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광풍
“이 무슨 짓이오! 대련자가 아닌 이는 비무대에 오를 수 없소!”
휘익!
백연이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와 현달 도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미 분노한 현달 도인에게 천하무도회의 규율 따위는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천하무도회인가! 제자의 죽음 앞에서도 남들의 대련에 그저 박수나 치고 있으라는 뜻이냐!”
“곡해 마시오! 죽음은 죽음이고 규율은 규율! 진정 제자의 죽음을 위하고자 한다면 비무대 밖에서 흉수를 찾음이 옳지 않겠소!”
“저놈이 흉수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소림에 도착한 첫날부터 환이의 팔을 부러트린 저놈이 아니라면!”
“그것은 말씀드린 대로 비무대 밖에서 해결할 일이외다. 소승은 이 비무대를 책임진 몸으로서 도인을 말려야 함을 이해하시오.”
“아니,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소림은 살인자를 감싸고 돈단 말인가!”
지강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역시 표정이 사나웠다.
제자를 잃은 현달 도인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 역시 연심환의 시체를 확인하고 놀랐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누가, 무슨 이유로 천하무도회에 참석 중인 화산파의 제자를 죽였을까.
개인적인 원한이었을까 아니면 문파 간의 알력 다툼이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연심환이 그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로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살인자로 몰고 갈 수는 없었다.
“저는 화산의 제자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그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지강백이 나서자 현달 도인의 눈이 그를 향해 홱 돌아갔다.
“네놈이 환이의 팔을 부러트리지 않았더냐! 화산에 앙심을 품었다는 증거일 터!”
“보통은 그 반대가 되겠지요. 앙심은 설욕할 것이 있다 믿는 사람들이 품는 것이 아닙니까?”
지강백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팔을 부러트린 것도 아닙니다. 정상적인 무인의 팔이라면 고작 그런 수에 부러질 일은 없을 줄로 압니다.”
지강백의 침착한 대꾸는 현달 도인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라 기름이 되었다.
“닥쳐라, 이놈! 화산의 제자를 시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모욕까지 더하는 것이냐!”
쉬익!
현달 도인이 다짜고짜 출수했다.
“이 무슨 짓이오! 멈추시오!”
백연이 소리쳤지만 늦었다. 현달 도인의 검은 이미 지강백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흐읍,”
지강백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두 번의 비무를 치르며 고갈되었어야 할 내력은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충만했다. 지강백이 삼킨 공공화단의 효능은 그것을 만든 당사자인 독귀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소환단과 만년설삼의 기운이 몸에 남아 공청석유와 어울려 뜻하지 못한 상승 작용을 일으킨 탓이었다. 공공화단이 아니었다면 지강백은 방금 전 태화 진인과의 내력 대결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태을신공 십 성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제자의 원수를 갚겠다!”
쐐액!
현달 도인의 검이 날카로운 검기를 토해 냈다.
지강백은 목검을 내던졌다. 대신 진기를 전부 집중시킨 양손으로 현달 도인의 검을 잡았다.
콰직!
손바닥 사이에 빈틈없이 끼어든 검이 거친 울음을 토했다.
“하앗!”
지강백은 기합을 터트리며 양팔을 옆으로 꺾었다.
뚝!
검기로 감싸인 매화검이 뎅겅 부러졌다.
“맙소사!”
남궁진현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벌써 두 번째였다.
“맨손으로 검기를 부러트리다니! 그사이 또 성장했다는 말인가!”
남궁완은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금 전 무당의 태화 진인이 종남의 새파란 일대제자에게 패배한 충격이 아직도 끓는 불처럼 이글대며 남아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현달 도인이 끼어들어 얼음물을 뿌리는가 싶더니, 종남의 일대제자는 단숨에 얼음마저도 녹여 버렸다.
놀라고 놀란 데다 또 놀란 나머지 머릿속에서 치이익 연기가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종남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바위처럼 웅크리고 앉아 침묵하던 세월,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를 키워 냈다는 것을.
그 제자로 인해 향후 종남의 시대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지강백의 등장은 어떤 면에서는 그 옛날 지월의 등장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지월은 소림이라는 후광을 이미 어깨에 매단 상태였다. 그가 양영천을 일 초에 패배시켰던 천하무도회는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진작부터 소림 제일의 무재라는 지월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반면에 지강백은 완전히 무명인 상태였다. 그는 아직 종남의 일대제자일 뿐, 명호조차 없었다. 이 자리에는 지강백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가 더 많았다.
