 치렁치렁대는 게, 아무래도 소림의 승려들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충분히 수상한 일이었다.

소림이 소림의 정문을 지키지 못할 일은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겼다면 강호에 몹시 큰 우환이 닥쳐 온 것이다.

“큰 형님…… 아차차, 대사형은 벌써 와 계시지 않겠습니까?”

지강백에게까지 걱정이 미친 왕대환이 불쑥 물었다.

“……그랬을 게다.”

양영천도 걱정을 감추지 못하며 답을 했다.

“걸음을 서둘러야겠다. 소림에 변고가 생겼다면 분명 먼저 도착한,”

문득 양영천은 말을 끊었다.

그새 좀 더 세월의 때를 입은 손가락이 소림의 길고 긴 담 어느 구석을 가리켰다.

“저거저거…… 저거 강백이가 아니더냐?”

“엇, 네?”

“대사형이라굽쇼?”

양영천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종남파 새 제자들이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왕대환이 떨떠름한 음성으로 말했다.

“에……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건 아무리 봐도 쫓기고 있는 것 같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요. 저건 사람이라기보다는 피떡에 더 가까운데……”

그건 지강백이 사람들에게 쫓길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의 말이었다.

그때 염창이 왈칵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니미! 큰형님 맞잖소! 저 개 같은 땡중 놈들이!”

그리고 그가 앞선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저만치 있는 소림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염창을 보며 다들 안색이 변했다.

“아, 아니 그럼…… 정말로?”

“크, 큰형님이 왜?”

휘익!

염창의 뒤를 이어 양영천이 뛰쳐나갔다.

낡은 장포 자락이 일으키는 바람 소리를 듣고 나서야 왕대환 일행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진짜로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큰형…… 아니, 대사혀엉!”

왕대환이 도낏자루를 손에 쥐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이 모든 게 꿈인가 싶었다.

* * *

퍼억!

이 모든 게 꿈 같긴 지강백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진현의 도움으로 탑림을 벗어나 정문 가까이 다가간 지강백은 외담을 넘었다.

그 끔찍하던 길이 이제는 끝이 나나 싶었다. 소림을 벗어나 산속으로 숨어들면 숨을 고를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꾸만 하얗게 변하는 머릿속을 억지로 다스리며 몸을 움직였다.

담을 넘었다. 개방의 사람들이 담을 빙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마저도 어떻게 해서든 손해를 감수하고 틈을 노리면 벗어날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그런데.

담을 넘자마자 등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담을 넘어서가 아니었다.

담을 뚫고 날아든 것이었다.

지강백은 예기치 못한 공격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한 채 몸을 굴렀고, 그사이 제 손으로 담을 와르륵 부수며 지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가 아니었다. 지월의 등 뒤로 이쪽을 향해 몰려오는 고수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월이 그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앞서 왔을 뿐이었다.

지강백은 지월이 기어코 자신을 쫓아왔다는 사실보다, 그가 병기처럼 던져 낸 것의 정체에 더욱 놀라고 절망했다.

그것은 남궁진현의 오른팔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검을 휘두르던 그 팔이, 어깨뼈와 연결된 부분이 너덜너덜해진 채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마교다!”

“잡아라!”

개방의 제자들이 지강백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지월이 단숨에 막아섰다.

주춤 몸을 굳히는 개방도들을 뒤로하고 그가 지강백의 앞으로 다가왔다.

“네 사제는 어디에 있느냐?”

지월의 질문이었다. 지강백도 그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남궁 대협을…… 어찌하신 겁니까?”

“어디에 숨겼느냐. 그를 내놓아라! 그는 반드시 오늘 죽어야 할 목숨!”

“남궁 대협을 어찌하셨습니까! 왜 그분을……! 대체 왜!”

지월은 바닥에 쓰러진 채 고함을 지르는 지강백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지금 마교의 죽음에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냐? 마교라는 이유만으로 죽음이 당연한 것을.”

“남궁 대협은 마교가 아닙니다! 그것이 더 당연한 사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마교와 결탁을 한 것이겠지.”

