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57화 (57/346)

제57화 비를 멎게 하는 사람

부슬비는 추적대는 긴 장대비로 변했다.

“낭패로군.”

용천휘가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보며 혀를 찼다.

“더는 못 갈 것 같은데. 이쯤에서 적당한 곳을 찾아 비를 긋자.”

“젠장, 그게…….”

대답하는 표정이 어두웠다. 비에 발이 묶인 것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바야흐로 숭산.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봉우리 어딘가에 소림이 있을 것이다.

지강백이 용천휘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힐긋 살피며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로군. 이 비를 뚫고 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채희유와 길이 나뉘고 산양을 떠나면서부터 용천휘는 조금 묘하게 굴었다. 기왕 가는 것 빨리 가자며 시도 때도 없이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덕분에 잠을 자는 시간을 빼고는 내내 마차를 달리기 일쑤였고, 그렇게 서두른 덕분인지 숭산까지 막힘없이 당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가 달릴 수 없는 길마저 서두르는 것은 용천휘와 어울리지 않았다.

속내야 어쨌든 말로는 그리 아끼던 비싼 가죽신은 지금 진흙투성이였다.

심지어 산을 오르는 데도 언제나처럼 지강백을 앞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이 먼저 길을 찾으려 들었다. 덕분에 구불구불 좁고 험한 길로 들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림사처럼 거대 문파가 있는 곳이라면 잘 닦인 넓은 길이 있을 텐데, 용천휘가 들어선 길은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외진 숲길이었다.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걸음을 고집했다.

그 결과가 중도에 장대비를 만나 더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게 된 지금 처지였다.

“……비가 이렇게 오니 더는 길도 못 찾겠네. 좋아. 좀 쉬자고.”

용천휘가 결국 손을 들었다.

그가 어깨를 휙 틀며 필목현에게 말했다.

“근처에 비를 피할 데는 있어?”

“아이고, 도련님.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오늘 처음 와 보는 산인 것을요.”

“쯧. 무능하긴.”

“예? 지금 무능하다 하셨습니까? 허, 참. 도련님께서 소림사 구경 한번 하고 싶다는 말에 섬서에서 하남까지 그 먼 길을 내내 늙은 말 채찍질하며 신속하고 정확하게 달려온 사람이 누굽니까? 예?”

“음. 아닌 게 아니라 사형이 고생했지.”

“허! 정말 이리 나오실 겁니까?”

“그렇게 따지고 들 시간에 쉴 데를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

“못 합니다, 못 해요! 오늘 처음 와 보는 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산은 뭐 얼마나 다녔다고.”

여느 때처럼 둘의 말씨름이 한참 이어졌다. 지강백은 말릴 생각을 하는 대신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좀 기다려라. 비를 그을 만한 데를 찾아보고 올 테니.”

지강백이 빗속으로 사라졌다.

너스레를 떨 때와는 표정이 싹 바뀐 필목현이 입을 열었다.

“지월의 흔적은 놓쳤다 봐야겠지요? 아무리 수라안을 쓰신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런 비라면 그렇게 봐야지.”

용천휘가 부득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분명히 산을 오른 흔적을 찾았는데. 멀리 있지 않단 말이다.”

“그간 이런저런 일들로 길이 많이 지체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원래는 놓치는 게 더 맞는 상황일 겁니다.”

“젠장!”

용천휘의 욕설이 빗소리를 타고 흐릿하게 번져 갔다.

지강백은 한 식경 정도 후에 돌아왔다.

* * *

“이쪽이다.”

인근 지형을 살피던 지강백은 오래도록 산에서 살았던 경험 탓인지 어렵지 않게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뭐 이리 멀어. 가는 동안 비 다 맞겠네.”

지강백은 용천휘가 진작부터 비를 맞고 있던 중이라는 사실을 굳이 상기시켜 주진 않았다.

“별로 안 멀다. 이제 다 왔어.”

지강백이 찾은 곳은 둥글게 밑동이 패인 암벽 아래였다.

벽을 타고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처마 역할을 해 주는 곳은 비를 가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꼽자면 비좁다는 것이었고, 일행을 데리러 가는 한 식경 동안 다른 사람들이 와서 이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분명 비를 피하게 해 준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필목현이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용천휘도 마찬가지였다.

