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달 없는 밤에 (2)
“흐아암.”
용천휘가 나른한 눈으로 하품을 했다.
지객당 뒤편의 비좁은 공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어? 좀 자자고.”
용천휘는 흙바닥이 침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히 앉아 있는 자세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맨바닥이 아니라, 옷 하나를 깔고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옷은 물론 지강백이 벗어 둔 무복 상의였다.
“무슨 소리냐. 아직 멀었어.”
잠시 동작을 멈춘 지강백은 흘러내린 땀을 팔뚝으로 닦아 냈다.
탄탄한 몸 구석구석 고여 든 땀방울이 희미한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창 수련 중인 터라 몸에서는 김이 훅 오르는 중이었다.
“졸리면 너나 들어가서 자라.”
“……나 참. 정 없이 굴기는. 같이 자면 안 돼?”
그게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지강백이 확 인상을 썼다.
“뭐?”
“혼자는 무서워서 잠이 잘 안 올 것 같단 말이야. 사형이 자장가라도 좀 불러 줘야……”
“닥치고 들어가 자라.”
“쳇. 너무하는군.”
용천휘가 입술을 비죽이다 결국 일어섰다. 그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달이 없잖아. 이런 밤은 왠지 좀 불길하달까…… 뭔가 사고가 생길 것 같은 밤인데.”
지강백이 흥, 코웃음을 쳤다.
“네가 입조심만 하면 사고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거다. 내 말대로 닥치고 들어가 자면 돼.”
“하나 있는 사형이 이렇게 매정해서야.”
지강백은 용천휘의 영양가 없는 투정을 무시했다. 상대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대처라는 것을 이제는 아는 것이다.
“그럼 간다, 사형.”
휙!
대답 대신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금방 와야 해.”
휙, 휙!
“쳇.”
혀를 한 번 찬 용천휘가 홀로 몸을 돌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희미한 달빛의 궤적마저 두터운 어둠 아래 완전히 숨어 버린 밤이었다.
이 밤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 어둠으로 꿀꺽 잡아먹어 버릴 것만 같았다.
* * *
드륵, 턱.
용천휘는 어둠에 감싸인 지객당의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안쪽까지 걸어가 지강백과 함께 쓰게 된 첫 번째 방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
용천휘가 미간을 옅게 찡그렸다.
낮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방 안의 공기가 느껴진 탓이었다.
오감이 예리하게 발달한 고수들처럼 상대의 기를 읽어 내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남들에 비해 훨씬 더 예민한 후각으로, 방 안의 냄새가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늘 독향을 풍기는 채희유와 가까이 지낸 탓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매사에 까탈스러운 성격 탓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는 남들보다 훨씬 정확하게 냄새를 구분할 수 있었다.
“…….”
본능이 그를 말렸다. 저 문을 들어서서는 안 된다고.
용천휘가 주춤, 반보 정도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서걱, 툭.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마 정중앙에 가느다란 실처럼 핏줄기가 이어졌다.
“뭐……!”
단 한 발이 앞섰거나 단 한 호흡이 빨랐다면 용천휘는 지금쯤 머리가 반듯하게 쪼개졌을 것이다.
용천휘가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정신없이 뒤로 물러났다.
스슥!
열리다 만 방문이 반으로 갈렸다. 괴한의 칼이 어둠 속에서 묵묵히 살기를 뿜었다.
“빌어먹을, 대체 누구……”
용천휘가 뒷걸음질을 치며 눈을 크게 떴다.
어둠이 그의 수라안을 감쪽같이 가려 주었다. 그러나 수라안을 통해 범인의 정체를 깨달은 그는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의 촌뜨기잖아?”
“…….”
괴한은 연심환이었다.
동시에 연심환이 아니기도 했다.
“……미친!”
용천휘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토했다.
연심환의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얗게 세어 있었다.
“네가 왜 이매가 되고 자빠졌어!”
연심환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해서 칼을 치켜들 뿐이었다. 용천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며 소맷자락을 흩뿌렸다.
필목현이나 채희유가 곁에 없을 경우 용천휘가 믿을 것은 호당충이었다.
호신을 위해 채희유가 붙여 놓은 이 작은 벌은 단 한 개의 독침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목숨을 구할 정도의 틈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호당충이 반응하지 않았다.
용천휘는 당황한 나머지 걸음을 흩뜨렸다. 연심환의 칼은 그 뒤로 바짝 다가왔고, 용천휘는 궁여지책으로 바닥을 굴렀다.
