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동맹
팔대호원은 묵직한 고요에 감싸여 있었다.
용천휘는 소리 없는 걸음으로 고요를 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림자처럼 은밀한 걸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화산의 청운신법이었다.
‘어디냐.’
붉은 눈이 내부를 한 바퀴 훑었다.
정중앙의 방장실을 팔대호원이 감싸고 있는 구조는 복잡할 게 없었다.
그러나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이 터무니없는 고요 때문이었다.
‘진인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열여덟 명 이상의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 이곳은 그저 텅 빈 듯했다.
‘그럴 리가 없어.’
수라안에는 그 어떤 이질적인 흐름도 보이지 않았다.
진 같은 것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침묵이 진짜라는 얘기였다.
‘정말로 텅 비어 있단 소린가? 팔대호원이?’
용천휘는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정면을 살펴보았다. 밤을 가리는 먹구름처럼 막힘없이 이어지던 걸음이 주춤거렸다.
설마 함정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월과 직접 맞부딪치기로 한 결정은 방금 내렸다. 그사이에 제 정체가 드러날 만한 일이 벌어질 리는 없었다.
그러나 후각보다 더 예리한 감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의 전진은 좋을 게 없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윽!’
용천휘는 솟구쳐 오르는 핏덩이를 삼켰다.
적혈대법이 끝나 가고 있었다. 일각 후라면 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다.
‘다음을…… 노려야 한다는 뜻인가.’
마음을 대신하듯, 발이 흔들렸다. 용천휘는 막 앞으로 내디디려던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냥 들어오시게.”
“……!”
용천휘의 낯빛이 변했다.
저 깊은 안쪽에서 들려오는 느리고 차분한 말투는 분명 지월의 것이었다.
“호원이 빈 것은 다들 잠을 청했기 때문이지. 무에 딱히 의뭉스레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세. 내가 방장실을 맡은 뒤로 잠은 다들 편하게 자고 있다네.”
“…….”
“기왕 이 몸을 보러 왔으니, 마저 걸음 하시게나.”
“……후.”
용천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도망치기에는 늦었다. 지월의 오감은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적혈대법에 쓰는 향을 감지한 것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저벅저벅.
주춤했던 걸음이 이어졌다.
지그시 사리문 입술이 경련했다. 몸을 감싸던 붉은색 운무가 서서히 흩어졌다.
지월을 향해 걸어가는 용천휘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
사방이 한 장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방이었다.
그 한가운데 정좌해 있는 노승의 얼굴에는 아직 잠이 묻어 있었다.
비좁은 방에서 낡은 이부자리를 개키고 있는, 잠이 덜 깬 노승이라면 궁색해 보이기도 할 텐데 지월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꼴이 우스워도 양해하시게나. 객을 맞을 준비를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쪽이니.”
“…….”
누가 봐도 객이 아닌 자를 앞에 두고 손님맞이가 어쩌고 하는 얘기를 꺼내는 것은 자만이 아니라 그저 성품인 듯싶었다.
“앉으시게.”
태연히 자리를 권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용천휘가 지월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다리를 접고 앉았다.
하지만 몸은 앉았어도 마음은 그만큼 편해질 수 없었다. 용천휘의 신경은 온통 지월을 향해 곤두섰다.
그럴수록 밀려드는 것은 밤을 닮은 절망감이었다.
‘틈이 없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드디어 눈앞까지 다가온 지월이었지만 그를 어떻게 할 수단이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물고 있는 용천휘를 향해 지월이 먼저 운을 뗐다.
“그럼 이제 이유를 물어야겠군. 그리 몸을 다그쳐 가면서 이 노구를 찾은 것은 어떤 까닭인지?”
“…….”
용천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젊은 몸이 벌써 그리 상하기도 쉽지 않을 듯한데. 그 또한 까닭이 있는가?”
“…….”
용천휘는 이제 저 지월의 물 같은 눈이 어디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지 두려웠다.
“허면, 몸이 상했다는 게 나를 찾아온 이유던가. 서에서 온 시주?”
“……!”
용천휘가 몸을 홱 뒤로 젖혔다. 달아나고자 하는 본능에서였다.
그러나 이곳은 사방이 한 장 반밖에 되지 않는 소림의 방장실이었다. 몸을 물려도, 피할 곳이 없었다.
지월은 용천휘를 보는 시선 안에서 살기를 억누르고 있던 인내를 거두었다.
“손을 쓰기 전 답을 들어 두고 싶네. 물론 답을 듣기 위해서도 손을 쓸 수 있다네. 이 몸은 천하제일기의 주인. 서쪽의 사람을 가만두고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소임을 지닌 바.”
지월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자세에서 발을 풀었다.
그 약간의 동작만으로도 지월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서 답을 하시게. 궁금증이 소임보다 앞서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걸세.”
