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천하무도회 (3)
비무대 위에 선 지강백에게 시선이 집중될 동안, 용천휘의 눈이 소리 없이 붉어지고 있었다.
‘이 중 어딘가에 있다.’
비무대는 점점 더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분간은 사람들이 비무대에서 눈을 뗄 일이 없을 것이다.
그 틈에 그는 이매를 찾아야 했다.
‘나를 노린 것이라면 내가 사라져 혼자가 된 이 틈을 놓치지 않겠지. 반대로 천하무도회의 누군가를 노린 것이라면 내가 그 움직임을 찾아낼 터.’
소림사에 은신하고도 절대 족적을 들키지 않을 자.
아니라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필목현 쪽으로 의심의 추가 기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간 내 곁에서 그렇게 눈과 귀를 막아왔던가. ……빌어먹을.’
용천휘가 무언가를 잡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도 믿지 않겠다 했다. 그것이 교주가 지녀야 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라 믿었다.
그러나 더불어 온 세월까지 모두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그러니 내가 너를 찾겠다. 네가 무얼 하려 했든, 내가 그것을 막아주겠다.’
그가 배신하기 전에.
그를 막을 것이다.
‘나는 네게 배신당하지 않겠다. 너는 절대 나를 배신할 수 없어.’
용천휘의 혼잣말은 어느샌가 각오가 되었다.
점점 짙어지는 수라안의 붉은 빛처럼 무겁고 진득한 각오가.
* * *
비무대가 한눈에 보이는 상석에 앉은 지월은 사람들 틈으로 몸을 가린 용천휘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말했다.
“이제 시작이련가…….”
지월의 감원인 범광은 그 낮은 소리를 들었다.
그가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녕 그리 하셔야겠습니까?”
그는 지월이 용천휘와 간밤에 맺었던 밀약에 아직도 반대하는 중이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큰 데다가, 무엇보다 마교의 인물을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미 한 약조를 어찌 무르겠나.”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자리에 마교의 두 세력이 모두 있는 것입니다. 굳이 서역정벌을 갈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그래서 무얼 끝내겠다는 말이더냐.”
지월이 범광의 말을 잘랐다.
“저들이 매번 중원을 범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면, 그 이유를 없애면 될 것. 네가 말하는 방법은 이유를 없애는 것과는 거리가 멀구나. 둘로 갈린 세력이 모두 와 있다니. 이 좁은 소림에 마교가 섞여들어 와 봤자 얼마나 섞여 있겠느냐. 태반은 서역에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들은 여전히 중원 땅에 들어올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가 정말 마교의 소교주라면,”
“그 역시 쫓기는 입장이 아니더냐. 그것을 진정한 소교주라 보아야겠느냐.”
“그자의 사정입니다.”
“그래. 그 사정으로 인해 여기서 그를 없애면 가장 기뻐할 자가 누구겠느냐. 서역에 남은 자들이 아니겠느냐?”
“그건…… 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제야 범광도 지월의 말을 모두 납득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여…… 방장의 몸에 변고가 생기면 어찌합니까. 그 대법이라는 것으로. 저는 그것이 가장 걱정입니다.”
“그건 걱정할 바가 아니구나.”
지월은 오히려 태연한 안색이었다.
“그 대법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걸 어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직접 본 것도, 겪은 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증거 아니겠느냐.”
지월이 느긋하게 수염을 한 번 쓰다듬었다.
용천휘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지월의 눈은 비무대에 고정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비무대 위에서는 지강백이 태화진인을 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강백은 처음 봤을 때와 또 달랐다.
심지어 며칠 전, 아니 어제와도 달랐다. 그는 무에 미쳐있던 젊은 날을 떠올리게 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지월은 자신까지도 다시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무라는 거대한 진리 앞에 서 있던, 이른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가슴이 두근대던 그 시절처럼.
지월은 지강백의 자세를 꼼꼼히 훑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한이 없는 대법이라 한다면 그자는 진작 제 몸을 벗어났을 것이다.”
“아……,”
“그가 말하길 체질이 맞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였다. 그자의 몸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허나 그 또한 계산한 바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지.”
그리고 지월은 그저 빙그레 웃어 버렸다.
