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천하무도회 (2)
천일장이 지강백을 향해 호통을 쳤다.
“무례하다! 대진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발을 붙이느냐!”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고.”
천일장을 향해 가볍게, 그러나 매서운 말을 던진 지강백이 백연에게 물었다.
“종남은 정식으로 초빙을 받았으니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자격을 논하시는 분이 계시니 청간과는 다른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실력입니까? 그렇다면 저자를 꺾어 보이면 되는 것입니까?”
백연은 자꾸만 진행에 차질이 생기는 것 때문에 심기가 그리 편치 않았다.
하지만 무당에서 주장하는 대로 대진을 바꿀 의향도 없었다. 지금 대진이 틀어지면 이후로도 걷잡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선이라고 해도 마흔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것이었다.
앞서 흘려 넘겼던 대진을 바로잡고, 본선에 들어설 인원을 정리하는 것에도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이 사태를 빠르게 수습할 필요성이 있었다.
“청간을 받았으니 종남의 자격은 충분하오.”
“그렇다면 이 대진을 허가해 주십시오.”
천일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당의 제자로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종남은 무당의 상대가 아닙니다.”
지강백이 툭 내뱉었다.
“무당이 종남의 상대가 아니겠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무당이 종남의 상대가 아니라 할 게 아니라 네놈이 내 상대가 아니라고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장내는 파도가 몰아친 듯 한바탕 들썩였고, 무당의 진인들이 일어서서 수염 위로 거품을 물었다.
이제 와 변명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들어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강백도 화가 난 상태였다.
그는 어떻게 해도 말귀를 들어먹지 않는 천일장이 오만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또다시 가르침을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두 번 다시 잊지 않게, 몸에 새겨서라도.
“나는 이미 한 번 증명했다. 두 번이라고 못 할 것은 없다.”
“이런……”
천일장이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무당에서 끝까지 이 대진을 거부한다면 종남에서 승을 가져가는 것으로 하겠소.”
백연이 쐐기를 박았다. 천일장이 즉각 반발했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왜지? 나를 이길 자신이 없나?”
지강백의 말은 천일장을 더는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무당의 일장로가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런 무뢰배를 보았나! 대체 이 자리가 어디라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무당이 종남의 상대가 못 된다? 하, 광오를 넘어 그저 광(狂)한 말이 아닌가! 무당의 제자는 듣거라! 네 손에 든 무당의 검으로 반드시 저자의 혀를 거두어라!”
여기저기서 그 비슷한 말들이 쏟아졌다.
화산파가 있었다면 더한 말도 나왔을 것이다.
지강백은 구파일방의 반응을 보고 양영천이 왜 그토록 사문을 드러내지 말도록 일렀는지 깨달았다.
‘사부님은 이런 생리를 알고 계셨던 거다. 종남의 무학을 전부 대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저들에게 그 어떤 부족함도 내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양영천의 사정이었고, 지강백은 사부의 깊은 뜻을 받아들였다.
‘송구합니다, 사부님. 하지만 지금은 제자가 물러날 수 없습니다.’
부족해도 꺾어야 했다.
그래야 사부님이 오시는 먼 길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이다.
“나는 네 혀를 거두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덤벼라.”
천일장이 울컥 숨을 뿜었다.
“……무얼 믿고 그리 오만한 것이냐?”
“오만은 네가 지금 부리는 객기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객기?”
“잔말 말고 검을 들어라.”
지강백이 오늘 아침 돌려받은 목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신호로 백연이 비무대 뒤로 물러섰다.
“그럼 무당과 종남의 대진을 시작하겠소이다.”
“…….”
천일장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본회가 시작되기 전 방법을 강구해 두어야 한다는 말이 맞았어.’
왜 진작 손을 쓰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대신 손을 써 주기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할 뿐이었다.
승!
천일장이 마지못해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 * *
카칵!
나뭇결의 소리가 거칠었다.
목검이 진검을 상대하면 불리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강백은 이제껏 진검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불리한 것으로 유리한 것을 상대하는 데 익숙했다.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은 피해야 했다. 같은 의미에서 섬세한 각도 조절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검날이 파고들 수 있는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냉철했을 때의 얘기였다.
지강백은 태을신공을 일으켜 오른손에 집중했다. 연이은영약의 복용과 실전 경험에 힘입어 지강백의 태을신공은 이제 십 성에 달해 가고 있었다.
카캉!
목검이 진검을 마주했다.
병기의 불리함 때문이라도 물러나야 할 지강백은 도리어 한 걸음을 앞으로 옮기며 천일장을 압박했다.
