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71화 (71/346)

제71화 공무도하 (1)

용천휘는 머릿속을 울리는 뚜렷한 음성을 들었다.

혜광심어.

지월이 용천휘만 들을 수 있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처음 보네, 형.

“……뭐?”

용천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던지는 이질감이 그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지월의 일 장을 맞아 내장이 곤죽이 된 것은 필목현이었지만 그 충격은 고스란히 용천휘가 받은 듯했다.

―늘 생각했지. 형을 보게 되면 나는 무얼 하고 싶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밖에 없었어.

“무슨…… 무슨,”

지월이 입을 벌렸다. 고른 이가 드러났다.

―찢어 죽이는 것. 가능하다면, 내 이빨로.

“…….”

―아버지도 그렇게 죽였거든.

“뭐?”

용천휘가 저도 모르게 필목현을 젖혔다.

“뭐라고!”

―그러니 형만 죽으면 된다는 소리야.

대명천교의 교주는 반신(半神)이나 다름없었다.

용천휘가 교주를 대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대천혈성이 남긴 권능으로 온몸을 감싼 그 태산 같던 위압감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인간 중에서 완전한 권능을 입은 교주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지월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수라안을 마지막으로 권능을 모두 입은 교주의 행적은 그 뒤로 비밀에 부쳐진다.

교주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고 어느 곳이나 갈 수 있었다. 현존하는 신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이룬 교주가 궁극적으로 향하게 되는 길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인간의 육신에 묶인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길고 긴 길을 가는 것은 필연적이기도 했다.

용천휘가 아는 한 부친인 현 교주 또한 그래야 했다.

“교주가 왜……!”

―내 몸을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뭐라고?”

―죽지도 못할 몸으로. 평생 햇볕 한 줌 보지 못하고 관 속에서 썩어 가게끔.

“대체 뭐라는 거야!”

용천휘는 알지 못했다.

사천당문에서 가져온 관이 모두 두 개였다는 것을.

그중 하나에는 채희유가 숨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체가 담겨 있었다. 아니, 시체가 되어 가고 있는 무언가가.

그 관은 지월이 제 방에 감추어 두었다.

모를 일이었다.

지금, 용천휘를 형이라 부르는 지월이 과연 누구인지는.

“이제 그만 네가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거라!”

지월이 양팔을 벌렸다. 광풍이라도 불어온 것처럼 가사 자락이 펄럭였다.

누구도 지월이 이렇듯 전신의 힘을 남김없이 개방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뒤에 서 있는 구파일방의 인사들도 얼굴을 가리며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

용천휘가 이를 꽉 물었다.

온전히 내기의 힘만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한 번 스칠 때마다 살갗을 갈랐다.

수라안도 소용이 없었다.

지월이 지금 팔십일복마장법을 펼치고 있다는 것도, 장법의 원리나 전개 방향도 한눈에 보였지만 저 힘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렇게,”

필목현이 손을 들어 올린 것은 그때였다.

입술이 나직하게 달싹였다. 피투성이 손이 허공에 인(印)을 맺었다.

스……슷.

그리고 모든 것이 멎었다.

지월이 뿜어낸 복마장이 아슬아슬한 간격을 앞두고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닿은 것처럼 멈춰 서 버렸다.

지월은 복마장의 출수 자세 그대로 굳었으며 그를 둘러싼 공기마저 흐름을 멈추었다.

시간이 멎었다.

뚝 잘라 낸 것처럼.

그 단절된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필목현 혼자였다.

필목현은 지체 없이 용천휘의 덜미를 낚아 들었다.

“살아남으십시오.”

푸들푸들 떨리는 입술에서 떨어진 피가 용천휘의 뺨을 더럽혔다. 필목현은 그마저도 닦아 주고 싶다는 듯 안타깝게 용천휘를 보았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가 멈출 수 있는 시간은 애석하게도 촌음.

필목현은 품 안에서 작은 목갑을 꺼내 용천휘의 가슴팍에 찔러 넣었다.

“부디.”

그리고 필목현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드나들 정도의 작은 창으로 용천휘를 던졌다.

휘익!

쿵!

“……어디 부러지지나 않았으면…… 우욱!”

필목현이 입으로 곤죽이 된 내장을 쏟아 냈다. 푸들푸들 떨리는 무릎을 간신히 움직여 그가 향한 곳은 적혈대법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강백이 있는 곳이었다.

“부디 사형분도…….”

입을 벌릴 때마다 더운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필목현은 지강백의 옷자락을 쥐어 당겼다. 지강백이 질질 끌려 창 밑까지 왔다.