“사형. 설마 이 빗속에서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아니면 저 사람들을 쫓아내고서 자리를 뺏자는 말이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분명 아까는 비어 있었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이 냉큼 자리를 차지할 줄 몰랐던 지강백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은 끼어들 자리도 없어 보이는데. 이대로 계속 비나 맞고 있어야겠군. 내 몸이 이 차가운 산비를 얼마나 버텨 줄까 모르겠네.”

용천휘는 들으라는 듯 더 까칠하게 굴었다. 지강백은 그것을 몸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몸이 아플수록 그것을 감추기 위해 가시를 세우는 게 그가 알고 있는 용천휘의 성격이었다.

“몸이 안 좋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 다른 곳을 찾아보겠다.”

“됐어. 더는 한 발짝도 못 걷겠어.”

“그럼……,”

지강백이 다른 방법을 찾아 시선을 돌리는 그 때,

“허허…… 본의 아니게 자리를 빼앗은 모양이로군. 이리 들어오시오. 좁은 곳이긴 하나 조금씩만 불편을 감수한다면 나누지 못할 것도 없는 곳이외다.”

산 공기처럼 맑고 청량한, 그러면서도 바닥을 쉬이 짐작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있는 음성이었다.

탁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이런 음성은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아, 감사합니다.”

지강백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용천휘를 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용천휘는 이렇게 좁은 곳을 나눠 쓰기까지 해야 되냐며 투덜거렸지만 결국 지강백의 뒤를 따라왔다.

누가 보더라도 용천휘는 내키지도 않는 곳을 억지로 들어섰다 여겼을 것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가 왜 눈을 빛냈는지는 짐작하지 못한 채.

“감사는 외려 이쪽에서 드려야지. 소협이 먼저 발견한 장소를 멋대로 빌려 쓰고 있었으니. 이 길은 어지간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니지 않기에 미처 생각을 못 했네.”

처음 보는 이들은 모두 둘이었다.

한쪽은 나이 들었고 한쪽은 젊었다. 그러나 나이의 구분이 없다면 둘은 착각할 정도로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끔한 민머리, 이마 위의 뚜렷한 붉은 계인. 진한 황색 가사.

이곳이 숭산이니 분명 소림의 제자일 것이다.

“종남의 제자들이 소림의 선사들께 은혜를 입습니다. 너도 어서 인사해라.”

지강백이 용천휘의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용천휘가 끝내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삐뚜름히 들고 작게 말했다.

“흠. 그러게 말이야. 정말 운이 좋았네.”

지강백 일행을 위해 자리를 당겨 앉던 노승이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오호라. 종남의 문하셨던가? 이거 놀랄 일이로군. 어쩐지 그……”

“대사!”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젊은 승려가 깜짝 놀라 노승의 말을 막았다.

노승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이런, 이런. 내가 또 실수할 뻔했군. 어서 앉으시게.”

“예, 감사합니다.”

안쪽에서부터 조금씩 당겨 앉아 어찌어찌 다섯 명이 모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 길을 오르는 것을 보니 목적지는 소림이겠고…… 그렇다면 소협은 천하무도회에 오는 것인가?”

노승이 물었다. 지강백은 정중한 태도로 답했다.

장문령부를 품에 넣고 천하무도회로 향하는 길에 오르는 순간부터 그는 남들 눈에도 종남의 일대제자였다.

이름을 감추는 것은 이제 필요 없었다.

“그렇습니다.”

“사문의 존장께서도 오시는가?”

“예. 길이 갈려 다르게 출발했지만 사부님께서도 지금 소림으로 오고 계신 줄 압니다.”

“흐음. 그렇군. 용케도 개방에서……”

“대사!”

이번에도 뭔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젊은 승려가 나서서 말을 막았다. 노승은 무안한 듯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았다, 알았어. 내 차라리 말을 말지.”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명호도 서로 묻고, 어쩐 일로 이런 곳에 있느냐 한 마디씩 더 오가야 자연스러웠을 테지만 더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용천휘는 좀이 쑤시는지 하품을 하다 말고 부채를 펴들어 설렁설렁 부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했다.

“사형. 자리 좀 바꿔 줘.”

“왜?”

“이 자리는 손을 쓰기가 불편해. 부채질이 영 시원찮은데.”

