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68화 (68/346)

제68화 파란(波瀾)

“허허…… 기어이 일을 내는구나.”

지월이 지강백을 보며 남들과는 다른 의미의 한숨을 내쉬던 때였다.

“방장스님.”

사미승이 졸졸대는 걸음으로 지월에게 다가섰다.

한창 비무대에 정신이 쏠려 있던 지월은 가까스로 지강백에게서 눈을 떼고 사미승을 돌아보았다.

“음? 왜 그러느냐?”

“첫 번째 방 손님이 이걸 내어주셨습니다. 방장스님께 드리라고요.”

“어떤 손님이 내어주셨더냐?”

사미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다 아시면서 뭘 새삼 물으시냐는 뜻이었다.

“그 왜 어마어마하게 잘생기신 손님이오.”

“오호라.”

지월은 사미승이 내미는 자그마한 옥병을 받아들었다.

“수고했다. 가는 길에 공양간에 들러 떡이라도 달라 하여라.”

사미승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방장스님.”

사미승이 사라지자 범광이 물었다.

“이것은 혹 그 일을 돕는 약입니까?”

“그럴 게다.”

지월은 옥병을 열었다. 언젠가 용천휘의 부채에서 맡아 본 적이 있는 독특한 향이 흘렀다.

용천휘는 적혈대법을 수월히 하기 위해선 체질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했다. 그때 사용하는 약이 있으니 때가 되면 보내겠다 했다.

지월은 흔쾌히 옥병에 든 것을 마실 기세였다.

“잠깐!”

범광이 그를 말렸다.

“어째 그러느냐?”

“한 번 더 생각해 보심이…….”

“쯧쯧.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고작해야 한 시진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은 귀한 것이니 이를 남에게 적선할 수 있다면 외려 기뻐할 일이 아니더냐.”

“…….”

잠시 말릴 말을 찾던 범광이 입술을 실룩였다.

“방장. 설마 무공을 옮긴다는 그 대법이 궁금하여 이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어……?”

범광의 말에 지월이 헛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무광이라 하더라도 강호의 대사(大事) 앞에서 제 사욕을 앞세울 리는 없는 것이다.

지월의 표정을 확인한 범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면 되었습니다. 저도 더는 말 않겠습니다.”

“허허, 참……. 그간 내가 네 눈에 어찌 보였는지 짐작을 하게 만드는 말이로구나. 오냐.”

지월은 옥병을 기울여 안에 든 것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으음……. 맛은 별로 없구나.”

“그럼 그게 맛있겠습니까.”

“……너, 내가 마음에 안 들더냐.”

“아니아니…… 그게 맛이 없을 것이 뻔하니까요. 입가심할 거라도 가져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됐다.”

지월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약이 왔으니 곧 때가 오겠구나. 그 대법이 시행되면 의식을 잃는다 했으니 나는 잠시 몸을 가려두어야겠다. 네가 나를 좀 지켜다오.”

이제야 감원다운 역할을 하게 됐다는 생각에 범광이 미미한 화색을 띄웠다.

“아무래도 그게 낫겠습니다. 잠깐 자리를 비우신다 일러두겠습니다.”

“그렇게 하자꾸…… 아니다. 두 번 움직일 게 무에 있겠느냐. 예서 같이 일어서자.”

지월과 범광이 막 자리를 뜨려던 순간이었다.

“대사.”

비무대를 둘러싼 자리에서 가장 상석을 차지한 지월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범광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사천의 가주 아니십니까. 본회 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소림의 방장 대사께 긴히 보여드려야 할 게 있어 왔소.”

“긴히 보여드릴 것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보면 알 것이오. 그리고 그대가 계속 내 앞을 막고 있을 수는 없을 텐데.”

그는 사천당문의 가주 당일적이었다.

넓적하게 생긴 괴상한 영웅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지만 분명 당일적이 맞았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혼자였다.

구파일방과는 위치가 다르다 하나 그 역시 한 문파의 수장이었다. 수장 대 수장이라면 감원이 끼어드는 것은 무례였다.

“허허. 당가주께서 오셨구려. 오랜만이외다.”

지월이 적절한 틈에 범광을 감싸듯 앞으로 나섰다.

예의로 치면 무턱대고 걸음 한 저쪽에도 잘못은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당가주가 손님인 상황.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노승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하셨소이까?”

낮은 말투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지월은 비무대 위로 쏠린 관심이 이쪽에게로 옮겨오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이며 당가주를 맞았다.

가능하다면 용천휘에게 약속한 한 시진을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보냈으면 했다.

“이것이오.”

쿵!

