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달 없는 밤에 (1)
“아니, 저 혼자 그런 것도 아니고…… 분명 칼을 먼저 뽑아 든 것은 저쪽이었습니다만.”
지강백은 억울한 마음에 범산에게 한마디를 했다.
범산이 곱지 못한 표정으로 지강백의 말을 받았다.
“그럼 따르시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시비를 시작한 게 제가 아님을 헤아려 달라는 말입니다.”
“허나 여기서 본 회의 규칙을 어긴 이는 시주 한 분뿐입니다.”
“규칙을 어긴 건 유감입니다만 그건 저자가 실력이 못 미쳐서 그런 게 아닙니까?”
“교만은 십거지악 중 하나입니다. 시주께서 남들보다 낫다는 마음으로 규칙 위에서 검을 휘두르신 것은 아닙니까? 계속 그러시면 더 강한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범산은 통 믿어 줄 눈치가 아니었다.
“그냥 줘, 사형. 그깟 목검. 비싼 것도 아니고.”
용천휘가 툭 끼어들었다.
입꼬리가 묘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는 지강백이 예상외로 구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을 유연하게 상대하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하는 중이었다.
예상은 했으나 지강백은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무연객이나 남궁진현 같은 절정고수들과의 마주침은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준 듯했다.
이제 더는 지강백을 시험할 일은 없었다.
“너도 입이 있으면 뭐라고 좀 거들어라. 다 보고 있었잖아.”
지강백이 투덜대듯 말했다.
사제를 도우려다가 엉뚱한 오해를 사게 생겼다.
그러나 용천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부채를 설렁대며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서 사형 편을 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으려고.”
“뭐? 내가 애초에 왜 이런 시비에 휘말렸는지 기억을 못 하겠나?”
“내가 기억을 하든 못 하든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나는 하나고, 저쪽은 마흔다섯이나 되잖아. 안 그래?”
용천휘의 부채가 구대문파의 제자들을 가리켰다.
“저치들이 종남파를 놓고 쥐떼 소굴이라느니 뭐니 더러운 말을 해 댄 게 뭐가 중요하냐고. 중요한 건 사형이 그중 하나를 목검으로 한 대 후려쳐서 반쯤 죽여 놓았다는 거라고.”
“그 정도로 심하지 않았어. 고작 이 하나가 부러졌을 뿐이야.”
“이 하나 부러진 게 저치한테는 죽을 만큼 아플 수도 있잖아?”
이어 용천휘는 물론 죽을 만큼 아픈 게 꼭 이가 아니라 자존심일 수도 있지만, 이라고 덧붙였다.
“무인의 몸이라고 해도 다 같은 몸은 아닌가 보지. 어쨌거나 사형이 잘못한 거야. 이런 땐 얌전히 따르는 수밖에 없어. 저치들은 죽어도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말 안 할 거야. 이쪽은 목검이고 저쪽은 날이 시퍼런 진검을 들고 싸웠다고 항의해 봤자야. 무기를 가진 사람이 이쪽은 고작 하나고 저쪽은 마흔다섯이나 된다는 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용천휘의 말에는 뼈가 숨어 있어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겼다.
무엇보다 그의 말은 듣는 마흔다섯의 기분을 아주 더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잘됐지 뭐야. 사형이 여기 있는 마흔다섯 전부를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여기서 더 있었으면 반쯤 죽는 사람은 우리가 됐을지도 모르잖아? 이쯤인 걸 다행으로 여겨.”
“…….”
지강백은 용천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일대일이라면 몰라도 마흔다섯은 무리였다.
문제는 그들이 명문정파의 제자들답게 공명정대하게 굴 것 같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지금만 해도 범산의 말에 누구 하나 사실을 바로잡는 이가 없었다.
지강백의 생각에 진검이 목검에 패했다는 사실보다는 마흔다섯이 두 명을 핍박했다는 게 훨씬 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지만, 저들은 아니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별수 없나.”
