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천동지-56화 (56/346)

제56화 가는 날이 장날인 이유

그러나 마차를 멈추게 한 것은 지강백이 아니었다.

“워워!”

때를 맞춘 듯, 필목현이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 앞에서 이쪽을 향해 질풍 같은 속도로 마주 달려오는 사람 탓이었다.

“저게 대체 뭡니까? 말입니까?”

필목현이 눈을 끔벅대며 마차에서 내려선 지강백을 향해 물었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휘몰아치는 터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말을 타고 달리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말치고는 너무 작았던 것이다.

“아니, 그렇다고 망아지나 노새라고 하기에는 저리 빠를 리가 없겠고요. 혹 뭐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산양……처럼 보입니다만. 제가 평소 보던 산양과는 좀 다르게 생겼군요.”

“예? 산양이라면, 양 말입니까? 매에, 하고 우는 그거요?”

“예.”

지강백은 필목현에게서 말고삐를 낚아챘다.

“마차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는 자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사제에게도 주의하라고 당부해 주십시오.”

“어엇, 그럼.”

필목현이 후다닥 마부석에서 내려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안녕하십니까!”

상대는 벌써 표정이 읽힐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다.

지강백이 걸음을 멈추고 산양과 함께 달려온 자를 바라보았다.

산양이라는 괴상한 탈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의외로 상식적이고 멀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종남파 일대제자, 지 대인이 맞으십니까?”

“예? 아, 종남의 제자인 건 맞습니다만…….”

지강백이 난감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이젠 처음 보는 사람들까지 그가 종남파 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부님께 아무리 등짝을 두드려 맞아도 모자랄 것이다.

“아, 신분 확인은 그냥 절차상 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인이라는 호칭이 쑥스러워 그러신 거라면 그것도 신경 안 쓰셔도 되고요. 사업 방침상 일을 맡겨 주신 객들은 다섯 살짜리 꼬맹이도 전부 대인이라 불러드리고 있거든요.”

“일을 맡기다니요? 저는 귀하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산양을 타고 온 그가 갑자기 깍듯하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지 대인.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진 모라는 사람으로, 섬서와 사천 그리고 호북 일대에서 무림 동도들을 상대로 작게 운송업을 하고 있습니다.”

“운송이라면 물건을 전달한다는 말씀입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어기 커다란 대형 표국들, 그러니까 시제표국이니 한진표국이니 하는 곳처럼 발 안 달린 물건이라면 전부 받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 몸 하나로 옮길 수 있는 작고 가벼운 것만 다루지요. 그래서 주로 서찰 같은 것을 전해 드립니다.”

지강백은 진 씨라는 그가 타고 온 산양을 쳐다보았다.

“양……으로 말입니까?”

“예? 아, 양이 낯선 모양이시군요. 웬걸요. 양뿐 아니라 속도를 내는 놈이라면 뭐든지 타지요. 평지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말이 제일 낫지만 산으로 들어서면 얘기가 전혀 달라지거든요. 사슴이며 금전표(金錢豹: 표범의 일종)도 탑니다. 일전에는 어찌나 급했던지 범도 한번 타보았지요.”

진 씨는 씩 웃으며 범은 사람이 탈 짐승이 아니었다는 너스레를 떨었다.

“자, 얘기가 길었습니다만 받으십시오. 종남에서 온 서찰입니다.”

“종남이라고요?”

지강백이 서둘러 그가 내미는 서찰을 받아 펼쳤다.

―이놈 강백아.

네 어디 저 멀리서 잘 다니고 있는 게냐. 이 사부는 당연히 네놈 걱정은 털끝만큼도 안 하고 있었다만 그래도 붓을 든 김에 이렇게 한 줄 적는다.

오늘 개방에서 첩지를 전해 왔느니라.

긴말은 않겠다. 올해 천하무도회가 시일을 앞당겨 소림에서 있다 하니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네놈이 준비가 될 때까지 천하무도회는 얼씬할 생각도 말라 이를 것이었는데, 기왕 이리된 것을 어쩌겠느냐.

