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61화 (61/346)

제61화 쥐의 반격

“어서 오십시오.”

임시로 지객승이 된 범산은 아마도 마지막 객이 될 사천당문의 일행을 맞이했다.

가주 당일적과 두 아들, 그리고 이가주와 그의 셋째 딸이었다.

총 다섯 마리의 말과 석 대의 수레, 그리고 행자들의 숫자를 확인한 범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드시지요. 지객당까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당일적이 고개를 끄덕였고, 인사는 이가주가 대신했다.

“그럼 부탁하오.”

“예.”

사천당문의 이가주가 앞장서서 범산과 다른 나한승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정문을 통과해서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였다.

“병법 스님!”

지객당의 잔심부름을 담당하는 사미승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가쁜 숨이 코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딴에는 몹시 화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객을 모시는 중인데 어인 소란을.”

“저, 그게…… 지객당에서 소란이 났습니다. 당장 어느 분께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서…….”

“지객당에서? 어떤 소란이냐?”

“서로 칼을 드시고…… 막 그러고 계십니다.”

사미승의 말에 범산은 저도 모르게 맥 빠진 한숨을 흘렸다.

사미승이 아직 어려 비무가 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게 계율원 앞 공터면 그러려니 해라.”

그러나 사미승은 조막만 한 고개를 고집스레 흔들었다.

“방장 스님께서 첫 번째 방을 내어드리라 하셨던 그 객이라서요.”

사미승은 어려도 눈치가 빨랐다.

첫 번째 방을 쓰는 손님을 새벽에 따로 부르는 등, 지월은 이래저래 신경을 썼다. 사미승을 따로 불러서는 불편한 게 있는지 잘 살피라고도 해 두었다.

사미승도 제 나이가 어림에도 일꾼 취급 안 하고 정중히 대해 주는 첫 번째 방 손님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가 마흔다섯이나 되는 객들에게 둘러싸여 홀로 목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보통의 비무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사미승도 알았다.

그래서 겁이 덜컥 나 달려온 것이었다.

“한 분을 두고 다른 분들이 모두 날 선 듯 구는 것도 큰일인 듯하여서…… 여튼 그랬습니다.”

첫 번째 방을 쓰는 종남의 제자들이라면 범산도 익히 알았다.

도착하는 첫날 화산의 연심환과 다툼이 있었던 것을 그도 뻔히 기억하는 중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예삿일은 아닌 듯하구나.”

범산이 등을 돌려 당가주 당일적을 향했다.

“죄송하온데 길 안내를 나한승들에게 맡겨도 되겠습니까?”

겉치레와 예의를 따지고 드는 것은 구대문파보다 오대세가가 오히려 더 까다롭다고들 했다.

그러나 당일적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목을 까닥였다.

“마음대로.”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범산은 동행한 나한승들에게 객들을 정중히 모시라 일러둔 다음 계율원 쪽으로 향했다.

“마침 잘되었군.”

길 안내를 맡았던 범산이 사라지자 당일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주님? 무어라 하셨습니까?”

당문의 이가주 당선적이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당선적은 요새 기분이 영 찜찜한 터였다. 그 이유는 가주이자 본가의 장손인 당일적 때문이었다.

정확히 당일적이 기별을 받고 멀리 객십(喀什: 카슈가르)으로 출타하고 난 뒤부터였다. 당일적은 희귀한 독충을 수집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가 오랫동안 수소문했던 독충이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당일적은 모든 일을 덮어 놓고 객십으로 떠났다. 소식의 출처가 불분명한 점을 들어 당선적은 반대했으나, 당일적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객십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당일적은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어졌고, 가족들을 멀리했다. 혼자 독공실에 틀어박혀 지냈으며 식사도 따로 했다.

천하무도회를 위해 소림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 아무리 물어도 당일적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니 혼잣말이라도 기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일적인 힐긋 당선적을 보았으나 답을 하지 않았다.

답답해진 당선적이 음성을 높였다.

“가주!”

당일적은 당선적의 어깨 너머로, 그의 여식인 당주화에게 말했다.

“지금 정문으로 나가 보거라.”

“예?”

당주화가 당황해 되물었다.

“수레가 잘 들어서는지 확인하고 오란 소리다.”

당주화가 저도 모르게 싫은 표정을 지었다.

부친 탓에 그녀도 가주가 요새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요새 당주화의 심기가 편치 않았다.

최근 당가의 독문독공인 도반열장을 익히며 피부에 열꽃이 피었던 것이다. 열아홉, 가장 아리따워야 할 나이에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 흉해졌으니 자연 기분이 좋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천하무도회도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주는 위로 두 언니들을 제치고 그녀가 올 것을 명했다.

할 수 없이 길을 나서기는 했지만 얼굴을 면사로 꽁꽁 감추고 다녔다.