지강백이 목검을 범산에게 건네주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범산이 목검을 받아 들었다. 그 역시 그리 밝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보잘것없는 무승이오만 제게도 눈은 있습니다. 숫자 정도는 셀 줄 압니다. 다만 본 회가 있기 전까진 규칙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점은 양해해 주십시오.”
지강백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규칙을 유지해야 하는 범산의 입장은 끝까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역할이 있는 법이었다.
“……알겠습니다.”
“압수한 병기는 본 회가 시작되기 이전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범산은 합장으로 인사를 한 뒤 지강백의 목검을 들고 사라졌다.
지강백이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규칙이라니 더는 여기 있어서도 안 되겠군. 자리를 옮기자.”
“나는 왜?”
지강백이 인상을 버럭 썼다.
“애초에 너 때문에 시비가 생겨난 거잖아! 내가 없으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고!”
지강백이 아예 용천휘의 팔뚝을 붙들어 질질 끌었다.
“원 참. 우리 사형은 자상하기도 하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사형이 엄마도 아니면서.”
“닥쳐.”
“무슨 그런 막말을.”
실랑이를 하며 계율원을 벗어나는 두 사형제의 뒤에 대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지강백이 힐긋 턱 끝을 돌렸다.
기가 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하나같이 날이 선 명검을 들고 있는 명문정파의 제자들이 그토록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저 값진 검들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또 한 번 얘기하지만, 충고든 모욕이든 그럴 실력이 됐을 때나 해라. 남은 이빨이라도 잘 간수하려면.”
더는 말을 섞기 싫었던 지강백은 속도를 높여 그곳을 벗어났다.
* * *
“워워, 사형. 좀 진정해. 팔 아프다고.”
지강백은 계율원을 지나서도 한참을 걸었다.
문제는 용천휘가 그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용천휘는 지강백이 아직도 자신의 팔을 꽉 틀어쥐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런…… 아팠나?”
지강백이 팔을 놓아주자 용천휘가 다른 손으로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당연히 아프지. 그럼 안 아프겠어? 그나저나 왜 이렇게 화를 내? 때린 건 사형이잖아. 목검을 뺏긴 게 그렇게 분해?”
“그게 아니라…….”
지강백이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뭐를?”
지강백은 작은 한숨을 섞어 용천휘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사부님을.”
“음?”
“사부님께서는 늘 내가 부족하다 하셨지. 그것은 맞는 말이다. 강호에는 나 같은 건 상대도 안 되는 절정고수가 무수히 많을 테니.”
용천휘는 그 절정고수라는 게 무연객이나 지월을 말하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들은 아니야. 저런 자들이 구대문파의 후기지수라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흐음.”
“저런 것들이 사문의 위세를 빌려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저런 실력이면 마땅히 사문에 누가 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저것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굴고 있으니.”
저런 자들이 이젠 저런 것들이 되었다.
“사형은 의심해 본 적 없어?”
의심이라는 말에 지강백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의심? 무엇을?”
“사부님이 하신 말.”
그렇게 답하는 용천휘의 얼굴은 그가 아닌 것처럼 진지해 보였다.
“사형이 그토록 부족해 부끄러울 지경이라는 사부님 말씀이 혹시 거짓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사형은 사형보다 뛰어난 고수들이 더 많다고 했지만, 사형은 이제껏 그런 자들을 잘 상대해 왔잖아. 물론 좀 다치긴 했어도 말이야.”
“…….”
지강백은 선뜻 그런 적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무연객 같은 고수가 흔할 줄 알았다.
남궁진현을 만나며 무연객이 보기 드문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곽을 맞서면서는 남궁진현도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백사준을 만나고서는 강호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여겨졌다.
그리고 구대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만났을 땐……
“모르겠다.”
지강백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부님이 알려 주신 강호와 지금 내가 직접 겪어 보는 강호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하지만?”
“만일 사부님께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신 거라면…… 그래야 했던 이유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용천휘가 물었다.
“그래? 사형은 이유가 있다면 거짓말도 이해할 수 있나?”