이 사부도 그쪽으로 움직일 터이니 소림에서 보자꾸나.

그리고 밑에 다급히 한 줄 덧붙인 게 보였다.

덧, 혹시 둘째 놈이 뭔가 크고 둥근 약 같은 것을 먹으라 하지는 않더냐?

그런다면 두말하지 말고 냉큼 받아먹어야 하느니.

“개방이라니…….”

지강백이 서찰을 다시 접으며 중얼거렸다. 접히는 서찰처럼 미간에도 주름이 접혔다.

용천휘에 대한 의심이 다른 데까지 번진 탓일까.

이 서찰이 정말로 사문에서 온 것이라 신뢰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그가 아는 사부는 개방에 종남의 제자라는 신분이 들킨 것에 먼저 노여움을 토하실 분이었다.

긴말 필요 없다며 소림으로 가라는 간략한 서찰은 낯선 위화감을 남겼다.

“이걸 종남에서 직접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 중간에 전달을 받았습니다.”

“전달이라니, 누가 전해 준 겁니까?”

“종남파에서 온 심부름꾼이라 하셨습니다만…… 아, 이것도 함께 전하라 이르셨습니다.”

진 씨가 품 안에서 반들대는 낡은 가죽에 둘둘 말린 물건을 꺼내 들었다.

지강백은 먼저 가죽을 알아보았다. 지금은 사제가 된 왕대환이 늘 차고 다니던 팔 토시였다.

“이리 주십시오.”

가죽을 풀자 그 안에서는 옥 장식을 박아 넣고 금박을 두른 목패가 나왔다.

“이건……”

종남의 장문령부였다.

아마도 지금 종남에 남아 있는 가장 비싼 물건일 것이다.

용천휘가 입문하기 전까지, 조사동의 향로까지 팔아 가며 근근이 버텨야 했던 그 가난하던 시절에도 끝끝내 팔지 않고 남겨 둔 유일한 물건이었다.

장문령부는 장문이 없는 자리에서는 그 자체가 장문이 되는 신물이었다.

이것을 함께 보냈다는 것은 그 어떤 의혹도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지강백은 정중한 손길로 장문령부를 다시 싸서 품에 넣었다.

그가 흐트러짐 없이 진 씨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틀림없이 전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객의 기쁨이 곧 저의 기쁨이자 생의 보람인 진가운송(眞家運送)입니다. 앞으로도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그럼 이만.”

진 씨 사내는 산양에 올라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거, 별일 아니었습니까?”

필목현이 마차 문을 빠끔히 열고 물었다.

지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손에 드신 건 뭡니까?”

“사부님으로부터 온 서찰입니다.”

“예에? 아니, 저희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그런 걸 보내셨답니까? 진인께서는 참말 귀신같은 분이시로군요. 역시 저희 도련님의 스승다우십니다.”

필목현의 영양가 없는 얘기는 뒤 이어 들려오는 용천휘의 목소리에 묻혔다.

“뭐라는 서찰인데?”

지강백이 용천휘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복잡했다. 아직 해소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마치 이 서찰은 용천휘를 구하려는 듯, 하필 이시간을 골라 도착했다.

이 또한 우연일 뿐이라면 사제는 천운을 타고 났다 해야 할 것이다.

“소림에서 보자고 하셨다.”

“음? 그럼 사부님도 천하무도회에 오신다는 말이야?”

“그래.”

용천휘가 물색없이 활짝 웃었다.

“그럼 곧장 소림으로 가야겠네. 사부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잖아. 함양에는 들를 시간이 없겠는데?”

“…….”

지강백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용천휘가 천운을 지니고 있다면, 대체 그것은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럴 것 같군.”

답은 소림에 있을 것이다.