……달아날 곳이 없었다.
용천휘는 대신 제 어금니를 씹었다.
“……나는,”
지월이 답을 재촉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록 제 속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자신은 수라안을 가졌지만 반쪽의 소교주였다.
완전한 교주가 되기 위해 제 몸을 담보로 잡으며 적혈대법이라는 금제의 영역에 손을 뻗었지만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다시 반쪽짜리 교주가 되는 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용천휘는 이를 힘껏 물었다. 그래도 이 굴욕감을 씹어 삼킬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제 어금니를 씹어 삼키라 하면 기꺼웠을 것이다.
“……그대와, 협상을 하고자 한다.”
“…….”
지월은 대답 대신 색이 바래 가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나는 대명천교의 다음 주인으로서 중원 땅을 밟지 않을 용의가 있다.”
“과연…… 개방의 얘기는 틀린 것이 없군.”
제 신분을 밝힌 용천휘를 보며 지월이 고개를 끄덕이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화평을 협상하자는 겐가. 칼을 드는 것이 숙명인 강호에서.”
“못 할 것도 없지. 그대와 말이 통한다면.”
지월은 식은땀이 흐르는 용천휘의 희어진 얼굴에 대고 말했다.
“허나 화평이란 저울과 같아서 양측의 힘이 엇비슷해야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 지금 시주는 내가 아닌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네만.”
지월이 아주 자연스럽게 눈빛을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시주를 없애는 것이 중원의 입장에서는 더 온전한 화평이 아니겠나?”
“아니.”
용천휘가 가까스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는다면 중원에는 이제껏 없던 혈란이 올 것이다.”
“어째서 그리되겠는가?”
그가 반쪽의 소교주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없애려는 놈들에게는 명분이 필요한 탓이다.”
생이빨보다 단단하고 끔찍했던 굴욕감이 비로소 뱃속으로 넘어갔다.
용천휘는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지월을 똑바로 응시했다.
“중원 일통은 그럴듯한 명분일 뿐 아니라 잔존한 나의 세력들을 없애는 데도 효과적일 테니까.”
비로소 진실이 나왔다.
“적의 적을 고하려 하심인가.”
지월이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그는 다시 느긋하고 유유자적해 보이는 노승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디 얘기를 들어보지. 말씀하시게나.”
* * *
교주의 직위란 간단했다.
대명천교의 사조인 대천혈성의 피를 이은 자.
다시 말해 피로써 전해지는 대천혈성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바로 수라안이었다.
“허나 수라안의 권능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대천혈성이 서역과 중원에 걸쳐 이루어 놓은 고대의 진법을 발동시켜야 했다. 그 거대한 진은 대천혈성이 자신의 권능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제물과 피였다.
“그게 일 대에 걸쳐 중원을 침범한 이유라는 게로군.”
“그렇다.”
그래서 수라안의 권능은 오직 일 대에 단 한 명만 얻을 수 있었다. 수라안을 위한 대진을 발동시키는 것은 사실상 교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셈이었다.
“허나 나는 수라안을 가지고 태어났다. 대천혈성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자라는 뜻이다.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다음 대의 교주임을 인정받았다. 본 교의 이십좌위들이 내 발아래 피를 모았고, 나는 그들의 피로 발을 씻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이십좌위의 충성을 약속받은 소교주가 용천휘였다.
“……허나 내 몸이 다른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기괴한 소교주가 되었다.
수라안의 권능을 받았지만 그 외의 다른 능력은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는 대천혈성이 남긴 무공과 술법 그 어느 것도 익힐 수 없었다.
“그리고 교에서는 내 목숨을 노리는 자가 생겨났지. 그들은 이매처럼 실체가 없다.”
용천휘는 끝내 이매의 정체를 밝히는 데 실패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자신은 교 내에서 무엇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저 피하고 숨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이매는 이곳 소림까지 나를 따라왔다. 방금 전까지 내 목숨을 노렸지. 이매는 이제 내가 그대를 만나려 했던 이유를 알고, 그것을 방해하려 들 것이다.”
지월은 용천휘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동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곳은 천하무도회의 본회. 그 이매라는 자들이 얼마나 될지 몰라도 쉬이 제 욕심을 채울 수는 없을 걸세.”
“나는 그중 하나가 축시와 축지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
대천혈성이 후대에 남긴 권능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시간에 틈을 내고 공간을 단절시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것도, 무한대로 확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는 자가 없는 조건에서라면 충분히 무서운 능력이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수라안이 아니라면 그가 이곳 방장실에서 찻물을 비우고 대신 제 소변을 채워 놓고 갔더라도 알 수 있는 자가 없다. 무공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권능이다.”
“허…….”
기가 막혔던지 지월이 혀를 찼다.
“그리고 그자는, 적혈대법의 존재도 알고 있다.”
“적혈대법이라 함은?”