그러나 벌써 허공에 맺은 축시의 인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필목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지강백은 아직 살아 있어야 했다. 그는 지금 용천휘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부디 살……아……서, 소……소야를……자, 잘 부타……”

……툭.

지강백을 쥐고 있던 필목현의 손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필목현의 눈이 부릅 뜨인 채 움직임을 멈췄다.

허공의 인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열천지복마!”

퍼엉!

용천휘가 사라진 빈 공간을 지월의 장력이 후려쳤다.

구파일방의 인사들이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 눈을 끔벅여 댔다.

그리고,

“이게 대체……!”

지강백이 정신을 차렸다.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외쳤다.

“마교가 도망친다!”

“잡아라!”

지강백은 지월이 저를 향해 두 손을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눈보다 앞서 온몸의 감각이 반응했다.

‘죽는다!’

더는 생각할 것도 없이 지강백이 창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퍽!

지강백의 몸이 창을 뚫고 2층 아래로 떨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몸을 가볍게 만들어 소리 없이 지면에 내려앉은 그가 전각을 등지고 뛰기 시작했다.

‘대체…….’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홍수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지막으로 그가 기억하는 것은 마교로 몰린 용천휘를 제 등으로 감싼 일이었다.

―증명해! 네가 마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제 목소리가 고막 안을 징징 울렸다.

지강백은 끝까지 용천휘를 믿고 싶었다. 제 입으로 마교와 연관이 없다 했으니 이번에도 아니라 해 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용천휘는 지강백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렸다.

―유감이야.

그는 이제껏 지강백을 속여 왔다는 말을 했다.

―나는, 대명천교의 주인이 될 몸이야.

자신이 마교의 소교주라는 것을.

“빌어먹을!”

지강백이 잇새로 욕설을 토해 냈다.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지강백은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처음으로 용천휘와 그가 백발마인과 마주쳤을 때였다.

그때도 용천휘가 제 등 뒤에 있었다. 그는 용천휘를 살리려고 했고, 용천휘는……

“그게…… 네 짓이었다고?”

백발마인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지강백은 지금에서야 용천휘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정확히 손바닥에만 난 상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백발마인들을 상대하며 얻은 상처이리라.

용천휘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무공을 쓸 수 있었다. 따라서 몸이 아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그가 했던 모든 말이 다 거짓인 셈이었다.

지강백은 용천휘의 빌어먹을 성격이나 이기적이고 막돼먹은 언행의 대부분이 제 몸을 다스리지 못해 불거져 나온 혹이라 생각했다.

허나 아니었다.

그가 사제를 이해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 되어 버렸다.

용천휘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저 색다른 놀이였던 걸까.

아니면 종남의 제자라는 신분을 얻어 천하무도회에 숨어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 어느 쪽이든 의미가 없었다.

용천휘는 마교였고 처음부터 사문을 속였다. 그에겐 사문이라는 것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배신감이 쥐 떼처럼 뱃속을 갉았다. 누가 제 목구멍에 손을 넣어 심장을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네가…… 네…… 우욱!”

지강백이 참지 못하고 울혈을 토해 냈다. 바닥을 더럽히는 핏덩이는 더운 비린내를 뿌렸다.

피 냄새가 그렇게 역겹다는 것을 지강백은 처음 느꼈다.

배신이 그렇게나 비리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저기 있다!”

“감히! 이곳에서 살아남을 작정이더냐!”

그러나 지강백에게는 배신의 고통을 누를 시간마저 없었다.

벌써 등 뒤로 그를 뒤쫓는 무리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가장 앞서 오는 자가 지월이라는 점이었다.

“마교는 필히 멸하리라!”

지월의 가사가 부풀어 올랐다.

지월은 달려오는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대력금강장을 밀어냈다.

“하압!”

퍼엉!

“우욱!”

등을 비껴 맞은 지강백이 피를 토하며 서너 장을 날아갔다.

“허, 피했더냐?”

지월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강백은 대력금강장을 피하려고 했다.

출수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고 반응 속도도 느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강백은 지월의 장력을 피하지 못했다. 지강백이 짐작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위맹했던 장력은 피했다고 생각했던 순간 등을 가격했다.

지강백이 할 수 있는 일은 일 장을 얻어맞는 동안 달리는 속도라도 더하는 것뿐이었다.

덕택에 거리는 조금 더 벌어졌다.

“대사!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저는 마교가 아닙니다! 대사께서는 종남의 무공을 알고 계십니다!”

지강백이 피가 반, 소리가 반인 음성을 토했다.

그런 지강백을 향해 지월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종남파 전부가 마교라는 소리일 테지. 이미 문파 전체가 마교의 수중에 넘어간 게로구나!”