지강백의 승리는 종남이 자취를 감추었던 근 삼십 년 이내 강호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터였다.
지강백이 부러진 검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저는 고작 시비가 걸렸다고 사람을 죽이진 않을 겁니다. 살생을 쉬이 하기 위해 무를 배운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 사부님께서는 그리 가르치셨습니다.”
현달 도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강백이 말이 옳음을 알아서가 아니라, 방금 일어난 일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는 난데없는 흉몽 속을 헤매는 기분일 것이다.
“제게 제자의 죽음을 탓하는 것은 관두고 진짜 흉수를 찾으십시오. 그게 제자의 억울함을 위하는 길일 줄 압니다. 미력하나마 저 역시 힘을 보태겠습니다.”
“…….”
현달 도인이 지강백에게로 눈을 돌렸다.
으득, 어금니를 깨무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강백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 어떤 말도 받아들이시지 못하는 겁니까?”
“네, 네놈은…… 네놈이…….”
지강백은 현달 도인의 이성이 돌아오길 바라며 천천히 마음을 다스렸다.
“비무대를 내려가십시오. 이 이상 천하무도회의 규율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네놈이 아니라면…… 그럼 누구란 말이냐…… 누가 내 제자를…….”
“그것은 도인께서 비무대를 내려가시는 순간부터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무도회는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비무대 밖에서 죽는 이가 발생했으니, 이부터 먼저 해결을 하려 들 것이다.
이는 지강백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저도 거들겠습니다.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흉수를 찾도록.”
지강백이 현달 도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시 물러나 있던 백연이 다가와 지강백의 말을 거들었다.
“비무대가 정리되는 대로 예선을 중단하겠소이다. 죽음을 가벼이 여길 자는 소림의 어디에도 없소. 본회를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흉수를 밝혀내겠소.”
“……반드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외다. 반드시……!”
마지못해 외치면서도 현달 도인의 눈은 지강백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결코 의심을 거두지 않겠다는 뜻이 칼날 같은 안광이 되어 지강백을 찔러 댔다.
“후우…….”
현달 도인이 뱃속에서부터 한숨을 토해 내며 목이 잘린 제자의 시체를 안아 들었다.
이렇게 비무대 위의 상황은 얼추 마무리가 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태, 태화 진인!”
비무대 아래의 날카로운 외침이 이를 방해했다.
“……! 도, 독이다!”
“태화 진인이 당했다!”
백연이 소리쳤다.
“뭐라고?”
그가 비무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소림의 불영선하보를 전개한 백연이 새하얀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태화 진인에게 이르렀다.
“마, 맙소사!”
온몸이 새카맣게 변색된 태화 진인이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칠공에서 핏물이 아닌 흑수가 흘러내렸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화산만큼이나 무당의 사람들도 넋이 나간 듯했다.
“어째서 천하무도회에 이런 일이!”
그 대답은 비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한 입구에서 들려왔다.
“그걸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서는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든 개방의 제자들과 백사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개방은 제자들은 비단 그들뿐이 아니었다. 그 뒤로 줄줄이 이어지는 거지들의 행렬은 비무대를 중심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하나같이 눈빛을 세우고 있는 그들의 행보는 마치 그물과 같았다. 여기 있는 누군가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개방의 백 소방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개방의 제자들이 저리 많은 숫자로 무얼 하려는 게요?”
“사실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사실이라?”
“오늘의 일과 관련해 개방에서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백사준의 걸음을 따라 사람들 틈에 저절로 길이 생겨났다. 백사준은 구파일방의 인물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비무대 앞까지 걸어왔다.
“화산의 제자, 무당의 장로. 그리고 사천당문의 직계까지.”
백사준이 나무 상자의 덮개를 밀쳤다. 쾅, 소리를 내며 열린 덮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개방에서 들고 온, 기이할 정도로 길쭉하고 큰 나무 상자는 바로 관이었다.
관이 열리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시체가 드러났다.
“……아, 아니!”
“설마…… 사천당문이라고?”