범광이 답답했던지 발을 굴렀다.
“방장. 그게 대체,”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더구나.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그러니 나는 믿을 도리밖에 없지 않겠느냐.”
“…….”
범광이 말을 잃었다.
불경을 읊은 세월만큼이나 사람을 보는 눈은 명징해지기 마련이었다.
지월의 눈까지 의심하라 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월은 용천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는 제 눈을 믿는 것이었다.
지월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돌리는 범광을 향해 또다시 물끄러미 웃었다.
“그리고 나를 추궁하는 것은 네 몫이 아니지. 이미 개방의 소방주가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 않더냐.”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허허…… 그래. 모두가 내 눈과 같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개방이 도착했다.
하지만 개방이 온 이유는 천하무도회에 참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천하무도회를 발판 삼아 마교를 뿌리 뽑길 원했고, 그 일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 백사준이었다.
소림에 도착한 백사준은 지월을 따로 만났다.
지월이 용천휘와 나눴던 밀약을 얘기하자 백사준은 단연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월은 서역정벌보다는 대천혈성이 남긴 진을 없애는 데 더 힘을 싣겠다 했고, 백사준이 말로서 지월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백사준은 용천휘의 뒤를 살피겠다 했다.
용천휘가 거짓을 말했을 경우, 지월이 그와 했던 밀약을 깨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서역정벌에 나서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백사준이 지월을 말릴 수 없었듯이, 지월 또한 백사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지금, 천하무도회 본회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백사준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용천휘의 뒷덜미를 챌 틈을 엿보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인내하거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진실인지는 오늘 안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
지월의 말에 범광이 묵직한 고개를 떨어트렸다.
“예, 알겠습니다.”
지월이 한 마디 덧붙였다.
“기왕이면 종남의 차례는 모두 끝난 다음이라면 좋겠구나.”
그리고 허허 웃는 지월을, 범광이 체념한 듯 바라보았다.
“예, 예. 부디 그리되면 좋겠습니다.”
때마침 비무대 위에서는 승패가 갈리고 있었다.
* * *
슷! 쉭!
태화진인의 공격은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하는 권과 발경(發勁) 위주였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권풍이 다가온다 싶으면 그 속에 예기치 못한 강기가 숨어 있는 식이었다.
태화진인의 태극신공은 한계가 없는 듯했다. 발경이라면 분명 내력의 소모가 극심할 텐데도 그는 그 패도적인 공세를 유지했다.
지강백은 감히 받아치지 못하고 북두천강보와 은하유영비를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는 식으로 그를 상대했다.
그러다 보니 비무대 한쪽 끝으로 밀려났다.
“그럼 그렇지. 종남이 어디 무당에 비할 바인가.”
“이대로 끝이겠군. 비무대에서 제 발로 떨어지게 만들 참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무당의 오 장로 아닌가. 그를 맞상대할 자가 이 강호에 얼마나 된다고. 애초에 될 상대가 아니었지.”
비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말을 쏟아냈다.
종남을 향한 악의와 무당에 대한 안도가 주를 이루는 발언들이었다.
태화진인은 위태롭게 위치를 잡고 있는 지강백을 비웃었다.
“마치 무당과 종남의 처지를 보는 것 같구나. 종남은 이미 이 땅에 설 곳이 없다. 지금 네놈처럼.”
그 말을 듣자 지강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그는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지강백은 종남의 일대제자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 저런 식의 공격을 했던 것이로구나.’
강기를 강기로 받아친다는 것은 내력을 직접 비교한다는 것이었다.
태화진인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점을, 사방에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공격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내가 피해 다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비록 지강백의 대응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비무가 진행된다면 사람들은 종남의 일대제자가 무당의 오 장로를 상대하며 계속 수세에 몰렸다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지강백이 이를 꾹 물었다.
‘맞서야 한다.’
그리 쉬운 말은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더 오래 상승의 무학을 익혀 왔을 것이다. 실력과 경험이 월등히 앞서는 상대에게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패배를 향해 달려드는 꼴이었다.
‘그리고 져서도 안 돼.’
지강백은 일순 초조해졌던 마음을 다스렸다.