백사준은 말했다. 용천휘가 그 돈을 싸들고 종남파에 들어온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지금으로써는 알지 못했다. 용천휘의 매끄러운 혀는 결코 진실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분명 그 답은 천하무도회에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용천휘는 천하무도회를 가는 날까지 종남파에 머물겠다 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천하무도회가 목적이었다는 소리였다.

생각해 보면 간단했다.

그간은 용천휘가 제 목적을 감추는 짓거리들을 이리저리 교묘히 벌여 왔던 탓에 생각을 해 보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소림으로 가자.”

지강백이 마차로 돌아왔다.

용천휘가 빙긋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어차피 그럴 거면서 왜 사람 겁을 주고 그래.”

다각다각!

마차가 출발했다.

지강백은 맞은편에 앉은 용천휘의 매끄러운 웃음을 지켜보다 말했다.

“내가 너를 믿는 한 너는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 말은 진심이냐?”

용천휘가 부채를 탁 소리 나게 펼쳐 들었다.

“갑자기 왜 정색을 하는 거야? 보는 사람 부담스럽게. 사형 눈빛이 아주 날 씹어 먹을 것 같은데.”

“대답해.”

“무슨 소릴…… 나 참. 그래. 진심이야. 진심이 아닐 건 또 뭐야.”

지강백은 이제 용천휘가 왜 부채를 항상 손에서 놓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부채는 매끄러운 웃음과 같은 것이었다. 상대로부터 자신을 능숙히 감추는 역할을 했다.

지강백이 그에게서 부채를 빼앗았다.

“워, 무슨 짓이야?”

부채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지강백은 발끈하는 용천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용천휘가 어처구니가 없던지 혀를 차며 물었다.

“……? 사형 미쳤어?”

지강백은 그를 보며 웃었다.

사형이, 아주 깊이 아끼는 사제를 대하듯 그렇게.

“그럼 나는 너를 믿겠다.”

“…….”

“배신하지 마라.”

툭툭.

지강백은 아랫사람한테 하듯 용천휘의 머리를 두들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각다각!

의심과 믿음의 양극단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침묵 속에서 마차는 속도를 더해 소림으로 달려갔다.

* * *

“하, 이이…… 이것들이!”

양영천이 푸르르 반 토막 남은 수염을 떨었다.

지금 종남파에는 유례없던 대참사가 발생했다.

장문령부를 도둑맞은 것이다.

“이이…… 거지를 사칭하더니 사실 도둑이었던 게냐!”

양영천은 평소 장문령부를 넣어 두던 목갑을 움켜쥐고 소리를 쳤다.

그러고도 분을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애먼 제자의 등짝을 후려쳤다.

퍽!

“이 쓸모없는 놈들! 그래, 네놈들은 눈깔이 어디에 달렸기에 근 오십 가까이 되는 놈들이 도둑 드는 것도 한 놈 몰랐느냐!”

등짝을 맞은 왕대환이 펄쩍 뛰었다.

“아이고, 사부! 무슨 말씀을 그래 하십니까! 도둑놈을 몰라본 것은 사부님이 먼저 아니셨소!”

“뭬야? 뭐라고 이놈아?”

퍽, 퍽!

왕대환은 등짝이며 어깨를 맞을 때마다 펄떡대면서도 기를 쓰고 외쳤다.

“아니, 그래! 개방에서 왔다고! 웬 신분도 모를 거지놈들을 냉큼 지객당으로 모시라 한 게 사부시면서! 왜 엄한 나를 잡고 그러시오!”

왕대환이 필사적으로 곁눈질을 보냈다.

바른말 잘하는 염창이 그를 거들었다.

“아, 틀린 말은 아니지. 천하무도회 첩지가 어쩌고 하면서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글썽인 게 사부셨는데.”

“예끼, 이놈들!”

이제 등짝을 팰 놈이 하나에서 둘로 늘었다.

무지렁이 산적 놈들이 어디 한 군데 빠질 데 없는 첫째 제자의 수련법을 그새 좀 따라 했다고 이제는 제법 사부의 손매를 피해 다니기도 했다.