“그게 무슨…… 그런 짐작만으로 남궁 대협을 죽였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교를 뒤쫓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는 것으로 그를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아니, 충분하지 않았다.

자신을 마교라 오인한 것은 증거가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다 했다.

그러나 남궁진현은 아니었다. 그는 강호의 구심점 중 하나인 오대세가에서 태어났으며 반평생을 남궁세가의 이가주이자 천하제일쾌검으로 살아왔다.

그런 자를, 저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마교라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지월은 이유를 불문하고 그와 연관된 모든 것을 마교라 몰아가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강백이 아는 한 지월은 결코 그럴 인물이 아니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대사가 왜 그런…… 정말 지월 대사가 맞으십니까?”

“닥쳐라!”

퍼엉! 펑!

대력금강장이 연달아 터졌다.

“으욱!”

지강백은 피 화살을 뿜으며 장력이 쏘아진 방향대로 날아갔다.

퍽!

이미 너덜너덜해진 몸이 사정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도 모자라 경사를 따라 저만치 굴렀다. 그 충격만으로도 늑골 서너 개가 부러졌다.

“죽어라!”

지월이 지강백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다섯 손가락이 매섭게 굽어들었다. 허공을 찢으며 날아오는 응조공이 지강백의 심장을 노렸다.

‘안……’

안 되는데.

지강백이 눈꺼풀을 꿈틀대며 생각했다.

도망쳐야…… 하는데.

응조공이 제 심장을 잡아 뜯는 시간은 아무리 해도 촌각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이 터무니없이 느리게 다가왔다.

경련이 일어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뒤틀리는 육신을 일으켜 달아나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느린 시간보다 제 몸이 더욱 느렸다.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손가락이 바르작대며 헛되이 땅을 긁는 것으로 그쳤다.

이대로……

죽는…… 걸까.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마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남궁진현의 은혜에 보답을 해야 했다. 용천휘를 찾아야 했다. 그가 던진 거짓들을 깨끗이 박살 내야 했다.

태을분광검에 이어 구궁신행검을 대성해야 했다. 태을신공을 십이 성 달성하면 은하유영비로 등평도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남의 모든 무학을 대성하고 장문이 내리는 진검을 하사받아야 했다.

그를 키우기 위해 사부는 십칠 년을 보냈다. 그 시간에 책임을 져야 했다.

저는…… 사부님, 제자는……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고…… 제가 사부님과 사문에 부족하지 않은 날이 올 것이라고…… 반드시 그리하겠다고……

아직, 아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여기서 죽지 않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죽어라!”

쐐액!

응조공의 지풍이 살갗을 먼저 베어 오는 그 순간이었다.

“이놈! 내 제자에게서 손을 떼지 못하겠느냐!”

휘익!

어디선가 날아오는 지팡이를 지월이 고개를 젖혀 피했다.

팍!

지팡이가 허무하게 바닥에 꽂혔다.

지강백은 지금 들어서는 안 될 소리를 들었다 생각했다. 푸들대던 눈꺼풀이 비로소 들렸다.

“사……사부님?”

그러나 지월의 공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한패가 있었더냐!”

지월은 일단 눈앞의 지강백부터 처리하려는 생각에서였던지 응조공을 다시 전개했다.

“이익! 안 돼! 멈춰라, 이 대머리 늙은이야!”

이번에는 염라도가 날아왔다. 염창이 젖을 빨던 힘을 모조리 쥐어짜 던져 낸 한 수는 지월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했지만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냈다.

“손 떼라 하지 않았냐!”

휘익!

양영천이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달려온 양영천이 지강백과 지월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턱!

양영천이 오뢰정인의 한 수로 지월의 오른팔을 붙들었다.

그는 일부러인 듯 엉망진창이 된 지강백을 보지 않았다.