태화진인에 비해 자신이 나은 점은 분명히 있었다. 제 처지와 상대의 의중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당의 권법은 유함에 숨겨진 강함에 그 묘미가 있다. 유함만을 막아내도, 강함만을 피해도 부족한 것이다.’
유함은 부드럽다는 뜻이었다.
부드러운 것은 흐른다는 뜻이었고, 흐르는 것은 곧 변화였다.
변화라면 태을분광검도 부족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은 흘렀다. 흐르고 굴러 제 모습을 잊고 변화하더라도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이치였다.
한 방울의 비가 강이 되고 강이 바다로 흘러가고, 바다가 구름이 되어 구름이 다시 비를 뿌리는 것처럼.
비는 결국 세상을 덮었다.
태을분광검은 세상에 속한 한 방울의 비였다. 태화진인의 양의권이 그러하듯이.
지월이 떨어지는 비를 보며 문득 만들어낸 손장난은 무공이라기보다는, 무학의 원리를 한데 아우르는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하앗!”
지강백이 선제공격을 했다.
수세에 몰린 듯 보이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태화진인의 낯색도 달라졌다.
저 멀리서 비무를 지켜보던 남궁진현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것은 사실 태화진인이 이겨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구파일방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을분광검의 화려한 변초가 태화진인의 코앞에서 펼쳐졌다.
태화진인은 두 발로 굳건히 버티고 서서 지강백이 쏟아 붓는 초식들을 일일이 맞받아쳤다.
두두두두!
비가 거칠게 지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스스스.
소나기처럼 퍼붓던 비가 어느 순간 실바람에도 흩날리는 가랑비가 되었다.
목검이 태화진인의 양의권에 맞부딪히는 순간, 지강백은 제 힘을 회수해 태화진인의 힘도 비껴 흐르게 했다.
그토록 강맹하고 날카롭던 권경이 애꿎은 허공을 후려쳤다. 그 반동으로 태화진인이 흐트러진 신형을 가다듬는 동안 이번에는 지강백이 대천강검의 초식을 쏟아냈다.
직선의 검이 다시 무형의 변초가 되어 음양의 조화를 기반으로 하는 양의권과 수십 합을 어우러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갓 약관을 벗어난 무명의 청년이 무당의 장로에 맞서 정면승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택한 수는 태화진인이 가장 무당파답다고 자신하던 바로 그 수였다.
비무대 밖에서는 이제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마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비무대 위의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을 터였다.
“하……! 이런 고얀, 감히 무당의 이화접목을 흉내 내려 하다니……. 한 번 훔쳐보는 것으로 도둑질이 될 만큼 만만해 보이더냐!”
태화진인이 울컥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지강백은 이화접목이라는 수법을 모르던 때에도 지금처럼 몸을 쓸 줄 알았다. 지월에게서 우비사를 사사하며 깨달음이 한층 깊어진 탓에 좀 더 능숙해졌을 뿐이었다.
키이익!
지강백은 검을 눕혀 우측을 치고 들어오는 태화진인의 양의권을 흘려보내며 답했다.
“아니, 저도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뭐라고?”
동시에,
콰앙!
지강백이 검을 세웠다. 이번에도 흘려보내는 듯하던 그가 갑자기 힘으로 맞서오자 태화진인은 이때다 싶어 내력을 집중시켰다.
지강백이 의도하던 바였다.
태화진인의 내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몰라도, 그는 이미 상당히 많은 내력을 소모했다. 발경은 위력적인 만큼 한계도 명확한 수법이었다. 그리고 지강백은 그 위험천만한 공세를 이제껏 잘 버텨냈다.
‘할 수 있다.’
지강백이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나는 할 수 있어.’
십 성의 태을신공을 아낌없이 담은 목검이 양의권의 공세가 시작되는 그 지점, 태화진인의 손목을 찔러 갔다. 양의권 또한 성난 맹수처럼 곧장 한 자루의 목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엉!
한 차례의 폭음이 먹먹하게 귀를 후려쳤다.
맞붙었던 두 사람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창백해진 지강백의 입가로 얇은 핏줄기가 고였다, 흘러내렸다.
“앗, 내상을 입었나 봅니다! 태화진인이 이기셨습니다!”