하지만 당일적은 지월의 뜻에는 아랑곳없이 이곳까지 가져온 커다란 물건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아무리 비무대 위의 상황이 흥미롭다 하나, 이쯤 되면 하나둘씩 고개를 돌리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 물건이란 게 아무리 봐도 관짝처럼 생겼으니 호기심은 더해졌다.

“이게 무엇이오?”

“직접 보셔야 하오.”

당일적은 소매를 휘둘렀다. 무거워만 보이던 관 뚜껑이 그 가벼운 손짓에 스르륵 밀렸다.

과연 당문의 가주라며 감탄할 새도 없이, 관 속의 물건이 드러났다.

“이것이……?”

대답 전에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어디서도 맡지 못했던 기이한 냄새였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강렬한 향은 약초의 냄새인 것도 같았고 독인 듯도 싶었다. 그리고 그 속에 은밀히 감춰진 또 다른 냄새도 있었다.

그것은……

“시신이라니!”

사람의 육신이 썩어가는 냄새였다.

당일적이 가져온 것은 정말로 관이었던 것이다. 관 속은 끈적대는 검은 물이 차 있었고, 그 속에는 반쯤 허물어진 시신이 잠겨 얼굴만 간신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게 무엇이오!”

지월이 당일적에게 묻는 순간이었다.

“……!”

관 속의 시신이 진물로 뒤덮인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는 시신이 아니었다. 저렇게나 다 썩어가는 몸으로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곧 네 몸이 될 모습이다!”

쐐애액!

당일적이 지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신에서 뭉게뭉게 구름처럼 독무가 일어났다.

“하압!”

지월은 단전에 힘을 모으며 범광을 밀쳐냈다.

“다들 호흡을 막으시오!”

웅혼한 내공이 실린 단호한 음성이 마치 귓가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소리는 비무대에 서 있는 지강백의 귀에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지강백이 당황해 지월 쪽을 돌아보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독무가 지월을 뒤덮었다. 지월이 막고 있는지, 아니면 집요하게 지월만을 노렸던지 독무는 지월의 반경 일 장 밖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방장!”

범광이 외쳤다. 그러나 독무 안에서는 여전히 온화한 지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나서지 말거라. 쉬운 독기가 아니구나. 저 멀리 물러나 있거라.”

휘이이잉.

독무가 소용돌이에 말린 듯,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회전의 축은 지월의 오른발이었다.

지월이 발끝으로 서서 회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하던 회전이 태풍처럼 거세졌다.

스스스스슷!

공간이 줄어드는 모양새로 독무가 압축되었다. 소용돌이 형태를 띠던 독무는 점점 가늘어져서 창처럼, 그러다 곤처럼, 이어서 한 손에도 쥐일 정도의 작은 덩어리가 되었다.

“나무아미타불!”

지월의 외침과 더불어 독무는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당가주! 이 어인 일이오!”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지월의 신형이 움직였다.

슷, 펑!

일 보를 내딛음과 동시에 손이 뻗어 나갔다.

소림의 백보신권이었다. 지월의 권풍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당일적의 신형이 풀썩 날아올랐다.

지월이 그보다 빠르게 몸을 이동하며 당일적의 퇴로를 막아섰다.

그러나 당일적은 지월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

갑자기 살기를 드러내는 당일적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무리 당일적이라고 해도 천하제일기의 주인인 지월과 일대일로 맞붙는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방금 전 그가 보여준 독공은 소름이 끼칠 만큼 위협적이었으나 지월은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독무를 처리했다.

“……나무아미타불.”

묵직한 체념을 토해낸 지월이 결국 당일적을 향해 다시 일 장을 뻗었다.

이번의 장은 소리가 없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당일적이 지월의 손바닥에 철썩 들러붙은 듯 보일 것이다.

지월이 엄한 눈으로 당일적을 들여다보며 내뱉었다.

“당가주의 무공을 거두겠소이다.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연유를 밝히지 않을 시엔 부득이하게 목숨도 거두겠소.”

“…….”

당일적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월은 당일적에 닿아 있는 손이,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빨려들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

불길한 예감은 더 이상 감이 아니었다. 그리고 감이 아닌 생생한 감각이 된 순간, 이미 늦어 있었다.

스스슷…… 퍼엉!

누구도 예기치 못하던 순간 당일적의 복부가 그대로 터져버렸다.

“방장!”

“지월 대사님!”

지월이 쏟아지는 핏덩이와 살점 앞에 노출되었다.

지월이 신형이 크게 휘청였다. 두 눈이 감겼다. 그는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범광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지월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멈춰라.”

“……! 방장!”

“나는 괜찮으니.”