“……알았다.”

번거롭긴 했지만 아주 못 들어줄 부탁도 아니기에 지강백은 용천휘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덕분에 용천휘는 노승의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노승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용천휘가 부채를 몇 번 휘적대고 난 뒤였다.

“독특한 부채로군.”

부채질이 딱 멎었다.

용천휘가 고개를 돌려 노승과 눈을 마주했다.

“비싼 거라서요.”

노승의 맑은 눈이 용천휘의 매끄러운 표정을 향했다. 그 눈은 세상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해체하는 듯했다.

“흐음. 그래서 그리 독특한 향이 나는 모양이군?”

“…….”

용천휘의 답은 잠깐의 틈새를 두고 이어졌다.

“향이라니요. 아무 냄새도 안 납니다만.”

그는 코끝을 부채에 대고 숨을 킁 들이쉬었다. 그를 지켜보는 노승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 눈이 어두워지는 대신 다른 것들이 예민해지기도 하지. 나는 코가 그런 모양일세.”

용천휘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니면 제가 너무 오래 지닌 부채라 체취가 배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흐음. 그렇다 하니 더는 말을 않지. 다만 늙은이 코가 엄살이 심해 그런데 그 부채는 그만 넣어 두지 않겠나?”

“아니, 그건 남이 이래라저래라 할……”

용천휘가 뭔가 되바라진 소리를 하려는 것을, 지강백이 나서서 재빨리 부채를 빼앗아 던져 버렸다.

“이봐, 사형!”

“무례하게 굴지 마라. 더운 날도 아닌데 왜 부채질이냐.”

“그거야 내 마음이지. 저 부채는 이젠 내게 손과 같은 물건이야. 쥐고 있지 않으면 허전하다고.”

“악취로 고생하는 것보다 손이 허전한 걸 참는 게 백 배는 더 쉽다. 좀 참아라.”

“제기랄. 이 몸에게 이리 굴다니. 기억해 두겠어.”

용천휘가 큰소리를 치는 동안 필목현이 손을 뻗어 부채를 주워 왔다.

“좀 자중하십시오, 도련님. 다른 데도 아니고 소림의 앞마당이잖습니까.”

“너까지…… 젠장.”

부채를 받아 든 용쳔휘가 또 생각 없이 부채를 차르륵 펼쳐 들었다. 습관이라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허허…… 고치기 힘든 버릇이로군.”

노승이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툭.

부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부채가 왜 떨어졌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용천휘가 손을 잘못 놀려 실수를 저지른 듯했다.

“당분간 그리 놔두게나. 비는 곧 그칠 터이니.”

그 뒤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승의 말이 그 어떤 기이한 힘이 되어 여기 있는 이들을 꽁꽁 묶어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낮은 침묵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다들 묵묵히 입을 다문 가운데 빗줄기 소리만 퉁퉁 바위와 나뭇잎을 때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흐음.”

지강백은 노승이 손가락으로 퉁퉁 허공을 퉁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손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니었다. 노승의 손은 즉흥으로 음률을 타는 듯 소리를 녹여내고 있었다.

“무얼…… 하시는 겁니까?”

노승이 고개를 돌려 지강백을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허허, 들켰군. 이제 와 감추기도 늦은 것 같으니 말을 하지. 소협의 눈에는 내가 무얼 하는 걸로 보이는가?”

“소리를…… 지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호라?”

노승의 눈이 반짝였다.

“소리라니. 그리 접근할 수도 있는가. 손을 보고 소리를 말할 줄은 몰랐네만.”

“손을 움직이실 때마다 소리가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하.”

노승이 이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은 감이 아주 좋아 그렇군. 눈 못지않게 다른 것도 빨라. 어디 그럼 내가 무얼 하는지 보겠나?”

“허락해 주시면 삼가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노승이 몸을 일으켰다.

지강백보다 오히려 다른 세 사람이 더 크게 긴장하여 숨을 삼켰다. 노승이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 보게.”

노승은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이미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슷, 스스스슷.

툭, 투두두둑.

가볍게, 퉁기듯 움직이는 손의 움직임에 맞춰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점차 소리가 줄어들었다.

“아……!”

지강백은 소리와 움직임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았다.

소리가 작아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노승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정확히 맞춰 손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퉁, 하고 손가락을 퉁길 때 빗방울도 퉁, 하고 튀었다.