비무대 위를 뚫어져라 지켜보던 남궁완이 양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으음…….”
남궁진현이 저도 모르게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남궁완은 곁에 있던 남궁진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숙부님? 숙부님은 혹 저자가 태화진인을 상대로 승을 얻어내길 바라고 계셨습니까?”
“무어라?”
남궁진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남궁완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아, 아닐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마땅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어쩐지……,”
사실 남궁진현도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몰랐다.
무당의 오장로라니. 자신도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종남의 풋내기가 무당의 오장로를 능히 상대하리라 생각한다면 그자가 멍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결과를 놓고 보니 마음이 언짢았다. 아니, 그보다는 마음 한구석이 미진하다 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성사되기 어려운 대진이었다. 무당에서 종남을 핍박했다 봐야지.”
“아니, 그러나 종남이 애초에 주제를 알았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쯧. 종남의 그가 이미 무당의 후기지수를 가벼이 이긴 것을 보고 나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아, 그건……,”
남궁완이 무안한 얼굴이 되어 입을 다무는 순간이었다.
“어어…… 어어어어?”
“뭐……라고?”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남궁완이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비무대 위에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뭐?”
남궁완도 찢어져라 입을 벌렸다. 남궁진현은 저도 모르는 새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내상을 입은 지강백이 한 차례 비틀대다 결국 한쪽 무릎을 땅에 댔다.
입가를 더럽힌 핏줄기는 곧 멎었으나 누가 봐도 지강백이 손해를 본 것은 분명했다. 태화진인은 지금껏 같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놀란 눈으로 태화진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태화진인의 오른손은, 손목이 푹 꺾여 기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손목이 부러진 것이다.
지강백의 목검이 태화진인의 손목을 부러트렸다.
입가의 피를 닦아낸 지강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형은 한 차례 비틀거렸을지언정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입을 손해를 이미 계산했고, 감수했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이 태화진인의 손목이었다.
지강백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뱃속이 지끈지끈 울렸으나 아직은 견딜 만했다. 그가 목검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계속하겠습니다.”
“…….”
태화진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나선 것은 백연이었다.
“아니, 이번 대진은 끝났소이다.”
“예?”
지강백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백연을 돌아보았다.
백연은 태화진인의 발밑에 시선을 던졌다. 태화진인의 발이 한 치쯤 바닥을 파고들어 가 있었다.
그가 무리하게 버티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금, 태화진인은 입을 열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종남이 승리하였소.”
“……예?”
지강백이 또 한 번 어리둥절하여 되물었고, 그를 대신하듯 남궁진현이 입술을 움직였다.
“아아……. 그래, 종남이 이겼군.”
천하제일쾌검의 혼잣말은 모두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세……상에.”
“맙소사. 이런 일이.”
“무당의 태화진인이?”
짧은 탄식 외에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의 대진이 정면승부로 끝이 난 탓이었다.
그 우직한 대결에는 다른 게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태화진인은 지강백의 초식을 피하지 못했고, 내력에서 눌렸다.
그가 앞서 내력을 낭비했다는 것은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이리되었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감이 좋지 않더라니…….”
지강백을 보면 불쑥 차오르던 불안감의 정체는, 결국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따라잡히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 그것도, 너무 빠르게.
남궁진현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호영장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그래. 종남이 이번 천하무도회에 파란을 불러올 것이라 장담했던 그였으니.”
확실히 파란이 일어났다.
“허……. 이래서야 예선은 볼 것도 없겠군. 뒤에 남은 후기지수들 중에서 무당의 오장로를 상대할 만한 이가 있던가?”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에 수많은 군웅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이 한 번의 대진으로 종남의 일대제자는 같은 배분에서 그가 제일임을 입증했다.
“종남의 약진…… 아니, 부활인가.”
비무대에 선 백연이 외쳤다.
“패자는 내려가시오. 이번 대진은 종남이 승리했음을 알리오!”
그 말에 함성과 탄식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삼십 년 만에 종남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 * *
“으엣취!”
고요한 숲길에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울렸다. 놀란 참새들이 후드덕 날아올랐다.
“으어, 사부님. 거 몸이 안 좋으신 게요?”