“망할…….”
그러나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또다시 살아날 구석을 만들기에는 연심환의 칼이 너무 매섭고 날카로웠다.
용천휘는 아무런 호신구도 없이, 강호 후기지수 중 하나의 검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었다.
스읏!
바닥에 누운 용천휘를 보며 연심환이 칼을 치켜들었다.
용천휘의 입술이 얇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래…… 와라.”
어느샌가 눈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하앗!”
연심환이 괴성을 토하며 칼을 내리쳤다.
용천휘의 수라안이 짙은 안광을 발하는 순간,
사아악!
“흐……”
용천휘가 내민 양 손바닥 사이에 연심환의 검이 끼어들어가 있었다.
연심환이 내리꽂는 힘을 더했다.
용천휘에게는 그를 밀어낼 수 있는 힘도, 반격할 수 있는 무공도 없었다. 용천휘는 그가 제 심장을 향해 칼을 미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양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간격은 용천휘에게는 저세상까지 가는 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검봉이 가슴팍을 가르기 시작했을 때,
“오란 말 못 들었냐?”
용천휘가 불쑥 칼을 쥐고 버티던 손을 놓았다.
동시에 그가 연심환의 목덜미를 홱 휘어 감았다. 제 몸이 찔리는 것을 무릅쓰고 저지른 일이었다.
검봉이 무른 살갗을 손가락 반 마디쯤 더 파고드는 순간,
“……!”
털썩!
갑자기 연심환이 쓰러졌다.
스스스……
그리고 용천휘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적혈대법이었다. 용천휘는 연심환을 끌어당겼던 것은 천극혈을 누르기 위해서였다.
“흐…… 욱!”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는 적혈대법이기도 했다.
그의 몸은 벌써부터 부작용을 겪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망할.”
몸이 맞지 않을수록 적혈대법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어둠 속의 붉은 눈이 마치 사냥 중인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이곳, 소림의 어딘가에 이매를 보낸 역도가 숨어 있을 것이다.
용천휘는 그자를 찾아야 했다.
“먼저 증거부터.”
용천휘는 정신을 잃은 연심환을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칼은 매스꺼울 정도로 이질적인 하얀색이었다. 이매향의 존재는 아직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
슷!
용천휘는 연심환의 칼을 들어 그의 머리를 몸통에서 깨끗이 분리했다.
머리칼을 쥐어 잘린 목만 손에 든 그가 어둠 속을 은밀히 걸어 나갔다.
* * *
“…….”
어둠과 침묵은 한 몸통을 놓고 다투는 머리 두 개 달린 뱀과 같았다.
당주화는 어둠이 단단히 똬리를 튼 자신의 처소에서 비로소 면사를 벗었다.
면사 너머로 드러나는 얼굴은 조금도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희고 깨끗했다.
“역시 너였나.”
“……!”
당주화, 아니 채희유가 홱 고개를 틀었다.
붉은 안개가 스미듯 방 안으로 밀려왔다. 용천휘였다.
“어째서 네 거처를 내가 모르고 있었나.”
채희유는 어둠 속으로 표정을 흘려보냈다. 껍질처럼 매끄러운 눈이 용천휘를 향했다.
“조용한 때를 맞춰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소야. 이리 먼저 걸음 하시다니…… 너무 조심성이 없어지신 건 아닙니까.”
“면사 하나로 사천당문을 속이겠다는 네 자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적혈대법은 그 자체로도 독이지만, 불완전한 대법은 독보다 더 위험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용천휘의 붉은 눈이 채희유를 샅샅이 훑어 내려갔다.
그는 필목현도 없이 채희유가 먼저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사천당문의 누군가로 위장해서.
파루나로서 채희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괴리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매가 여기까지 나타났다. 네가 쫓는다던 이매의 단서는 어찌 됐나?”
채희유의 표정에는 그 어떤 당황도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단서 때문에 저 스스로 소야를 찾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과연 소림에 계셨더군요. 짐작이 맞아 다행이었습니다.”
스스로라는 말이 걸렸다.
그는 분명 채희유를 데려오라며 필목현을 보내 두었다.
“삼좌위가 너를 찾지 못했나?”
“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용천휘가 알기로 그럴 일은 없었다.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네. 제가 숨고자 하면.”
“…….”