목검이 뎅겅 잘리지 않은 것은 지강백의 태을신공이 천일장의 양의신공을 월등히 앞서는 탓이었다.
천일장이 붉어진 얼굴로 간신히 말했다.
“멍……청한, 힘으로 누르는 것이 검술……이냐?”
“목검은 벨 수가 없잖아.”
“그, 그렇다고……”
“그런데 한번 해 보고 싶긴 하군.”
슷!
지강백이 돌연 어깨를 기울이며 반보를 물렸다. 천일장은 자신이 쏟아 내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앞으로 울컥 상반신을 숙였다.
천일장의 반응을 계산해서 몸을 비켜선 지강백은 목검을 둥글게 돌려 바람을 일으켰다. 천일장의 머리칼과 옷깃이 나풀거렸다. 지강백은 그 사이로 목검을 아주 빠르게 찔러 넣어 휘저었다.
언뜻 단순한 동작으로 보였지만 태을분광검과 대천강검의 초식들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은 발휘된 한 수였다.
슥, 스스스슥!
머리칼과 옷자락이 가을을 맞은 나뭇잎처럼 우스스 흩날렸다.
천일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강백이 약간의 심술을 담아 중얼거렸다.
“잘 베어지는데. 살갗도 갈리겠군.”
두 사람의 차이가 너무 명확히 드러나는 결과였다.
태을신공을 단숨에 개방했지만 지강백은 아직 제대로 출수를 하지도 않았다.
천일장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그가 그렇게 형편없는 무인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지강백을 피하려고 했던 자신의 수가 통하지 않자 심적으로 크게 당황한 것이 제 실력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면이 컸다.
그 와중에 이런 망신살까지 뻗쳤다.
천일장이 가장 두려워하던 결과였다. 무당의 대제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늘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었다. 그는 항상 사제들을 앞서야 했으며 그들보다 뛰어나야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짊어진 짐에 비해 타고난 재능이 한 발짝씩 모자랐다.
천일장은 모자란 재능을 메우기 위해 피를 땀처럼 흘리며 노력했다.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것은 순전히 노력 탓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두려웠다.
함께 세 명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개방의 백사준이나 소림의 범광에 비해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채는 날이 올까 봐.
천일장의 얼굴이 깜깜해졌다.
너무 일찍 그날을 맞은 천일장은 투지를 잃었다. 천하무도회에서 자신이 패하는 상대가 백사준이나 범광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으……”
머리칼과 옷이 잘렸을 뿐 몸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천일장이 덜컹, 칼을 떨어트렸다.
“이 무슨!”
무당파의 진인들이 왈칵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찌 저런 짓을! 저런 간악한 장난질로 천하무도회를 더럽히다니!”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는 타 문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강백이 보여 준 수에 대해 욕을 하는 이도 있었고, 치를 떠는 이도 있었다. 반면에 흥미를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공통된 반응이 있었다.
“종남에 왜 저런 자가 있단 말이냐?”
그것은 놀라움이었다.
지강백은 저를 두고 떠들어 대는 소리를 흘려 넘겼다.
이제껏 짧게나마 겪었던 구대문파의 행동거지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들이었다.
다만 완전히 기세가 꺾인 천일장을 보고 있으려니 이제껏 치솟던 화가 좀 가라앉는 듯도 했다.
“칼을 주워라.”
“…….”
“다시 하자. 설마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천일장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쯧.”
지강백은 언젠가 살막의 덜떨어진 막내아들이 살려달라고 했을 때처럼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꼭 자신보다 약한 자를 힘으로 괴롭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머리칼을 잘라 낸 것이 그렇게 심한 일인가도 싶었다. 어차피 먹고 자다 보면 다시 자라는 것, 뭐가 그리 문제인지 모르겠다.
미안해진 지강백은 대신 칼을 주워 주려고 했다.
발로 툭 밀어 주면 간단하겠지만 일부러 허리를 굽혀 손을 뻗었다.
그때, 천일장의 눈이 돌변했다.
“하압!”
물이 흐르듯 유연하게 구부러지던 다섯 손가락이 뻣뻣하게 일어서며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무당의 십단금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유연하고 강맹하기로 이름 높은 장법이 완전히 노출된 지강백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저런! 피해!”
남궁진현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생사를 건 싸움도 아니고, 엄연히 규칙이 있는 비무대 위에서 등을 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금기였다.
마음의 평정이 모두 깨진 천일장은 지금 그런 것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지강백이 등 뒤의 기운을 느꼈다.