“게 얌전히 있지 못하겠냐!”

양영천이 꽥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때리는 사부도 알고 맞는 제자들도 알았다. 사부는 제자들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장문령부를 도둑맞은 이 참사 앞에 넋을 놓았을 뿐이라는 것을.

그것도 귀한 손님이라며 제자들 닦달해 거하게 대접까지 했던 사람들에게서.

일단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종남파에 실로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실로 간만에 강호의 객이 들었던 것이다.

나타난 손님은 모두 둘이었는데, 행색은 꾀죄죄한 거지였으나 풍채가 당당했고 눈빛이 맑았다. 그리고 옷이랍시고 걸친 누더기 위로 매듭 다섯 개를 묶은 새끼줄을 보란 듯 두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개방의 사람들이었다.

양영천은 감히 좌시하지 못하고 그들을 맞았다.

그들의 목적은 소림방장의 직인이 찍힌 천하무도회의 첩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으, 으허억…….”

양영천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대체 몇 년 만…….”

어찌 감개무량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장문인이 된 그해 이후로 처음 받아보는 첩지였다.

그간 망했네 어쩌네 하는 말들이 아무리 귓등을 따갑게 해도 찍소리 한번 해 보지 못했다.

종남이 구대문파의 쭉정이 된 것, 기어코 그 자리에서 밀려난 것, 천하무도회에 더는 발을 붙일 수 없게 된 것.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개방의 대제자들이 나서서 직접 첩지를 전달했다.

듣자 하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여쁜 제자가 강호에 나가 이 사람 저 사람 부딪혔던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개방의 소방주와 친분도 쌓았다 한다.

어쩌다 종남의 제자라는 것도 들켰다. 제 사부의 젊은 시절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는 개방의 소방주가 제자의 무위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종남이 다시 구파일방의 한 자리를 차지할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다 한다.

그게 근 삼십 년 만에 천하무도회의 첩지가 전달된 이유였다.

“이번 천하무도회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개방의 제자가 말했다.

“지난번 천하무도회에서, 종남의 부재 이후로 이제껏 공석인 구파의 한 자리를 누군가가 채워야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습니다.”

“뭐라? 그런 괘씸한!”

양영천이 노기를 이기지 못하고 왈칵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분노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기에 더욱 화가 났다.

“그러니 이번에는 꼭 와 주십시오. 종남이 건재함을 만천하에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야 마음 같아서는 백 번도 천 번도 더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는 지월에게 단 일 수에 패했던 그날의 비웃음이 쟁쟁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제자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느니.”

양영천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말단 제자들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쳤다.

“아니, 대사형 정도면 하늘이 놀랄 청년 고수인데 사부님은 어찌 그러시오?”

“그렇지요. 게다가 대사형께서는 이미 소림으로 가는 중이시지 않습니까요? 운도 이런 운이 없지요. 이건 하늘이 정해 주신 겁니다요.”

“그보다 이번 첩지를 물리면 다음에도 또 온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안다. 하지만 양영천은 단 한 명의 제자만으로는 과거의 영화를 되살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강백이 천하제일이 되어야 했다. 능히 혼자서 지월과 맞설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종남파에 괜찮은 제자가 하나 있었네, 하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다.

결코 지월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원한 탓에 이러는 것만은 아니었다.

“종남은 다음을 기약하겠다 전하라.”

양영천은 눈을 질끈 감고 첩지를 물렸다.

“준비가 되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가겠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있어 개방의 제자 둘을 극진히 대접했다. 간만에 쌀밥도 하고 닭도 잡았다. 술독도 뜯었다.

청정한 도가의 경내에 비린내가 돌았지만 제자들은 모두 신이 났다. 일단은 거지 신분인 개방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진탕 먹고 마시고 하루를 보냈다.

개방의 제자들은 맛난 고기반찬에 감동했는지 첫째 제자의 칭찬을 줄줄줄 늘어놓았다.