그새 몸을 가다듬은 지월이 가볍게 소맷자락을 휘둘러 더러워진 공기를 치워냈다. 분명 쓰러질 듯 보였던 지월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 싶게 멀쩡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범광이 거듭 물었다. 지월은 그 말에는 답을 하지 않고 당일적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기이한 영웅건이 반쯤 풀려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드러난 머리칼이 문제였다.

“아…… 아니!”

머리칼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희끗하게 새는 것과는 달랐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매끈하게 빛을 발하는 흰 머리칼은 소름이 돋도록 이질적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어째서 사천당문의 가주가 이런 짓을!”

“지월 대사!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독무가 걷히고 이제야 몰려든 사람들이 정황을 물었다.

지월은 말없이 소매를 휘둘렀다.

슷, 쿵!

당일적이 가져왔던 관 뚜껑이 도로 덮였다.

“이것을 어서 내 방으로 옮겨라. 마교의 증거다.”

“맙소사…….”

범광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교.

그는 아직 마교를 두 눈으로 겪어보지 못했다. 마지막 마교의 침공은 지월이 소림에 갓 입문한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마교의 존재가 이렇듯 생생히 세상에 드러났다.

그것도, 오대세가의 일원인 사천당문의 형태로. 중원 무림의 한 축이 마교에게 잠식당한 것이다.

범광을 대신하듯 다른 인사들이 기함했다.

“마교라니! 지월 대사! 그게 사실이오!”

“마교……! 마교가 천하무도회에?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나!”

“저 기괴한 머리칼이 마교의 증거라는 겁니까! 대사! 어서 입을 여시오!”

“이제껏 마교의 행보를 보면 이럴 수가……,”

“그렇다면 천하무도회는,”

지월은 자신을 향해 달려들듯 입을 열어 대는 구파일방의 인물들을 돌아보았다.

“갈(喝)!”

“……읍,”

“으……,”

지월이 내력을 실어 고함을 치자 다들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었다.

“다들 입을 다무시오. 마교가 아직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속히 마교의 행적을 밝혀야 할 것이 아니오!”

“…….”

수십 쌍의 눈이 지월을 향해 모여들었다.

지월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마교의 목적은 천하무도회를 틈타 중원을 넘보려는 것. 분명 이곳에 기척을 숨긴 채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이외다.”

지월의 눈길이 비무대 위를 향했다.

비무대에는 지월에게 사고가 생긴 뒤로 그 자리에 멎어 있던 지강백과 백연, 그리고 태화진인이 있었다.

“그럼 어찌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범광이 물었다.

지월은 지강백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해라. 대진을 계속 이어. 그리하면 마교에서 무얼 노리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월을 따라 하듯 사람들의 눈이 다시 지강백에게로 쏠렸다.

종남파 일대제자라던 그의 존재는 이번 천하무도회에 불어온 파란의 중심이었다. 마교가 갑자기 드러나기 전까진.

“무승들을 보내어 사천당문의 사람들을 한데 모으거라. 그들이 마교에 어디까지 발을 담그고 있는지부터 알아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자리를 지키게 해라. 별일이 아니었다 전해라.”

“예.”

범광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대진을 멈춰라! 천하무도회는 더 이상 진척이 되어서는 아니 될 터!”

울분에 찬 고함 소리가 비무대를 반으로 쪼개며 날아들었다.

현달도인을 비롯한 화산파 인물들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어수선한 의혹이 장내를 번져감과 동시에,

“화산의 제자가 살해되었소!”

현달도인의 피 끓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아……!”

사람들은 현달도인이 제자의 시체를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시체에는 목이 없었다. 현달도인은 목이 없어진 시체를 내내 품에 안고 왔던 것이다.

목이 없어도 누구의 시신인지는 금세 확인이 되었다.

값진 장식들로 멋을 낸 차림새와 오른팔을 감싼 면포, 허리춤에 찬 현달도인의 검.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라던 연심환의 시체였다.

“어떤 악인이 무슨 목적으로 정파의 올곧은 제자를 살해했단 말인가! 흉수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화산의 이름으로 천하무도회를 용납지 않을 것이오!”

애제자를 잃은 현달도인의 분노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서려 나왔다.

종남의 부활에 이어 마교과 사천당문, 그리고 화산파 제자의 죽음까지.

모두가 얼을 빼놓은 듯 정신이 사나운 와중에 현달도인이 제자의 시체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챙!

화산의 이름이 새겨진 명검이 가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현달도인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엉뚱하게도 지강백의 가슴팍이었다.

“그러니 너에게 제일 먼저 묻겠다. 화산의 제자를 살해한 흉수는, 네놈이냐?”

“……!”

가뜩이나 뒤숭숭하던 장내가, 또 한 번 거센 파도가 친 듯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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