당주화의 시체였다. 당주화의 시체는 며칠은 된 것처럼 이미 고약한 시취를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는 방금 쓰러진 태화 진인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검게 변한 시체는 칠공에서 흘러나온 흑수로 반쯤 잠겨 있었다. 얼굴을 온통 뒤덮은 독공의 흔적이 아니었다면 당주화라는 것을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사인이 동일합니다. 같은 독, 같은 수법입니다. 이는 흉수가 동일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
도무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혼란이 장내를 덮쳤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누가 이들을 죽였겠습니까?”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충격과 반비례하듯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침묵 속에서 백사준의 음성이 소름 끼치도록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구파일방에 속한 무림의 인사들을 죽이고, 천하무도회를 이토록 어지럽히는 무리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
백사준의 시선이 천천히 장내를 훑어 갔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가공한 독. 아무도 모르는 사인. 누군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흉수의 정체.”
“…….”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장내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마교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 소름 같던 침묵이 일제히 깨어졌다.
“마교라니!”
“마교가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개방은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마교라니! 마교가 어찌!”
백사준의 시선이 비무대 위의 지강백을 향했다.
“이 자리에는 구파일방의 누구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독, 아무도 모르는 사인. 죽음의 이유. 짐작할 수 없는 흉수.
그리고, 이제껏 누구도 존재를 모르던 자.
백사준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종남의 제자라 스스로를 칭하는 그들이 정말로 이 땅에서 사라진 종남의 제자인지,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
하늘에 걸린 태양만큼이나 거대한 탄구가 폭발한 듯했다.
현달 도인이 가장 먼저, 가장 큰 소리를 터트렸다.
“네놈이 마교였더냐!”
지강백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백사준을 바라보았다.
“백 소방주님!”
백사준은 눈곱만큼의 사감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 되어 지강백의 말을 받았다.
“증명해 보시오! 종남의 제자라는 것을!”
백사준은 장난을 치는 게 아니었다. 저렇듯 정색을 하고 자신을 마교로 내모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 걸까.
지강백이 입술을 질근 물었다.
“백 소방주님은 저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마교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왜 하필 종남이었소? 종남이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어 아무도 알아보는 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오?”
“제게는 사부님께서 보내신 장문령부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임은 어찌 증명할 생각이오?”
“사문을 대고 거짓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문이 거짓이라면?”
백사준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예리한 꼬챙이가 되어 지강백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섬서에서 전해 온 소식이 하나 있었소. 종남에서는 얼마 전 장문령부를 도둑맞았다 하더이다. 그래서 종남의 장문인이 직접 하산해 도둑의 행방을 쫓고 있다 했소.”
백사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장문령부를 훔쳐 낸 당사자가 개방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강백이 소리쳤다.
그러나 단신으로 비무대에 서 있는 그에게는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증거를 찾아낼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마교라면 모든 게 설명이 되지 않느냐! 저 시체들도, 저 터무니없는 무공도!”
“천하무도회를 노린 것인가!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마교를 색출하라! 분명 혼자가 아닐 것이다!”
지강백을 둘러싼 고함은 즉시 살기로 변질돼 그에게 내리꽂혔다.
저도 모르게 주춤 걸음을 물리는 지강백을 보며 백사준이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러게 내 말하지 않았소. 사제를 조심하라고.”
지강백은 백사준의 눈가에 언뜻 스치는 미안함을 보았다.
“소협의 일은 나 역시 유감이오. 내가 한 경고를 끝까지 듣지 않았던 소협이 치러야 하는 대가라 생각하시오. 나는 소협을 대의를 위한 불가피했던 희생이라고 여길 터이니.”
지강백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백 소방주님. 제 사제는,”
그러나 지강백의 말은 허공에서 끊겼다.
백사준이 당주화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높이 치켜들었던 탓이었다.
그는 관으로 지강백을 겨냥하며 소리쳤다.
“사제를 위한 변명을 어디 죽은 자들 앞에서도 해 보시오!”
휘익!
백사준이 들어 올린 관이 지강백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백 소방주님!”
쾅!
지강백이 날아오는 관을 피해 신형을 날렸다. 관이 비무대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관을 던진 것은, 지강백의 시선을 가리기 위한 수였다.
“저자를 잡아라!”
관을 던지자마자 몸을 돌린 백사준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것은 용천휘의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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