파루나가 삼좌위로부터 숨고자 했다는 말에는 적지 않은 뜻이 들어가 있을 터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용천휘가 두르고 있는 붉은 운무가 일렁거렸다.
“삼좌위께서 사라졌을 때마다 이매가 나타났습니다. 그 점을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휘익!
용천휘의 신형이 채희유의 코앞으로 쏟아지듯 다가왔다.
채희유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용천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제가 쫓던 단서가 삼좌위께 연결되고 있다는 말씀은 아직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단서를 뒤쫓던 제 걸음을 방해하던 자는 삼좌위와 닿아 있었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는 소리냐!”
“저는 그 말씀을 드리고자 삼좌위의 시선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소야의 말씀대로, 이렇게나 자만에 불과한 얇은 면사를 쓰고서 말입니다.”
“빌어먹을, 그걸……!”
“호당충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울렁이던 운무가 뚝 멎었다.
“……뭐라고?”
“저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매를 보내기 전에.”
“…….”
중원 땅에서 호당충의 존재를 아는 자는 셋.
그와 채희유, 그리고 필목현이었다.
“저도 아니고 소야도 아니라면 삼좌위가 남겠지요.”
“…….”
그 말을, 과연 부인할 수 있을까.
“소야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 되짚어 보십시오. 천하무도회는 교의 힘이 가장 미치지 않는 곳. 소야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매를 부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수는 없겠지요.”
아니, 부인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도 용천휘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가슴의 상처는 혈을 누르고 내력을 돌려 잠시 덮어 두었다지만 적혈대법이 끝나는 순간 다시 피를 뿜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교가 아닌 곳에서, 소교주가 아닌 것처럼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었다.
들끓는 용암 같던 운무가 사그라졌다.
용천휘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 같은 배신감이 살갗을 찢으며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를 보며 채희유가 말했다.
“지월을 포기하십시오. 소림을 떠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좋을 것입니다. 삼좌위를 대신해 제가 보위하겠습니다.”
“…….”
그럴 것이다.
이곳에서 죽는 것은 개죽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반쪽짜리 소교주였던 용천휘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소교주가 아닌 자로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매가 바라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여기서 지월을 포기하면 그에게 남는 것은 종남파의 뿔난 망아지 제자라는 사실밖에 없었다.
“아니, 가지 않겠다.”
용천휘는 스스로를 제외한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필목현을 믿을 수 없다면 채희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매가 소림에 있고 이매의 목적은 적혈대법으로 지월의 무공을 얻기 전에 그를 없애려 한다는 것이었다.
“먼저 움직이겠다.”
용천휘는 적혈대법의 거부 반응으로 인해 위에서 역류하는 핏덩이를 씹어 삼켰다.
“이매가 움직이기 전에.”
스슷.
용천휘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 없이 사라졌다.
밤은 아직도 달 없이 검기만 했다.
채희유는 너무 어두운 나머지 커다란 구덩이같이 보이는 허공에 대고 입술을 가만 움직였다.
예, 그러실 분이지요. 가만 물러나실 분이 아니지요.
그러니 움직이십시오. 더 움직이십시오.
언젠가……
“……가 제가 그 뒷덜미를 낚아챌 그 날까지.”
그녀의 혼잣말도 용천휘의 걸음만큼이나 소리가 없었다.
밤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 * *
손이 덜덜 떨렸다.
눈앞이 흐렸다. 용천휘는 몇 번이고 고꾸라질 뻔한 것을 버텨 냈다.
사실 이 정도는 심각한 부작용이라 말할 수 없었다.
적혈대법이 완전히 끝나고 난 뒤의 반소효응과 비교하면.
“…….”
용천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 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팔대호원. 이곳을 거치면 방장실이었다.
“과연.”
피투성이 입술이 실소를 그렸다.
이 불안정한 적혈대법으로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용천휘는 전신의 내력을 끌어 올렸다. 연심환의 자하신공은 이제 고작 육 성에 다가가는 수준이었다.
그의 무공만으로는 도무지 팔대호원을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용천휘에게는 사물의 원리와 동작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수라안이 있었다.
수라안이 더해지면 일신의 무공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연심환이 고작 육합검법의 일 식을 겨우 익힌 수준이었다 할지라도 용천휘는 일류고수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후우.”
용천휘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저 벽 너머에 지월이 있었다.
종남을 거쳐 소림으로 왔던 번잡한 여정이 이제 곧 끝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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