몸을 피하기에는 늦었다. 받아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고 회심퇴로 지면을 걷어차 몸을 뒤집었다.
동시에 목검이 움직였다.
수백, 수천 번을 연마했던 초식이었다. 호흡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쾅!
십 성에 가까운 태을신공이 대천강검에 담겨 십단금을 후려쳤다.
이것은 검과 장의 대결이라기보다는 내기의 격돌이었다.
“……욱,”
지강백이 메스꺼움을 느끼며 튀어 오르는 토기를 삼켰다.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장들이 조금씩 흔들린 모양이었다.
한 차례 상대의 공격을 걷어 낸 지강백이 곧장 무릎을 퉁겨 신형을 세웠다. 지강백의 무공이 무서운 이유는, 그가 익힌 모든 초식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는 것이었다.
회심퇴는 어느덧 은하유영비가 되었고, 은하유영비는 다시 북두천강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태을분광검의 초식 속에서 이루어졌다.
스륵,
목검이 미끄러졌다.
이어서,
빡!
눈으로 구분 짓기 어려운 속도로 흐름을 탄 검이 천일장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으…… 으웩!”
천일장이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음?”
지강백이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일장이 이미 내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괜찮았으니 그도 같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방금 전 일격으로 천일장은 갈비뼈가 부러졌다.
피를 토하는 동작은 부러진 갈비뼈에 무리를 주었다. 천일장이 고통으로 비틀거렸다.
그에 비하면 지강백은 너무 멀끔한 모습이라 결과만 놓고 본다면 아무도 그가 등을 기습당했다 믿지 못할 것이다.
지강백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 이리 약……”
약해, 라고 말하려던 그는 다급히 말을 돌렸다. 이런 경우 너무 솔직하게 생각한 바를 내뱉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아니, 미안하다. 내상을 입은 줄은 몰랐다.”
그러나 벌써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 천일장이 입가에 온통 피칠을 하고서도 눈을 홱 뒤집으려는 순간 백연이 나섰다.
“그만!”
백연이 비무대 위로 뛰어올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승부는 정해졌소이다. 이번 대진은 종남이 승리하였소. 부상자는 어서 비무대를 내려가시오.”
천일장이 고개를 흔들며 불복했다. 백연이 엄한 눈길을 보냈다.
“어허, 어서. 이곳은 피를 보는 곳이 아니외다.”
천일장의 사제들이 비무대로 와 그를 부축해 내려갔다. 물론 그 전에 지강백을 한 번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승자는 몸이 괜찮으시오?”
백연이 물었다. 지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다면 같은 검을 계속 겪으시겠소?”
지강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토기는 금방 사라졌고, 몸은 어느 군데도 이상이 없었다. 무엇보다 비무는 그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예, 하겠습니다.”
“그럼 무당에서 한 분 오르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무당의 진인들 사이에서 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다음은 이 몸이오.”
백연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마치 공중을 나는 것처럼 표홀하게 비무대를 향해 다가왔다.
무당에서 가장 상승의 신법으로 꼽는 제운종이었다.
비무대를 오른 자의 얼굴을 확인한 남궁진현이 인상을 썼다.
“뭐라고? 농담이겠지.”
남궁진현뿐만이 아니었다. 비무대를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엇비슷한 반응들이었다.
“무당의 태화진인이 예선에 나오다니! 아무리 제자의 복수에 눈이 멀었다지만 저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태화진인은 현 무당의 오장로로, 장로들 중 가장 어렸다. 그러나 타고난 무재를 인정받아 무공 교두를 겸하는 오장로 직을 맡은 것이었다.
백연이 약간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이시오?”
“물론.”
태화진인은 진심이었다.
“이 몸은 한 번도 천하무도회의 본선에 참여한 적이 없소. 그러니 예선에 설 자격은 충분하다 보는데.”
규칙으로 따지자면 그가 잘못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선은 그의 말대로 본선을 대비하는 이들을 위한 자리였다.
그런 이들이 주로 일대제자 이하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태화진인은 그간 저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장로들에게 양보하느라 이제껏 한 번도 본선에 나서 본 적이 없었다.
“규칙은 그러한데…… 종남에서는 어찌하시겠소? 받아들이시겠소?”
태화진인이 백연의 말을 가로챘다.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지강백을 바라보는 눈이 무서웠다.
“반드시.”
“…….”
본회의 예선이 시작된 지 고작 두 번의 대진이 지났을 뿐이었는데 장내는 벌써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지강백은 무언가 아주 난해한 급류에 휘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천하무도회 본회와는 다른 일이, 이곳 소림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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