어찌 그리 잘 키우셨냐는 둥, 이대로만 가면 천하제일기는 종남이 맡아 놓은 게 아니냐는 둥, 듣고 싶은 얘기만 쏙쏙 골라 잘도 들려주었다.

덩달아 신이 난 양영천은 술독을 하나 더 뜯으라 했다. 손님에게 대접할 고기와 술은 부족하지 않았다. 역시 돈 많은 제자는 하나 들이고 볼 일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개방에서 먼저 제안을 했다.

제자가 보고 싶지 않냐며, 혹시 당부할 말이라도 적어주면 자기들이 내려가는 길에 전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서 술김에 서편을 하나 적었다.

내 어여쁜 제자야 잘 지내느냐. 이 사부는 네놈 걱정에 하루하루 말라 간다. 어서 돌아오너라. 보고 싶어 몸살 앓는다. 그러나 천하무도회는 못 보낸다.

가는 날이 장날이랬다고 하필 소림에서 천하무도회가 열린다 했으니 네놈이 싸게 길을 돌려서 돌아와야겠다.

대충 이렇게 적어 주었다. 개방의 제자들은 서찰을 품에 꼭 챙겨 넣으면서 틀림없이 전해 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왕대환이 제 팔 토시를 벗어서 그도 전해 달라 했다. 저어기 산 아래가 추우시면 어쩌냐는, 말도 안 되는 걱정과 함께.

그렇게 밤새도록 떠나간 제자를 그리워하면서 그 핑계로 진탕 먹고 마셨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장문령부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개방의 대제자라던 두 거지 놈들과 함께.

어쩐지 술을 그리 잘도 따른다 했다. 이제 보니 뭔가 잠이 오는 약도 탔던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 “이놈들아. 손님들 그냥 가셨다. 여비라도 챙겨드리지 그랬느냐.” 라며 죄 없는 제자들을 구박했다.

장문령부를 도둑맞았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그런 말을 한 제 입을 없애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이제 어쩝니까요? 그 도둑들 잡으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요?”

귀신눈 구악이 눈치 빠르게 핵심을 파고들었다.

빈 목갑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양영천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야겠지.”

“그럼 어떻게 할깝쇼? 일단 내려가 근처 장물아비들부터 족치는 게 좋겠습니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소림으로 간다.”

그 말에 다들 자지러질 듯 놀랐다. 장문령부를 도둑맞았는데 뜬금없이 소림이라니. 그럼 설마 소림에서 도둑질을 해갔다는 소리일까.

“장문! 아니아니, 사부님! 그건 너무 과대 해석하시는 것 아닙니까요?”

“아니다.”

콰직!

양영천의 늙은 손마디 사이에서 목갑이 박살이 났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코 부순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분명 돈도 있고 쌀도 있는데 왜 하필 장문령부를 훔쳐 갔겠느냐. 장문령부는 알아보는 이가 없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인 것을.”

그렇다면 장문령부를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강백이 놈을 끌어들이려는 게다. 애초에 천하무도회로 부르는 게 목적이었을 테니, 내가 말을 안 듣자 장문령부를 훔쳐 달아난 게야.”

“헉……! 그렇다면 큰형님이, 아니 대사형께서 뭔가 음모에 빠지셨단……? 그런 말씀입니까요?”

“아니아니! 그렇다면 당장 대사형께 달려가야지 않겠소! 어서 가서 이 몸이 구해드리리다!”

오십이 있어도 일대제자 하나의 발끝도 못 쫓아오는 말단제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양영천이 굳은 눈매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저 멀리, 숭산이 있는 방향을 찾아서였다.

“짐 싸라. 소림으로 가자.”

“예, 장문!”

그렇게 양영천도 소림으로 떠났다.

아침에는 훤하던 종남산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불길한 먹색 구름은 하산하는 내내 차가운 보슬비를 뿌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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