“……사부님께도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군.”
용천휘는 진지하던 표정을 풀고 웃는 낯이 되어 지강백의 어깨를 툭 쳤다.
“안심이야.”
“뭐가?”
“내가 만약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말이지, 뭔가 사정이 있었다고 하면 사형이 한 번쯤은 변명을 들어줄 것 같아서.”
“…….”
이번에는 지강백이 진지해졌다.
“그래? 너는 내게 거짓말을 한 게 있나?”
“혹시나 하는 얘기지 뭐.”
용천휘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가자. 사형도 수련을 할 장소를 찾아봐야 되지 않겠어? 내가 거들어 줄게.”
용천휘는 지강백이 무어라 하기 전에 훌쩍 앞서 걸어갔다.
그의 등을 지켜보는 지강백의 표정이 복잡해진 것은 비밀이었다.
* * *
“어찌 저런 무례한 자가 있단 말인가!”
마흔다섯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물론 지강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였다.
“감히 무당의 천일장 앞에서 실력을 운운하다니!”
게다가 비겁하게 천일장을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아직도 욱신거리는 오른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던 천일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게나 말일세. 다른 곳도 아닌 종남파 인간이 구대문파에게 실력 운운이라니.”
연심환이 입을 비죽이며 말을 받았다.
“이미 터가 다한 곳이니 저리 근본 없이 구는 것도 별수 없나.”
그래도 그는 내심 천일장이 저 꼴이 된 게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무당의 천일장도 패했다고 하면 사부님의 잔소리가 조금 수그러들 것이다.
“좀 어떤가?”
연심환이 아직까지 쓰러져 있는 천호를 일으켰다.
천호가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한 대 얻어맞은 뺨이나 복부보다 자존심이 더 얼얼할 터였다.
“으…… 내 반드시 저놈을…….”
이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아미파 속가제자 지전영이 팔짱을 풀며 말했다.
“다들 너무 태평하게 구는 것 같은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곧 있으면 본 회지. 그런데 저 종남의 제자와 본 회에서 맞붙게 된다는 걸 다들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우리끼리 있는 곳이 아니라, 다들 지켜보는 곳에서 이런 꼴을 당한다고 생각해 봐.”
“…….”
그녀의 말은 가뜩이나 언짢던 모두의 기분을 한층 더 불쾌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전에 뭔가 방법을 강구해야 되지 않겠어? 욕만 한다고 될 게 아니잖아.”
지전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방법을 생각해 둬야겠어. 재수 없게 저런 자와 처음부터 맞붙으면 안 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지전영이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녀의 말에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례니 뭐니 하며 애써 가려 두었던 진실을 그녀가 사정없이 후벼 팠던 것이다.
어쩌면, 종남파 제자의 실력이 그들보다 위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진실을.
연심환이 저도 모르게 웅얼거렸다.
“처음부터 맞붙으면 어쩌냐고?”
눈이 미처 따라가지 못한 속도로 제 칼을 떨어트리던 그 뭉툭한 목검이 이제야 두려워졌다.
“어쩌냔 말이지.”
천하무도회 본 회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같은 꼴을 겪는 것은 결단코 사양하고 싶었다.
“…….”
지전영의 말대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 * *
그리고 그 날 밤.
연심환은 누군가의 뒤를 밟았다. 운이 좋은지 달이 없는 오늘 밤에는 희미한 빛도 한 점 없었다.
발소리를 죽인 작은 그림자가 그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범한 걸음이었다.
그 걸음은 내원과는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 외진 창고였다. 주로 지객당을 찾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쓰이는 창고인 터라 딱히 지키는 사람도 없는 곳이었다.
자박.
연심환이 쫓는 그림자가 그중 한 곳으로 들어섰다. 연심환은 마침 잘되었구나 싶어서 그 뒤를 따라갔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어?”