“부러 얘기하지 않아도 본가의 일꾼들이 알아 잘할 것입니다.”

이래저래 마음이 좋지 않은데 가주는 허드렛일마저 시키려 들었다. 싫은 태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네게 가라 일렀다!”

갑자기 당일적이 서슬 퍼렇게 노기를 드러냈다. 당주화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보다 못한 당선적이 나섰다. 이대로 두면 딸이 더 심한 나무람을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네 감히 가주의 명에 토를 달 셈이냐. 잠깐 가서 확인하고 오너라.”

“…….”

이제껏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당주화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나 부친까지 저렇게 나오는데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예. 그럼.”

얼굴이 빨개진 당주화가 몸을 돌렸다.

당주화가 방금 지나온 소림의 정문을 다시 넘어서는 것을 본 당일적의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머물렀다.

“…….”

그것을 본 당선적이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한기가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정체를 알 수가 없기에 더욱 차게 느껴지는 한기였다.

대체 당일적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 * *

당주화는 입술을 부루퉁 내밀고 수레를 옮기는 행렬을 살폈다.

사실 살필 것도 없었다.

수레는 총 세 대로, 눈이 달려 있으면 아무 일 없이 얌전히 이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당주화가 투덜대며 수레 행렬을 따랐다.

일꾼들은 소림에서 머물 수 없기에 짐만을 나르고 다시 하산해야 했다.

당주화는 일단 수레가 무사히 소림에서 내준 창고까지 이동하는 것을 본 다음, 빈손이 된 일꾼들이 하나둘씩 창고를 나서는 것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수레 안을 점검했다.

형식적이긴 했지만 행여나 가주가 캐물었을 때 답할 거리가 필요했다.

“대체 내가 왜…… 에잇.”

당주화는 마지막으로 덮개가 덮인 수레를 확인했다.

앞선 두 개의 수레는 소림에서 머물 동안 쓸 짐이 들어 있었다. 당주화는 세 번째 수레도 당연히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겼다.

“……음?”

그런데 아니었다.

세 번째 수레에는 두 개의 커다란 나무 상자가 나란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저 상자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검은 칠이 되어 있는 두 개의 상자는 꼭…….

“기분 나빠. 관처럼 생겼잖아.”

당주화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일단 상자가 아무 일 없이 잘 닫혀 있는가를 확인했다.

“됐어. 별거 없어 보이네.”

당주화는 숙였던 고개를 재빨리 들어 올려 창고를 나서려 했다.

그러나.

“……?”

무인의 예민한 귀에,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왔다.

당주화는 생각할 것도 없이 숨소리가 들려오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

콰당!

꼭 관짝처럼 보이는 길고 네모진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이게 뭐야…….”

눈을 감고 있는 새하얀 여인이었다.

사람이 누워 있는 나무 상자는 관이 맞았다. 좀 전에 들었던 작은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빛이 닿자 여인의 눈이 반짝 뜨였다.

“뭐, 뭣,”

깜짝 놀란 당주화가 뒷걸음질로 거리를 벌리려고 들었다. 동시에 재빨리 허리로 손을 돌려 평소 백승연편을 시전할 때 쓰는 채찍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상반신을 일으킨 새하얀 여인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 끝이 당주화의 손등을 스쳐 갔다.

“웬 계집이냐! 어째서 당가의 짐에 숨어…… 헙! 으흣…….”

……쿵!

당주화가 쓰러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천당문의 자제로 독공을 연마 중인 그녀가 병기를 꺼내 들 틈도 없이 쓰러진 것이다.

아무런 공격이 없었던 것을 보면 당주화를 쓰러지게 한 것은 피부로 스미는 독이 틀림없었다.

“…….”

몸을 일으킨 새하얀 여인은 바닥에 쓰러진 당주화를 힘겹게 붙들어 저가 누워 있던 관 속으로 옮겼다.

사람을 하나 옮기는 게 힘에 들었던지 여인은 소리 없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여인은 허리를 굽혀 당주화의 면사를 떼어 냈다.

이어서 여인은 당주화의 경장을 벗겨 내고 그것을 입었다. 면사를 쓰고 머리를 비슷하게 다듬자 여인은 당주화가 되었다.

“…….”

잠시 당주화를 바라보던 여인은 이윽고 관 뚜껑을 덮었다.

당주화가 된 여인이 조용히 등을 돌려 창고를 빠져나갔다.

사천당문의 누구도 이 여인이 누구인지, 또 하나의 관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 * *

천일장은 방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방심이라는 말이 우스웠다. 그의 뒤에는 마흔넷의 후기지수들과 그 동기들이 있었으며 자신은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당파의 상승 무학을 익혔다.

반면에 상대는 제일의 약체로 알려진 종남파였다.

대체 얼마나 형편없는 무학이기에 익히고자 하는 사람도 하나 없는 것인지, 뻔하다 생각했다.