왕대환이 안색을 바꿔 물었다.
섬서에서 출발한 그들은 내내 강을 따라 달리다 다시 산길로 들어섰다. 소림까지 오는 가장 빠른 길을 따라오다 보니 계속 험한 길을 고르게 됐다.
한사코 길을 재촉하는 쪽은 양영천이라지만, 대사형이 떠나고 난 뒤 어째 나날이 늙수그레해지는 것 같은 사부를 보면 이 험한 여정이 죄송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산에 들어서니 공기가 차가워 그런가 봅니다요.”
“아, 거…… 그러게 늙으신 양반이 몸 간수 좀 잘하셔야지…….”
이제는 사제라 부르는 아우들도 호들갑을 떨었다.
양영천이 당장 제 겉옷을 벗어 어깨를 덮어주려는 염창의 손을 치웠다.
“거, 됐다. 내 어깨 말고 네놈 주둥이나 덮어라. 늙긴 누가 늙었다 그러느냐.”
“거 참. 사부는 도사가 되셔 가지고 어째 말이 그리 저렴하오. 걱정하는 제자 입을 두고 주둥이라니.”
“아, 그럼 늙었다는 말을 하질 말던가!”
양영천이 뻑 소리를 지르자 염창이 어깨를 으쓱했다.
“밤마다 잠 안 자고 큰 형님…… 아니, 대사형 빈 방에 들어가 목침 끌어안고 눈물로 지새우니 안 늙고 배기오. 젊은 처자도 그러다 머리칼 샌다던데. 그러게 잠 좀 잘 주무시오.”
“아, 울긴 누가!”
“내 다 봤소.”
“아니라니까!”
빡!
염창은 기어코 뒤통수를 얻어맞고야 말았다.
그러나 별로 피하려는 눈치도 아니었고, 아주 썩 아프지도 않았다.
쓰다듬는 것처럼 뒤통수를 때린 양영천이 한 번 더 거하게 재채기를 했다. 대충 코 밑을 닦고 길을 가려는데 이번에는 멀쩡하던 신발 끈 매듭이 주르륵 풀려버렸다.
양영천이 잠시 허리를 구부려 매듭을 다시 매며 투덜거렸다.
“난데없이 재채기가 나는 것을 보니 아직 죽지도 않은 구파일방의 잡늙은이들이 내 욕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강백이가 늙어 굳은 뒤통수라도 시원하게 갈긴 게야. 내 어서 가봐야겠다.”
“아니, 예서 더 서두르면 그러다 진짜 사부 늙으신 몸이…… 윽!”
쾅!
이번에는 진짜로 얻어맞았다.
“아, 늙었다는 소리 고만 하라니까! 산적 놈이 산적질 그만둔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산길에서 귓구멍이 막히냐!”
“원 참. 과거는 또 왜 꺼내고 그러시…… 아, 알았소! 가면 될 거 아니오, 가면.”
염창이 바지런히 걸어 저만치 앞서 나갔다. 양영천은 뒤따르고 있던 왕대환과 구악을 향해서도 눈을 부릅떴다.
“너희들도 맞아야 제대로 걸을 테냐!”
“아, 아닙니다!”
“그 무슨 말씀을!”
왕대환과 구악이 걸음을 서두르자 뒤따르던 제자들도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종남에 남아 있으라 일러두었음에도, 부득불 소림사 구경하겠다며 따라나선 이들이었다. 지금은 속으로 조금쯤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 능선만 넘으면 숭산이었다.
서둘러 온다고 했지만 벌써 시간이 이리도 지나버렸다.
“에고…… 이놈이 어디 휘둘리지나 말고 얌전히 이 사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텐데.”
양영천이 너무 높아 잘 보이지도 않는 소실봉을 눈으로 찾으며 중얼거렸다.
“강호란 매사 산길과는 비교도 안 되게 험한 것을…….”
어디서든 제 몫 이상을 해내는 제자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래도 품 밖으로 내보낸 이상 바람만 불어도 모든 게 다 걱정이었다.
양영천의 걱정을 대신하듯, 저 멀리 소실봉에는 묵직한 먹구름이 줄기줄기 감겨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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