이 꼴이 대체 뭐냐며 내 그리 사문 망신시키지 말라 단단히 이르지 않았냐며 한바탕 노함을 터트려야 할 것도 같은 그가 지금 이 순간에는 무섭도록 침착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양영천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혹은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처럼 굳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지금 양영천에게 지강백을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강백이 너는 도망치거라. 어서.”

“사부님…….”

“저 괴물 같은 중놈을 이 연로하신 사부더러 얼마나 막고 있으라는 게냐! 어서!”

“제자의 목숨보다는 사부님의 목숨이 더 귀합니다. 지금,”

지강백은 지월이 천하무도회나 구파일방과는 아랑곳없이 자신을 죽여 없애려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이미 남궁진현을 죽인 지월이었다.

종남파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해야 할 것은 지월 하나뿐이 아니었다.

양영천이 나타나자 개방도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구파일방의 다른 고수들도 곧 몰려올 것이다.

양영천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그들 전부를 혼자 막아설 수는 없었다.

“사부님 혼자서는,”

“어서 가라 하지 않았느냐!”

“……!”

지강백은 순간 제 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사부의 음성에 피 끓는 소리가 묻어나왔던 것이다.

“사부님……?”

오뢰정인으로 지월의 팔을 가두었다 생각했던 것은 지강백의 착각이었다.

양영천은 제 몸으로 응조공을 받아 낸 것이었다.

지월의 손이 양영천의 가슴팍을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그러게 어서 가라고…… 하잖았……”

“사, 사부…… 사부님…….”

“거지 놈들이…… 장문령부를 훔쳤으니…… 너는 그걸 어서 찾아내서…… 조사님들께 죄가 없도록…… 흐,”

지월이 피식 웃었다.

“팔자 좋은 걱정을 하는군. 이리된 마당에 장문령부 따위가 무어란 말이냐.”

조금 귀찮은 벌레를 보는 듯한 그 표정은 조금도 지월의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이 모든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 사부……”

“이제 그만 내 앞에서 비켜라!”

지월이 양영천의 가슴에 박은 손을 빼어 내려고 했다.

“……음?”

그러나 양영천이 그의 두 팔을 악착같이 붙들었다. 그가 지월의 응조공에 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뢰정인을 전개한 것도 사실이었다.

“도, 도망…… 어서 가라고 그리도…… 대체 왜 말을 안 듣,”

“이 버러지 같은 것이!”

퍽!

지월이 다른 손으로 양영천의 천령개를 내리찍었다.

머리통이 부서지며 피와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지월이 양영천의 시체를 홱 떠밀며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이 모든 일이 꿈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거짓말 같은 죽음이었다.

아니, 그저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거짓말일 것이다.

“사, 사부…… 사부님…….”

지월이 피투성이 손을 한 채 돌아섰다.

“쯧쯧…… 그마저도 소용없는 죽음이었더냐. 이젠 네 죽음이 미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월이 장력을 뿜을 것처럼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사 자락이 무섭도록 휘날렸다.

단숨에 목숨을 끊을 작정으로 내력을 남김없이 끌어올린 것이다.

“큰형님!”

어느샌가 달려온 염창이 지강백을 제 몸으로 홱 떠밀었다.

퍼엉!

지월의 장력을 고스란히 맨몸으로 받아 낸 염창은 그대로 터져 나갔다.

시신이라 부를 것도 없었다. 그저 살점과 뭉클대는 피 안개가 전부였다.

거짓말일 것이다.

“큰형님 어서 도망치시오! 뭣하고 있소! 어서!”

왕대환이 지강백의 뒷덜미를 낚아채 거칠게 잡아끌었다.

한 발짝을 벗어나자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되었다.

“흐…… 흐으,”

입술 새를 비집고 소리가 된 고통이 흘러내렸다.

그때 왕대환이 지강백의 등짝을 홱 떠밀었다. 지강백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가 말했다.

그가 실없이 웃는 것도 같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먼저 가시오, 큰형님. 우리는 다음에 또 봅시다.”

퍼억!

그리고 왕대환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한 무더기의 살점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강백은 비로소 실감했다.

이제부터 시작될 악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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