천일장은 그저 자신의 필연적인 승리를 확신했을 뿐이다. 그것은 천일장의 뒤에 있는 마흔넷도 마찬가지였다.

“하앗!”

탓!

구궁참혼의 한 수가 날카로운 살기가 되어 지강백의 미간을 향해 날았다.

첫 수부터 살초를 전개한 것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천일장은 지강백이 구궁참혼을 받아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래야 했다.

하지만.

스슷, 퍽!

지강백은 대뜸 날아드는 살초를 피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가 피하면 용천휘에게 여파가 미칠 것이 우려되기도 했고, 이미 그에겐 남궁진현의 천하제일쾌검을 받아 낸 경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천일장의 검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천하제일쾌검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검과 맞닿는 순간, 지강백의 신형이 흐르듯 움직였다. 목검이 미끄러질 때처럼 매끄럽게 힘의 방향을 돌려 검면을 타고 내려갔다.

은하유영비와 태을분광검, 그리고 오뢰정인이 그때처럼 유연하게 일체가 되었다.

그 결과는,

탓!

“……!”

바닥에 떨어진 천일장의 검이었다.

천일장은 방금 전 목검의 끝으로 비껴 맞았던 오른 손목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다른 마흔네 쌍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지강백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에게 함부로 모욕을 내뱉을 만한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연심환이 제 패배를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은 것처럼, 천일장 또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망연자실하게 땅에 떨어진 제 검을 바라보았다.

“사과나 해라. 방금 전 네 검을 막은 것은 종남의 태을분광검이었다.”

“…….”

“사과하라니까. 아니면 손을 쓰겠다.”

천일장을 대신해 움직인 것은, 그의 사제인 천호였다.

“이걸 받아랏! 하앗!”

단단하게 쥐어진 주먹이 날아들었다. 칠성권의 한 수였다.

“쯧.”

이번에도 평가를 하자면 나쁘지 않은 권법이었다.

그러나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지강백에게는 천호의 주먹보다 장난처럼 퉁겨 내던 지월의 빗방울이 더 위력적으로 느껴졌다.

지강백은 공격을 피할 것처럼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그도 잠시, 몸이 탄력을 더해 일어섰다. 목검이 수평이 되어 천호의 안면을 밀었다.

그 잠깐의 대응으로 천호의 칠성권은 원래 급소를 노리던 목표를 잃어버렸다.

지강백은 오른손의 목검으로는 상대의 시야를 방해한 뒤, 왼손으로 벽운천강권을 전개했다.

퍽!

복부에 정확히 권이 꽂혔다.

“으윽!”

천호의 몸이 앞으로 숙여진 채 펄쩍 뛰어올랐다. 지강백은 내키는 김에 목검으로 그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딱!

“으악!”

천호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부러진 잇조각 하나가 비명에 섞여 튀어나왔다. 입가가 피투성이가 된지라 누가 본다면 중한 내상이라도 입은 줄 알 것이다.

“방금 것은 종남의 벽운천강권이다. 뺨을 갈긴 건 아무런 초식도 아니었지만.”

지강백은 천일장에게로 목검의 방향을 돌리며 말했다.

이빨을 하나 부쉈지만 눈은 여전히 사나웠다.

지강백의 입장에서 직접적인 모욕을 던진 것은 천일장이었고, 따라서 그는 이빨을 몽땅 부러트려도 시원찮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 줄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과해라.”

“……그,”

천일장이 무어라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하필 그때 범산이 도착했다.

“손속을 멈추시오!”

내력을 실은 묵직한 말이 귓가를 후려쳤다.

“손에서 무기를 놓으십시오! 어서!”

범산이 지강백을 향해 소리쳤다.

피를 토한 것처럼 보이는 천호와 칼을 잃고 망연자실 서 있는 천일장, 그리고 그 앞에서 범 같은 눈으로 목검을 휘두르려 하고 있는 지강백.

범산의 눈에는 지강백이 이 사단의 원흉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

지강백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잔뜩 사나워진 눈매는 아무래도 좋은 인상을 남기기에 힘들었다.

“계율원 내에서는 피를 보아서는 아니 되오! 그것은 아무리 객이라 하여도 무시할 수 없는 계율. 또한 천하무도회 전까지 다른 이를 상하게 해서도 아니 됩니다. 그것이 규칙입니다.”

범산은 한껏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지강백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라서 본 회까지 병기를 압수하겠습니다. 검을 이리 주십시오.”

“저, 그게……”

지강백이 뭔가 억울한 듯 입을 뗐다.

그야 이빨을 나가게 한 것은 이쪽이었지만 시비는 저쪽에서 먼저 걸었고, 다짜고짜 살초를 전개한 것도 저쪽이었다.

“그리고 본 회가 있을 때까지 종남의 제자들에게 계율원의 임시 연무장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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