분명 수를 셀 수 없는 게 맞는 빗줄기들이 하나하나 낱알이 되어 노승의 손가락 새에서 유희하는 듯했다.

빗줄기가 거세지면 손동작은 빨라졌고, 조금 약해지면 손도 느려졌다.

노승의 주위로만 비가 멎은 듯 보였다. 노승이 빗줄기에 녹아 그대로 비가 되는 듯 보였다.

반 각 정도 빗방울을 퉁기던 노인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지강백에게 물었다.

“보았는가?”

“예…… 예, 보았습니다.”

“어땠는가?”

그 물음에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노승은 마치 비를 다루는 산신령처럼 보였다.

“비를 멎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홀린 듯한 표정으로 양 볼이 상기되어 이런 말을 하는 지강백을 보며 노승이 호방하게 웃었다.

“허, 이런. 그런 건 용신님이나 하시는 일이지. 범부가 어찌 그런 신통력을 부리겠나. 이 노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노승이 지강백에게 소맷자락을 내밀었다.

“이 한 몸 비를 덜 맞게 하는 것뿐일세.”

“…….”

빗속에서 반 각을 흔들리고 왔던 소맷자락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비를 맞은 적이 없는 것처럼 보송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경지였다. 경외감마저 들었다. 과연 무림의 태산북두라던 소림이었다. 소림에는 대체 이 노승만 한 고수가 얼마나 있다는 소릴까.

“이건…… 어떠한 무공입니까.”

“글쎄. 방금 생각이 난 거라 나도 잘 모르겠네. 이것이 무공일지 아닐지도. 누군가에게는 무공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잠시 재주를 부려 비를 긋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 아니 그런가?”

마지막 말은 지강백의 어깨 너머 용천휘를 향했다.

용천휘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뭐…… 그렇겠습니다만.”

“그런데 자네는 혹 눈에 병이 있는가?”

용천휘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아닙니다만. 그건 왜 묻습니까?”

“내가 저 밖에 있는 내내 자네가 눈을 가리고 있는 듯 보여 말일세. 병이 아니라면 눈이 너무 좋은 모양이로군.”

용천휘의 손이 작게 꿈틀거렸다. 아마도 부채를 쥐지 못해 손이 근질대는 모양이었다.

“네. 너무 좋아 탈입니다.”

“그렇군.”

노승이 고개를 돌려 하늘 한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지강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네만 내 말을 너무 새겨듣지 말게. 이건 그저 나이 들어 더 이상 무(武)와 유희의 구분이 어려운 노구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말이니. 자네는 아직 젊고도 젊으니 무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으면 하네.”

알 듯 말 듯 어려운 말이었지만 지강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무가 그에게 가벼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자네에게 무란 어떤 것인가?”

“힘입니다.”

“그렇다면 힘이란?”

“제 육신을 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힘입니다.”

“자네의 마음은 무엇을 원하나?”

“악을 다스리고 약자를 위하는 조사의 유지를 세상 모든 이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참 모난 데 없는 답이로군.”

노승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무의 끝을 보는 순간에도 그 마음을 지니길 바라네. 강호는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그런 마음으로 일구어야 하는 것이지.”

노승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좋은 인연과 좋은 말씀에 또 한 번 감사를. 나무아미타불.”

“엇,”

갑작스러운 인사에 지강백이 허둥대는 동안 노승은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비가 오는데 벌써 가십니까?”

“가다 보면 그치겠지.”

“비가 아직 굵습니다. 잠시 더 기다리시는 게,”

“서둘러야 할 일이 생겨서 말일세. 객을 초대해 놓은 자리에 주인이 없어서야 쓰나.”

노승의 뒤를 젊은 승려가 말없이 따랐다.

지강백이 그 뒤를 따라나서며 고개를 숙여 포권을 했다.

“그럼 소림에서 뵙겠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대사의 법명을 일러 주십시오.”

“노구의 법명은 지월이라 하네.”

“지월이라 하면……?”

지강백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이미 지월은 저만치 앞서 가는 중이었다.

신기하게도 굵던 빗줄기가 벌써 가늘어지는 듯했다.

“저 노승이 지월 대사였다니…….”