“그 무슨……!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제 그만 죽어라!”

휘리릭!

지월이 양팔을 교차해 휘두르자 가사가 펄럭였다. 내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

지강백의 눈에 캄캄한 절망이 내려앉았다.

지월마저 그를 믿지 않는다면 기대할 것이 없었다. 구파일방의 인사들은 그가 하는 말을 한번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강백에게는 마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도가 없었다. 반면에 저들에게는 지강백이 마교와 한패였다는 증거가 있었다.

“흐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은 살기 위해서 도망쳐야 했다.

지강백은 이를 꽉 물고 신형을 솟구쳤다.

“하압!”

쿵!

지월이 오른발을 구르며 주먹을 내질렀다. 백 보 밖의 바위를 부순다는 권풍이 지강백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으윽!”

또다시 각혈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강백은 솟구치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지강백의 몸은 장경각과 참선동을 구분하는 담에 거칠게 처박혔다가 그 밑으로 떨어졌다.

“잡아라! 결코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마라!”

지강백은 담을 넘어오는 살기 어린 음성들을 들으며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켰다.

타닥! 츳!

발에 밟히는 한 줌의 흙조차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 * *

소림이 발칵 뒤집혔다.

종남파의 탈을 쓰고 천하무도회에 잠입한 마교를 찾아내기 위해 소림 전체가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꿈틀거렸다.

이미 희생자를 본 이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교의 소교주를 일부러 놓아 주고 서역의 본거지까지 가는 길 안내로 쓰자는 의견을 내세워 볼 틈도 없었다.

지월이 직접 앞장서서 마교를 뒤쫓는 지금, 서역 정벌이라는 말에 힘을 보태 줄 이도 없을 듯 보였다.

“일이 대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백사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천하무도회까지는 그의 생각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그는 일부러 종남의 장문령부를 훔쳐 오는 수고까지 했다. 마교와 연관이 있는 게 확실한 용천휘를 소림으로 오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결국 종남의 두 제자는 천하무도회에 왔고, 그로서는 감사하다고 할 도리밖에 없는 사고를 쳐 놓았다.

당주화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는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였다.

백사준은 일부러 가장 극적인 때를 노려 마교의 존재를 발설했다.

지강백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긴 했다.

사제를 끝까지 믿으려 했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의를 위한 사소한 희생에 불과했다.

한 가지 더 변명을 달자면 지강백이 어리석은 탓이었다. 사제가 마교라는 증거를 들이대도 믿지 않으려 했다.

“쯧. 그러게 진작 손을 뗐으면.”

백사준이 혀를 찼다.

지강백을 제외하면 모든 것은 제대로 굴러갔다.

기대했던 대로 군웅들은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고, 마교에 대한 분개심이 삽시간에 끓어올랐다.

이 기세를 서역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뭔가가 조금 어긋나기 시작했다.

일단 지월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월은 되도 않는 밀약을 얘기하며 용천휘를 지켜보자는 식이었다.

마교의 소교주인 그가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다는 그 마교의 진식을 저들 땅으로 옮겨 가겠노라 약조했다고 했다.

덕분에 마교에서 왜 한 대(代)에 한 번씩 중원으로 올라와 분탕질을 치는지 알아냈지만, 그걸 옮기겠다는 말을 고스란히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백사준은 거짓말을 교활하게 내뱉던 용천휘의 모습을 똑똑히 새겨 두었다. 그가 지월에게 진실을 말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월은 태연하다 못해 태평할 지경으로 용천휘를 두둔했다. 그를 믿어 보겠다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필멸을 말씀하시니…….”

백사준은 갑자기 지월이 입장을 바꾼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래야 용천휘를 서역까지 가는 길 안내로 쓰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한번 되짚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수가 아니라면 서역 정벌은 예상외로 복잡해지는데…… 제기랄.”

답답해진 백사준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에 화색이 돌았다.

“……아! 이런 젠장. 사천당문이 있었잖아! 그래, 당가주가 처음 사달을 일으켰다고 했지.”

직접 보지 않았기에 사천당문을 깜박 잊고 있었다.

마교에서 당가주에게 어떻게든 손을 써서 지월의 암살을 시도한 것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단서가 남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사천당문에 소속된 사람들은 대련이 한창 이루어지던 와중에 지월의 명으로 신속히 참회동에 가두어 둔 상태였다.

혹시 지월은 그 사실을 믿고 용천휘를 죽여도 된다 판단한 것일까.

허나 사천당문이 마교와 연관이 있다 해도 마교의 본거지를 정확히 알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잠시 서서 생각을 잇던 백사준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서 직접 캐 봐야겠어.”

타닷.

그가 참회동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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