용천휘가 한 차례 숨을 고른 후 답했다.
“내 몸의 저주를 잠시 잊게 해 주는 금단의 독이지.”
이어서 용천휘는 적혈대법을 설명했다.
지월을 들으면서 놀랍다는 태를 감추지 않았다.
“허허…… 무공을 빼앗는다?”
“순간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대체 무(武)인지, 아니면 도술인지…….”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대 역시 대법에 이용할 수 있다. 축시와 축지의 권능을 이용할 수 있는 자라면 못 할 것도 없겠지.”
지월이 헛기침을 하고 난 뒤처럼 입맛을 다셨다.
“그게 그리 쉬울 리가 있나…… 하고 싶지만 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섣불리 말은 못 하겠네.”
“신중함이 필요할 것이다. 이매의 정체는 나도 아직 모르고 있다. 짐작만 할 뿐.”
얘기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용천휘는 보일 수 있는 것을 전부 내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협상을 하지. 약속한 대로, 내 대에서는 중원 땅을 밟지 않겠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영원히 미완의 교주가 되겠지. 허나 감수하겠다. 대신 나는 이매를 없애겠다.”
“시주는 이 몸에게 그 이매라는 것을 없애 달라 말하는 건가.”
“아니.”
용천휘의 눈빛이 절박해졌다.
“이매를 없앨 힘을 빌리고 싶다.”
지월이 정말로 혀를 찼다.
“그 뜻은? 이 늙은 귀가 알아들은 대로인가?”
용천휘의 말은 적혈대법을 허락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이매들이 이곳까지 숨어들어 내 목숨을 노리려는 정확한 이유를. 단지 내 목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고작 그런 것이었다면 기회는 더 많았어.”
“흐음…….”
“그들은 적혈대법을 알고 있다. 가장 걸리는 것은 그 점이다. 내가 그대의 무공을 염두에 두었듯이, 그들 또한 그럴지 모른다.”
자신이 내뱉는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도 용천휘는 섣불리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이매를 부리는 자가 필목현이든 누구이든 간에 이제껏 수법을 가리지는 않았다는 것.
그는 교의 이매향을 제 족적을 지우는 데 쓸 만큼 대담했다.
“어쩌면 정확히 천하무도회라는 멍석 위에서 내 죽음을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제 정체를 지우며 동시에 중원침공이라는 거대한 판을 끌어오기에도 적격이지.”
“으음…… 그저 부인하기에는 난해한 일일지도. ……나무아미타불.”
“단 일각이다.”
용천휘가 애타는 심정으로 말했다.
“천하무도회 본회. 외부에서 온 자들이 남김없이 한자리에 모이는 때. 단 일각만 그대의 무공을 빌리겠다. 거기에 수라안이 더해지면 나는 이매를 찾아 없앨 수 있어.”
“…….”
무슨 생각에선지 지월이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럴수록 용천휘의 표정은 초조와 절망이라는 양극단을 오갔다.
“일각이라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그대에게 더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을, 내 모든 것으로 약조하겠다. 나는 수라안의 권능을 지닌 자. 이것을 아는 자에게 헛된 말을 내뱉지도, 내뱉을 수도 없다.”
지월이 마침내 천천히 입을 뗐다.
“……안 될 말일세.”
“아……”
용천휘의 어깨가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았다. 그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두 팔에 실린 제 반쪽짜리 몸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처럼 여겨졌다.
이 무게감의 이름은 좌절이었다.
“이 노불자의 생각에 일각은 너무 짧은 것 같군.”
그러나 이어지는 지월의 말은 좌절의 무게를 단숨에 앗아 갔다.
용천휘가 비틀대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
“한 시진으로 하지. 그쯤이면 본회가 시작되고 예선이라 불리는 일 차 비무가 한창 이어질 무렵이니. 손을 쓴다면 그쯤이 더 나을 걸세.”
“아…….”
그리고 지월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허나 나 역시 조건이 있네.”
용천휘는 섬서의 회동에서 소림과 개방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지월은 역으로 서역 정벌을 주장하는 백사준에게 반대를 유보한 바 있었다.
지월은 지금 저울을 앞에 두고 모든 추를 홀로 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지월은 마교가 분열되고, 그 소교주가 단신으로 중원에 도움을 청하는 지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서역 정벌이나 느닷없는 동맹이나 결국 목적은 매한가지였다.
더 이상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일이 없게 만드는 것.
그러자면 대량의 피를 감수해야 하는 서역정벌보다 더 간단한 수가 있었다.
“대천혈성이 남겼다는 그 진법. 그곳의 위치를 내게 말해 주어야겠네. 나는 그 진을 영구히 파훼하여 다시는 서쪽에서 중원으로 올 일이 없게 만들고 싶다네.”
“그건…….”
용천휘의 얼굴에 갈등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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