연심환은 창고 문을 닫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가 따라온 인물이 휙 고개를 돌렸다. 연심환이 걸음을 옮기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저런. 말은 들었지만 그 꼴이 대체 뭐야? 도반열장이 그렇게나 무서운 건가?”
연심환이 뒤를 밟은 이는 사천당문의 당주화였다.
당주화가 뭐라고 말을 하는 듯, 면사가 살풋 흔들렸다.
“뭐, 육 성의 단계를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니까 곧 낫겠지. 그나저나 왜 늦게 도착한 거야? 기다렸다고.”
“……가 아니……라서.”
“음?”
당주화는 들리지 않는 말을 몇 마디 중얼대다 입을 다물었다. 연심환은 그것이 도반열장의 후유증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면사를 쓰고 다닐 정도면 꽤나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혹시 얘기 들었어?”
연심환은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아무리 외진 창고라 하나 워낙 모여든 인간들도 많은지라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종남파라 하는 웬 잡것들이 섞여 들어왔단 거.”
“…….”
면사가 흔들렸다. 연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그런데 문제는 그놈이 좀…… 뭐라고 해야지? 주제도 모르고 너무 설친다는 거야. 벌써 무당파의 체면을 형편없이 구겨 놨어.”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팔꿈치의 통증이 떠올라 연심환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래서 말인데…… 놈이 편하게 본 회에 나오게 하는 건 말려야 할 것 같아.”
“……?”
면사 너머의 눈이 반응을 보였다.
연심환은 제 말뜻을 당주화가 알아들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당주화와 그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산공독이라면 너무 표가 날 테고. 잠깐 몸을 무겁게 만들거나…… 뭐 그런 건 없나?”
“……없어.”
면사 뒤에서 나직한 답이 들려왔다. 연심환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당주화에게 바싹 몸을 붙였다.
“왜 그래? 없으면 만들면 되잖아. 설마 사천당가에서 그 정도 약이 없다는 건가?”
“…….”
대답이 없자 연심환은 당주화의 어깨를 붙들었다.
“창고에 온 김에 좀 찾아보자고. 당가에서 맨손으로 왔을 리는 없을 것 아냐. 나도 같이 찾아 줄까?”
때마침 연심환의 곁에는 길쭉한 나무 상자가 두 개나 있었다. 연심환은 속으로 혀를 찼다. 대체 얼마나 많은 독과 암기를 챙겨 왔기에 이렇게 관짝만큼이나 큰 상자가 필요했다는 걸까.
“이걸 열면 되겠어? 내가 해 줄게.”
“……아니, 안……!”
텅!
당주화가 만류하는 것은 알았지만 연심환은 일부러 못 들은 척 뚜껑을 열어 버렸다.
당주화가 그런 약이 없다고 발뺌하는 게 괘씸하던 차였다.
“오라, 대체 뭐가 있…… 음?”
관처럼 크고 긴 상자를 채운 것은 사천당문의 암기와 독들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온몸이 면포로 둘둘 감긴 기괴한 몰골을 하고 있는.
게다가 시취에 버금가는 지독한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면포로 가렸어도 전신의 관절이 비틀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긴 두 눈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이게 시체가 아니라고 하면 그게 더 끔찍한 일일 것이다.
“대체 이게 뭐……! 흡,”
왈칵 고개를 돌리던 연심환이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몸이 굳은 탓이었다.
“흐으……”
꼼짝도 하지 못하는 그의 앞에서, 당주화가 면사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니, 당주화가 아니었다. 도반열장의 후유증으로 얼굴이 망가졌다는 그녀가 이토록 희고 깨끗한, 마치 눈꽃 같은 모습일 리 없었다.
“종남의 제자에게 손을 쓰고 싶다 하였느냐?”
눈꽃 같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여인이 입술을 열 때마다 기이한 자색의 숨이 한 움큼씩 흘러나왔다. 여인의 숨은 곧 안개가 되어 연심환을 꽁꽁 묶었다.
“그리하도록 해 주겠다.”
여인이 연심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인의 눈은 짙은 녹색 안광을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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