지강백이 경탄과 한숨을 섞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천휘가 그때서야 부채를 집어 들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저자가 지월이야?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어 보이던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그를 몰라보는 네 눈을 탓해라.”

“흐음. 사형이 볼 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그래.”

“사부님하고 비교해 보면?”

“……뭐? 그런 질문이 어디 있나.”

“안 될 건 또 뭐야. 사부님도 고수고 저 사람도 고수라니 그러는 거지.”

“그건 내가 감히 평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런 건 묻지 마.”

지강백이 딱 잘라 말하자 용천휘도 더는 귀찮게 굴지 않았다.

“비가 그칠 것 같다. 우리도 출발하자.”

“완전히 그친 다음에 가자. 아직 길도 미끄러울 텐데 뭘 서둘러.”

용천휘는 외려 느긋하게 돌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껏 길을 재촉하던 그가 맞나 싶은 행동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서두르더니. 갑자기 왜 마음을 바꿔 먹었나?”

“흠. 그땐 그러고 싶었는데…… 뭐, 중간에 그럴 이유가 사라졌달까.”

용천휘가 흰 손으로 부채를 들어 올렸다. 언제봐도 늘씬하게 고운 손은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였다.

그 이유라는 게 몸이 안 좋아져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잊는 노릇이었지만 그의 사제는 기이할 정도로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럼 나는 불을 피울 만한 것을 구해 오겠다. 좀 쉬고 있어.”

“뭐, 그러든지.”

말리지 않는 것으로 보면 저 시큰둥한 대답은 그렇게 해 달라는 소리일 것이다.

지강백은 비가 거의 그쳐 가는 길로 나섰다.

그가 어느 정도 사라졌다 싶자 필목현이 입을 뗐다.

“……괜찮으십니까?”

“빌어먹을!”

그가 묻기 무섭게 용천휘가 부채를 흙바닥에 패대기쳤다.

탁, 하고 땅에 부딪힌 부채가 저절로 벌어졌다. 곱게 접히도록 되어 있는 쥘부채에는 누군가 송곳이라도 박아 넣은 것처럼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었다.

“지월이 내 부채를 망가트렸다.”

“저런……. 그 비를 퉁기는 짓을 할 때 손을 썼겠군요.”

“그래. 기본적으로는 탄지신통을 응용한 거겠지. 문제는 지월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무공이 되어 전혀 다른 위력을 발휘한다는 거지만.”

“그렇다면 소야께서 부채로 적혈혼을 흘리는 것을 알아챘다는 말입니까?”

“다 봐 놓고선 뭘 또 묻나. 그래, 그랬겠지. 이 짓을 하겠다고 그동안 지월의 뒤를 쫓아 헐떡대며 달려왔는데. 대체 어떻게 적혈혼을 눈치챌 수 있는 거지? 나도 맡지 못하는 향을.”

필목현이 낯빛을 무겁게 가라앉히며 물었다.

“그렇다면 적혈마로서 지월을 시험해 보겠다는 뜻은 어찌 되는 겁니까? 소림 안에 들어가면 상황이 더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적혈혼은 적혈대법에 쓰일 제물에게 쓰는 약으로, 용천휘와 몸 상태를 맞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파루나가 직접 쓸 때와 부채에 발라 임시변통으로 쓰는 것은 효과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긴 했지만 아쉬운 대로 쓸 만했다.

그런데 그것을 간파당했던 것이다. 오로지 파루나만이 감지할 수 있는 무색무취의 향을.

“변하는 건 없다.”

용천휘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나 혼자서 적혈혼을 쓰는 게 어려워졌을 뿐. 파루나를 다시 불러들여야겠어. 너는 최대한 빨리 기별을 넣고 다시 와라.”

“존명.”

필목현이 자취 없이 사라졌다.

혼자 남은 용천휘는 제 눈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조소를 떠올렸다.

“눈에 병이 있냐니…… 앞으로는 수라안을 쓸 때도 조심해야 한다는 소린가.”

모를 일이었다. 중원의 일인자라는 지월의 힘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는.

용천휘가 한숨을 쉬듯 눈을 감았다.

“어쩌면 적혈마는 고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이걸 어쩌지, 사형?”

감은 눈꺼풀이 옅게 흔들렸다. 그 안의 붉은 눈이 갈등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용천휘는 애써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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